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L 교과서 된 ‘다시 쓰는 한국현대사’···역사관 '경도'

[일요서울ㅣ조주형 기자] '광복 75주년'을 맞이한 지난 8월15일, “대한민국은 민족반역자를 제대로 청산하지 못한 유일한 나라”라는 김원웅 광복회장의 ‘자학(自虐)적 경축사’가 ‘건국절 논란’의 단초가 됐다. 게다가 그는 건국 대통령을 향해 “친일파와 결탁했다”라는 원색적 비난도 서슴없이 가했다. 특히 “한국사회의 갈등구조는 보수와 진보가 아니고, 민족과 반민족”, “남북 간 분단 극복 노력을 노골적으로 방해하는 나라는 일본”이라는 경축사 발언을 통해 김 회장의 ‘해방 이후 건국 사관(史觀)’을 엿볼 수 있다. 일요서울이 현 집권세력의 ‘해방 전후(前後) 인식’을 파헤쳐 봤다.
 

문재인 대통령이 1일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열린 제100주년 3.1절 기념식에서 기념사하고 있다. 2019.03.01.[뉴시스]
문재인 대통령이 1일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열린 제100주년 3.1절 기념식에서 기념사하고 있다. 2019.03.01.[뉴시스]

 

-박세길 “南, 망국적 단독선거 강행”···거세지는 민중사관(民衆史觀) ‘논란’

문재인 대통령은 2018년 신년 기자회견에서 “내년(2019년)은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이다. 임시정부의 법통을 계승한 대한민국 건국 100주년”이라고 밝혔다. 그의 ‘해방 이후 건국 사관(史觀)’이 단적으로 드러난다. 바로 ‘건국절 논란’이다.

그렇다면 1945년 8월15일은 광복(光復)일과 해방(解放)일 중 어느 표현이 맞을까. 두 말 모두 ‘정치적 용어’로, 사용하는 주체의 정체와 목적, 현실에서 추구하는 방향 등에 따라 그 의미가 다르다. 그러다 보니 집권세력의 ‘해방 이후 건국 사관’ 논란이 식을 줄 모른다. 이에 광복일·해방일 판단에 앞서 용어의 기원부터 면밀히 살펴볼 필요가 있다.

‘광복’이라는 용어는, ‘한국광복군 선언문’의 “광복군은···독립을 회복하고자 일본 제국주의자들을 타도하기 위하여 연합국의 일원으로 항전을 계속한다”라고 천명하면서 사용됐다. 광복을 표명한 단체들에 따르면 그 목적이 곧 ‘독립(獨立)’이라고 했기 때문에 광복과 독립은 ‘호환적 동의어’로 볼 수 있다. 다만, 광복은 ‘주권의 회복’을, 독립은 ‘주권의 확립’에 방점을 둔다.
 

1946년 1월 14일 경북 안동군의 좌파계열 정당·사회단체들이 연명으로 작성해 뿌린 ‘신탁통치문제에 관한 성명서’. 모스크바 삼상회의 결정이 ‘위임통치’와는 다르며 조선의 완전한 민주주주의적 국가 건설을 후원하고 협력하기 위한 것이라는 내용을 담고 있다. (사진=미디어한국학 제공) 2020.02.23. [뉴시스]
1946년 1월 14일 경북 안동군의 좌파계열 정당·사회단체들이 연명으로 작성해 뿌린 ‘신탁통치문제에 관한 성명서’. 모스크바 삼상회의 결정이 ‘위임통치’와는 다르며 조선의 완전한 민주주주의적 국가 건설을 후원하고 협력하기 위한 것이라는 내용을 담고 있다. (사진=미디어한국학 제공) 2020.02.23. [뉴시스]

 

