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렘린 [뉴시스]
크렘린 [뉴시스]

 

[일요서울] 국립외교원 외교사연구센터에서 ‘외교’라는 렌즈를 통해 우리 현대사를 조명하기 위해 오럴히스토리사업 ‘한국 외교와 외교관’ 도서 출판을 진행해 왔다. 지금까지 총 17권의 책이 발간됐다. 일요서울은 그중 공로명 전 외교부장관의 이야기가 담긴 책의 내용 중 일부를 지면으로 옮겼다.

“한·소 수교 이루어지고 한국 기업 도움 받아” 

“제3차는 한·소 협력을 다짐하는 회담” 

- 제주도 정상회담은 1991년 4월에 개최됐다. 1년도 안 되는 사이에 한·소간에 3차례의 정상회담이 열린 것은 아주 빈번한 것이다. 제주 회담이 시작되기 전에 소련 경제협력단이 연초에 방한을 했다. 당시 양국의 이해관계에 의해 수교와 경제협력을 교환했다고 보는 시각이 있는데, 어떻게 생각하는지 말씀해 달라 

▲ 물론 시차는 좀 있지만, 우리로서는 정치외교적으로 수교를 하는 게 목적이고, 소련의 입장에서는 외교적인 것보다는 한국과의 실제적인 관계 증진이 바람직했다. 그래서 1990년 12월 모스크바 정상회담 이후에 소련에서 경제기획담당 유리 마슬류코프 부수상이 경제사절단을 이끌고 왔다. 그때 로가초프 차관이 정치 분야를 대표해서 같이 왔다. 우리 측에서는 주로 경제부처에서 김종인 경제수석이 경제협력 관련 한·소 교섭을 진행했다. 우리 외부부에서도 경제담당 차관보가 참석했는데, 그 결과는 아시다시피 현금차관 10억 달러, 전대(轉貸)차관 15억 달러, 상품차관 5억 달러로 총 30억 달러의 차관이 합의됐다. 그 후에 제주도 정상회담으로 넘어갔다. 

- 수교 교섭 과정에서 우리가 경제협력 관련 이야기를 많이 했다는 인상을 받는다. 소련이 한국과의 수교를 통해 경제관계를 확대하면 다른 선진국들의 투자를 끌어들이는, 말하자면 마중물 역할을 할 수 있다는 논리도 고려됐나 

▲ 꼭 그렇게 이야기가 될 수 있을지 모르겠다. 소련은 한국과의 관계발전을 추구하는 과정에서 항상 경제 교류의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있었던 거 같다. 1988년의 크라스노야르스크선언에서도 한국을 지칭하고 경제교류 가능성에 대해서 언급을 했다. 그래서 역시 소련은 한국의 경제 발전, 경제협력 가능성에 매력을 느꼈다. 그건 부정할 수 없을 것 같다. 동시에 한국과 소련의 경제협력관계에 대해서 일본은 굉장희 흥미를 가지고 있었다. 당시 우리 기업들이 소련과의 에너지협력에 관심을 가지고, 특히 현대 같은 경우 사할린 유전개발사업에 파트너로 들어가려고 노력했다. 그때 일본 기업도 같이 경합하는 입장에 있었다. 소련이 일본 자본을 끌어들이는 데 그러한 상황이 얼마나 기여를 했는지는 모르겠다. 전문가들이 좀 더 들여다봐야 알겠다. 

한·소 수교가 이루어지고 나서 한국 기업들이 소련에 들어가 여러 가지 협력과 투자 가능성을 찾는 가운데, 우리 기업들이 도움을 받은 사례가 꽤 많았다. 어느 기업이라고 이야기하지는 않겠지만, 소련의 질서가 상당히 문란해지는 상황에서 각 연구소들에서 도움을 받았다. 가령 한 예로는 의약품 관계, 항생물체의 항균 등 분야에 굉장히 도움을 받았다고 했다.

