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정원 前 고위간부들 “‘위임(委任) 통치’ 아니라 ‘하청(下請) 통치’”

[일요서울ㅣ조주형 기자] 과연 독재(獨裁)자가 권력을 나눌 수 있을까. 무려 70년 동안 일명 ‘선대의 유훈(遺訓)’을 떠받드는 체제를 놓고 ‘위임통치’라는 용어가 적용될 수 있는 것인지 관심이 모아진다. 게다가 ‘위임통치’라는 용어를 사용한 주체와 그 출처에 대한 궁금증도 증폭되고 있다. 이는 바로 ‘北 김정은’의 동향과 직결된 사항이기 때문이다. 일요서울은 지난 20일 국회 정보위원회에서 등장한 ‘北 김여정 위임통치’라는 용어의 진위를 놓고 전문가들을 통해 그 실체(實體)를 알아봤다.
 

北 김정은.(사진=조선중앙TV 캡처) [뉴시스]
北 김정은.(사진=조선중앙TV 캡처) [뉴시스]

 

-“北 김정은, 허리띠 졸라매지 않게 한다던 약속 공수표 돼···면피용”

‘北 김여정 위임 통치’라는 용어가 등장하면서 혼선을 빚는 모양새다. 게다가 박지원 신임 국가정보원장의 첫 국회 정보위원회 보고라는 점에서 ‘첫 발부터 삐꺽거리는’ 모습으로 비춰지는 양상이다. 그동안 박 원장의 대북관 등 주관주의에 대한 우려 또한 거론된다.

박 원장은 지난 20일 비공개로 진행된 국회 정보위원회 전체회의에서 ‘위임 통치’라는 자체 평가 결과를 밝혔다. 김병기 더불어민주당 의원과 하태경 미래통합당 의원에 따르면 국정원은 이날 “北 김여정이 국정 전반에 위임통치를 하고 있다”라고 보고했다. 이는 ‘北 김정은이 각 분야별로 자신의 권한을 北 김여정에게 분산하고 있다’는 의미로 해석됐다. 신임 국정원장의 보고에 따라 70년 동안 3대 세습 독재 체제를 견고히 세워 온 김씨 왕조가 한순간에 권력을 분산했다고 판단할 수 있을까.
 

북한의 금수산태양궁전.(사진=조선중앙TV 캡처) [뉴시스]
북한의 금수산태양궁전.(사진=조선중앙TV 캡처) [뉴시스]

 

우선 북한의 권력 승계 5대 절차에 따르면 ‘北 조선노동당의 영도절차’에 맞춰야 한다. 권력의 ‘핵심 인자(因子)’가 될 경우 ‘北 주체사상’과 ‘대남혁명 지도권’에 한 발짝 더 가까이 다가설 수 있게 된다. 바로 ‘계승성’을 갖게 되기 때문이다. 이는 북한 내부 문건인 ‘수령후계자론(평양출판사)’의 ‘주체위업의 계승’에서 근거를 찾을 수 있다. 북한 수뇌부의 ‘위임자’가 될 경우 그의 필수 과업은 ‘대남 혁명 지도권’이 된다. 이는 北 조선노동당 규약 전문에 나온다.

北 조선노동당 규약 전문에는 “조선로동당의 당면목적은 공화국 북반부에서 사회주의 강성대국을 건설, 전국적 범위에서 민족해방(인민)민주주의 혁명의 과업을 수행하는데 있으며, 최종목적은 온 사회를 주체사상화해 인민대중의 자주성을 완전히 실현하는데 있다”고 밝힌다. 이것이야말로 북한 지도부의 최종 목적이다. 즉, 누가 권력을 위임 받느냐와 상관없는 부분이다.

그렇다면 ‘위임통치’라는 용어의 진위는 무엇일까. 일요서울은 지난 26일, 27일 약 30년 동안 국정원에서 근무한 유성옥(63) 前 심리전단 단장, 곽길섭(60) 前 북한체제연구실장의 ‘위임 통치’에 대한 이야기를 서울 서초구·성북구 일대에서 직접 들었다. 다음은 유 前 단장과 곽 前 실장과의 인터뷰 전문 일부다.
 