그에 반해 1945년 8월15일을 ‘해방’의 날이라고 최초 정의한 주체는 바로 소련이다. 당시 한반도 이북에 진주한 소련군 사령관 치스챠코프는 포고문을 통해 “소련군은 해방군으로 조선에 왔으며 이제 조선인민은 해방됐다”라고 선언한다. ‘해방’을 사용한 주체는 소련뿐만 아니라 임시정부의 한국독립당 또한 “우리 조국은 동맹국의 우의적 협조하에 해방되고 있다”라고 밝혔다. 여기에는 임시정부 주석이자 한국독립당 당수인 김구의 성명에서도 나타난다. 김구의 ‘조국의 해방을 안전에 목도하면서’, ‘조국의 독립을 안전에 전망하고 있는 이때에’라는 성명에 따르면 당시 한반도에서 진행된 것이 ‘해방’이며 ‘독립’은 이후 일어날 과정인 셈이다.

위에서 ‘광복’과 ‘해방’이라는 정치적 용어를 고려하면 앞서 언급한 ‘광복 75주년’이라는 전제는 1945년 8월15일을 ‘광복일’로 보는 셈이다. 건국·독립과 ‘호환적 동의어’인 ‘광복’이 ‘해방’으로 왜곡되고 ‘건국’의 의미가 통째로 빠진 것이다. 이를 바로잡는다면, ‘한민족은 1945년 8월15일 일제로부터 해방됐고, 대한민국은 1948년 8월15일 광복(건국)됐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왜 김원웅 광복회장은 이승만 대통령을 향해 “친일파와 결탁했다”는 비난에 이어 “대한민국은 민족반역자를 제대로 청산하지 못한 유일한 나라”라고 지적했을까. 그가 그렇게 바라보는 ‘해방 이후 건국 사관(史觀)’에 대해 일요서울이 직접 분석해봤다.
 

김원웅 광복회장을 두고 특기할 만한 점은, 그가 지난 2018년 12월8일 일명 '위인맞이 환영단 세미나'에서 "박근혜 좋다는 사람보다 北 김정은 좋다는 사람이 낫다"는 발언을 했다는 것이다. 지난 2018년 12월8일 오마이뉴스 보도에 따르면 김 회장은 이날 오전 서울 종로 을지로2가 향린교회에서 열린 '위인맞이환영단' 공개 세미나 축사에서 "박근혜를 좋아하는 사람보다는 김정은을 좋아하는 사람이 훨씬 나아 보인다"면서 "일왕에 개처럼 충성 다하겠고 혈서 쓰고 독립군 토벌에 앞장선 사람 집안에서 큰 박근혜보다는 일제강점기 항일무장 투쟁한 독립운동가 가문에서 자란 北 김정은이 낫다"고 말했다. 그가 이날 언급한 '일제강점기 항일무장 투쟁한 독립운동가 가문'은 北 김일성, 北 김정일 일가로 추정된다. [페이스북 사진 캡처]
김원웅 광복회장을 두고 특기할 만한 점은, 그가 지난 2018년 12월8일 일명 '위인맞이 환영단 세미나'에서 "박근혜 좋다는 사람보다 北 김정은 좋다는 사람이 낫다"는 발언을 했다는 것이다. 지난 2018년 12월8일 오마이뉴스 보도에 따르면 김 회장은 이날 오전 서울 종로 을지로2가 향린교회에서 열린 '위인맞이환영단' 공개 세미나 축사에서 "박근혜를 좋아하는 사람보다는 김정은을 좋아하는 사람이 훨씬 나아 보인다"면서 "일왕에 개처럼 충성 다하겠고 혈서 쓰고 독립군 토벌에 앞장선 사람 집안에서 큰 박근혜보다는 일제강점기 항일무장 투쟁한 독립운동가 가문에서 자란 北 김정은이 낫다"고 말했다. 그가 이날 언급한 '일제강점기 항일무장 투쟁한 독립운동가 가문'은 北 김일성, 北 김정일 일가로 추정된다. [페이스북 사진 캡처]

 

지배-피지배 관계로 재조명된 ‘민중사관’

