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북회담 [뉴시스]
미북회담 [뉴시스]

 

[일요서울] 국립외교원 외교사연구센터에서 ‘외교’라는 렌즈를 통해 우리 현대사를 조명하기 위해 오럴히스토리사업 ‘한국 외교와 외교관’ 도서 출판을 진행해 왔다. 지금까지 총 17권의 책이 발간됐다. 일요서울은 그중 공로명 전 외교부장관의 이야기가 담긴 책의 내용 중 일부를 지면으로 옮겼다.

“‘외교안보연구원 원장’이 남북관계에 관여해 긴장과 기대 교차”

“아놀드 캔터와 김용순 접촉은 처음 조·미 고위급 접촉”

- 장관님께서는 1992년 초에 소련 초대 대사를 마치고 돌아오시면서 저희 외교안보연구원 원장으로 부임했다. 그때 어떤 각오로 부임했나.

▲ 글쎄, 그때 주소대사로 있다가 주러대사가 됐다. 소련연방이 붕괴되고, 옐친 대통령이 러시아공화국의 대통령이 되는 격동을 겪고 난 후였는데 '돌연'이라고 말할 수는 있겠다. 돌연히 외교안보연구원 원장으로 들어오라는 메시지를 받았는데, 그때 임동원 대사께서 외교안보연구원 원장으로 한 3년 넘게 근무하고 계셨다.

지금 우리가 있는 이 건물을 짓는 등 여러 일들을 했는데, 그분이 통일부차관으로 자리를 옮기게 되니까 그 빈자리에 들어오라는 연락을 받았다. 러시아에 가서 시간적으로 한 1년 되지만, 굉장히 오래 머물렀던 것 같은 느낌이 있었다. 오랜만에 본국에 오게 된 거다. 생각해 보면 제가 1983년에 서울을 떠나서 1992년 초에 돌아오게 된 거다. 오랫동안 밖에 있다가 고국에 들어오니까 우선 개인적으로는 기쁜 마음이었다. 또 외교안보연구원이라는 곳이 우리 외교정책을 상위적인 입장에서 구상할 수 있는 자리인 동시에, 그때부터는 외교안보연구원 원장이 남북 고위급회담 대표로 나가게 되고 남북관계에 관여했기 때문에 한편으로 긴장하고 또 기대도 많이 했다. 

- 장관님께서 초대 남북핵통제공동위원회 위원장으로서 핵 협상을 하신 데 대해 잘 모르고 계시는 분들이 많은데, 사실은 22차례에 걸친 협상이 있었다. 장관님께서 귀국하실 당시는 남북관계와 국제정세가 크게 변화하는 전환기다. 우선 남북 간 고위급회담이 물살을 타서 기본합의서가 채택됐다. 그리고 비핵화공동선언이 체결되었으며, 그 과정에서 노태우 대통령이 핵무기가 한반도에 없다는 선언도 했다. 그 일련의 과정에서 아놀드 캔터 미국 국무부 차관과 북한 김용순의 접촉이 있었다고 알려지는데, 이 접촉이 어떤 의미가 있었는지 말씀해달라.

▲ 아놀드 캔터와 김용순의 접촉은 사실 조·미 가 고위급 접촉으로서는 아마 처음이다. 근데 그 접촉 시 미국이 몇 가지 조건을 달아서 북측에 이야기를 했다. 북측에서는 조·미 고위급 접촉을 정례화하자는 요구를 해왔는데, 그에 대해서 미국 측에서는 서너 가지 조건을 제시했다. 북한이 바라던 조·미간의 고위급 접촉이 캔터와 김용순 접촉으로써 이루어졌고, 이에 북한은 정례화를 요구했다. 그때 미국 측에서는 정례화 같은 조·미간의 접촉에 북한이 우선 IAEA 사찰을, 그다음에 남북 상호사찰을 받아들일 필요가 있으며, 그렇게 해야만 조·미간 접촉이 가능하다는 전제조건을 같이 제시했다. 실질적으로 그러한 의미에서 북한이 IAEA 사찰을 받아야 하고 동시에 남북 간 상호시찰을 받아야 한다는 것이 조·미 간 관계 개선에 전제가 된다는 점을 인식시켰다는 이야기가 있다. 

- 캔터와 김용순 접촉에 대해 항간에 많은 이야기들이 있다. 김용순 부장이 미국과의 관계 개선 필요성을 제기했다든지, 미국과의 관계 개선에 북한이 굉장히 관심이 많다고 하면서 한국과의 관계보다도 더 심화한 전략적인 관계를 미국과 맺기를 원한다는 뉘앙스의 발언을 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는데 혹시 그와 관련해서 기억나시는 부분이 있나.

▲ 핵통제위원회 회의가 아무런 결실을 못 보고 1993년 1월에 중단됐다. 미국과 협의하기 위해서 제가 3월에 미국을 갔을 때 상황으로, 미국 측에서도 북한이 IAEA 특별사찰을 받지 않고, 또 남북 간의 상호사찰에 응하지 않는 상황에서 조·미 접촉을 할 경우에는 북한에게 잘못된 신호를 보내는 일이 될까 봐 굉장히 우려하고 있었다. 그래서 제1차 조·미 간의 고위급 접촉에 대해서는 아주 소극적이었다. 그때 우리 정부는, 북한이 IAEA 특별사찰을 받지 않고 NPT를 탈퇴해 버릴 위험성이 있기 때문에 그렇게 구석으로 몰고 가지 않고, 북한을 계속 NPT체제하에 두는 것이 좋을 듯하다는 생각을 했다.

그리고 관련 협의를 위해서 3월에 나갔었는데 그에 대해서는 미국 측, 국무부·백악관·국방부도 다 동의했다. 그리고 그러기 위해서 우리 정부가 다시 핵통제위원회를 재개하는 데 대해 굉장히 적극적으로 지지하고 있었다. 워싱턴에서 언제 한국에 핵통제위원회를 재개할지를 논의할 당시 팀스피릿이 시행되고 있었다. 3월18일에 끝나는 것으로 되어 있었는데, 팀스피릿 훈련이 끝나고 북한의 커다란 행사인 김일성 생일이 있기 전, 그 중간쯤에 핵통제위원회를 재개하는 것이 북한으로서도 현실적으로 가능하지 않겠느냐는 이야기를 한 적이 있다. 그런 것들을 예상하는 과정에서 보면, 일정한 절차를 거치지 않고 바로 조·미고위급 접촉을 하는 데 대해서는 굉장한 저항감을 가지고 있었다고 볼 수 있다. 

- 당시의 상황에서 우리는 남북 간에 핵 문제를 두고 협상을 했다는 것이 굉장히 주목할 점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했고, 북한의 입장에서는 핵 문제를 미국과 협상하고 미국과의 고위급 접촉을 계속 이어가고자 했는데, 결국은 남북 간 핵 협상이 이루어진다. 미국의 입장에서는 결국 상호사찰과 IAEA 사찰을 다 해야지만 접촉을 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그것이 캔터와 김용순 간 접촉에서 미국이 제의한 내용이라고 볼 수 있겠다.

▲ 그런 틀을 제시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그런데 제1차 핵통제위원회 접촉에서부터 마지막 공정위원회가 열리는 13차까지 북한 측에서는 시종 진지하게 비핵화를 위한 조치를 하겠다는 생각은 별로 없었다. 그리고 결국 핵 문제로는 미국과 경쟁하는 수밖에는 없겠다는 생각이었고, 북한 안보 문제에 관해서는 그 대화의 대상이 미국이지 여타의 나라는 아니라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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