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동맹 관계 ‘등 돌렸나’…“WTO 심리 대상 아니야” 

일본이 한국에 대한 반도체 관련 소재부품장비 수출규제를 조치를 취한데 대해 우리 정부가 WTO에 제소했다. 첫 패널 회의에서 미국이 일본을 옹호하는 발언을 하면서 산업통상자원부 등 정부가 대안 마련에 나서고 있다. [이창환 기자]
일본이 한국에 대한 반도체 관련 소재부품장비 수출규제를 조치를 취한데 대해 우리 정부가 WTO에 제소했다. 첫 패널 회의에서 미국이 일본을 옹호하는 발언을 하면서 산업통상자원부 등 정부가 대안 마련에 나서고 있다. [이창환 기자]

[일요서울 | 이창환 기자] 일본의 한국에 대한 반도체 소재부품장비 수출규제 등으로 위법 여부를 판단 받기 위한 세계무역기구(WTO) 패널이 지난달 29일 설치됐다. WTO 분쟁해결기구(DSB)는 이날 스위스 제네바에서 전체회의를 개최하고 일본의 수출규제 위법성을 다룰 패널 설치를 확정했다. 산업통상자원부는 일본의 수출규제가 WTO 협정에 부합하지 않음을 본격적으로 입증하겠다고 각오를 밝혔다. 다만 패널 설치 후 기대했던 첫 회의에서 미국이 일본을 옹호하는 뜻밖의 입장을 드러내면서 WTO 제소를 주도하고 있는 산업부를 비롯해 우리 정부가 대안 마련에 고심이다. 외교 전문가들은 한국이 일본의 수출규제를 바라보는 입장과 미국이 바라보는 입장이 다를 수 있다는 평을 내놓고 있지만 일각에서는 미국이 피로 맺은 동맹관계를 저버리고 자국의 이익을 위해 한국보다 상대적으로 경제적 우위에 있는 일본을 선택한 것이라는 해석도 나오고 있다.

일본 수출규제, ‘경제’ 아닌 ‘정치’ 문제로 보는 트럼프
미국, 자국 이익 앞세워…GATT 21조 안보예외 뭐길래  

우리 정부는 지난해 7월 일본의 수출규제를 철수를 촉구하며 같은 해 9월 WTO 제소를 진행한 바 있다. 다만 11월 일본과의 국장급 대화가 마련되면서 이를 잠정 중단했다. 다만 협의가 이뤄지지 않아 올해 다시 내부 논의를 거쳐 WTO에 제소하게 됐다. 이후 분쟁 심리절차로 패널 위원 선정, 서면공방, 구두심리 등 쟁송 절차가 본격적으로 진행된다.

이런 가운데 지난 3일 WTO 제소 이후 일본의 한국에 대한 수출규제 위법성을 다루는 첫 패널 회의에서 미국이 “일본의 수출규제는 자국 안보를 위해 필요한 조치를 취한 것”이라며 “WTO 심리의 대상이 될 수 없다”고 주장했다. 특히 “국가 안보와 관련된 문제는 그 나라만 판단할 수 있다”고 밝혔다. 

미국의 발언, 일본 옹호였나? 

그간 미국이 동맹국 간의 분쟁 상황에서 한쪽 국가의 편을 들어준 경우는 찾기 힘들 만큼 흔치 않은 사례라는 말이 나왔다. 특히 일본의 수출규제로 어려움을 겪고 있는 국가가 한국인 상황에서 일본의 입장을 대변하듯 언급한 것은 그간 미국과의 관계를 돌아볼 때 아쉬움이 따른다는 목소리도 있다. 

특히 국제 관계에서 미국이 힘을 실어주는 발언을 할 때의 영향력을 무시할 수 없다는 관측도 나오면서 ‘미국이 일본과의 관계를 확고히 하고자 혈맹 관계인 우리에게 등 돌린 것은 아닌가’ 하는 물음도 나오는 상황. 미국의 이와 같은 발언이 알려진 후 정부는 여론 달래기에 나섰다.

산업부에 따르면 이번 WTO에서 일본과의 분쟁 패널 회의에서 미국이 일본 편을 들었다고 볼 수 없으며 미국이 피소된 ‘철강 232조 분쟁’에서도 일본을 옹호한 듯 발언한 것과 동일한 안보예외를 주장하고 있다. 

산업부 관계자는 “미국은 일본의 한국에 대한 수출규제와 관계없이 앞서 진행된 러시아·우크라이나 통과 운항 분쟁, 사우디·카타르 지적재산권 분쟁에서도 동일한 주장을 해왔다”며 “해당 패널은 미국의 의견을 받아들이지 않았고 WTO 판례는 미국 측 입장과 달리 패널이 가트(GATT) 제21조인 ‘안보예외’를 심리할 수 있다는 입장”이라고 말했다.