지난 20일 북한 주민들이 평양 김일성 광장에서 김일성 김정일 부자의 대형 초상화 등을 든 채 한국의 이명박 대통령을 비난하는 구호를 외치며 행진하고 있다. 북한 사람들은 지난 주 이 대통령의 북한에 대한 라디오 논평을 문제삼았다.<평양=AP/뉴시스>
지난 20일 북한 주민들이 평양 김일성 광장에서 김일성 김정일 부자의 대형 초상화 등을 든 채 한국의 이명박 대통령을 비난하는 구호를 외치며 행진하고 있다. 북한 사람들은 지난 주 이 대통령의 북한에 대한 라디오 논평을 문제삼았다.<평양=AP/뉴시스>


국정원 前 심리전단 단장 “北 본질 전혀 이해 못한 용어”

- 국회 정보위원회 업무보고에서 ‘北 김여정 위임 통치’ 용어가 등장했는데. 
▲ 정보위 보고에 앞서 실무국장 등이 ‘北 김여정 위임 통치’ 등의 답변을 내놨는데, 그게 차장·원장을 통해 걸러지지 못한 것 같다. 박지원 신임 국정원장 등은 국가정보기관의 ‘정보(Intelligence)’를 직접 다뤄본 경험이 전혀 없기 때문에 첫 업무보고에서 (위임통치 등의)그런 표현을 쓴 것 같다. ‘위임 통치’라는 용어는 ‘통치 전반을 넘기거나 대신하게 한다’라는 뜻이다. 그런데 ‘유일영도체계’이자 1인 독재체제인 북한에 대해서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용어다. 북한의 본질을 전혀 이해하지 못한 데서 등장한 용어다.

- 정보위에서 국정원이 ‘위임 통치’라고 표현했는데, 그 말의 숨은 의미는 무엇인가.
▲ 북한 체제하에서는 ‘위임’이라는 용어가 부적합하다. 굳이 표현하자면, 北 김정은이 실무 부문에 약간의 재량권을 높여줬다고 볼 수 있다. 앞서 지난 2012년 4월15일, 北 김정은은 이날 평양 김일성광장에서 “우리 北 인민이 다시는 허리띠를 조이지 않고 사회주의 부귀영화를 마음껏 누리게 하자는 것이 우리 당의 확고한 결심”이라고 밝힌 바 있다. 그런데, 지금 어떻게 됐는가. 북한의 코로나19 확산 사태를 비롯해 경제 상황은 성공 가능성이 거의 없는 상태다. 허리띠를 조이지 않게 하겠다더니 완전히 허리가 잘리게 조여야 하는 상황이다. 北 주민들의 불만도 나날이 커지는 상황에서 권력 분산은 있을 수 없다. 다만, 주민들의 불만을 北 김정은이 직접 받게 되면 부담이 커지니, ‘꼬리자르기’ 식으로 회피하기 위함인 것 같다.

- 과거 北 김정일 시대에도 그런 적이 있었나.
▲ 北 조선노동당의 박남기 계획재정부장이 지난 2010년 3월 경 ‘화폐개혁 실패’라는 명분 등으로 공개 처형됐다. 70대 당 원로가 있던 ‘계획재정부장’이라는 직책은 당의 살림을 비롯해 북한 지도부의 재정계획을 총괄하는 요직 중의 요직이다. 그런데 처형됐다. ‘천벌을 받을 놈’이라는 저주를 했다는 첩보까지 들어왔다. 전체주의 사회에서는 독재자가 시키는 대로 해야 하는데, 모든 결정은 윗선에서 하고 그에 따른 책임을 아랫선으로 돌린 대표적인 사례다. 북한 사회를 더욱 통제하겠다는 뜻으로 볼 수 있는 대목이다.
 

