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근혜 해외순방 결정판

싱가포르를 방문중인 한나라당 박근혜 전 대표가 15일 싱가포르의 국부로 추앙받는 리콴유(李光耀) 전 수상을 접견, 환담하고 있다.

한나라당 박근혜 전 대표가 ‘싱가포르 구상’을 마쳤다. 5월의 ‘오세아니아 3대 구상’에 이은 올해 2번째 해외 구상이었다. 지난 1월 중국방문은 이명박 대통령(MB)의 외교특사 자격이었다.

오세아니아 구상이 MB와 5·10청와대 회동의 결렬과 친박 일괄복당 요구 등 ‘통첩과 침묵의 정치’의 벼랑 끝에 있었다면, 싱가포르 구상은 우호적인 환경이 조성된 가운데 나왔다. 박 전 대표는 싱가포르에서 개헌 논란에 전향적 입장을 보였고, 독도와 금강산 문제에 대해서는 보수층의 목소리를 대변하면서도 MB를 자극하는 발언은 삼갔다. 오세아니아 구상의 첫 번째 원칙이었던 ‘통첩과 침묵의 정치’에서 벗어난 것이다.(박 전 대표의 오세아니아 구상은 본지 734호와 735호 참조)

박 전 대표는 향후 MB와의 관계설정에 대해서도 “우리나라를 위해서 좋은 일이고, 옳은 일인 경우에는 항상 협력한다는 것을 마음에 깊이 새기고 있다"고 거듭 강조했다. MB와 동반자가 아니라 조건부 협력을 통한 민심장악이란 오세아니아 구상의 원칙을 재차 확인한 것이다.

이제 박 전 대표는 오세아니아 구상의 업그레이드 버전인 ‘싱가포르 구상’을 통해 범 보수 세력을 결집시킬 준비를 하고 있다. 이는 진보세력에 대한 여름 대반격의 전주곡이 될 수도 있다.

싱가포르 방문을 마치고 귀국하던 18일 오전 한나라당 박근혜 전 대표는 환하게 웃었다. 친박 일괄복당과 국회개원의 쌍축포가 터지던 지난 10일 국회 본 회장에서의 미소보다 농도가 짙어졌다. 환영 나온 어린 팬클럽 회원에게 사인을 해 주는 여유로움도 찾았다.

박 전 대표가 4박5일간 싱가포르에 머무르는 동안 친박계 의원 19명이 우선 복당하면서 한나라당은 171석의 거대여당이 됐고, 박 대표는 거대야당 안에 막강한 친박군단을 거느리게 됐다.

싱가포르로 떠나기 직전 ‘당직에는 관여 않겠다’는 무언의 선언도 했다. 박 전 대표의 ‘싱가포르 구상’이 부정이 아닌 긍정의 선상에 있음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오세아니아 구상의 부정적 요소 제거

오세아니아 구상의 3대 원칙은 “통첩과 침묵의 정치로 전리품 챙기기, 당권에 대한 집착보다는 국회에서의 캐스팅보트, 그리고 ‘MB의 동반자 대신 조건부 협력으로 민심을 안는 것”이었다.

싱가포르 구상은 이 가운데 부정적 요소가 제거된 듯하다.

한나라당 관계자는 “침묵의 행보나 당권에 대한 집착, 그리고 MB에 대한 지나친 견제와 같은 부정적 요소는 씻고, 국가정체성과 국익과 관련해 보수 세력의 목소리를 대변하면서 대통령과 조건부 협력을 모색할 것”이라고 전망했다.

박근혜 전 대표는 지난 17일 싱가포르에서 일본의 독도 영유권 주장과 관련 "우긴다고 이게 말이 될 수 있느냐. 진실이 바뀔 수 있느냐"고 비판했다.

그는 금강산 관광객 피격 사망 사건 견해를 묻는 질문에도 "시급한 것은 철저한 진상규명"이라며 "북한도 협조"하라고 촉구했다.

그러면서도 정부 책임론에 대해서는 구체적 언급을 피했다.

박 전 대표는 이미 지난달 30일 촛불정국에 대해 “정부의 성급한 고시도 잘못, 과격시위도 잘못”이란 입장을 밝히면서 MB에 대한 ‘미 쇠고기 재협상 압박카드’를 거둔 바 있다.

당내 '친박계'의 좌장인 허태열 최고위원은 이에 대해 "박 전 대표는 집권 전반기만큼은 이명박 대통령께서 국민들께 약속한 것도 많고 하고 싶은 일도 많으실 테니 전적으로 '책임정치'를 해 달라는 생각을 갖고 있다"고 전했다.


당내 계파 초월한 행보 시작

박 전 대표는 친박 일괄복당으로 '친박계 수장의 이미지가 생겼다'는 견해와 관련 "제가 대표 시절에도 계파 정치를 안했던 사람인데 계파가 어디 있느냐"고 적극적으로 일축했다.