김원웅 광복회장의 ‘해방 이후 건국 사관(史觀)’은 “한국사회의 갈등구조는 보수와 진보가 아니고, 민족과 반(反)민족”, “남북 간 분단 극복 노력을 노골적으로 방해하는 나라는 일본”이라는 자학(自虐)적 경축사에서 드러난다. 그는 “친일반민족세력이 민족 자주적 역량의 결집을 방해했다”고 목소리를 높인다. 그의 경축사를 통해 현 집권세력으로 통칭되는 86운동권, 그중에서도 ‘민족해방(National Liberalism·NL)’계열 세력의 기조가 드러난다. NL을 알아보기 위해서는 33년 전인 지난 1987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일명 ‘NL의 교과서’라고 불리는 ‘다시 쓰는 한국 현대사 1·2·3(지은이 박세길, 출판사 돌베개)’를 통해 현 집권세력의 ‘해방 이후 건국 사관’의 뼈대를 엿볼 수 있다. 핵심은 ‘해방 이후 건국 시기’를 ‘신(新) 식민지 건설의 시초’로 봤다는 점이다. 일요서울은 지난해 서울 시내 주택 단지 등을 돌며 ‘다시 쓰는 한국 현대사 1·2·3 초판 발행본’을 입수했다. NL 운동권이 바라보는 ‘해방 이후 건국 시기’에 대해 알아보고자 책에 기술된 일부 내용을 밝힌다.
 

일명 ‘NL의 교과서’라고 불리는 ‘다시 쓰는 한국 현대사 1·2·3(지은이 박세길, 출판사 돌베개)’를 통해 현 집권세력의 ‘해방 이후 건국 사관’의 뼈대를 엿볼 수 있다. 핵심은 ‘해방 이후 건국 시기’를 ‘신(新) 식민지 건설의 시초’로 봤다는 점이다. ‘다시 쓰는 한국 현대사 1·2·3(약칭 다현사)’을 지은 이는 바로 서울대학교 철학과 81학번인 박세길(58) 씨다. 일요서울은 지난해 서울 시내 주택 단지 등을 돌며 ‘다시 쓰는 한국 현대사 1·2·3 초판 발행본’을 입수했다. NL 운동권이 바라보는 ‘해방 이후 건국 시기’에 대해 알아보고자 책에 기술된 일부 내용을 밝힌다. [조주형 기자]
일명 ‘NL의 교과서’라고 불리는 ‘다시 쓰는 한국 현대사 1·2·3(지은이 박세길, 출판사 돌베개)’를 통해 현 집권세력의 ‘해방 이후 건국 사관’의 뼈대를 엿볼 수 있다. 핵심은 ‘해방 이후 건국 시기’를 ‘신(新) 식민지 건설의 시초’로 봤다는 점이다. ‘다시 쓰는 한국 현대사 1·2·3(약칭 다현사)’을 지은 이는 바로 서울대학교 철학과 81학번인 박세길(58) 씨다. 일요서울은 지난해 서울 시내 주택 단지 등을 돌며 ‘다시 쓰는 한국 현대사 1·2·3 초판 발행본’을 입수했다. NL 운동권이 바라보는 ‘해방 이후 건국 시기’에 대해 알아보고자 책에 기술된 일부 내용을 밝힌다. [조주형 기자]

 

우선 ‘다시 쓰는 한국 현대사 1·2·3(약칭 다현사)’을 지은 이는 바로 서울대학교 철학과 81학번인 박세길(58) 씨다. 박 씨는 당시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10개월간 복역했다. 수감 생활 중 우유팩 껍데기를 벗긴 종이에 ‘나름대로 해석한 현대사’를 기록했다. 그러다 1987년 3월 집행유예로 석방된 뒤 그 초고를 팸플릿 형태로 만들어 대학가 등에 몰래 배포했는데, 반응이 뜨거워 책으로 엮었고, 1988년 1월 서점에 배포됐다. 80년대 운동권에서는 박 씨의 책을 ‘의식화 필독서’로 꼽게 됐다. 도대체 어떤 내용이 수록됐기에 그런 평가를 받았을까.

