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년간 송출된 北 '지령 방송'···작전이냐 기만이냐 ‘분분’
[일요서울ㅣ조주형 기자] “···지금부터 710호 탐사대원들을 위한 원격교육대학 정보기술 기초 복습 과제를 알려드리겠습니다. 564페이지 23번, 479페이지 마이너스 19번, 694페이지 20번···여기는 평양입니다.” 이는 지난달 29일 오전 유튜브 ‘북한 평양 방송’에 등장한 정체불명의 동영상이다. 일각에서 규칙성을 찾기 어려운 숫자들이 나열돼 있다는 특징과 더불어 그것을 이용한 北 대남 공작원 전달용 ‘지령(指令) 신호’ 아니냐는 의혹이 나오고 있다. 도대체 이 방송의 정체는 무엇일까.
-전통적 ‘A3방식’에서 ‘사이버(Cyber)’로…실체 ‘무엇’
바로 ‘난수(亂手) 방송’이다. 이 방송은 北 대남 공작원에게 보내는 일종의 ‘공작(工作) 지령(指令)’과 유사한 형태다. 유튜브 채널 ‘북한 평양 방송’에 이 같은 목적으로 추정되는 내용의 유사 방송이 등장하면서 관심이 집중됐다. 일각에서 실제 북한의 ‘난수 방송’이 재개된 것 아니냐는 우려가 나왔고, ‘안보 불안’으로까지 확대되는 형국이다. 일요서울이 이 방송의 정체를 추적했다.
우선 ‘난수 방송’의 기원부터 알아본다. ‘난수 방송’을 송출해 온 ‘북한 평양 방송’의 존재는 北 간첩 김동식(金東植)의 회고록에서 다음과 같이 확인된다. “···우리가 예고한 특정 날짜 밤 12시에 평양방송(주파수 : 단파 6400KHz 또는 중파 659KHz)을 청취하면 ‘평양에 살고 있는 박모 씨가 서울에 사는 이모 씨에게 보내는 편지는 사정에 의해 보내드리지 못합니다’라는 아나운서의 육성 멘트가 나온다.” 北 대남 공작원을 통해 ‘북한 평양 방송’이 실재했음을 확인할 수 있는 대목이다.
게다가 “···라디오를 평양방송 주파수(중파 657KHz)에 맞추고 약속된 신호노래가 나오는지를 확인했는데 나오지 않았다. 계획된 시간에 접선을 할 수 있다는 뜻이었다. 북한 공작부서와 공작조가 미리 약속한 제목의 노래가 나오면 당일 접선을 할 수 없다는 뜻이고 노래가 나오지 않으면 예정대로 접선을 한다는 뜻이다.”라는 그의 회고에서 ‘북한 평양 방송의 내용’이 ‘암호화’ 돼 있음을 알 수 있다. 실재하는 이 방송은 그 내용이 규칙성을 찾기 어려운 숫자로 암호화돼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방송의 정체를 알기 위해서는, 국가정보기관의 ‘비밀공작(Covert Action·秘密工作)’부터 알아볼 필요가 있다.
정보기관 등에 따르면 ‘비밀공작’이란 ‘자국의 대외 정책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다른 나라의 정치·사회·경제·안보 등에 영향을 미칠 목적으로 수행하는 포괄적 활동’으로 정의된다. 이는 ‘집행’ 기능을 수행한다는 특성을 갖고 있어 공작의 결과가 어떤 형태로든 노출될 수밖에 없는데, 공작의 배후세력(행위주체)이 무엇인지 알 수 없도록 철저히 은폐한다는 고도의 ‘은밀성’ 또한 수반된다. 그렇기 때문에 ‘북한 평양 방송’의 난수 방송 또한 대남 공작원에게 보내는 일종의 신호로 볼 수 있으며, 난수(亂手)는 이를 숨기기 위한 ‘가장(假裝·Cover)’임을 알 수 있다. 다만 ‘비밀공작’이 국가정보기관만의 독자적 영역임을 고려하면, 반(反)국가단체인 북한 지도부의 이런 행위는 ‘대남혁명’의 ‘기초화 작업’이라고 볼 수 있다. 그렇다면 지난달 29일 ‘북한 평양 방송’에 등장한 ‘난수 방송’은 정말 지령 신호였을까.
난수(亂手)방송은 진화 중···A3→사이버
‘난수(亂手) 방송’은 지난 1948년 9월9일 북한에서 北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수립이 선포되면서부터 지난 2000년 6월15일 남북회담 때까지 방송됐다. 그러다 16년 만인 지난 2016년 6월24일 재개됐다. 그해 19회를 시작으로 2017년에는 43회, 2018년 42회, 지난해 19회로 무려 130여 차례 이상 방송됐다. 그러자 ‘전문가’라는 인물들은 라디오 단파 형태의 ‘A3 방식’을 통해 암약중인 北 대남 공작원들을 움직이게 하려는 것 아니냐는 분석을 내놓기도 했다. 라디오 단파를 통한 전통적인 ‘A3 방식’이야말로 최신식 지령 수신법일까.
