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스크바 크렘린 궁전[뉴시스]
모스크바 크렘린 궁전[뉴시스]

 

[일요서울] 국립외교원 외교사연구센터에서 ‘외교’라는 렌즈를 통해 우리 현대사를 조명하기 위해 오럴히스토리사업 ‘한국 외교와 외교관’ 도서 출판을 진행해 왔다. 지금까지 총 17권의 책이 발간됐다. 일요서울은 그중 공로명 전 외교부장관의 이야기가 담긴 책의 내용 중 일부를 지면으로 옮겼다.

공로명 “두 외상이 수교 합의 후, 9월30일이라고 썼다”

소련 외상 “소련 정부 KAL기 사건 가슴 아프게 생각”

- 9월30일에 UN 본부에서 양국 외상이 만나 역사적인 한·소 수교가 이루어진다. 그런데 그 직전에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소련 과학아카데미가 주최하는 국제회의가 개최되었다고 하는데, 이 회의는 한·소 수교와 어떤 관계가 있나? 

▲ 샌프란시스코 정상회담 이후 국교정상화를 어떻게 구체화할지의 문제를 고민하게 됐다. 외무부, 즉 외교채널을 통한 교섭이 관건이었는데, 그러던 차에 9월에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소련 과학아카데미 주최로 ‘대화, 평화 그리고 협력’이라는 부제의 아시아·태평양회의가 열린다. 그 회의에 예두아르 세바르드나제가 참석해서 기조연설을 한다고 했다. 그 시점에 소련 외무성 의전과 직원에게서 연락이 왔다. 이름이 정확히 기억은 안 나는데, 그 회의에 참석을 하라고 했다. 그래서 서현섭 참사관, 최일성 서기관과 같이 블라디보스토크로 갔다. 그때 최일성 서기관이 제 통역을 맡았는데, 제가 아는 한에선 그 당시에 우리 외무부에서 러시아어를 제일 잘했다. 이 친구가 억양은 코리안-러시안인데, 어휘력이 풍부했다. 물론 러시아 사람들은 잘 알아들었다. “어째서 그렇게 어휘력이 강하냐?”고 물었더니, 영국정보학교에서 러시아어를 배웠다고 했다. 아시다시피 영국정보학교는 무관들을 양성하는 곳이다. 거기서는 교수가 인문·사회·과학·경제·교육, 각 분야에 해당하는 단어를 매일 100개씩 주면서 외우라는 과제를 주었다고 했다. 그런 훈련을 받다 보니까 어휘력이 강해진 거다. 그래서 역시 영국 사람들 교육이 아주 실용적이라는 생각을 했다. 

그때도 우리나라에서 많은 분들이 왔다. 학자들도 많이 오셨고, 박철언 장관도 안기부의 염돈재 국장을 데리고 왔다. 그래서 셰바르드나제의 기조연설 이후 별실에서 모스크바에서 온 외교단을 접견했다. 테이블에 앉아서 이야기를 했는데, 소련 외무성 의전과에서 저를 초청해 줬다. 거기서 제가 셰바르드나제에게 발언할 기회를 얻어서 UN에 가시게 되면 우리 외무부 장관을 만나서 한·소 외상회담을 갖기를 권한다고 강하게 이야기했다. 셰바르드나제는 웃으며 듣고만 있었다. 이런 과정을 거쳐서 결국 양국 외상이 UN에서 만나 한·소 수교에 대해 논의하기로 합의가 됐다. 그런데 도브리닌은 소비에트 최고간부회의에서 국교정상화일을 1991년 1월1일로 결정했다고 했다. 왜 바로 할 수 없느냐고 키리예프 국장에게 물었더니 키리예프가 아주 의미심장한 이야기를 하는데, 모든 권한은 지금 셰바르드나제에게 위임되어 있어서 그의 결심에 달려 있다는 거다. 그러니까 9월30일 아니면 1월1일이다. 그래서 제가 UN에서의 양국 외상회담을 위한 정부협의 차 서울에 들어왔을 때 이수혁 동구과장에게 “문서를 3개 준비해라. 1월1일자와 9월30일자, 그리고 하나는 날짜를 빈칸으로 가지고 가자”라고 했다. 그랬는데 막상 뉴욕에 갔더니 이 친구가 문서를 1월1일 것 하나만 해 가지고 왔다. 

현지 대사 이야기를 안 들은 거다. 그래서 결국 두 외상이 수교를 합의한 후, 문서에서 1월1일이란 날짜를 지우고 9월30일이라고 썼다. 어떤 면에선 역사적인 일인지도 모른다. 

- 그런데 왜 수교 시기가 변경되었는지 궁금하다.