‘다시 쓰는 한국 현대사 1·2·3(약칭 다현사)’은 1권 ‘해방에서 한국전쟁까지’, 2권 ‘휴전에서 10·26까지’, 3권 ‘1980년대에서 90년대 초까지’로 구분된다. ‘해방 이후 건국 사관’을 알기 위해서는 1권과 2권의 내용 일부를 알아볼 필요가 있다.

박 씨는 ‘다현사 1권’의 ‘왜 한국현대사를 다시 쓰는가’라는 머리말에서 다음과 같이 밝힌다. 그는 “한반도 긴장의 진정한 원인은 무엇인가”, “통일의 장애물이 무엇인가에 관한 인식의 대전환과 결합돼 있다”고 전한다. 이어 “우리 국민은 그동안 너무도 엄청나게 속아 왔음을 깨닫게 되었다. 미국이 군부독재정권을 탄생시키는 산파 역할을 맡고 있고, 이러한 역할이 분단체제에 의해 끊임없이 합리화되고 있는 현실을 돌이켜본다면 그 같은 생각과 기대는 한낱 무모한 환상에 불과할 뿐”이라는 지적과 함께 “불행의 근원을 파헤치지 않으면 안 된다”고 강조한다.
 

일명 ‘NL의 교과서’라고 불리는 ‘다시 쓰는 한국 현대사 1·2·3(지은이 박세길, 출판사 돌베개)’를 통해 현 집권세력의 ‘해방 이후 건국 사관’의 뼈대를 엿볼 수 있다. 핵심은 ‘해방 이후 건국 시기’를 ‘신(新) 식민지 건설의 시초’로 봤다는 점이다. ‘다시 쓰는 한국 현대사 1·2·3(약칭 다현사)’을 지은 이는 바로 서울대학교 철학과 81학번인 박세길(58) 씨다. 일요서울은 지난해 서울 시내 주택 단지 등을 돌며 ‘다시 쓰는 한국 현대사 1·2·3 초판 발행본’을 입수했다. NL 운동권이 바라보는 ‘해방 이후 건국 시기’에 대해 알아보고자 책에 기술된 일부 내용을 밝힌다. [조주형 기자]
일명 ‘NL의 교과서’라고 불리는 ‘다시 쓰는 한국 현대사 1·2·3(지은이 박세길, 출판사 돌베개)’를 통해 현 집권세력의 ‘해방 이후 건국 사관’의 뼈대를 엿볼 수 있다. 핵심은 ‘해방 이후 건국 시기’를 ‘신(新) 식민지 건설의 시초’로 봤다는 점이다. ‘다시 쓰는 한국 현대사 1·2·3(약칭 다현사)’을 지은 이는 바로 서울대학교 철학과 81학번인 박세길(58) 씨다. 일요서울은 지난해 서울 시내 주택 단지 등을 돌며 ‘다시 쓰는 한국 현대사 1·2·3 초판 발행본’을 입수했다. NL 운동권이 바라보는 ‘해방 이후 건국 시기’에 대해 알아보고자 책에 기술된 일부 내용을 밝힌다. [조주형 기자]

 

그는 ▲ 철저히 민중을 중심에 둔 역사를 쓰고자 한다 ▲ 특히 미국과의 관계를 집중적으로 파헤치고자 했다 ▲남북한의 민중을 동시에 하나의 민족사의 주체로 파악하고자 했다 ▲갈라진 우리 민족이 지금 이 순간에도 여전히 하나임을 확인시켜 주고 ▲ 강요된 분단의 철조망을 걷어내는 데 이 책이 조그마한 보탬이 된다면 필자로서는 더없는 보람이 될 것이라고 전한다.

