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AEA [뉴시스]
IAEA [뉴시스]

 

[일요서울] 국립외교원 외교사연구센터에서 ‘외교’라는 렌즈를 통해 우리 현대사를 조명하기 위해 오럴히스토리사업 ‘한국 외교와 외교관’ 도서 출판을 진행해 왔다. 지금까지 총 17권의 책이 발간됐다. 일요서울은 그중 공로명 전 외교부장관의 이야기가 담긴 책의 내용 중 일부를 지면으로 옮겼다.

“북한, IAEA 특별사찰 회피 위해 일방적 탈퇴”

“문민정부, 남북관계 심각히 우려”

- 도널드 그레그 대사는 최근 『아사히신문』과 인터뷰에서 한·미가 팀스피릿 훈련을 재개하는 바람에 북한이 사찰을 수용하지 않고 NPT를 탈퇴했다고 주장했다. 딕 체니 당시 미국 국방부장관이 팀스피릿 재개를 결정하게 됨으로써 남북 협상과 북한의 NPT 협상이 결렬되고, 결국 NPT 탈퇴를 초래했다는 것이었다. 그 점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나.
▲ 나도 그 기사를 봤다. 그 기사를 보고 참 황당했다. 도널드 그레그는 주한대사를 지내고, 또 조지 부시 1세 대통령의 안보보좌관을 지냈다. 그런 사람이 견강부회한 발언을 한 거다. SCM에서도 남북 간의 사찰에 관한 합의가 의미 있는 진전이 없으면 준비하지 않을 수가 없다는 경고를 했는데도 말이다. 

- 기본적으로 SCM에서 팀스피릿 훈련을 유보할 때도 조건부가 아니었나.
▲ 1992년 이야기에서도 남북 간의 관계에 의미 있는 진전이 없으면 다시 재개한다는 전제조건이 붙어 있었다. 성명 속에서도 밝힌 내용이고. 그런데 그 관계는 빠지고 네오콘이라고 이야기를 했다. 조지 부시 주니어 대통령 당시에 네오콘 보수주의자 가운데 강경론자들이 대화를 거부하고 결국은 팀스피릿을 재개했기 때문에 남북 간에 긴장이 다시 왔다는 이야기는, 괜한 견강부회라고 생각을 한다. 

- 그런 것도 있지만, 당시에 IAEA가 1992년 6월부터 북한에 대한 임시사찰을 실시하면서 6차례에 걸친 사찰이 있었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그런데 두 번째 사찰 때부터는 북한이 제공한 보고서와 내용과 실제 사찰 결과가 크게 불일치했고 그 때문에 점점 IAEA와 북한 사이에 갈등하게 되는 상황이 벌어졌다. 특히 가을부터 더욱 심해지는 양상이었다고 본다. 그래서 결국 IAEA가 북한에 대한 특별사찰을 요구하면서 결국 북한 측에서는 자신의 핵 히스토리가 탄로 날 수 있다는 위기감에 탈퇴하게 되었다고 보는 게 정석일 듯하다. 
▲ 나도 전적으로 그렇게 본다. 당시 IAEA의 사찰은 일반 사찰이다. 그런데 사찰을 하다 보니까, 북한이 보고한 플루토늄 추출 양보다 훨씬 많은 양이 추출되었으리라는 흔적을 발견해서 확신을 했다. 그래서 이 내용을 한스 블릭스 사무총장이 이야기하며 IAEA 이사진에도 보고가 되었고, IAEA 이사회가 특별사찰을 결의했다. 그렇게 북한에 특별사찰을 요구하니까 북한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을 도리가 없었다. 그래서 북한이 남북 간의 핵통제위원회에서는 팀스피릿을 구실 삼았지만, 실은 IAEA 특별사찰을 회피하기 위해서 3월에 일방적으로 탈퇴한 것이라고 생각을 했다. 11월에 열렸던 10차 핵통제위원회에서 IAEA 사찰로 북한의 핵 개발 계획이 없다는 것이 증명됐으니, 이제는 남한에 있는 미군의 핵 관련 시설을 사찰해야 한다고 적반하장으로 주장했다. 지나고 나서 볼 때, 북한은 자기들이 정한 목표를 향해서 하나하나 바둑을 두며 간 거였다. 마치 뒤통수 맞은 것 같은 느낌이 있다. 

- 11차례 걸친 공동위원회가 있었고 또 실무 접촉과 위원장 접촉도 있었으며, 22차례 정도의 회의가 있었다. 당시에 저도 판문점 회의에 들어갔는데, 북한이 하는 회의가 협상은 아니었다는 생각이 든다. 당시 북한은 모두발언에서 한국전쟁의 책임부터 미제의 역사 등등을 40분가량 이야기했다. 그 내용을 1시간 정도 듣고 마지막 1시간 정도를 입씨름하다 끝나는 회의가 아니었나 생각이 드는데, 혹시 그 과정에서 생각나는 일들이 있나.
▲ “당신들은 어떻게 준비를 하우?” 하고 커피 마시면서 물어보니, 그 전날 밤 개성에 내려와서 모의훈련을 한다는 거 아닌가? 시뮬레이션을 하고 회의장에 나온다는데, 회의장에 나와서 보면 써놓은 원고를 읽어갔다. 그리고 말 한마디 한마디를 평양에 검토했다. 2월25일 우리 정부교체가 있었고 새로운 문민정부가 들어섰다. 남북관계에 대해서 새로운 정부에서는 대단히 심각히 우려했고, 그래서 특히 동맹국·우방국과의 협의가 필요하다고 여겼다. 북한이 NPT에서 탈퇴하는 것을 어떻게 해서든지 막으려는 생각이 그때는 많았다. 그래서 한·미·일 협의가 필요하다는 상황이다. 제가 외교안보연구원 원장으로 있으면서 핵통제위원회도 겸임했기 때문에, 그러한 경위에 따라서 3월에 미국으로 갔다. 

