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 최초 백과사전 저술자 이수광

비우당 전면 [사진=박종평 기자]
비우당 전면 [사진=박종평 기자]
지봉집 표지(고려대 해외한국학자료센터, 미국 버클리대 동아시아도서관 소장), 지봉집 중 비우당기 (고려대 해외한국학자료센터, 미국 버클리대 동아시아도서관 소장)
지봉집 표지(고려대 해외한국학자료센터, 미국 버클리대 동아시아도서관 소장), 지봉집 중 비우당기 (고려대 해외한국학자료센터, 미국 버클리대 동아시아도서관 소장)
지봉유설 표지(고려대 해외한국학자료센터, 미국 버클리대학교 동아시아도서관 소장본), 지봉유설 영국(영길리국) 천주실의 부분 표시 (한국학중앙연구원, 미국 버클리대학교 동아시아도서관 소장본)
지봉유설 표지(고려대 해외한국학자료센터, 미국 버클리대학교 동아시아도서관 소장본), 지봉유설 영국(영길리국) 천주실의 부분 표시 (고려대 해외한국학자료센터, 미국 버클리대학교 동아시아도서관 소장본)

[일요서울ㅣ박종평 객원기자] 동대문에서 시작하는 한양도성길이 있다. 낙산성곽길이다. 낙산에서 성곽길을 우측으로 벗어나 가다 보면 비우당, 원각사, 동망봉, 청룡사, 동망정, 동묘역 벼룩시장, 청계천까지 타원형을 그리며 약 4km 구간을 걸을 수 있다. 타임머신을 탄 느낌이 드는 곳들이다. 그 길에는 우리나라 역사상 최초의 백과사전인 『지봉유설』을 쓴 이수광(李睟光, 1563~1628)과 조선 초기의 청백리 유관(柳寬, 1346~1433), 숙부 세조에 의해 죽임을 강요당한 단종과 그의 왕비 정순왕후(定順王后, 1440~1521), 현대인들에게 가장 많이 사랑받고 그림값이 가장 비싼 화가인 박수근(1914~1965)의 숨결이 살아 있다.

낙산에 오르다 돌아보면 서울 시내가 한 눈에 들어온다. 근경은 콘크리트 덩어리들로 숨이 턱턱 막힌다. 성벽 동쪽 바로 아래는 창신동 절벽을 중심으로 산 정상까지 주택 밀림이 있다. 다른 쪽도 마찬가지다. 서울이 얼마나 집중된 도시이고, 치열한 경쟁의 공간인지 보여준다. 그럼에도 조금만 눈을 들어 멀리 보면 또 다르다. 동쪽 지평선 끝 롯데타워, 가까운 서쪽 인왕산, 남쪽 하늘 아래 남산타워, 북쪽 장벽 북한산과 도봉산이 답답한 숨통을 풀어준다. 원경을 배경삼아 그 길을 걷는 것 자체가 고단한 일상을 벗어나 자연과 역사와 대화하는 방법이기도 하다.

성곽길 옆 쇳대박물관 [사진=박종평 기자]
성곽길 옆 쇳대박물관 [사진=박종평 기자]
비우당 뒷편 자지동천 글씨와 자지동천 및 새마을 표시 [사진=박종평 기자]
비우당 뒷편 자지동천 글씨와 자지동천 및 새마을 표시 [사진=박종평 기자]

천하의 근심을 덜어주는 우산의 꿈

동대문에서 약 800미터 쯤 올라가면 성벽 옆에 쇳대박물관이 있다. 다시 몇 분을 가다 보면 종로구와 성북구의 경계지점인 낙산삼거리가 나온다. 동쪽 낙산길을 택해 몇 분을 더 가면 산 정상을 비스듬히 걸친 창신쌍용2단지아파트가 보인다. 아파트 정문과 버스정류장 사이 아래쪽으로 난 아주 작은 샛길이 있다. 그 끝에 조선 실학의 선구자인 이수광의 집을 복원한 비우당(庇雨堂, 가릴 비, 비 우, 집 당)이 있다. 비우당은 “비를 겨우 피할 수 있는 초라한 집”을 뜻한다.
 그가 비우당을 지은 이유는 그의 외가 5대 선조로 세종 때 청백리였던 유관의 청렴정신과 가난한 백성과 공감하는 선비정신을 본받기 위함이었다. 유관이 살았던 옛터에 그의 아버지가 집을 지었고, 임진왜란으로 파