‘다현사 2권’의 ‘책을 펴내면서’라는 머리말 또한 의미심장하다. 그는 “노예가 자신이 노예임을 깨닫지 못한다면 그는 영원히 노예일 수밖에 없다”면서 “자신을 지배하는 외세를 마냥 받들어 모시기만 한다면 결코 식민지 노예의 멍에로부터 벗어날 수 없을 것”이라고 지적한다.
그는 ▲ 미국은 침략적인 전쟁정책을 추구하면서도 언제나 자신을 자유와 평화의 수호자로 부각시켜 왔다 ▲ 전쟁 도발의 책임을 적대진영에게 떠넘기기 위한 엄청난 음모가 수십 년에 걸쳐 줄기차게 전개돼 왔다 ▲ 미국은 자신의 정체를 철저하게 은폐시키고자 노력했고 경제적 수탈에서도 사정은 마찬가지였다 ▲ 미군정의 종식과 함께 남한은 미국의 직접통치에서 벗어나 점차 독립의 기반을 강화시켜 왔다는 신화는 결국 미국의 통치방식이 더욱 교활해져 왔음을 의미하는 것에 불과한 셈 ▲ 민중이 미래의 역사를 자기 것으로 삼기 위해서는 먼저 과거의 역사를 되찾는 것에서부터 출발해야만 한다 ▲ 남북의 민중을 하나의 민족사이 주체로 서술하고자 했다고 밝힌다. 우선 1권의 내용부터 알아보자.
 

10일 북한 조선중앙TV가 지난 9일 평양 김일성광장에서 '북한 체제 수립 70주년'을 맞아 열병식을 진행한 모습을 공개했다. 2018.09.10. (사진=조선중앙TV 캡쳐) [뉴시스]
10일 북한 조선중앙TV가 지난 9일 평양 김일성광장에서 '북한 체제 수립 70주년'을 맞아 열병식을 진행한 모습을 공개했다. 2018.09.10. (사진=조선중앙TV 캡쳐) [뉴시스]


“美, 이승만 위시한 극소수 매국노와 결탁했다”?

‘다시 쓰는 한국 현대사 1권’은 ‘제1부 해방과 분단 5개 장’, ‘제2부 한국전쟁 6개 장’으로 구성된다. ‘제1부 제1장 해방의 길목에서’의 ‘조선 민족은 결코 죽지 않아다-해방을 향한 투쟁(p.22)’에서는 ‘식민지 민중으로서의 자신의 처지를 개선하고 궁극적인 독립을 쟁취하기 위한 일체의 투쟁은 철저히 압살됐다. 극악한 일제의 파쇼통치 하 유일하게 우리 민족이 의존할 수 있는 것은 직접 손에 무기를 들고 일제의 폭력에 맞서 투쟁하는 것 뿐···’이라고 전한다.

미 군정에 대한 박 씨만의 표현은 계속된다. ‘항복 조인식은 일본 식민통치 질서의 근본적 해체가 아니라 통치권을 일본에서 미국의 손으로 이양하기 위한 절차라고 해도 조금도 틀린 이야기가 아닐 것···미 군정은 그 즉시 자신만이 남한 내의 유일한 정부임을 선언했고 그에 따라 인민공화국은 간단히 부정됐으며 궁극적으로 미 군정의 무력에 의해 분쇄됐다’면서 ‘소련에 대한 대항기지로 삼고자 하는 강력한 동기로부터 출발했다’고 덧붙인다(p.48).

특히 ‘일제의 패망과 더불어 파산지경에 이르고 있었던 친일파들은 새롭게 미 군정을 맞이하여 과거의 지위를 되찾는 데 성공했다···미 군정은 대부분 친일 경력이 뚜렷한 인사들을 각종 고문과 군정관리 자격으로 채용함으로써 일제 잔재의 청산이라는 시대적 요청을 거역하고 말았다(p.50)’라고 표현한다. 앞서 “친일반민족세력이 민족 자주적 역량의 결집을 방해했다”고 밝힌 김원웅 광복회장의 경축사와 겹쳐지는 부분이다.
 

