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시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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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요서울] 국립외교원 외교사연구센터에서 ‘외교’라는 렌즈를 통해 우리 현대사를 조명하기 위해 오럴히스토리사업 ‘한국 외교와 외교관’ 도서 출판을 진행해 왔다. 지금까지 총 17권의 책이 발간됐다. 일요서울은 그중 공로명 전 외교부장관의 이야기가 담긴 책의 내용 중 일부를 지면으로 옮겼다.

“北, 1991년 비핵화공동선언 안 지켜”

“北, 본심은 ‘핵포기 안해’”

- 북한은 왜 남북 간의 핵 협상을 받아들였나.
▲ 당시 흐름 속에서 무언가 해갈 수 있지 않겠느냐는 계산을 한 거 같다. 그건 뭔가 하면 지금이야 소위 데자뷰적인 시각으로 이야기를 할 수 있겠지만, 그 당시 1991년 12월31일 비핵화공동선언이 선언되는 단계에서 핵을 보유하지도 않고, 만들지도 않고 또 장차 핵을 이용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했는데 전부 거짓이라는 게 드러났다. 그 당시 이미 북한은 핵무기를 만들기 위한 계획을 착착 진행해가면서, 심지어는 농축 처리를 해가면서 미국의 핵무기가 한반도에서 철거되기를 바라는 전략적인 목표를 가지고 있었다. 다만 불행하게 부시 대통령이 1991년에 한반도뿐만 아니라 글로벌하게 핵무기 철폐 선언을 하는데, 미국의 핵정책의 일환으로서 이루어진 거다. 그러니 북한 측도 그러한 기류를 이용해서 판단을 했다고 이야기할 수밖에 없다. 

- 결국 장관님 말씀하신대로 12월31일 전격적으로 한반도비핵화공동선언이 이루어지고, 이어서 1992년 2월에 6차 고위급회담에서 발효하게 됐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북한이 NPT에 가입하고도 거의 6년 가까이 미뤄왔던 IAEA 핵안전조치를 1992년 1월에 조인하고 IAEA 핵 사찰을 받아들이겠다고 이야기했다. 그래서 결국 실무회담 끝에 1992년 3월19일 첫 번째 핵통제공동위원회가 발족하게 되고, 이때 5월 중에 동시사찰 규정을 마련하고 6월에 사찰을 실시한다는 합의가 있었던 걸로 알려지고 있다. 우선 전반적으로 핵통제공동위원회에 대한 대한민국의 입장은 어떤 것인가. 
▲ 우리는 정말 핵통제위원호의 상호사찰을 통해서 북한의 핵무기화를 저지할 수 있다고 생각했고 또 핵통제위원회에 임했던 저 스스로도 상당히 진지하게 그렇게 생각하고 교섭에 임했다. 그런데 아시다시피 소위 말하면 북한의 무대 속에서 우리는 헛춤만 춘 결과가 됐다. 핵통제위원회 제1차 회의를 할 때부터 이 길이 대단히 어렵다는 느낌은 받았다. 왜냐하면 우리는 정직하게 믿고 사찰 규정을 내놓았는데, 북한은 한반도 비핵화 이행을 위한 합의서를 꺼내놓았다. 우리는 사찰 방법을 논의하자는 방법론을 꺼내들었고, 원칙부터 이행 합의서가 협의되면 거기서부터 사찰 방법을 논할 수가 있다는 이야기로 제1차 회의부터 합의점을 못 찾고 있었다. 그리고 그러한 패턴이 계속 됐다. 

비핵화선언을 하고 핵통제위원회를 만들어서 근 1년 동안 핵통제 활동을 했던 북한의 저의가 무엇이라 생각 하냐는 질문을 하셨는데, 전체적인 흐름을 이렇게 한번 생각해볼 수 있다. 우선 미·소 대립 과정이 있었고, 미국이 북한의 핵활동 상황에 대해 위성을 통해 탐지하는 상황이었으며, 소련의 요구에 따라 북한이 결국 1985년 12월에 NPT에 가입했다는 게 당시 우리가 알고 있는 지식이다. 그래서 NPT 가입을 하게 되면 제3조 4항에 따라 의무조항으로 IAEA 안전조치를 하게 되겠지만, 북한은 그 체결 자체를 거부해왔다. 1985년에 들어가서도 북한 측이 계속 거부하니까, 1989년 IAEA 이사회에서 북한의 핵안전협정이 이루어지지 않는 데 대한 논쟁이 일어나게 됐다. 