괴된 뒤에 그가 다시 비우당을 세웠다. 그의 「비우당 병서(庇雨堂 幷序)」에 따르면, 좌의정 유관은 초가집을 지어 살았는데, 비가 오면 비가 새서 방 안에서 우산을 펴고 비를 피해야 했다고 한다. 권력과 부를 탐하기보다 백성의 삶과 함께했던 청백리의 결과였다.
 그는 유관의 정신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간다. “청백리 정신이 가문에 전해져 내게도 이르렀다. 어떻게 천만 리를 에워쌀 수 있는 우산을 얻어 천하를 다 가리어 젖지 않게 할 수 있을까”라며 세상 구제를 고심했다. 유관의 자세를 기본으로 하되 자연의 빗방울을 막는 수준이 아니라, 천하의 근심걱정을 덜어주는 큰 우산이 되고 싶은 마음이 실린 곳이 비우당이다.

한양도성길에서 본 성곽과 동대문 [사진=박종평 기자]
한양도성길에서 본 성곽과 동대문 [사진=박종평 기자]
성곽길에서 만난 흰고양이 [사진=박종평 기자]
성곽길에서 만난 흰고양이 [사진=박종평 기자]

비우당은 제 위치에 복원되었는가

현재 위치 비우당은 복원 당시에는 어떤 근거가 있었던 듯하다. 비우당 곁에 있는 원각사 대각 스님에 따르면, 아파트가 생기기 10년 전쯤인 1980년대 초에 현재의 낙산어린이공원 맞은편 쌍용아파트 지역에서 “자연석으로 된 ‘비우당 옛터’라는 표석이 있었는데 아파트 건설과정에서 없어졌다”고 증언하기 때문이다.

집 주인 이수광이 직접 쓴 유래기인 「동원비우당기(東園庇雨堂記)」에는 다음과 같이 나온다.

“내가 사는 곳은 흥인문(興仁門, 동대문) 밖, 낙봉(駱峯, 낙산) 동쪽에 있다. ‘상산(商山)’이라는 산이 있고,  산의 한 기슭이 길게 구부러져 남쪽으로 이어져 있어 공손히 읍(揖, 인사하는 예법의 하나) 하는 모습으로 ‘지봉(芝峯)’이라고 한다. 봉우리 위에는 너럭바위가 있어 수십 명이 앉을 수 있다. 또한 나무 가지가 햇빛가리개처럼 펼쳐진 모습의 큰 소나무 10여 그루가 있다. 서봉정(棲鳳亭)이라고 한다. 그 아래의 땅은 더욱 평평하고 넓고 에워싼 것이 백여 묘(畝, 1묘는 259.46㎡)로 이를 나누어 밭을 만들고 ‘동원(東園)’이라고 했다. 깊숙하게 있으나 평평하고 넓어서 숨어 살기 좋은 곳이다.”

비우당은 낙산 동쪽에 있는 상산이라는 산과 지봉 사이의 공간에 있었다. 그런데 상산이나 지봉은 문헌에 거의 나오지 않는다. 그 때문에 실제 지명으로는 보기 어렵다. 「동원비우당기」 중 “밭을 만들고 ‘동원’이라고 했다”라는 부분과 연관해 보면 상산과 지봉, 서봉정 모두 전래된 지명이 아니라, 그가 스스로 지어 부른 명칭으로 추정할 수 있다.

게다가 유심히 살펴보면, 상산의 ‘상(商)’, 그의 호로 사용되기도 한 ‘지봉(芝峯)’과 ‘동원(東園)’에는 일반적이지 않은 공통점이 있다. 그가 비우당 인근의 8가지 풍경을 읊은 「비우당팔영(庇雨堂八詠)」 중 「뒷밭에서 영지버섯을 캐다(後圃採芝)」에 그 실마리가 있다.

“이슬에 젖은 이른 아침 봄밭(露濕春園早)에는 영지버섯(芝) 솟아나 향기가 품에 가득하네(芝生香滿抱) 밥으로 먹으니 몸도 가벼워져(餐來骨欲輕) 상산(商山) 노인과 닮지 않았는가(何似商山老).”

