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의 샤를 몽테스키외(1689-1755년)는 3권분립을 정립한 계몽주의 사상가이다. 그는 저서 ‘법의 정신’에서 집권세력은 언제든지 부패할 수 있고 권력을 무한대로 확대코자 한다는 데서 3권 분립을 통한 견제가 필수적이라고 했다. 행정·입법·사법 3부로 나뉘어 서로 견제하고 균형을 유지해야 한다고 했다.

만약 이 3개 권력 중 두 개가 한 사람이나 한 집단에 의해 장악될 때 자유는 붕괴된다고 했다. 그러나 오늘날 문재인 대통령의 대한민국에서는 3개 권력이 한 사람에 의해 장악되었다. 몽테스키외는 셋 중 둘만 한 사람에 의해 지배되어도 자유는 붕괴된다고 했는데 대한민국에선 셋이 모두 문 대통령 한 사람에 의해 장악되었다. 대한민국의 3권분립은 죽었는가 묻지 않을 수 없다.

300석 중 176석 절대 다수의 힘을 믿고 국회 입법을 독단적으로 밀어붙인다. 민주당은 ‘주택임대차보호법’ 개정안을 소위원회 심사나 찬·반 토론도 생략했고 법안내용도 공개하지 않는 등 입법 절차를 거치지 않은 채 국회 본회의를 열어 야당 퇴장속에 통과시켰다.

그렇게 강행한 건 문 대통령의 생활경제 입법에 대한 속도전 주문에 충성키 위한 데 있다. 입법부가 대통령에게 충성키 위해 입법 절차마저 짓밟은 것이다.

대법원도 14명 중 문 대통령이 새로 임명한 8명의 대법관들이 과반을 지배한다. 김명수 대법원장도 문 대통령이 임명했다. 김 대법원장은 대통령을 견제해야 할 사법부 수장이지만 대통령을 상전으로 받든다.

문 대통령이 김 대법원장 앞에서 2018년 “지난 정권의 사법농단 의혹은 사법부 스스로 바로잡아야 한다”고 훈계하자, 김 대법원장은 “그렇게 하는 게 지금 저에게 주어진 시대적 소망임을 한시도 잊은 적이 없다”며 “적극적으로 협조하겠다”고 허리를 굽혔다. 이 장면 하나만으로도 사법부가 대통령에 의해 장악되었음을 반영키에 족하다.

하지만 미국의 경우 대법원장은 대통령의 훈계를 반박한다.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은 2018년 자신의 정책에 반대하는 판결을 내린 제9연방순회법원 판사를 가리켜 “수치스러운 일”이고 “오바마 판사”라고 몰아세웠다.

그러자 존 로버츠 대법원장은 대뜸 성명을 발표, “우리에겐 오바마 판사나 트럼프 판사가 없다. 헌신적인 판사들이 있을 뿐이다”고 맞받아쳤다. 자유민주주의는 여러 정치·경제·사회·문화·예술·종교 주체들이 서로 상충되는 이해관계를 토론하고 타협하는 데서 보장된다.

단순히 과반을 독점했다고 해서 다수결 원칙에 따라 토론·타협없이 일방적으로 밀어붙이는 것은 독재다. 19세기 프랑스의 알렉시스 토크빌(1805-59년)은 다수에 의한 일방적 폭주를 “다수의 폭정”이라고 했다. 요즘 “다수의 폭정”으로 가는 민주당의 행태는 18세기 말 프랑스 혁명 당시 다수의 힘을 믿고 폭주했던 과격 정치분파 자코뱅(Jacobins)을 떠올리게 한다.

자코뱅의 다수 폭정은 테르미도르의 반동을 불러왔다. 김태년 민주당 원내대표는 다수를 믿고 설쳤던 자코뱅의 막시밀리앙 로베스피에르를 닮지 말기 바란다.

“민주화 세력”이라고 자처해 온 운동권 출신 집권세력은 토론과 타협은 물론 법적 절차마저 유린한 채 “다수의 폭정”으로 간다. 민주주의 허울을 쓴 독재다. 문 대통령은 주한미군의 사드(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 배치와 관련해선 환경평가의 “절차적 정당성”이 결여되었다며 “환경영향평가 절차를 진행하라”면서 “절차적 정당성”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하지만 그는 집권당에 의해 유린당한 국회 입법의 “절차적 정당성”에 대해선 말이 없다. 민주화 의식 결여 탓이다. 실상 오늘의 집권세력은 운동권 시절 민주화를 외치면서도 상명하복의 전투적 투쟁을 주도하며 독단으로 흘렀다. 집권세력은 “다수의 폭정”을 벗어나 3권 분립을 유지하기 위해선 의회민주주의 요체인 토론과 타협 그리고 ‘절차적 정당성’을 존중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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