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르바초프 전 소련 대통령 [뉴시스]
고르바초프 전 소련 대통령 [뉴시스]

 

[일요서울] 국립외교원 외교사연구센터에서 ‘외교’라는 렌즈를 통해 우리 현대사를 조명하기 위해 오럴히스토리사업 ‘한국 외교와 외교관’ 도서 출판을 진행해 왔다. 지금까지 총 17권의 책이 발간됐다. 일요서울은 그중 공로명 전 외교부장관의 이야기가 담긴 책의 내용 중 일부를 지면으로 옮겼다.

“쿠데타는 결국 크렘린궁 내부 권력다툼이다”

“고르바초프의 리더십이 없었더라면 독일 통일은 없었다”

- 장관님께서 소련을 떠나신 후 그해 8월에 소련에서 쿠데타가 발생했다. 그때는 소련에 안 계시지 않았나.

▲ 제가 있을 때 쿠데타가 있었다. 

- 그때까지 계셨나

▲ 그렇다. 1991년 8월에 소련에 쿠데타가 일어났다. 그 쿠데타가 결국은 크렘린궁 내부 권력다툼인데, 제2차 한·소 정상회담의 날짜를 정하기 위해 우리가 모스크바와 서울을 빈번하게 왕래하던 1990년에 이미 시작됐다. 궁중 내의 강경파와 온건파의 싸움이 시작된 시점이 12월이라고 했다. 그런데 그걸 전혀 감지 못했다. 그래서 반성도 했다. 미리 감지했더라면 8월에 쿠데타가 나진 않았을 텐데. 그때 상황은 정말 어수선했다. 제2차 한·소 정상회담이 1990년 12월14일부터 모스크바에서 개최되었는데, 저는 그때까지도 대사 신임장을 제정하지 못한 상황이었다. 그래서 소련 외무성에 “내가 정식 대사도 아닌데 어떻게 공식방문에 다니겠느냐. 신임장을 빨리 받아달라”하니까 “걱정하지 말라. 신임장 안 받아도 당신이 대사인 거 다 안다”고 했다. 결국은 방문이 끝난 12월25일이 지나서 겐나지 야나예프 부통령에게 신임장을 제정했다. 부통령이 대신 받았다. 

그때 르완다 대사와 함께 대사 너댓 명이 함께 신임장을 제정했다. 그런데 그 이후 한참이 지나도 신임장 제정식 때의 사진이 안 왔다. 제정을 하고 나서 얼마 안 됐을 때 소련의 차석쯤 되는 의전실 직원이 “사진사가 제대로 사진 찍었습니까” 하고 물었다. 그래서 플래시가 터졌다고 대답했다. 그랬더니 고개를 갸웃거리며 “내가 그날 아파서 못 나갔는데, 좀 걱정스럽다”고 하기에 무심코 들었다. 그런데 아니나 다를까 필름 없는 사진을 찍은 것이다. 그래서 르완다 대사에게 사진을 받았는지 물었더니 전부 다 못 받았다고 했다. 그래서 난 한국의 유일한 주소대사인데, 주소대사 신임장 제정하는 사진이 없다. 

- 그건 참 큰 사건이었겠다.

▲ 보통 일어날 수 없는 상황이다. 그러니까 그 당시 내부가 굉장히 어수선했다는 게 지금 회고하면 납득이 좀 간다.  

- 8월 쿠데타 이후 얼마 지나지 않아 고르바초프 대통령이 사임했다. 고르바초프 대통령이 한·소 수교에서 갖는 비중이 엄청나지 않나. 개인적으로 고르바초프를 어떻게 보나.

