孝를 근본으로 공정 세상을 꿈꾸다
억강부약(抑强扶弱)으로 民을 헤아리다
참된 지도자의 길을 향해 정진하다
어머니는 나의 안식처였고, 나의 피난처였다

[일요서울|수원 강의석 기자] 위대한 영웅들은 孝를 근본으로 삼았다. 어머니의 마음을 헤아렸던 미국의 윌슨 대통령은 어머니날을 만들었고, 우리의 정조대왕은 자신의 업적에 孝를 담았다.

덕을 갖춘 위대함은 孝에서 나오며 孝는 인·의·지·예·신으로 자신의 힘을 가진다. 孝는 곧 세상의 힘인 것이다.

孝는 자아의 가치를 높이며, 위대함으로 다가서게 만든다. 우리는 무수한 위인들의 孝의 이야기를 듣고 교훈을 삼는다.

여기 경기도에 孝를 근본 삼고, 기본과 공정 세상을 추구하며 자신의 업적을 향해 끊임없이 정진하는 사람이 있다.

이재명 경기지사, 그는 民을 푯대 삼았으며, 억강부약(抑强扶弱)으로 民을 헤아렸다. 일요서울은 오늘도 民을 향해 온 정성을 다하는 그를 만나 어머니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고, 그의 孝를 담아 봤다.

- 지사님의 유년 시절과 학창 시절, 그리고 청년 시절 등 성장 과정은?

경북 안동 예안면 도촌리라고 하는 봉화 안동의 교차지점인 아주 깊은 산골이 나의 고향이다.

거기서 초등학교까지 다녔는데, 당시 나는 약 4km에서 6km 되는 등하교거리를 걸어서 다녔다.

초등학생 꼬맹이들, 즉 동네 학생들 모두 걸어다녔지만 지금 생각하면 참 대단했던 것 같다.

나는 초등학교를 마치고 성남으로 이사왔다. 내가 가장 안타까웠던 것은 형제 중에서 제일 어린 나이에 공장을 다녀야 했던 현실이다.

동생들은 당시 초등학교를 다녔고, 나부터 그 위 형제자매는 전부 공장을 다녔는데 내 나이가 그때 13살쯤 됐었다.

그 당시 나는 키가 매우 작았고. 나이도 어려서 공장을 다닐 수 없었기에 나이든 동네 형들 이름으로 다녔다.

그러나 어려움을 이기고 검정고시로 중학교, 고등학교를 졸업했고, 대학교에도 입학해 열심히 공부한 결과 변호사가 됐다.

- 정치에 대한 꿈은 언제부터 가졌으며, 발단은 무엇이었나?

정치의 꿈이라고 하면 정치를 어떻게 규정하느냐에 따라서 다를 것 같다.

현실 권력으로서의 정치를 정치라고 한다면 2004년 3월 28일 오후 5시가 정치적 꿈을 가진 발단의 시작점이다. 시간을 이렇게 정확히 특정할 수 있는 이유가 있다.

내가 인권 변호를 하기 위해서 89년에 변호사 개업을 했다. 시국 사건을 변론하기 위해 인권 운동을 하던 그 시점에 사회는 조금 더 민주화가 되었다.

소위 형식적 민주주의라는 게 어느 정도 갖추어진 다음에 실질적 민주주의, 내용상의 민주주의를 확보하기 위한 시민운동이 벌어졌다.

그 시민운동에 나는 94년부터 뛰어들게 되었으며, 그때는 박원순 시장이 서울 참여연대를 만든 시점과 똑같다.

내가 박원순 시장의 시민운동 투신 과정을 보고 똑같이 따라했다. 그 당시에는 노동탄압이나 시국 사건 등이 많이 줄어들 때였고, 소위 법정 투쟁을 할 단계도 벗어났던 시기였다.

나는 시민운동 과정 중 구속됐던 적도 있고, 수배됐던 적도 있다. 그래서 나는 전과자라고 비난 받기도 했다.

하지만 그 과정이 딱 정치라고 단정할 수는 없을 것 같다. 내가 두 번 수배됐던 사건이 있다. 첫 번째는 소위 파크뷰 용도 분양 특혜분양 사건이다.

두 번째는 시민운동의 일환으로 시립의료원 설립 운동이다. 나는 그 운동의 공동대표였다.

시민들이 한겨울에 18만 명 정도 서명하고 발의했던 최초의 주민발의 조례를 시의회에서 47초 만에 날치기로 폐지해 버렸다. 방청했던 사람들은 항의하며, 의원들을 잡기 위해 쫓아다녔다.

그때 특수공무집행 방해로 구속됐었다.

두 번째는 또 구속될 수는 없다는 생각에 2004년, 시청사 앞 교회 지하실 기도실에 숨어 있었다.

2004년 3월 오후 5시에 그 운동을 같이 하던 보건의료노조 간부가 찾아왔다. 둘은 함께 초밥을 먹다가 “이렇게 포기할 수 없다. 우리가 직접 하자”고 의기투합한 후 그때 선거를 준비하기로 결정했다.