조선중앙TV가 북한 노동당 중앙위원회 제7기 제5차 전원회의에서 제시된 과업을 관철하기 위한 평양시 궐기대회가 5일 김일성광장에서 열렸다고 보도했다. (사진=조선중앙TV 캡쳐) 2020.01.05. [뉴시스]
조선중앙TV가 북한 노동당 중앙위원회 제7기 제5차 전원회의에서 제시된 과업을 관철하기 위한 평양시 궐기대회가 5일 김일성광장에서 열렸다고 보도했다. (사진=조선중앙TV 캡쳐) 2020.01.05. [뉴시스]


국정원 前 북한분석관 “유일영도체계 北···하청 통치”

- 北 김정은의 ‘위임 통치’ 지시를 두고 왜 해석의 차이가 발생하는가? 그 이면에 담긴 뜻은 무엇인가?
▲ 일종의 ‘하청 통치’라고 보면 된다. 자유민주주의 체제에서 있을 법한 대통령의 권력 분산행위의 한 형태로 인지하는 것 같은데, 그렇지 않다. 북한은 ‘유일영도체계’를 근간으로 하는 ‘독재체제’다. 北 김정은의 명령에 따라 움직이는 체제다. 하청을 줘 놓고 그 결과가 마땅치 않으면 ‘무효화’시킬 수 있는 곳이 바로 북한이다. 그 '무효화'가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이미 알고 것으로 본다.

- ‘위임 통치’의 한 형태가 지난 과거에도 있었는가?
▲ 지난 1998년, 北 김정일은 ‘국방위원장’이라는 직함을 북한의 최고 지위로 격상시키고 그 자리에 추대됐다. 北 김일성은 2012년 4월 헌법 개정을 통해 ‘영원한 주석’이 됐다. 역시 모든 권한은 본인이 갖고 있었고, 경제 문제는 내각 총리에 맡기는 형국이 됐다. 제아무리 ‘위임 통치’라고 하지만, 실질적인 정책결정권은 北 김정은이 갖고 그에 따른 책임은 아랫선이 지게 된다. 北 김정은 입장에서는 책임회피를 넘어 당 간부들에게 체제 효율화를 요구하는 것이다.

- 그런데, 이런 정보가 국회 정보위에서 거론되는 것은 위험하지 않은가.
▲ 정보 출처 노출의 위험이 있다. 정보위 업무보고는 비공개가 원칙이지만, 완전 비공개는 불가능하기 때문에 ‘간사 브리핑 제도’를 운영하는데, 이번에는 ‘경제’나 ‘코로나19’, ‘8차 당 대회’ 등에 관한 브리핑을 했어야 했다. 오히려 ‘北 김정은 통치’에 관한 것을 공공연히 노출시키는 것은 상당히 위험한 행위로, 우리 측의 정보망이 노출되는 치명상을 입을 수도 있는  행위다.
 

북한의 김정은. [뉴시스]
북한의 김정은. [뉴시스]

 

靑 “北 김정은, 통치에 자신감 있다”?

서주석 청와대 국가안보실 1차장은 지난 25일 국회 운영위원회 전체회의에 출석해 “당시 (박 원장이) ‘위임 통치'’라는 표현을 쓸 때 그 전제는 통치에 대한 자신감이 기본”이라며 “자신감이 기본이라는 전제 위에 각 분야별로 측근에 권한을 위임한다는 설명을 했었다. 2012년 이후 8~9년 동안 나름 통치에 대한 자신감이 기본이 됐다고 생각한다”고 설명했다.

앞서 유성옥 前 심리전단 단장, 곽길섭 前 북한체제연구실장이 일요서울에 밝힌 이야기 가운데, ‘北 김정은 위임통치’를 관통하는 핵심은 바로 “유일영도체계를 근간으로 하는 북한의 본질은 바로 권력 독점”이다. 이는 ‘위임’이라는 용어에 담긴 이중적인 해석을 ‘자유민주주의 체제에서의 권력 분산’에 준하는 행위로 봐서는 안 된다는 뜻이기도 하다. 서 차장이 이런 의미를 받아들였을지 관심이 모아진다.
 

평양사진공동취재단 박진희 기자 = 문재인 대통령과 북한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19일 밤 평양 5.1경기장에서 열린 남북정상회담 경축 대집단체조와 예술공연 '빛나는 조국'에 입장한 뒤 손을 들어 인사하고 있다. 2018.09.20 [뉴시스]
평양사진공동취재단 박진희 기자 = 문재인 대통령과 북한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19일 밤 평양 5.1경기장에서 열린 남북정상회담 경축 대집단체조와 예술공연 '빛나는 조국'에 입장한 뒤 손을 들어 인사하고 있다. 2018.09.20 [뉴시스]

 

관련기사

저작권자 © 일요서울i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