가장 오른쪽이 北 김일성이고,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세번째 위치한 인물이 바로 김원봉이다. [한국학중앙연구회]
가장 오른쪽이 北 김일성이고,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세번째 위치한 인물이 바로 김원봉이다. [한국학중앙연구회]

 

김 회장의 이같은 역사적 인식은 ‘다현사 1권’에서 계속 연결된다. ‘미 군정의 체제와 정책은 과거 일본이 이 땅에 들어와서 했던 것의 단순한 반복 내지는 그것의 연장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미 군정은 스스로를 일본의 총독부와 동일시했고 일본이 이 땅 위에 설치해 놓은 모든 기구를 고스란히 인수하여 다시 사용했다(p.61)’고 지적한다.

‘국방경비대’ 또한 거론됐고, 미 군정에 대한 적대적 해석도 등장했다. ‘국방경비대의 창설은 그 자체로서 남북을 분열시키고 남한만의 단독정부를 만들겠다는 미국의 음모가 최초로 명확히 드러난 구체적 사례(p.62)’, ‘이렇게 해서 미 군정은 과거 일본 총독부를 능가하는 거대 지주, 거대 자본가로서 남한 땅 위에 군림하게 됐다(p.65)’, ‘미 군정은 다수의 중소기업과 농민의 희생으로 자국의 상품 판매에 연계된 매판자본의 토대를 쌓아나가게 됐다(p.68)’고 밝힌다.

반면 ‘다현사 1권’에 따르면 북한에서의 모습 또한 전해진다. 일명 ‘남한 사회’가 ‘일제 잔재의 청산이라는 시대적 요청을 거역했다(p.50)’라는 점과는 달리 ‘북한에서는 해방과 동시에 일제시대의 식민지 통치 기구를 구성했던 일본인과 친일파들이 신속히 제거됐다(p.83)’고 전한다.
 

1945년 10월 14일 평양공설운동장에서 열린 군중대회에서 원고를 보며 연설하는 北 김일성. (사진=미디어한국학 제공) 2020.02.09.[뉴시스]
1945년 10월 14일 평양공설운동장에서 열린 군중대회에서 원고를 보며 연설하는 北 김일성. (사진=미디어한국학 제공) 2020.02.09.[뉴시스]

 

불 붙는 '건국절·국부 논란'···진실은 어디에?

‘다현사’의 핵심은 바로 ‘대한민국 건국’을 바라보는 시각이다. 우선 박 씨는 북한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술한다. ‘조선최고인민회의는 9월8일 만장일치로 헌법을 채택하고 상임위원을 선출했다···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수립을 선포했는데, 인민공화국은 그 본부를 평양에 두되 수도는 서울로 하며 남북에 걸친 전 인민의 선거로써 성립된 한반도 유일의 합법 정부임을 자처했다(p.131~132)’고 밝히기도 했다.

반면 그는 ‘이승만 정권의 정체(p.124)’에 대해 ‘남한에서의 단독정부 수립은 식민지 예속권력에 독립이라는 간판을 내건 것과 조금도 다를 바 없었다’, ‘식민지 권력의 최고 운영자가 하지 중장에서 이승만으로 바뀌었다는 점 외에는 아무것도 없었다(p.124)’, ‘이승만 정권은 예속 조약·미국의 이해에 따라 국정 전반을 풀어나갈 수밖에 없는 허약한 존재(p.125)’라고 표현했다.

‘다시 쓰는 한국 현대사’의 주장처럼 대한민국은 ‘일제의 뒤를 이은 미 군정’에 의한 친일파가 세운 나라일까. 그렇지 않다. ‘친일파 건국론’은 1980년대에 들어서면서 급격히 확산됐다. “대한민국의 건국 자체가 잘못된 것이었기 때문에 남한은 미국의 식민지가 됐다”라는 논리가 사회적으로 재생산된 인식의 결과다. 대한민국 건국주도세력은 ‘이승만 대통령과 독립촉성국민회’와 ‘한국민주당’ 세력이다. 이승만 대통령은 독도를 우리나라 영토로 귀속하게 만든 ‘평화선’을 선포한 인물이며, ‘신익희·오세창·명제세·이청천’ 등 민족독립운동가들로 구성된 ‘독립촉성국민회’도 건국주도세력 가운데 하나다.