또 외유 중 단행된 한나라당 당직 개편에서 'MB계'가 독식했다는 지적에 대해서도 "외국에 나와 국내 얘기는 가능한 하지 않겠다"며 말을 삼갔다.

정치권에서는 박 전 대표의 싱가포르 방문시점을 두고 친박계 의원들의 당직 기용에 관여하지 않겠다는 의지를 보여준 것이란 분석도 나오고 있다.

여권 관계자는 “이미 4·9 총선과 7·3 전당대회를 통해 ‘박근혜의 힘’을 보여줬는데 당에 집착할 필요가 없다”며 “향후 국회에서의 캐스팅 보트 역할을 강화할 것”이라고 전망했다.

즉 당 안팎의 친박 친위대와 이회창 총재의 선진당, 그리고 당내 중도보수 세력을 아우르는 ‘보수 대연대’로 국회를 실질적으로 장악할 수 있다.


당분간 정중동, 견제 강해지면 MB직계와 격돌

당장 개헌문제만 해도 박 전 대표를 중심으로 한 보수연대가 한나라당의 입장을 지원하면 200석에 육박하게 된다.

박 전 대표가 ‘싱가포르 구상’ 중이던 지난 17일 계파를 초월하는 한나라당 연구모임 `국민통합포럼'이 공식 발족한 것은 이러한 관점에서 의미가 있다.

총 83명의 국회의원과 30명의 당협위원장 등 모두 113명이 가입한 포럼에는 친이계와 친박계, 그리고 상대적으로 계파색이 옅은 인물들이 골고루 포진해 있다.

여권 관계자는 “당내 갈등의 전면에 나서지 않고 물밑에서 보수세력과의 연대를 통해 보수층의 여름 대반격의 구심점이 될 수도 있다”면서 “그러나 본격적인 목소리를 내는 시점은 MB정부의 집권 후반기가 될 것”으로 전망했다.

이와 함께 자칫 정국 주도권이 박 전 대표에게로 쏠릴 것을 우려하는 목소리도 나오고 있다. 이재오 전 의원과 친분이 두터운 친이직계 의원 40여명은 지난 15일 ‘함께 내일로’라는 모임을 발족했다.

당 일각에서는 17대 국회의 <국가발전연구회>멤버들이 이 모임을 주도하고 있다는 점에 주목해 이재오계가 '헤쳐모여식' 세결집을 시도하는 게 아니냐는 지적도 제기되고 있다.

구심력이 강한 친박계에 맞대응하기 위한 친이계의 견제 모임이란 것이다.

이들 가운데는 진보적 색채가 강한 의원들도 있어 18대 국회에서 박근혜 전 대표를 중심으로 자연스럽게 형성될 범보수연대와의 격돌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박근혜와 리콴유 ‘세 번의 인연’

‘아사코(朝子)와 나는 세 번 만났다’ <피천득의 ‘인연에서’>

박근혜 전 대표도 리콴유((李光耀, 싱가포르 내각고문, 전 수상)를 세 번 만났다. 30여 년 전 박정희 전 대통령 서거 일주일 전과 2006년 지방선거 괴한 피습 당일, 그리고 지난 15일 싱가포르에서다.

피천득과 아사코의 ‘인연’ 만큼이나 박 전 대표와 리콴유의 ‘인연’도 각별하다.

첫 인연은 1979년 10월 리콴유 당시 싱가포르 수상이 우리나라를 방문했을 때로 박 전 대표는 박정희 전 대통령과의 식사자리 통역을 맡았다. 박 전 대표는 ‘두 분의 대화는 한마디 한마디가 고수들의 대결 같았다’며 그날을 회고했다. 일주일 뒤 박 전 대통령이 서거하자 리콴유 수상은 너무나 애통해하는 조문을 보내왔다.

그리고 27년이 지난 2006년 5월 20일 박 전 대표는 서울에서 리콴유 전 수상 부부를 다시 만났다. 박 전 대표는 “아버지가 살아 계신다면 저런 모습일까하는 생각에 마음이 울컥했다”고 털어놓았다.

이날 리 전 수상의 부인 과격주 여사는 박 전 대표에게 “유세에 목이 제일 중요하다”며 목 보호 사탕을 건넸다. 그날 오후 서울시장 선거 지원 유세를 하던 박 전 대표는 괴한에게 피습을 당한다.

리 전 수상부부는 안타까운 전언과 함께 쾌유를 비는 편지를 보냈다. 박 전 대표는 “부모님의 정을 느끼게 해 준 두 분을 잊지 못할 것”이라며 감사해했다.

그리고 박 전 대표는 지난 15일 리콴유 전 수상을 세 번째 만났다.

박 전 대표는 “한 나라 지도자의 철학과 지도력이 그 나라의 운명을 바꾼다”며 리 전 수상을 추켜세웠다.

박 전 대표는 이날 리콴유 전 수상의 아들인 리센룽(李顯龍)총리와 MB가 국제자문위원으로 위촉한 고촉동(吳作棟) 전 총리도 만났다. 30여년의 세월을 넘나드는 세 번의 아름다운 <인연>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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