‘지(芝)’의 뜻은 첫째는 자지(紫芝) 혹은 지초(芝草)로도 불리는 다년생 풀에 속한 버섯으로 중국에서 불로초로 여겨지는 자줏빛 영지버섯이다. 둘째는 지초(芝草) 혹은 자초(紫草)라고도 하는 지치과에 속하는 다년생 풀이다. 자주색 뿌리는 천연염료 또는 약재로 사용되고, 진도 홍주의 원료이기도 하다. ‘상산 노인’과의 연관성에서 볼 때, ‘지(芝)’는 염료로 활용되는 다년생 식물이 아니라 자지(영지버섯)이다. 일부 책에서는 상산(商山)을 ‘적산(啇山)’이라고 기술하고 있으나, 이는 원문을 확인하지 않은 결과들이다.

상산 노인은 중국 진(秦)나라 말기의 폭정과 혼란을 피해 섬서성 상산에 은둔했던 네 사람 즉 동원공(東園公), 기리계, 하황공, 녹리선생을 가리킨다. 그들은 산속에서 불노초라는 자지를 캐 먹으며 가난해도 자신의 뜻대로 사는 삶이 더 좋다는 자지가(紫芝歌)를 지어 불렀던 탈속한 인물들이다.

비우당과 관련된 상산, 지봉, 동원은 결국 은둔한 선비들인 상산 노인의 옛이야기를 이용해 이수광이 만든 이름으로 볼 수 있다. 실제 비우당은 어디에 있었을까? 이규태(『이규태의 600년 서울』)와 이경재(『서울정도 육백년』)는 숭인동과 보문동 경계부터 옛날 동덕여학교 뒤 안양암 남쪽 사이에 있다고 보았다. 그런데 『이규태의 600년 서울』에 실린 지도에는 원각사와 청룡사 사이로 산 위쪽 지역에 있다. 이는 어떻든 대각 스님의 주장이나 현재 비우당 위치와는 전혀 다르다. 이수광의 기록으로 추정해 보면, 청룡사 밑 창신역부터 창신초등학교와 숭인근린공원 사이의 공간에 있었던 듯하다.

가톨릭의 하나님과 서유럽 국가들을 최초로 소개한 사람

1613년 사직한 이수광은 1614년 비우당에서 오랫동안 저술해 왔던 우리나라 최초의 백과사전인 『지봉유설』을 탈고했다. 1590년, 1597년, 1611년의 세 차례 중국 방문 시 확보했던 자료와 수십 년 동안 국내에서 확보한 우리나라 자료 총 348종을 바탕으로 3,435항목, 2,265명에 대해 사실을 기록하고 논했다. 가장 눈에 띄는 부분은 그가 우리나라 최초로 동남아의 여러 국가는 물론이고 아라비아, 포르투갈, 네덜란드, 영국, 로마 교황까지도 소개했다는 점이다. 또한 1600년대 초에 우리나라 바다에 나타난 영국의 전함, 1604년에 통영 당포 앞바다에 나타난 포르투갈 상선에 대한 기록도 나온다. 이 배에는 포르투갈인 주앙 멘데스가 타고 있었다. 영국 전함 기록은 현재로서는 『지봉유설』이 유일하다.

중국 중심의 세계관을 가진 시대와 사람들 속에서 홀로 바다 건너 수많은 다른 세계를 이야기했다. 놀라운 것은 마테오 리치(Matteo Ricci)의 『천주실의』가 중국에서 간행된 지 채 10년도 되지 않은 상태에서 입수해 『지봉유설』에 해설을 써넣을 만큼 주목했다는 점이다.

그는 성리학의 세계에 살았으나, 실용적이고 실학을 바탕으로 중국 중심 세계관에 갇히지 않았다. 비를 간신히 가릴 만큼 초라했던 공간에서 지구 전체를 보려는 하늘을 덮을 만큼 큰 인물이었다. 비우당은 온 세계를 알려고 했던 세계로 열린 공간이다. 그가 그런 인품과 저술을 할 수 있었던 이유는 그가 사망하기 1년 전인 1628년 설날에 쓴 스스로를 경계하기 위한 글,「자신잠(自新箴)」에서 확인할 수 있다. 그 중의 지금의 우리에게도 울림을 주는 한 구절을 소개한다. “나와 백성이 이미 새로워졌다면(我民旣新兮) 국운도 새롭게 된다(邦命亦新).”

낙산 주소 종로구 창신동 615-279
쇳대박물관 주소 종로구 이화동 9-84
비우당 주소 종로구 창신동 9-471

저작권자 © 일요서울i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