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주대첩 영웅 '강감찬 장군' 생가터

강감찬 집터에 있는 강감찬장군 유허비 [사진=박종평 기자]
강감찬 집터에 있는 강감찬장군 유허비 [사진=박종평 기자]
강감찬 사당인 안국사의 안국문 [사진=박종평 기자]
강감찬 사당인 안국사의 안국문 [사진=박종평 기자]

[일요서울] 최근 서울에 대한 관심이 다시 시작되고 있다. 그럼에도 누구도 부정할 수 없고 공감하는 사실은 서울이 한반도 역사 중심이었다는 점이다. 수도 서울의 역사를 보면, 백제가 처음 서울에 수도를 둔 이후, 대략 천 년이 지난 고려 문종 21년(1067년)에 고려의 사경(四京, 개성․평양․경주․서울) 중의 하나인 남경(南京)으로 승격되었다. 고려 말 우왕과 공양왕 때 잠시 수도가 되었다가, 조선시대에 들어서는 500년 수도가 되었고, 지금의 우리 대한민국의 수도이기도 하다. 그런 서울은 세계 역사에서도 드문 경우이다. 2천 년 역사의 서울을 일요서울이 찾아간다.

인간으로 환생한 큰 별, 강감찬

지하철 2호선은 서울을 한 바퀴 도는 순환선이다. 그중 한 역의 이름은 특별하다. ‘별이 떨어진 터(落星垈, 낙성대)’란 뜻이 담긴 낙성대역이다. 지금 서울 밤하늘에서는 별똥을 쉽게 볼 수 없지만, 별똥은 지금도 매 순간 떨어지고 있다. 낙성대의 성(星)을 별똥이라고 본다면, 그리 특별할 수 없다. 그러나 낙성대가 말하는 별은 별똥이 아니라 별 그 자체이다. 『고려사열전』․「강감찬」에 따르면, 어느 관리가 밤에 오늘날 낙성대 지역에 들어가는 중에 큰 별(大星)이 어느 집에 떨어지는 것을 보고 찾아갔더니 사내아이가 태어났는데, 그가 바로 강감찬(948~1031)이었다고 한다. 큰 별이 떨어져 위대한 인물로 변한 것이다. 별이 떨어진 곳, 즉 강감찬이 태어난 곳을 낙성대라고 후대 사람들이 부르면서 낙성대와 낙성대역이란 명칭이 생겼다.

그 큰 별은 어떤 별이었을까?『고려사절요』에 따르면, 송나라 사신이 고려에 왔다가 강감찬을 보고는 절을 하면서, “문곡성(文曲星)을 보지 못한 지 오래되었는데, 지금 이곳에 있었구나”라고 했다고 한다. 인간이 된 큰 별, 강감찬이 바로 문곡성이라는 의미이다. 문곡성은 북두칠성 중의 네 번째에 위치한 별이다. 북두칠성을 국자 모양이라고 할 때, 국을 풀 수 있는 움푹 들어간 부분이 시작되는 곳에 위치한 별이다. 중국의 『유기백과(維基百科)』에 따르면, 중국의 신화와 전설에서 문곡성은 학문과 시험을 담당하는 별이며, 문장에 능하고 조정의 고위 관료인 사람을 지칭한다고 한다.

강감찬 장군과 함께 자랐다는 강감찬 향나무 [사진=박종평 기자]
강감찬 장군과 함께 자랐다는 강감찬 향나무 [사진=박종평 기자]

대비되는 고려와 송나라의 문곡성

강감찬보다 200년 뒤의 인물로 중국 송나라 때 몽골군의 침략에 저항하다가 처형당한 문천상(1236~1283)도 문곡성으로 불린다. 강감찬과 문천상은 비슷한 면이 많다. 둘 다 문장에 능했다. 강감찬이 고려 때 첫 복시(覆試)에 장원 급제했다면, 문천상은 진사 시험에서 장원을 했다. 그들은 각각의 조정에서 고위 관료로 활약했고, 문신이었으나 강감찬은 거란, 문천상은 몽골과 싸웠다. 그러나 둘 사이에는 결정적 차이가 있다.

강감찬은 승리해 나라를 구했고, 문천상은 패배했고 나라도 망했다. 강감찬이 거란을 물리친 귀주대첩은 고구려 을지문덕의 살수대첩, 조선 이순신의 한산대첩과 함께 흔히 우리 역사의 3대 대첩으로 평가받는다. 문신 강감찬의 승리가 얼마나 위대한 것인지 또 강감찬과 송나라 문천상과의 차이가 무엇인지 보여주는 부분이다. 이 때문에 문신이나 명장이었던 강감찬을 문곡성으로만 평가하기에는 부족하다.

