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게 어느 놈의 장난이야?”
길익주는 자신 앞으로 온 익명의 편지를 책상 위로 내던졌다. “무슨 편진데?”
하명길은 아무 생각 없이 그 편지를 주워들려 했다. “자네가 나를 죽이려 하니 조심하라는 경고 편지야.” 

“뭐?” 하명길의 눈이 똥그래졌다. “글쎄, 그렇다니까.” “그것 참, 정말 말도 안 되는 편지로군 그래.”
하명길은 편지를 구겨서 휴지통에 던져넣었다. “이건 우리 사업이 잘되어 나가는 걸 시기하는 자의 소행일 거야.” “누구 짚이는 사람 있나?” 길익주가 실눈을 뜨며 물었다. “아니, 글쎄 생각을 좀 해보자고. 그리고 자네도 몸조심을 해야겠네.”

하명길이 고개를 갸웃하며 말했다. “뭐? 자네, 그럼 저 편지를 믿는단 말이야?”
길익주가 웃음을 터트렸다. “조심해서 나쁠 것은 없지. 그리고….”
하명길이 말을 끊으며 생각에 잠겼다. “그리고 뭔가?” “그리고 이런 시나리오도 가능하자.”

하명길은 휴지통에서 다시 편지를 꺼내 찬찬히 읽어보았다. “자네를 죽이고 죄를 내게 뒤집어씌움으로써 우리 둘을 모두 죽게하는 시나리오가 성립할 수 있단 말이야.” “신경과민이야.”

길익주의 입가에는 여전히 웃음기가 머물러 있었다. “그렇지 않을 수도 있어. 이 편지를 보란 말이야. 타자를 한 것이긴 한데 타자기의 종류가 서로 달라. 위의 한 줄은 수동식 4벌 타자기로 친 거고, 다음 줄은 2벌식 전동타자기로 친 거야. 그리고 마지막 줄은 공병우식 3벌식 타자기로 쳤단 말이야.” “그게 뭐 어쨌다는 거야?” “이 편지의 봉투는 어디 있어?” 하명길은 길익주의 질문에 대답 대신 새로운 질문을 했다. 

“봉투는 없어. 내 차 위에 누가 꽂아놓은 거야. 나는 그래서 내 차를 누가 긁었나 했지. 그런데 그런 편지더란 말이야” “음, 이미 자네랑 나랑 만지고 구기고 했으니 지문 채취 같은 건 어렵겠군그래.”

길익주는 깊게 몸을 파묻고 있던 소파에서 몸을 일으켰다. “그러다 자네 정말 신경쇠약에 걸리겠군. 쓸데없는 것을 내가 주워온 탓이야.”
길익주가 하명길의 어깨를 툭툭 쳤다. “그런 거 신경 쓰지 말고 오늘 술이나 한잔하지.”

“그러는 게 좋을지 모르겠군. 아무튼, 당분간 자네 곁을 떠나서는 마음이 놓이지 않겠어.”

하명길은 고개를 끄덕여 찬성을 표했다. 둘은 같은 대학 출신으로 동업으로 무역 일을 하고 있었다. 수입품목은 외국의 명품 술들이었는데 어찌나 잘 나가는지 사업의 규모가 날로 커지고 있었다. 길익주가 한잔하자고 한 말도 일반 술집에 가서 마시자는 소리가 아니라 그런 술을 한 병 따자는 뜻이었다.

새 술들이 도착하면 으레 한 병을 따서 마셔버리는데 핑계가 그럴듯했다. 어떤 상품인지 모르는 상태에서 소비자들에게 팔 수 없다는 것이 그들의 변명이었다. 그날도 마침 중국 항주의 유명한 술이 선적되어 들어왔고 한 병 맛볼 차례가 되었다. 직원들이 퇴근하고 나자 길익주는 직원이며 하명길의 애인이기도 한 배미리에게 창고에 가서 술을 가지고 오게 했다.

“중국 술이라고 아주 호리병에 들어 있군그래.” 하명길이 술병을 보며 벌써 군침을 삼켰다.
“자기 눈독 들이는 품이 수입 물량을 몽땅 먹어치울 심산인가 본데요?”
미리가 웃으며 호리병 마개를 땄다. 잘 익은 술 냄새가 사무실 안에 향긋하게 퍼졌다.

“으와, 그 향기 한번 죽이는데!” 하명길이 반색하며 손을 내밀었다.
“어허, 이 친구, 위아래도 없다니까? 어른부터 한 잔 마시고 보자, 응.”
길익주가 점잖게 하명길의 내미는 잔을 막으며 자신의 잔을 미리에게 내밀었다. 그러나 미리는 생긋 웃으며 하명길의 잔에 먼저 술을 부었다. 

“아무래도 팔은 안으로 굽는 것 아니겠어요?” “허 참, 이거 서러워서 나도 빨리 직원 중에 한 여자 구워삶아야지, 이거야 어디 살겠나?”
“그래그래, 억울하면 출세하란 말도 있지. 억울하면 연애하라고, 음 향기 좋고.”
하명길이 입맛을 다시며 술을 한 번에 들이켰다. “카 독한데.”

“그러면서도 부드럽게 넘어가는군.” 길익주도 한 잔을 받아 조금씩 마시며 말했다. “어, 둘이만 마시기 있어요?”
미리가 입을 샐쭉거렸다. “어, 그럴 리가 있나?” 길익주가 얼른 호리병을 들어 미리에게 따라 주었다. “야, 정말 맛있네요.” 미리도 입맛을 다시며 말했다. 셋은 그렇게 한 병을 한 시간도 되기 전에 비워버렸다. 술들이 모두 세긴 했지만 그 정도 독주면 모두 얼큰하게 취했을 만했다.

