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르바초프 전 소련대통령[뉴시스]
고르바초프 전 소련대통령[뉴시스]

 

[일요서울] 국립외교원 외교사연구센터에서 ‘외교’라는 렌즈를 통해 우리 현대사를 조명하기 위해 오럴히스토리사업 ‘한국 외교와 외교관’ 도서 출판을 진행해 왔다. 지금까지 총 17권의 책이 발간됐다. 일요서울은 그중 공로명 전 외교부장관의 이야기가 담긴 책의 내용 중 일부를 지면으로 옮겼다.

고르바초프 “한·소 정상회담을 시급히 개최하자”

한국정부 “순서 뛰어넘어 외교관계 맺자”

- 장관님께서 소련에 부임한 1990년은 한·소 관계에서 기념비적인 한 해다. 3월에 김영삼 최고위원을 비롯한 민자당 대표단의 방소가 있었고, 6월에는 최초의 한소 정상회담이 개최됐다. 9월에는 UN 본부에서 역사적인 한·소 수교가 이루어졌다. 그 과정에 대해서 말씀해달라

▲ 소련에 부임할 때 과제를 안고 갔다. 민자당, 여당 대표단, 그것도 당시 김영삼 최고위원은 자기가 이끌고 있던 여당인 민정당(민주정의당)과의 합당을 통해서 민자당 최고위원이 됐다. 아주 거물급 정치가이자 여당의 최고위원이 포함된 대표단이 된 거다. 대표단의 규모를 보면 당시의 우리나라 국민들, 정부·여당·정치권의 생각을 알 수 있다. 규모가 굉장히 컸고, 국회의원만 해도 열여덟 분이 된다. 또 김수한 전 의장도 포함되었고, 재계에서는 구평회씨 같은 거물급 인사들도 같이 수행을 했다. 공식·비공식 대표단이 34명이에요. 거기에 우리 취재기자들 30여명이 동행했다. 그러니까 한 70명 가까운 대규모 대표단이 가는 거다. 규모만 봐서도 그에 대해 얼마나 기대했는지를 충분히 알 수 있다.

러시아에서 모스크바 국제경제 및 국제관계 연구소, 즉 IMEMO가 김영삼 최고위원을 포함한 대표단을 초청했다. 그 전해에 김영삼 최고위원이 통일민주당 대표로서 소련을 방문했을 때도 그곳에서 초청을 했다. 당시는 후에 소비에트연방의회 의장이 되는 예브게니 프리마코프가 IMEMO 소장이었다. IMEMO를 찾아가서 준비 협의를 했는데, 당시 블라들렌 마르티노프 소장이 “소련공산당과 한국의 여당인 민자당과의 당과 당의 대화가 정식으로 시작되는 데 큰 의이가 있다”는 이야기를 하면서, “소련으로서는 알렉산드르 야코블레프 정치국원이 창구가 되고, 소련 정부로서는 대외경제담당 부수상인 스테판 시타리안이 창구가 될 것이다” 하는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 그 당시 우리가 외교당국을 바로 끼지 않고 김영삼 최고위원을 통해서 소련과의 접근을 시도한 이유는 무엇인가?
 

▲ 외교당국을 끼고 가면 여러 가지 법적인 함의가 생긴다. 그러니까 역시 정치적인 접근이 우선됐다. 우리는 우리대로 북방정책을 시행해 나가려는 의지에서 이루어졌고, 소련은 소련대로 여러 가지 문제가 있으나 지금 가지고 있는 국가적인 과제인 경제개혁이나 개방을 추진해나가기 위해서 한국과의 관계를 개선할 때가 됐다는 생각이 있었다. 그런 흐름에서 파악되어야 할 문제다. 그래서 이때 이야기가 시작된다. 그런데 특히 이때 의미가 있다고 이야기 할 수 있는 게 단순한 어떤 정당 대표단이 방문하는 게 아니고, 국교가 없는데도 미하일 고르바초프 서기장이 김영삼 최고위원을 만났다. 게다가 소련 측에서도 정식 일정을 잡고 크렘린의 고르바초프 사무실에서 만나는 것이 아니라, 고르바초프 대통령이 프리마코프 연방의회의장 방에서 방문해 있던 김영삼 최고위원과 만난다는 형식을 취했다.