- 냉전기 소련의 발전된 군사기술을 말하나

▲ 북한의 핵 개발에 소련의 기술자들이 개인적으로 많이 도왔다는 이야기도 있다. 소련이 상당히 규제를 하는데도 경제가 워낙 어려웠다. 그렇게 우리 기업들도 소련의 기술자들을 데리고 와서 활용하는 경우가 꽤 있었다. 언젠가 그 관계를 조사해 보면 상당히 재미있는 결과가 나오리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우리가 소련과의 경제협력에서 일방적으로 주기만 했다고 생각하기 쉬운데 반드시 그렇지 않다. 손익 장부를 계산해 보면 진실은 어딘가 다른 곳에 있을는지도 모르겠다. 

- 우리가 북한 핵 문제를 다루는 데 소련을 활용하고자 하는 의도도 있었을 법한데 어땠나.

▲ 핵 분야에서 구체적인 협력이 있었는지 모르겠다. 북한이 핵 개발을 이용했을 것으로, 즉 북한의 핵 개발에 소련의 과학자들이 기여한 게 아니냐 하는 의심만 가지고 있었다. 

- 북한이 NPT체제를 유지하고 핵 개발을 하지 않도록 영향력을 행사해 달라고 우리가 소련에게 요구한 적은 없나.

▲ 일반론으로는 가능한 이야기인데, 구체적인 사례로 생각나는 게 없다. 

- 냉전 시대에 레이건 행정부가 소련을 일관되게 압박했고, 그 결과 소련이 체제경쟁에서 어려워졌다는 일반 해석이 있다. 한·소 수교가 조기에 이루어질 수 있었던 것은 미·소 냉전 대결이라는 큰 구도에서 한국이 수혜를 입었다고 볼 수 있는 측면도 있을 것 같다. 이러한 해석을 어떻게 보나

▲ 결과론적으로 그런 이야기를 할 수 있다. 그런 압박으로 한계점에 도달했기 때문에, 소련이 그 출구를 생각하는 과정에서 한국에도 눈을 돌리게 되었을 수 있다. 

- 알겠다. 그럼 한·소 간 이루어진 세 차례의 회담을 역할을 분담해서 보자면 어떤 식으로 정리가 되나
 
▲ 제1차는 시작이 반이라는 노태우 대통령 말처럼 길을 여는 역할을 했고, 제2차는 국교정상화 이후 양국관계를 어떻게 정립해 나가느냐. 양국의 일반원칙 선언이 비교적 추상적인 내용이므로, 관계를 설정해 나가는 구체적인 규칙을 만들고 그동안 문제되어 왔던 경제협력 등을 구체화하는 길을 텄다. 제3차는 아시아·태평양 지역의 플레이어로서 한반도 문제를 다루기 위한 한·소 간의 협력을 다짐하는 차원 높은 회담이었다. 제3차는 아주 시간이 짧았다. 고르바초프 대통령의 일본 방문이 상당히 길어져서 예정 시간보다 한 너댓 시간 늦게 왔다. 그래서 제주도에서의 저녁 만찬이 자정에 시작됐다. 그럼에도 한·소 수교를 이룩한 양 정상들의 열기가 상당히 느껴지는 회담이었다. 

한 가지 재밌는 이야기는, 고르바초프를 영접하기 위해서 저희 내외가 소련에서 들어와서 한·소 정상회담에 참여했는데, 그땐 라이사 고르바초프 여사가 살아 있을 때라 두 분이 같이 왔다. 부인 프로그램은 따로 있으니까 제주도 관광을 하기 위해서 제 아내가 안내하고 가는데, 갑자기 라이사 여사가 샛길로 들어가자고 했다. 그곳에 들어가니까 구멍가게가 있었다고 했다. 제주도 시골길 구멍가게의 상황이 어떨지 모르니까 제 아내의 가슴이 철렁했는데, 들어가 보니까 뜻밖에도 깨끗하게 정리되어 있었다고 했다. 거기서 라이사 여사가 자기 손녀한테 사준다고 신발과 몇 가지 물건을 샀다고 했다. 라이사 여사가 제주도의 번듯한 시가지를 보고는, 뒷골목은 어떤가 궁금했나 보다. 그 이야기를 하는 제 아내에게 제가 “당시 제주도민의 개인당 소득이 2만 달러쯤 된다. 그렇게 생각하면 크게 놀랄 건 없다”는 이야기를 한 게 기억이 난다. 그때 우리 국민 개인당 소득이 7,500달러 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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