“에이, 이거야 어디 감질나서 먹겠나? 우리 한 병만 더 마셔보세.”
하명길이 언제나처럼 투정을 했다. 평소에는 그런 그를 말리던 길익주도 술에 취한 모양인지 충동을 표했다. “응, 그래. 어디 술 한두 병에 우리가 망하기로도 하겠어? 마시자고.”

길익주는 직접 창고로 가서 다시 호리병 하나를 가져왔다. 미리도 어느 정도 취해 있었던 탓이다. 셋은 다시 그 술을 몇 잔 마셨다. “야, 명길아, 너 정말 나 죽일 생각이 없느냐?”

길익주가 농담조로 낮의 일을 들먹였다. “없기는 왜 없어. 너 죽으면 이 회사는 통째로 내 건데? 많이 마시고 오늘 아주 가라.”
하명길도 농담으로 그의 말을 받았다. “그래, 너 잘 났다. 나 죽이고 너 재벌 돼라, 자식아!”

길익주는 그렇게 말하며 하명길의 어깨를 툭 쳤다. “이 자식이, 아주 사람을 치네.”
하명길도 그렇게 말하며 일어선 길익주의 배를 한 대 쳤다. 길익주는 비틀거리며 자기 자리로 쓰러졌다. 그 통에 호리병이 엎어졌다. 

“어, 피 같은 술은 왜 엎고들 그래요. 싸우려면 나가서 싸워요, 요건 나 혼자 먹어치울 테니.”
미리가 술병을 바로 세웠지만, 술은 이미 탁자에 흥건히 고였다.
“그래그래, 우리가 왜 싸우냐? 자, 한 잔 받게, 아우님.”
길익주가 술을 다시 하명길의 잔에 가득 따랐다. “그러자고, 우리 사업의 번창을 위해!”

하명길이 크게 외치며 잔을 치켜들고는 예의 버릇대로 단번에 술을 마셨다. 그러나 예전처럼 호기롭게 잔을 탁자에 내려놓지는 못했다. 그는 목을 움켜쥐었더니 맥없이 모로 쓰러졌다.
“명길아, 장난치지 말고 일어나.” 미리와 길익주는 낄낄대며 하명길을 일으켰다. 그러나 하명길은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다. 둘은 술이 순식간에 깨는 것을 느꼈다.

“경찰을 불러! 아니, 의사를!” 길익주가 통곡하듯이 외쳤다.
추 경감과 강 형사는 머리를 맞대고 고민했다. 피살자는 청산가리 중독으로 죽었다.

그런데 독약은 아무 곳에서도 발견되지 않는 것이다. 정말 답답한 나머지 모두 같이 마셨다는 호리병의 술도 조사해 보았지만 역시 독은 검출되지 않았다. “범인은 길익주가 분명합니다. 괜히 자기 앞으로 협박 편지를 보내는 등 머리를 써서 자신을 혐의에서 빼보려고 했던 게 분명합니다. 지금 그 친구는 상습 도박으로 위기에 몰려 있거든요.” 강 형사가 책상을 손톱으로 탁탁 치며 말했다. “그거야 명약관화한 일이지만 독약을 먹인 방법을 알 수가 없잖아?”
추 경감이 지포 라이터를 철컥거렸다.

“술은 셋이 같이 마셨고 그 때문에 피살자의 애인도 길익주가 범인이 아니라고 자신 있게 말하는 것 아니겠어?”
“하지만 반장님, 술은 사고 후에 새 술로 바꿔 놓을 수도 있는 문제 아닙니까? 단지 문제라면 어떻게 독이 선별 수리됐느냐 하는 점이지요.”

추 경감이 씁쓸하게 웃었다. “그래, 선별 수리될 방법이 있긴 있군.”
추 경감은 지포 라이터를 힘껏 당기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평생 불붙을 줄 모르던 지포 라이터에서 파란 불이 일어났다.

“술병이 호리병이라는 사실을 빼먹고 있었어. 호리병 안쪽에 비닐 같은 것을 붙여서 청산가리를 넣어두는 거야. 그러면 따를 때는 아무 문제가 없지. 하지만 술병이 엎어졌을 때는 청산가리가 녹아서 술병 안으로 들어가게 하는 거지.” “하긴 술병에서는 독이 나오지를…….”

강 형사가 추 경감의 추리에 제동을 걸었다. “물론 술병은 사건 후에 바꿔치기한 거야. 하지만 그 술은 남아 있지. 당장 조사를 시켜.”
강 형사도 그 말에 빙그레 웃음을 떠올렸다.

 

퀴즈. 추 경감은 어떻게 독을 찾아낼 수 있었을까요?

 

[답변-4단] 독은 술병이 쓰러졌을 때 혼합된 것이므로 당연히 탁자 위에 엎질러진 술에도 남아 있게 마련이다. 추 경감은 그곳에서 독을 찾아냈다. 

 

 

[작가소개]

이상우는 추리소설과 역사 소설을 40여 년간 써 온 작가다. 40여 년간 일간신문 기자, 편집국장, 회장 등 언론인 생활을 하면서 기자의 눈으로 본 세상사를 날카롭고 비판적인 필치로 묘사해 주목을 받았다. 역사와 추리를 접목한 그의 소설은 4백여 편에 이른다. 한국추리문학 대상, 한글발전 공로 문화 포장 등 수상.

주요 작품으로, <악녀 두 번 살다>, <여섯 번째 사고(史庫)> <역사에 없는 나라>, <세종대왕 이도 전3권> <정조대왕 이산>, <해동 육룡이 나르샤>, <지구 남쪽에서 시작된 호기심>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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