- 이원화된 경로로 교섭을 시작하게 된 것은 소련 쪽의 의향도 있었던 거고, 우리도 북방정책이라는 큰 그림을 염두에 두고 시작됐다고 봐야 한다는 말씀인가?

▲ 그렇다. 정치적인 의지가 선행을 했다. 그때 김영삼 최고위원께 고르바초프와 이야기한 내용에 대해 호텔에서 물어봤다. 김영삼 최고위원은 “우선 한·소 국교정상화가 조속히 이루어졌으면 좋겠다. 그러기 위해서는 한·소 정상회담을 시급히 개최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하는 말씀을 하셨다고 했다. 그랬더니 한·소 정상회담에 대해서는 대답이 없었고, 고르바초프가 “국교정상화에 관해서는 좀 시간이 걸리겠다. 그러나 가만히 서 있지는 않겠다”라고 했다. 그리고 고르바초프를 만났다는 사실은 김영삼 최고위원이 모스크바 체제하는 동안에는 대외에 발표하지 않기로 합의를 했다.

그런데 이 내용이 추측 보도로 언론에 나가게 됐다. 일정에 없던 일인데 프리마코프 의장 쪽에서 급히 김영삼 최고위원에게 들어오라고 했다니, 직감이 있었을 수도 있고, 다른 것들이 좀 더 있었는지 모르겠다. 사진기자 두 사람이 김영삼 최고위원과 함께 크렘린에 들어가서 프리마코프 의장 방에서 사진을 찍은 후에 퇴장을 했다. 그리고 앉아서 한참 이야기를 했는데, 이 기자들의 직감에 뭔가 있다는 생각을 했다. 그래서 결국은 고르바초프 대통령하고 만났다는 이야기가 언론보도에 나왔다.

그런데 여기서 이야기가 그치지 않았다. 같이 갔던 박철언 정무장관은 함께 들어가지 못했다. 급작스럽게 김영삼 최고위원만 가게 되고, 고르바초프를 만나고 나왔다는 이야기를 들으니까 박철언 장관이 대통령 친서를 가지고 왔다는 걸 몰랐다. 자기 수행원들 외의 사람들한테는 그 말을 안했다. 김영삼 최고위원한테도 그 이야기를 안 한 것 같았다. 대통령의 친서니까 박철언 장관은 나름대로 만나면 그때 꺼내놓으려고 가지고 있었다. 

- 당시 우리 내부 전문을 보면 기자들의 추측성 보도가 있어서 우리 본부에서는 장관님께 어떻게 된 거냐고 물은 내용이 있다.

▲ 네 고르바초프 대통령을 만났는지 묻는 전보가 왔기에, 그 과정에서 내가 김영삼 최고위원에게 어떤 이야기가 있었는지 물어봐서 정부에 보고를 했다. 그중에 한가지가 이런 게 있다. 김영삼 최고위원이 “수교는 단계를 밟아서 가는데 7월경에는 영사관계가 공식으로 이루어질 것이다”라는 말씀을 했다고 해서 신문에 보도가 났다. 김영삼 최고의원이 영사관계 이야기를 들었다고 하는데 이 이야기가 어디서 나왔느냐 추적을 하니까, 야코블레프 정치국원이 이야기했다는 말이 있다. 그런데 당시 우리 정부는 그런 순서를 밟기보다 바로 뛰어넘어서 외교관계로 넘어가길 원했다. 그래서 우리 민자당 대표단과 IMEMO의 공동성명이 나가는데, 거기서는 바로 ‘양국관계 정상화’라는 표현을 쓰고, 그런 단계를 거친다는 이야기는 하지 말자고 제가 주장을 해서 그런 식으로 공동선언이 나갔다. 영사관계는 한 단계를 더 거쳐 가는 것은, 우리가 바라는 바가 아니었기 때문에 바로 관계정상화, 노멀리제이션이라는 식으로 이야기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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