안보예외, 정치적 문제로 보는 미국

윤덕민 전 국립외교원장은 취재진에게 “우리는 일본과의 수출규제 등 무역 관련 문제를 경제적인 문제로 보면서 미국이 어느 정도 힘을 실어주길 바랄 수 있지만, 미국이 WTO 제소를 부정적으로 보거나 일본을 옹호한다는 이야기가 나오는 이유는 미국이 이 문제를 정치문제로 보고 있어서다”라고 말했다. 

이어 “그런 차원에서 정치적으로 풀어야지, 경제적으로 풀어야 할 문제가 아니라고 볼 수 있다”며 “미국과 중국이 경제적으로 대립하며 그 사이에서 일어나는 일련의 일들에 대해 양국이 WTO에 서로 제소하고 그러지 않는 것을 보더라도, 한일 간의 문제가 정치적인 부분에서 시작돼 경제문제로 이어졌다고 보고 있을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고 덧붙였다.

우리는 그간 일본의 무역 제재 또는 수출 규제 관련 조치에 ‘경제보복’이라든가 ‘경제전쟁’이라는 등의 수식어를 써가며 이 문제를 WTO까지 끌고 왔지만, 미국의 입장에서는 한국과 일본 간의 문제를 국가적, 정치적인 요소로 시작된 문제로 보고 있다는 설명이다. 

윤 전 원장은 “한일군사정보보호협정(지소미아)을 포함해 한‧미‧일 간의 협력관계를 비춰볼 때 미국이 한쪽 편을 들기는 쉽지 않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산업부의 해석에 힘이 실리는 부분이다. 다만 미국이 자국의 상황을 빗대어 ‘안보예외’ 등으로 주장하며 이를 WTO 제소 사항이 아니라고 언급한 만큼, 일본이 동일한 내용을 근거로 제시할 가능성도 대비해야 한다. 미국의 방향성은 제쳐두고 WTO까지 끌고 온 만큼 여기서 문제 해결을 봐야 한다. 

관세 및 무역에 관한 일반협정(GATT) 21조 ‘안보상의 예외’에 따르면 첫째, 핵분열성 물질 또는 그 원료가 되는 물질에 관련된 조치와 둘째, 무기‧탄약 및 전쟁도구의 거래에 관한 조치 및 군사시설 공급을 위한 직‧간접적으로 행해지는 재화 및 거래에 관한 조치 그리고 셋째, 전시 또는 국제관계에 있어 그 밖의 비상시에 취하는 조치에 대해 자신의 필수적인 안보이익 보호를 위해 의무 위반이 정당화 될 수 있다고 규정하고 있다. 

즉 일본이 한국에 대한 반도체 관련 소재부품장비 등의 수출규제 조치를 취하는 것이 자국의 안보와 직결된 것이라는 증명을 하게 되면 그 정당성을 인정받을 수 있게 된다는 의미다. 

산업부가 앞서 설명한 안보예외 관련 분쟁에서 패널들은 안보 조치를 절차적 측면에서 심리할 수 있다고 판단했다. 신의성실 원칙에 따라 GATT상 의무를 우회하기 위해 제21조를 남용하면 안 된다는 것이다.

이와 관련 산업부 일각에서는 “일본 정부가 한국을 대상으로 수출규제 조치 실행 전 충분한 사전 소통을 했는지, 안보상 부적절한 사례가 무엇인지 알려달라는 요청에 일본이 충분한 소명을 했는지 등을 따져야 한다”며 “일본의 수출규제가 우리 대법원의 강제징용 판결 이후 보복성으로 단행한 것인지도 살펴야 한다”는 의견이 나왔다.  

한편 일본은 지난해 7월 한국에 대한 수출 규제를 단행하면서 한 언론을 통해 “안보상 부적절한 사례가 다수 있었다”며 “한국 기업이 사린가스 등 화학무기 제조에 전용할 수 있는 에칭가스를 생산하는 일본 회사에 납품을 재촉했다”고 밝힌 바 있다. 

일본은 반도체 소재부품장비 가운데 하나인 에칭가스를 한국 기업이 사린가스 등 화학무기 제조에 전용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또 이를 위해 한국이 해당 소재를 제조하는 일본 회사에 납품을 재촉했다고 설명했다. [이창환 기자]
일본은 반도체 소재부품장비 가운데 하나인 에칭가스를 한국 기업이 사린가스 등 화학무기 제조에 전용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또 이를 위해 한국이 해당 소재를 제조하는 일본 회사에 납품을 재촉했다고 설명했다. [이창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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