이경립편집위원
이경립편집위원

더불어민주당 당대표 이해찬. 이제 그의 임기도 1개월이 채 남지 않았다. 다가오는 8월 29일 더불어민주당의 당대표 선출을 위한 전당대회에서 새로운 당대표가 선출되면 그는 30여 성상(星霜) 정치인으로서 살아온 정치이력에 종지부를 찍고 자연인으로 돌아가게 될 것이다.

그런데 최근 그의 정치인으로서의 언행을 살펴보면 꼭 자연인으로 돌아갈 것 같지는 않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왕년의 혈기왕성했던 이해찬의 모습이 아직도 남아 있음을 발견할 수 있기 때문이다. 현직 기자에 대한 ‘후레자식’ 발언이 그렇고, 서울을 두고 ‘천박한 도시’라고 표현하는 그의 천박한 표현력을 보면 더더욱 그렇다.

이해찬 그는 누구인가? 1988년 제13대 국회의원선거에서 35세의 나이로 국회의원에 처음 당선된 이래 7번의 국회의원선거에서 당선되었으며, 1995년 서울시 정무부시장, 김대중 정부 초대 교육부장관과 노무현 정부 실세 국무총리를 지냈고, 2012년 민주통합당 당대표에 선출되었다. 그리고 이번이 두 번째 당대표였고 임기 2년을 모두 채우게 된 것이다.

그러한 그의 정치 경력은 남부러울 것이 없지만 대통령이 되지는 못했다. 물론 그도 대통령이 되기 위해 노력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2007년 대통령선거 당내 경선에서 킹메이커가 아닌 선수로서 등장하여, 친노가 폐족으로 불리는 엄중한 시대적 상황에서 한명숙 전 국무총리와 유시민 전 보건복지부장관을 주저앉히면서까지 정동영 후보, 손학규 후보와 경쟁했지만, 시너지 효과 제로로 딱 3위에 그친 전력이 있다.

그가 스스로 킹이 되기 위한 도전은 실패하였지만, 킹메이커로서의 그의 도전은 누구보다도 성공의 길을 걸어왔다. 3선 의원 시절이던 1997년 대선에서는 김대중 후보를 지근거리에서 보좌하면서 소위 50년만의 수평적 정권교체를 이루었다. 그 공로를 인정받아 김대중 정부의 초대 교육부장관을 지내면서 소위 이해찬 세대를 만들어냈다. 지난 21대 총선에서 그 세대들이 이미 국회의원이 되었으니 아마도 감개가 무량할 것이다.

2002년 대선에서 그의 선택은 자신의 대학동기이며 친구로 자신이 정치권에 입문시킨 정동영이 아니라, 국회의원 입문동기이자 정치적 친구인 노무현이었다. 그는 정몽준과의 단일화 협상에서 노무현을 기사회생시켜 기어코 대통령으로 만들고 말았다. 자타가 공인하는 노무현 대통령 탄생의 일등공신으로 실세 국무총리라는 닉네임은 괜스레 붙여진 것이 아니었다.

그리고 2007년 자신의 실패를 반면교사로 삼아 2012년 자신의 정치적 친구인 노무현의 인생 친구 문재인을 대통령 후보로 만들어 박근혜에 대항하였다. 안철수를 주저앉히는 것까지는 성공하였지만 마지막 뒷심이 조금 부족했다. 아마 그가 당대표를 그만두지 않았다면 박근혜마저 꺾고 문재인 정부수립을 앞당길 수 있었을 텐데 아쉬웠을 것이다.

2017년 뜻하지 않은 탄핵정국에서 어렵지 않게 문재인 대통령을 만들었고, 지난 2년 동안 당력을 총동원하여 문재인 정부를 지원했다. 특히 지난 21대 총선에서는 상대를 자극하는 주특기를 잘 살려 야당이 스스로 궤멸하도록 만들었다. 3차례의 대선 승리에 더해 민주화 이후 최대 의석 확보라는 대승리를 이끌었다. 그러니 정계를 떠나는 아쉬움이 클 것이다.

따라서 최근 그의 논란의 발언들은 그러한 맥락에서 해석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전무후무한 세 번의 대선 승리를 이끌었던 킹메이커 이해찬이 네 번째 킹메이커로 도전해 보고 싶은 것이다. 자신보다 고등학교를 1년 먼저 졸업한 서울대 2년 선배 이낙연 의원이 대선후보 1위를 질주하고 있고, 자신보다 2살이나 위인 정세균 국무총리도 대권을 엿보고 있는 상황에서 그에게 정치은퇴는 어불성설(語不成說)이다. 그렇다면 그의 선택은? 위 두 사람이 아니라면? 이해찬에게 비장의 카드는 당연히 있을 것이다. 당대표 퇴임 후의 이해찬이 더 주목되는 이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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