▲ 역시 셰바르드나제에게 맡겼던 거 같다. 크게 보자면 9월30일이나 1월1일이나 별 차이가 없지만, 당시 소련 정부 입장은 이듬해 1월1일로 정해져 있었다. 그때 소비에트 연방 내의 사정이 참 복잡했다. 우리가 12월 노태우 대통령의 방소 일자를 협의하는 과정에소 줄곡 소련 측에서는 “여러 가지로 굉장히 사정이 어렵다. 내주 사정이 복잡하다. 연방의회 일정과 겹친다”고 했다. 이듬해에 재주 한·소 정상회담을 확정할 때까지도 계속 “내부 문제가 복잡한데, 그동안 너무 외정에만 치중했다. 그래서 일본 방문만 결정했지 그 외에는 도정히 갈 수가 없다”는 등의 이야기를 했다. 

내부야 경제적으로 어려운 거 뻔하다. 글라스노스트야 입으로 하는 거지만, 페레스트로이카라면 실제적으로 경제 구도 개혁하고 여러 가지 복잡한 이야기가 있다. 그런데 이듬해 8월에 소련에 쿠데타가 일어나고 나서 내부의 복잡한 사정이란 게 권력투쟁과 관련된 것이었구나 하고 뒤늦게 알게 됐다. 

- 한·소 수교가 이루어지기 전에 셰바르드나제 외상이 북한을 방문하지 않나?

▲ 블라디보스토크 회의에 가기 전에 북한을 방문했다. 한·소 수교 날짜는 정하지 않았지만 상당히 가까운 시일 내에 하기로 예정됐고, 또 그동안에 국교가 없는 상황에서 정상회담을 했다. 그런 상황이니 자기들의 오랜 맹방인 북한에 그 이야기를 했다고 생각되고, 그렇게 보도도 됐다. 그랬더니 북한이 몹시 반발을 하고, 소련 외상이 왔는데도 김일성이 만나지 않았고, 굉장히 홀대 받았다고 했다. 그렇게 노골적으로 셰바르드나제 외상에게 대해서 적의를 표명했다. 그 후 셰바르드나제는 블라디보스토크 회의에 참석하고, UN에 갔다. 소련 측 내부 결정은 이듬해 1월1일인데도 셰바르드나제가 9월30일로 앞당긴 것은 역시 그런 이유 때문이 아닌가, 당시 우리들은 그렇게 생각했다. 

- 한·소 수교 당시 우리 영사처를 대사관으로 승격하는 문제가 결정이 되고, 그 한 달 후에 우리 대사관이 정식으로 승격이 됐다. 그러면서 장과님께서 대사로 임명받았다. 그래서 바로 두 번째 한·소 정상회담을 준비하셔야 되는 일정이셨나? 그해 12월14일 모스크바에서 열린 제2차 한·소 정상회담에 대해서 말씀해 달라
 

▲ 앞에서 말씀드린 대로 6월에 샌프란시스코 회담에서 상호 초청이 있었다. 모스크바 정상회담은 국교정상화 이후 처음으로 노 대통령이 소련을 방문한 것이었다. 45년간, 긴 세월 동서 진영의 대립이 있었고, 소련은 북한의 후원자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국교가 트이고 문이 열렸으니까, 우리 대통령이 소련을 방문하려는 강한 욕구를 가지는 것은 자연스럽다고 생각 했다. 그리고 제가 영사처 임명장을 받으면서 노태우 대통령이 “연내에 모스크바 구경을 하도록 해 달라”는 농담 반 진담 반으로 이야기한 그 소망도, 그러한 배경에서 이해할 수 있었다. 

실제로 그 정상회담에서 우리가 숙제로 안고 있었던 문제를 하나 해결했다. 대소 수교를 할 때 국내 일부에서는 “왜 수교를 하면서 KAL기 격추사건에 대한 소련의 사과를 못 받았느냐” 하는 비판이 있었다. 그래서 모스크바 정상회담에서 그 이야기를 우리가 꺼냈다. 양국관계의 일반 원칙이라고 하는, 제네럴 스테이트먼트가 나오고, 좋은 이야기가 나왔다. 양 정상이 양국관계가 발전해 나가는 데 필요한 선언을 채택한 후에 양국의 상호 관심사를 이야기하는 가운데 노태우 대통령이 KAL기 사건을 제기했다. 

그렇게 정식으로 거론하니까 소련 측에서는 셰바르드나제 외상이 사과를 표명했다. “소련 정부와 국민은 KAL기 사건을 심히 유감스럽게, 가슴이 아프게 생각한다. 법적으로 이야기하면 물론 자위적인 입장에서 그렇게 했다고 볼 수도 있겠으나 인도적인 면에서도 보아야 한다”는 내용의 사과였다. 그래서 “죄 없는 많은 사람이 희생되었다는 점에서 인간적으로 가슴이 아프다. 앞으로 그러한 불행한 일이 되풀이되지 않기를 믿는다”고 했다. 제주도에서 가진 제3차 한·소 정상회담에서도 당시 알렉산드르 베스메르트니흐 외상이 동일한 취지의 사과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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