그 전에는 정치라는 게 도둑놈이 되는 길이었다. 왜냐하면 공천 받는 데 충성을 서약하고, 공천 헌금을 줘야 하는 등 선거하려면 엄청나게 비용이 들었다.

당선되면 본전 찾아야 하고, 다음 선거 준비하기 위해서는 부정해야 했다. 떨어지면 완전 거지 되는 상황이 벌어졌었다.

그런데 그것이 바뀌었다. 노무현 대통령의 정치개혁 성과이다. 비용도 일정 득표 이상하면 다 돌려주고, 공천도 어디 가서 빌 필요가 없게 되었고, 충성 서약도 안 해도 되며, 돈이 들 필요도 없게 만들어 놓았다.

그래서 나는 무소속 출마를 준비하다가 결국 열린민주당에 입당하게 되었다.

2006년 시장 선거 나와서 떨어졌지만 그것이 나의 정치 생활의 첫 출발이었다. 마침내 2010년, 실제 당선되었고, 이는 곧 현실 정치의 시작을 알렸다.

사회 참여, 크게 보면 정치이다. 사회 참여를 결심하게 된 건 대학 다닐 때다.

과거 나는 산재 사고로 팔과 코의 장애인이 되었다. 또, 공장 소음 때문에 귀까지 이명과 난청이 되어 버렸다. 이렇게 산재로 장애인이 됐는데도 나는 보상을 받아본 일이 없다.

월급 안 줄까 봐 팔을 깁스하고 한쪽 손으로 일하러 다녔던 것이다. 원래 70% 보상해준다는 것을 대학에 가서 알게 되었다.

그래서 그런 어려운 서민들의 삶, 대중들의 고통이라는 게 “개인이 게으르거나 또는 무능해서 생기는 것이 아닌, 매우 구조적인 문제가 있구나”라는 걸 그때 깨닫게 되었다.

그래서 내 과거의 삶도 나 스스로와 부모님만 탓하면서 살았는데, 대학을 다니면서 전혀 다른 세상을 볼 수 있게 되었으며, “세상을 좀 바꿔야 되겠다”라고 결심하게 되었다.

이후 나는 사법시험 공부를 하기 시작했고, 합격하고 난 후에 좀 더 큰 영향력으로 사회운동에 참여하기로 마음먹었다.

사법연수원을 마칠 때쯤 그냥 맨발로 허허벌판에 나가는 게 정말로 두려웠다. 그때 나에게 용기를 주신 분이 바로 노무현 대통령이다.

그분은 이런 저런 얘기도 참 소탈하게 잘 하신다. 강연에서 본인의 변호사의 삶, 그리고 활동 등을 말하면서, 노동 운동의 중요성, 노동인권 변호 활동의 중요성, 이런 것들을 설명하셨다.

그러나 본인은 정작 구속되고, 쫓겨 다니고 이러면서도 “먹고 사는데 아무 지장이 없다”는 것이었다. 그것이 내게는 큰 도움이었다.

2004년 3월28일 오후 5시, 정치 개혁 입법은 나를 정치의 길로 정진하게 만들어 놓았다.

- 어머니에 대한 효심이 지극하다고 들었다. 지사님의 어머니는 어떤 분이셨나?

어젯밤에 꿈에 나타나시어 나를 무척이나 걱정하셨다. 깨어나 많이 울었다.
 
가난과 함께했던 어머니는 거의 우리 7남매 생계를 책임지다시피 했다. 농터도 없고 주로 남의 밭일 같은 것을 하며 살았다.

특히 내가 가슴 아팠던 것은 어머니가 동네 남정네들 상대로 어린 형제들이 같이 자는 안방에서 막걸리를 파셨다.

동네 분들이 와서 안주를 시키면 양미리를 구워 팔기도 하고, 김치, 무를 잘라서 안주로 대접하기도 했다.

가끔씩 라면을 끓여서 안주로 드실 때면 우리에게 그것을 한두 점씩 집어 주셨다. 지금 그때의 라면 맛을 아직도 잊지 못하고 있다.

또 막걸리를 만드니까 아무래도 밀주 단속반들 때문에 숙성시키던 단지를 이불로 둘둘 싸서 들고 바쁘게 집 옆 골짜기에 숨기는 참혹한 삶을 사셨다.

자식들을 위해 남의 집 일도 많이 하셨고, 급경사에 산전을 일궈서 농사를 지으러 먼 길도 다니셨다, 무척이나 힘들고 가난하게 사셨지만 그래도 참 밝으셨다.

자식들에게는 눈물을 안 보이려고 무척이나 노력하셨지만 나는 우시는 모습을 종종 보았다.

가끔씩 연기에 매워서 눈물 나시는 것처럼 나에게 숨기기도 했지만 나는 그 내막을 알고 있었다.

어머니는 많이 아프셨다. 그때는 약이 없으니까 나는 어머니가 가르쳐준 민간요법으로 치료를 많이 해드렸다.