그렇지 않다. 北 김정일은 1990년대에 들어 “남조선의 인터넷은 국가보안법이 무력화된 해방구이며 사이버전(戰)은 일제시대의 총검과도 같다”고 강조했는데, 北 김정은 역시 지난 2013년 8월 “사이버전은 핵, 미사일과 함께 우리 군대의 무자비한 타격 능력을 담보하기 위한 만능 보검이다. 적들의 사이버 거점을 일순에 무력화할 준비를 갖추라”고 지시한 바 있다. 이후 北 대남 공작기관은 ‘사이버 드보크(Dvoke)’라는 신종 연락수단을 개발해 간첩 교신에 활용했다. 지난 2006년 ‘일심회 간첩사건’에서 교신 수단으로 ‘전자메일’을 사용했음이 드러났고, 2013년 통합진보당 이석기 RO 내란음모사건에서는 디지털 은닉 행위인 ‘스테가노그래피(Staganography)’를 통해 교신했음이 적발됐다. 결국 A3방식은 최신식이라고 볼 수 없다.
반북(反北)단체 제작 후 친북(親北)단체 차용?
‘북한 평양 방송’에 게재돼 문제가 된 그 방송은, 지난해 7월9일 청년단체 ‘(신)전대협’의 유튜브 채널 ‘전대협’에 ‘전대협 난수방송’이라는 이름의 방송과 동일하다. (신)전대협의 김수현 대표는 최근 국민일보와의 인터뷰에서 “베스트셀러 100위에 포함된 책을 토대로 난수방송을 만든 것”이라고 밝혔다.
김 대표와의 인터뷰를 통해 알 수 있는 점은 그가 유사 난수 방송을 어떤 근거도 없이 만든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즉, 국내 청년단체에 의해 유사 방송의 근거가 실제 난수 방송 등에서 차용했다고 추정할 수 있다.
그런데, 더욱 이상한 점은 북한 찬양 일색이라고 볼 수 있는 ‘북한 평양 방송’에 국내 반(反) 북한 성향 청년단체인 ‘(신)전대협’의 유사 난수 방송이 실렸다는 점이다. 게다가 국가위해사범을 대상으로 하는 ‘위험한 방송’의 존재도 ‘안보 불안 요소’로 작용하고 있는 형국이다. 국내 언론의 관심이 모아지자 ‘북한 평양 방송’은 해당 방송을 삭제하기에 이른다. 현재 해당 채널에서는 그 방송을 볼 수 없다. 대체 왜 이런 양상이 나타난 것일까.
‘北 찬양 채널’ 게재로 이미 ‘혼란’···교란용?
그럼에도 불구하고 ‘난수(亂手) 방송’이 떠돌고 있는 이유는 ‘대남 교란용’으로 분석된다. 25년간 경찰청 공안문제연구소, 경찰대학 치안정책연구소, 대검찰청 자문위원을 역임한 유동열 자유민주연구원장은 지난 2일 일요서울과의 통화에서 “북한의 난수 방송의 경우, 사이버상의 최첨단 교신 방식이 있기 때문에 훈련용이거나 대남 기만용으로 사용되는 경우라고 보면 된다”며 “현재 북한 난수 방송 자체는 北 간첩 공작 사실을 대대적으로 우리 국민들에게 유포시켜 불안을 조성하거나, 안보 불감증을 유발시키려는 행위로 일종의 기만(欺瞞) 선전”이라고 밝혔다.
비록 청년단체 (신)전대협이 난수방송을 만들어 올렸다고 하더라도 그 근거가 기존 북한의 대남 난수방송에 있었기 때문에 그 위험성을 무시할 수 없다. 유 원장은 이날 “현재 간첩 교신은 최첨단 사이버 공간에서 가능한데, 네트워크가 끊어질 경우 그에 따른 비상연락수단으로 A3 방식 등을 하게 된다. 통상 북한에서 난수방송을 하게 될 경우 우리 대공 안보수사기관 또한 이를 청취하는데, 70년 동안 수집해 둔 난수 해독표를 통해 50~60% 정도 해독이 가능하다”라고 밝혔다. 그러면서 “이번 방송은 국내 기만용으로 보인다”라고 전했다.
북한 찬양 일색의 유튜브 ‘북한 평양 방송’에서 게시한 ‘(신)전대협’의 ‘난수 방송’ 또한 북한의 기만용일 공산이 크다는 결론으로 모아진다. 해당 방송을 제작한 단체의 정체는 차치하더라도, ‘북한 찬양 채널’이 이를 이중 게재했다는 점에서 이미 한 차례 혼란을 겪고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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