그리고 그 시점에 프랑스에서 위성 영상으로, 영변에 5메가와트 원자로가 활동을 했고 또 50메가와트 원자로가 건설 중이라는 것을 보여주었다. 그리고 그해에 영변 강가에서 원자탄을 개발해서, 원자탄에 필요한 기폭장치가 나오기도 했다. 그런 상황을 볼 때 결국은 북한에게 있어 구원국가인 소련의 강력한 압력이 작용했다는 건데, 결국 북한은 마지못해서 1992년 1월에 핵안전조치에 서명을 했다. 

그런 과정을 볼 때, 북한이 국제적인 압력 때문에 끌려와서 핵통제위원회라고 하는 테두리 속에서 남북 대화를 하게 되겠지만, 북한의 본심은 어디까지나 포기하지 않으려 했던 게 아니냐. 13차의 회의 기록을 되돌아볼 때, 남한에서 미군 핵이 철수됐다는 사실은 1991년 부시 대통령의 성명으로도 분명하고, 또 노태우 대통령의 성명도 있었다. 그럼에도 북한 측은 직접 보고 확인하기 이전에는 믿지 못하겠다며 핵과 관련하여 남한에 주둔한 미군 기지를 사찰해야겠다고 했다. 우리도 상호주의 입장에서 북한의 핵 기지 사찰을 해야 할지 생각하고 있는데 절대 할 수 없는, 들어본 적도 없는 원칙을 들이민 거다. 이런 경위를 볼 때 우리가 허송세월한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을 했다.

- 우리는 북한의 핵 의심을 풀고 비핵화를 확인해나가기 위한 방법으로 굉장히 정교한 동시 사찰체제로 상호사찰을 제의한 반면에 북한은 이행합의서를 들면서 비핵화공동선언을 이행하기 위한 조항마다의 합의가 또다시 필요하다고 했다. 그래서 이행합의서 다음에 모든 군사기지를 사찰 대상으로 하겠다고 하고서는 자신의 기지는 보여주지 않는 행동을 봤을 때, 북한의 생각이 결국 우리가 원하는 내용은 아니었다고 생각된다. 그래서 결국 남북이 상당히 많은 마찰을 빚으면서 여러 차례 회의를 했다. 그 과정에서 특별히 생각나시는 사안들이 있었나. 
▲ 몇 가지 짚고 넘어가고 싶은 게 있다. 6차 공동위원회에서 북한이 팀스피릿을 들고 나온다. 팀스피릿으로 핵전쟁 연습을 하는 마당에 어떻게 사찰 문제를 논의하겠느냐 하며 이야기를 했다. 그런데 우리가 분명히 1992년 한미안보협의회의 성명에서 밝힌 바와 같이 사찰 규정에 대한 의미 있는 진전이 없으면 팀스피릿을 준비하지 않을 수 없다는 내용이 공동성명에 나온다. 우리가 공동성명 제9장을 인용하면서 빨리 사찰 규정을 만들어서 상호사찰을 하면 되는 거였다. 우리가 팀스피릿 재개 문제를 고려 할 수 있다는 이야기를 공동위원회에서 하게 되고, 동시에 그해 9월에는 8차 남북 고위급회담이 평양에서 있었다.

그 다음에 9차 남북 고위급회담은 12월에 서울에서 열릴 예정이었다. 그런데 9차 공동위원회 때쯤, 북한이 팀스피릿을 하게 되면 남북 간 모든 접촉을 끊겠다고 했다. 그리고 그 이후부터 사찰 문제는 논의도 못하고 팀스피릿 문제로 9~13차까지 옥신각신하게 됐다. 그런 면에서 북한이 팀스피릿을 구실로 잡아서, 핵 사찰 등 문제로는 싸워볼 수 있겠다는 생각을 한 것이 너무나 뚜렷했다. 우리는 정직하게 상호사찰이 이루어진다면 팀스피릿 재개 관련 논의를 검토할 수 있다고 이야기를 했고, 더욱이 제9차 남북 고위급회담이 예정돼 있던 12월 이전에 상호사찰을 실시하기 위해서 서둘러서 협의하자고 했다. 북쪽은 완강하게 먼저 팀스피릿을 재개하지 않겠다는 합의가 이루어져야 하며, 그러기 전까지 남북 간에 모든 접촉을 일절 끊겠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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