우리 형제 중에 내가 특히 어머니에 대한 생각이 각별했던 것은 사실이다. 그것이 내가 어려운 환경에서도 끊임없이 도전하고, 좌절하지 않으며 살게 된 결정적인 이유였다.

어머니 말씀에 의하면 점쟁이한테 내 생일날이 며칠인지 물어보려고 가셨다고 한다.

어머니는 내가 음력 23일인지 22일인지 헷갈려서 점쟁이에게 물어봤는데 23일이라고 가르쳐 주면서 얘를 잘 키우면 나중에 반드시 호강한다고 말했다는 것이다.

어머니는 없는 살림에 복채를 주면서까지 그것을 실제로 믿으려고 하셨다.

이후 내가 공장에 다닐 때 어머니는 아침 일찍 나를 데려다주고, 어머니는 시장에 있는 공중화장실을 지키면서, 이용료를 받는 일을 하셨다.

나의 어머니는 낮에 열심히 일하시고, 저녁 늦게야 집에 와서는 또 과일 봉투 접는 일을 하셨다.

내가 다녔던 세 번째 공장은 고무 공장이었는데 고무공장에서 샌드페이퍼 작업을 하다 보니까 손바닥이 샌드페이퍼에 갈려서 피가 나고, 다 닳아버렸다.

그것을 보고 어머니는 무척이나 마음 아파하셨고, 그런 어머니의 헌신 때문에 나는 젊은 청소년 시절을 잘 견뎌내었다.

어머니는 내가 만들어낸 작은 성과들 즉 검정고시 합격과 장학금 받아서 대학도 가고, 이런 점들을 무척이나 자랑스러워하셨다. 이런 어머니의 모습 때문에 나는 더 열심히 나의 길을 향해 노력했다.

어머니는 나에게 있어서 정말 하늘 같은 존재다. 그러나 너무나도 고생하셨다. 경제적 어려움이 너무나도 컸었다.

"가지 많은 나무에 바람 잘 날 없다"라는 말을 참 많이 하셨다. 그 와중에 돌아가신 셋째 형님 때문에 정말 마음고생이 심하셨다.

자식들이 여럿이고. 그 자식들 중에 잘됐다는 내가 대학을 가서 변호사가 되었고, 형님은 나의 재정 지원으로 열심히 공부해서 장학금을 받고 대학을 다녔었다. 그러나 다른 자식들 상황은 전혀 개선되지 않았다.

그런 연유로 어머니의 마음은 무척이나 무거웠으리라 여겨본다.

어느 날 둘째 형님이 건국대를 졸업해서 회계사가 되었고, 돈도 잘 번다고 하는 이 자식과 변호사 하다 시장이 된 자식 사이의 심각한 갈등으로 이어지는 상황들을 지켜보아야만 했다.

심지어 나는 그 문제 때문에 정치적으로 심각한 타격을 입기도 했고, 재판받는 상황까지 묵고하시게 했기 때문에 돌아가실 때까지도 참으로 많은 고통을 안겨드린 셈이다. 

어머니는 사실 사회 운동에도 조금의 관심이 있었기에 민노당의 지지자셨다. 그 이유는 성남 중원구에 살았는데 그곳은 민주노동당의 세력이 좀 강했던 곳이기 때문이다.

어머니는 김미희 후보나 정형주 같은 사람들을 이해했다. 정확한 이유는 모르겠지만 김미희 후보 선거 사무실에 가서 격려도 해주시었다.

내가 시장을 하고 있을 때, 그것 때문에 내가 정치적 오해도 받고 우리 내부에서도 문제가 생겨서 갈등도 한 번 있었다.

즉 어머니의 음성을 녹음해서 날 고발하려고 했었다. “내가 시켜서 어머니가 갔던 것 아니냐. 공직자의 선거개입이다.” 이것으로 반박하려고 했던 것이다.

어머니는 나름 사회 문제에도 약간은 깨어 있는 분이셨다. 어머니는 단순히 그냥 혈육으로서의 어머니이기도 하지만 또 한 면으로 보면 정말로 치열하게 살아왔던 우리 대다수 서민의 일부였다.

나의 어머니는 바다 같은 분이셨다. 품은 넉넉하시고, 무엇이든지 다 받아주시고, 나에게는 혹여 해가 될까 어떤 요구도 하지 않으셨다.

언제나 나를 지지해 주셨던 그 어머니는 이제 땅속에 계신다. 사실은 가 봐야 하는 곳인데 못가게 됨을 안타까이 여기고 있다.

내가 다른 사람들에는 고향에 가지 말라고 그렇게 권고해놓고 명색이 행정책임자가 갈 수는 없기 때문이다.

좀 상황이 개선되면 찾아가 인사드릴까 한다. 그래서인지 어젯밤에 내 꿈에 보였는가 하는 그런 생각도 든다.

나의 어머니는 위대한 분이셨다. 남들은 동네 아낙으로 알았겠지만, 나에게는 위대한 존재였고 나의 피난처였다.

어머니는 나의 지주였으며, 내 삶의 원천이었고, 나의 기둥이셨던 것이다.

저작권자 © 일요서울i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