게다가 이들 건국주도세력은 5·10선거에서 ‘친일파의 선거권 및 피선거권 박탈 조항’을 넣음으로써 친일파의 선거 참여를 배제했다. 5·10 선거법 제2조에 따르면 일본 정부로부터 작위를 받은 자, 일본제국의회 의원 등에 대해 선거권이 박탈됐고, 동법 3조에서는 일제시대 경찰·판사·헌병 등 치안관계자 및 중추원 부의장 고문 및 참의, 부·도 자문 혹은 결의기관 의원, 3등급 이상 고등관 관리 등에 대해 피선거권이 없다고 규정했다. 바로 ‘친일파 배제원칙’이다. 이로써 건국의 정당성 훼손을 막으려고 했다. 당시 해방 직후의 혼란과 소련 등 공산주의 세력의 위협 등으로 건국 노력이 방해받고 있는 가운데 인적자원의 한계 등을 고려할 사안이다.
 

1948년 제헌 국회의원을 선출하는 5·10 총선거에서 서울시 동대문구 갑 지역구에 출마한 이승만(李承晩) 후보 전단. (사진=미디어한국학 제공) 2020.07.05. [뉴시스]
1948년 제헌 국회의원을 선출하는 5·10 총선거에서 서울시 동대문구 갑 지역구에 출마한 이승만(李承晩) 후보 전단. (사진=미디어한국학 제공) 2020.07.05. [뉴시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각에서 ‘친일 행적 논란’을 거론할 경우, 문제가 되는 인물은 ‘여운형’이다. 사회주의 계열의 지도자적 인물인 그를 둘러싼 ‘친일 행적 논란'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건국절’ 논란에 이어 ‘국부(國父)’ 논쟁도 뜨겁다. 김원웅 광복회장은 이번 경축사에서 “이승만은···친일파와 결탁했다”고 비판했는데, 뿐만 아니라 더불어민주당 이인영 의원 現 통일부장관도 그가 국부가 아니라는 인식을 내비쳤다. 지난달 23일, 이 의원은 장관 후보 국회 인사청문회에서 ‘이승만 정부는 괴뢰(傀儡)정부인가’라는 질문에 대해 “우리의 국부는 김구가 됐어야 했다는 역사 인식을 갖고 있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이를 통해 현 정부의 ‘해방 이후 건국 사관(史觀)’을 엿볼 수 있다.

한편 김원웅 광복회장이 불을 지른 ‘해방 이후 건국 사관(史觀) 논란’은 ‘역사전쟁’으로 점차 확전되는 양상이다. 광복회장의 광복절 경축사가 오히려 국론을 두 갈래로 나눈 셈이다.
 

지난 1949년 8월 15일 중앙청에서 열린 대한민국 정부 출범 1주년 기념행사의 모습으로, 출처는 도서출판 백년동안. 대한민국 정부 출범 1주년 기념행사에 걸린 ‘대한민국 독립 1주년’, ‘민국 수립’ 현수막은 대한민국 정부가 한 해전인 1948년 8월15일 건국됐다고 보고 있음을 보여준다. [도서출판 백년동안]
지난 1949년 8월 15일 중앙청에서 열린 대한민국 정부 출범 1주년 기념행사의 모습으로, 출처는 도서출판 백년동안. 대한민국 정부 출범 1주년 기념행사에 걸린 ‘대한민국 독립 1주년’, ‘민국 수립’ 현수막은 대한민국 정부가 한 해전인 1948년 8월15일 건국됐다고 보고 있음을 보여준다. [도서출판 백년동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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