문신 강감찬의 병법에 대한 기록을 『고려사열전』․「강감찬」에서 살펴보면, 크게 두 가지로 볼 수 있다. 첫째는 1010년 거란이 처음 쳐들어왔을 때, 항복하자는 거의 대부분의 신하 주장과 달리 “(거란군에 대해) 중과부적(衆寡不敵)이니, 마땅히 그들의 예봉을 피했다가 천천히 회복할 방법을 도모하자”며 고려 현종의 피난을 홀로 주장한 것이다. 이는 절대다수의 항복론과 유일한 피난론의 대립이었다.

현종은 강감찬의 피난론에 손을 들었고, 피난하며 후일을 도모했다. 우리 역사에는 외세의 침입이 있을 때, 임금이 피난을 했다고 비난하는 일이 많다. 그러나 항복론에 비한다면, 피난론은 비겁한 것도 굴욕적인 것도 아니다. 피난은 국가의 자존심을 지키고, 종묘사직을 지키는 방안으로 적극적으로 볼 수 있다. 현종도 훗날 “강감찬의 전략을 쓰지 않았다면, 온 나라가 오랑캐의 옷을 입었을 것”이라고 칭찬했다. 강감찬의 첫 번째 전략은 항복하여 굴욕을 당하지 않고, 힘을 키워 승리하는 방법이다. 오늘날의 민주국가와 다른 절대왕정시대의 역사적 편린의 모습이다. 오늘의 잣대로 재단할 일은 아닌 듯하다.

둘째는 귀주대첩에서 보이는 다양한 실제 병법을 활용한 전략전술이다. 강감찬은 거란이 침략당했을 때 상원수(上元帥)에 임명되었고, 함께 임명된 부원수 강민첨, 판관 박종검과 류찬과 함께 군사 20만 8천3백 명을 이끌고 참전했다. 그는 군대를 매복시키기도 했으며, 소가죽을 꿰어 강을 막아 수공(水攻)을 하기도 했으며, 기습 전략을 펼치기도 했고, 마지막으로는 사기가 꺾인 거란군을 거세게 밀어붙여 대승리를 거두었다. 귀주대첩에 놀란 거란 성종은 거란 총사령관인 소손녕을 책망하면서 “네가 적을 가벼이 여겨 깊이 침입해(輕敵侵入) 이렇게까지 되었다”라고 패전 원인을 지적했다. 거란 성종의 이야기에는 강감찬의 전략전술의 다른 중요한 것을 지적하는 것이다. 이는 강감찬이 의도적으로 거란군으로 하여금 고려군을 얕보게 만들었다는 것이다.

안국사에 있는 삼층석탑 [사진=박종평 기자]
안국사에 있는 삼층석탑 [사진=박종평 기자]
삼층석탑에 새겨진 낙성대 강감찬 글씨 부분 [사진=박종평 기자]
삼층석탑에 새겨진 낙성대 강감찬 글씨 부분 [사진=박종평 기자]

역사를 들어 올린 작은 키의 볼품 없는 인물

귀주대첩의 영웅 강감찬, 별이 떨어져 인간 강감찬으로 태어난 곳은 오늘날 ‘강감찬 생가터’로 지정되어 있다. 낙성대역 1,2,3,4번 출구에서 나와 인헌초등학교를 지나 작은 골목길로 들어가면 나온다. 거리는 대략 300m, 도보로 10분 거리이다. 인헌초등학교의 ‘인헌’은 강감찬의 시호(諡號)를 활용한 이름이다. 생가터에서 다시 관악구민종합체육센터를 지나 조금만 가면 낙성대공원이 나온다. 약 400m, 도보 10분이다. 낙성대공원에는 강감찬의 사당인 안국사, 강감찬의 생가터에서 옮겨온 ‘삼층석탑’이 있다. 석탑에는 ‘落星垈 姜邯贊(낙성대 강감찬)’이라는 글이 새겨져 있다. 안국사에는 강감찬의 초상화가 있다. 강감찬의 외모에 대해서는 『고려사절요』에는 다음과 같이 나온다. “성품은 맑고 검소했으나 먹고사는 일을 꾀하지 않았다. 젊을 때는 배우기를 좋아했고 기이한 책략이 많았다. 체격과 외모는 작고 볼품없었으며, 옷은 때가 묻고 헐어서 보통 사람에도 미치지 못했으나, 얼굴빛을 바르게 하고 조정에 섰고 큰일을 대할 때면 큰 계책을 결정해 부지런히 움직여 나라의 기둥과 주춧돌이 되었다(性淸儉 不營產業 少好學 多奇略 體貌矮陋 衣裳垢弊 不踰中人 正色立朝 臨大事 決大策 矻然爲邦家柱石)”고 나온다. 초상화가 진짜 강감찬의 모습을 그렸는지는 상상해 볼 일이다. 서울에 우리 역사의 3대 대첩의 기운을 느끼고 싶다면, 언제든 낙성대에서 강감찬을 만나면 된다. 

강감찬 생가터 주소 관악구 봉천동 218-9.
낙성대공원 주소 관악구 봉천동 산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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