- 장관께선 핵통제공동위원회 위원장도 했지만 사실 남북 고위급회담 대표이기도 했다. 이 기간 중에 고위급회담 대표로서 어떤 인상적인 일이 있었나? 
▲ 생전의 김일성을 만난 일이다. 1992년 2월에 제6차 남북고위급회담은 제5차에서 합의된 기본합의서 및 남북 비핵화공동선언 문선에 대한 비준을 교환하는 의미가 있었는데, 그때 정원식 총리가 수석 대표였다. 오찬에서 김일성이 나의 맞은편 테이블 세 번째쯤에 앉아 있었다. 거의 바로 볼 수 있는 거리에 있었다. 

그때 인상적인 이야기가 있다. 남한에는 자동차가 많다는 이야기였다. 그랬더니 김일성이 자기는 평양에 차를 많이 들여놓지 않는 것이 방침이라고 했다. 일본에 있는 친구 이야기가 도쿄 사람들은 폐가 좋지 않다. 그래서 자기는 평야에 자동차가 많이 다니지 못하도록 제한하고 있다고 했다. 그리고 또 다른 한 가지는 그때 식탁에 회가 나왔다. 머리가 큰 쏘가리회라고 김일성이 자랑을 하면서 이 요리를 내놓으면 일본에 있는 친구가 한 접시 다 먹고 또 먹는다는 이야기를 했다. 식사 후 사진을 찍었다. 오찬 과정에서 우리가 김정일을 만날 수 있냐고 물었더니, 사업이 바빠서 얼굴을 잘 못 본다는 이야기를 했다. 

그리고 고위급회담을 위해서 2월에 개성에서 기차를 타고 가는데, 정거장에 보니까 개성에서 평양까지 160 몇 킬로미터라고 아주 크게 써 붙였다. 그런데 우리에게 준 시간표를 보면 근 4시간쯤 걸린다고 되어 있었다. 그때는 아직 KTX가 없었지만, 우리 기차들이 시속 70~80킬로미터는 달릴 때였다. 그래서 160킬로미터를 2시간 이상 갈 이유가 없는데 왜 4시간이나 걸리는지 수행하던 안기부 직원에게 물었더니, 신물이 올라와서 고속으로는 못 달린다고 했다. 당시가 2월인데 가면서 길에 자동차가 얼마나 있는지 유심히 봤다.

그때 이미 소련이 베를린 장벽이 무너진 후에 하드 커런시(주조 화폐)가 있다 해서, 달러화 아니면 사기가 어려웠다. 또 무역이 적자가 되니까, 외화가 부족한 북한으로서는 굉장히 어려운 관계에 놓였으리라는 생각을 했다. 그래서 자동차를 보려고 했는데 네 시간 가까이 걸려 평양에 가는 동안에 국도1호 선상에서 자동차를 6~7대밖에 못 봤다. 그중에 승용차가 4대고 나머지는 트럭인데 물동양이 도로 위에 거의 없었다. 레일을 달리다가 분명히 철교 위를 가는 소리가 나는데, 밖을 내다보면 강이 아니었다. 그래서 수행하는 안기부 직원에게 이유를 물어봤더니, 장마에 모래들이 쓸려서 조그마한 레일은 하상이 덮였다고 했다. 그러니까 정말 강 위의 철교를 지나는 건 대동강이나 그전에 한두 개 정도였다. 

부단히 작은 철요를 타고 가면서 먼 산을 보니 나무가 없이 밋밋했다. 우리의 산은 겨울에 잎이 떨어져도 빗살처럼 나무줄기가 있잖나. 주체농업으로 웬만한 산들은 다 밭으로 만들었는데, 그것들이 장마에 다 쓸려서 그렇게 된 상황이었다. 북한 안내원에게 연료 사정을 물어봤더니 석탄을 쓴다고 했다. 석탄을 쓴다면 물동량이 눈에 보여야 할 텐데, 밤중에 철도 수송을 하는지 모르지만 거의 없었다. 그러니까 결국은 관목을 떼어 쓴 것이다. 그게 제1차 고위급 회담 때였다. 

그리고 두 번째로는 9월에 평야에 갔다. 1차 때는 우리가 북한이 보여주겠다는 것을 일체 안 봤지만, 2차 때는 보겠다고 했다. 그랬더니 운동장에서 마스게임을 보여줬다. 마스게임을 끝내고 아이들이 우리가 있는 단상 밑으로 지나서 들어갔다. 자세히 보니까 몸은 초등학생들 같기도 한데 얼굴은 중등 아니면 고등학생 같았다. 그래서 남북 간에 청소년 체위가 엄청난 차이가 있다고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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