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은 영하 15도를 오르내리는 매서운 겨울밤이었다.

강 형사는 이런 날 숙직인 것을 오히려 다행으로 여기며 푸시킨의 시집을 읽고 있었다. 러시아의 겨울은 물론 이곳보다 추울 것이다. 언어는 그런 추운 곳에서 아름답게 가꾸어지는 것일까. 강 형사의 쓸데없는 생각을 깨우듯 당직 전화가 울렸다.

“강 형삽니다.” 강 형사가 시큰둥하게 전화를 받았다. “살인 사건이라고요? 지금 여기는 아무도 없는데…. 넌 누구냐고요? 뭐요?”

강 형사가 벌컥 화를 냈다. “나는 당직이오만 당신은 누군데 큰소리야?”
다음 강 형사의 목소리가 기어들어갔다. “반장님? 아니, 목소리가 왜 그렇게 변했습니까? 감기가 걸리셨다고요? 하지만 정말 여기는 아무도 없어요. 누구라도 자리는 지켜야지요. 마약반 최 형사에게 맡기고 나오라고요?”

강 형사는 얼른 수화기를 내려놓았다. 물귀신 같은 추 경감. 아마 자기 혼자 감기든 게 억울해서 나까지 물고 들어가는 걸 거야. 강 형사는 투덜거리며 점퍼를 걸쳤다.

도착한 곳은 가나다 아파트였다. 111동에 도착했는데 추 경감은 보이지 않았다. “여기 어디서 사건이 일어났는데, 어디요?”

강 형사는 신분증을 보여주며 말했다. “사건이 일어난 곳은 709호입니다.” 수위의 얼굴이 파랗게 질려 있는 것으로 보였다. 추워서 그런 건지도 모른다.
“잠깐만요.” 마침 내려온 엘리베이터를 얼른 타려는 강 형사에게 수위가 말했다. “뭐요?”

“혹시 강 형사님이십니까?” “그렇습니다만….” “저, 추 경감이라는 분이 강 형사님이 오시면 건너편 119동으로 오라고 하셨기 때문에...”
“뭐라고요? 왜 그랬나요?”

“그러야 제가 뭐 알 수 있겠습니까? 들은 대로 전해 드리는 것뿐입니다.”
수위가 고개를 흔들었다. 강 형사는 고개를 들어 건너편 119동을 바라보았다. 길을 사이에 두고 건너편이긴 했지만, 계단을 내려가서 길을 건너야 했다. 그렇다. 이것은 분명히 길거리를 쏘다니게 해서 감기에 걸리게 할 양으로 추 경감이 파놓은 함정이 분명했다.

“알았습니다.” 강 형사는 알았다고 하고는 냉큼 엘리베이터를 타고 709호로 갔다.
이미 담당 파출소 직원들이 지키고 서 있었다. 강 형사가 현관문을 열고 들어가자 더운 방 안 공기와 더불어 피비린내가 몰려온다. 강 형사에게는 피비린내보다 뜨끈한 방 안의 공기가 더 빨리 느껴진다. 나도 이런 아파트에 좀 살아봐야 할 텐데.

피살자는 혼자 사는 여자로 외출해서 돌아와 살해당한 것 같았다. 코트는 벗어놓았지만 입고 있는 옷은 정장 차림이었다. 사용된 흉기는 예리한 흉기로 짐작되었다. “이 아파트는 난방을 어떻게 하고 있나?” 강 형사는 순경을 하나 붙잡고 물어보았다.

“개별난방입니다” “그래? 그런데 여긴 왜 이렇게 따뜻해? 누가 난방을 틀었나?”
“아닙니다. 아무도 틀지 않았습니다. 아마 여자가 피살되기 전에 난방부터 틀었던 모양입니다. 저희가 막 도착했을 때는 방이 아직 싸늘한 편이었습니다.”
그건 충분히 상상할 수 있는 일이었다. 손을 호호 불면서 뛰어들어와 얼른 난방을 튼다. 범인이 등 뒤에 있는 줄도 모르고.

“난방을 낮추든지 끄든지 하라고.” 강 형사는 돌아서다가 다시 물었다.
“시경에서 온 반장님은 어디 가셨지?”
“건너편 아파트로 갔습니다. 피살자를 쫓아다니던 용의자가 있거든요. 여기 바로 건너편에 보이는 아파트에 삽니다. 그곳이 지대가 낮아 층수는 두 층이 높지요.” “건너편이라고?”

강 형사는 베란다 너머를 바라보았다. 거실 유리문에 습기가 가득 차서 밖에 보이지 않았다. 강 형사는 다가가 유리문을 열었다. 건너다보이는 아파트에는 추 경감이 이쪽을 바라보고 있는 것이 보였다. 이런!

추 경감은 강 형사를 보며 인상을 쓰더니 손짓을 했다. 빨리 오라는 뜻이다.
강 형사가 들어가자 한 청년이 열심히 변명하고 있었다. 바로 죽은 여자를 쫓아다녔다는 사내가 틀림없었다. “글쎄 저는 여기에 오늘 죽 있었어요. 그리고 건너편 보라 씨 아파트는 저렇게 성에가 끼어서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기 때문에 범인이 누군지도 보지 못했다. 이겁니다.”

추 경감은 손을 들어 청년의 말을 막았다.
“자네는 이리로 오라는 전갈을 받지 못했어? 왜 거기에 있는 거야?”
“반장님도, 현장을 파악해야 추리가 서는 것 아니겠습니까? 강 형사가 너스레를 떨었다.

“허. 참” 추 경감이 기가 막힌다는 듯 웃고는 강 형사의 팔을 끌어 현관 쪽으로 갔다.

“저 친구가 범인인 것은 틀림없는 것 같아. 떨고 있는 게 눈에 보이거든. 그런데 아직 자백을 안 하고 버티고 있는데……. 자네 생각은 어때?”
“저자가 범인인 것이 분명합니다. 제가 들어오면서 들으니까 거짓말을 하고 있더군요.”

강 형사가 귓속말로 추 경감에게 말을 건네자, 추 경감이 함박웃음을 머금었다.
“서당개 3년이면 풍월을 읊는다더니!”

 

퀴즈. 강 형사는 청년의 말이 거짓이라는 것을 어떻게 알았을까요?

 

[답변 - 4단] 709호의 보라는 살해되던 당시에 막 난방을 틀었었다. 그 때문에 아직 성에가 끼지 않아 건너편에서 환히 바라보이던 상태였다. 그런데 건너편 청년은 성에가 끼어서 아무것도 보지 못했다고 거짓말을 했으니 그가 범인일 수밖에.
 


[작가소개]

이상우는 추리소설과 역사 소설을 40여 년간 써 온 작가다. 40여 년간 일간신문 기자, 편집국장, 회장 등 언론인 생활을 하면서 기자의 눈으로 본 세상사를 날카롭고 비판적인 필치로 묘사해 주목을 받았다. 역사와 추리를 접목한 그의 소설은 4백여 편에 이른다. 한국추리문학 대상, 한글발전 공로 문화 포장 등 수상.

주요 작품으로, <악녀 두 번 살다>, <여섯 번째 사고(史庫)> <역사에 없는 나라>, <세종대왕 이도 전3권> <정조대왕 이산>, <해동 육룡이 나르샤>, <지구 남쪽에서 시작된 호기심>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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