▲ 그 당시 국제정치에서 고르바초프의 위상은 한·소 수교라는 테두리 안에서만 생각할 건 아니다. 고르바초프는 미·소 양 국가 한 축의 지도자였다. 물론 저는 한·소 수교를 이끌어 준 건 전적으로 고르바초프 리더십이라고 생각을 한다. 그 당시 페레스트로이카의 실질적인 추진자였던 야코블레프 정치국원이 이론적으로 뒷받침을 해주기는 했다. 그 외에 또 당시 정치국 내 개혁파들의 영향도 있었습니다만, 고르바초프의 리더십이 단연 위였다. 고르바초프는 소련 서기장 가운데 유일하게 모스크바대학교 출신이다. 인텔리다. 1991년 당시 고르바초프는 밖에서는 인기가 높은데, 소련 안에서 일반인들에게는 인기가 높지 않았다. 그런데 대사관의 운전수들에게 물어보면, 어김없이 옐친 대통령 이야기를 했다. 옐친이 러시아 사람 같다고 했다. 인사불성이 될 정도로 술을 마시는데 러시아의 남성적인 상징인지 모르지만, 그렇다 했다. 

그러나 반면 모스크바에서 우리가 접촉하던 인텔리층에서 고르바초프는 굉장히 인기가 높았다. 지적 사회에서의 위상은 높은데, 일반인들에게는 옐친이 훨씬 대중적·서민적으로 받아들여졌던 것 같다. 왜 국제정치인 측면에서 봐야 하냐 하면, 만약 고르바초프의 리더십이 없었더라면 독일 통일은 없었다. 동독이 무너지면서 소련에 도움을 요청할 때도 고르바초프는 “동독 인민의 의지를 존중해야 한다”는 이야기를 했다. 그래서 군사원조도 안 했다.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게 된 큰 요인이 고르바초프의 리더십에 있다. 콘돌리자 라이스가 쓴 책 Germany Unified and Europe Transformed: A Study in Statecraft를 보면 그 내용이 잘 나온다. 

- 냉전체제의 붕괴에 관한 한 고르바초프가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한 것 같다. 

▲ 소비에트가 붕괴하는 과정을 이끌어나온 게 고르바초프였다. 마지막에 앙시아레짐을 유지하겠다고 발버둥친 야나예프 같은 보수극단주의자들이 있었지만, 그땐 이미 역사의 흐름이 방향을 틀었을 때였다. 구소련체제를 벗어나려고 하는 러시아인들의 열망이 컸다. 그 후에 경제가 어려우니까 한때 그 노스텔지어에 묻히는 사람들도 있고, 혼란에서 질서를 찾으려고 하는 리더십 속에서 옐친을 보는 시각이 있기도 했다. 그러나 민주주의·페레스트로이카·글라스노스트, 특히 글라스노스트에 대한 열정이 강했다. 소련 인민은 가혹한 입장을 겪었다. 공식적으로 밝혀진 자료에 따르면, 소비에트체제에서 목숨을 잃은 사람들의 수가 제2차 세계대전으로 죽은 소련 인민 2,500만 명에 버금간다고 했다. 그런데도 소련 인민이 글라스노스트를 지지했다는 점에서 북한과 차이가 난다. 

러시아도 비교적 민정은 뒤처진 나라다. 유럽 국가들은 유럽 안에 러시아를 포함시키지 않으려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러시아에는 러시아정교라는 기독교 문명이 면면하게 흐른다. 1912년 러시아혁명 이후에 종교를 그렇게 탄압했는데도 제가 소련에 있을 때, 그리고 소련이 붕괴한 후에도 러시아 정교의 힘은 상당했다. 고르바초프의 어머니가 아주 경건한 신자였다고 했다. 그 도덕적인 가르침에 대해서 고르바초프가 상당히 높이 이야기하고 회상을 했다. 그런 차이가 있으니까 가능했던 거 아닌가 한다. 차르의 존재가 무섭다고는 하지만 동양 진시황의 존재는 더 무서웠던 것 같다. 중국문화의 영향에서 오는, 개인보다는 사회를 중시하는 문화적인 차이가 있는 게 아닌가, 그게 오늘날의 북한사회를 뒤덮고 있는 게 아닌가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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