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헌법 4조의 ‘자유민주적 통일’···‘심리전·경협’ 모두 북한의 변화를 위한 방법입니다”

[일요서울ㅣ조주형 기자] 일요서울은 지난 22일 오전 경기도 모처에서 26년간 국가정보원에서 근무한 유성옥 前 국가안보전략연구원장을 직접 만나 저녁까지 그와의 인터뷰를 진행했습니다. 과거 국정원 재직 시절 유 前 원장은 남북회담 실무요원으로 북한 핵 협상을 수차례 이끌어 왔던 인물로, 국정원 심리전단 단장으로 대공(對共)전선에서 밤낮없이 자유민주주의 체제수호에 기여하기도 했습니다. 그와의 인터뷰를 진행하면서, 지난 1980년대부터 오늘날까지 그가 바로 ‘살아있는 역사’라는 점을 다시금 느끼기에 독자 여러분들께 그와의 인터뷰 전문(全文) 일부를 두 편에 걸쳐 소개합니다. 지난 ①편(‘관련기사’ 항목 참조)에서는 유 前 원장의 공직 생활 동안 겪었던 이야기를 실었고, 이번 ②편에서는 ‘남북 통일’을 향한 그의 여정을 소개합니다. 

-“평생 품어 왔던 ‘통일’의 꿈, 이제는 민간에서 그 꿈을 이뤄보려고 합니다”
 

일요서울은 지난 22일 오전 경기도 모처에서 26년간 국가정보원에서 근무한 유성옥 前 국가안보전략연구원장을 직접 만나 저녁까지 그와의 인터뷰를 진행했습니다. 2020.09.22 [조주형 기자]
일요서울은 지난 22일 오전 경기도 모처에서 26년간 국가정보원에서 근무한 유성옥 前 국가안보전략연구원장을 직접 만나 저녁까지 그와의 인터뷰를 진행했습니다. 2020.09.22 [조주형 기자]

 

-최근 통일부는 남북교류협력법 개정안을 입법 예고하기도 했는데, 저작권이나 산업권 등을 북한과 함께 하는 내용까지 들어있어요. 이건 왜 그런 겁니까? 근원이 뭡니까?
▲지금 우리 사회의 주도세력은 86세대, 일명 ‘586’이라는 인물들이 대다수입니다. 조 기자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저도 이해가 안 됩니다. 어느 정도 북한에 대한 통찰이 있으면 되는 것인데, 북한의 선전을 그대로 받아들인 것이죠. 처음부터 머리가 백지상태인 어린이가 북한의 역사인식 등에 동조하게 되는 원리죠. 북한 원전을 보면 빠져들게 만들어져 있어요. 교묘한 조작과 감성에 호소하지요. 그래서 북한을 모르는 사람들이 ‘김일성 항일투쟁’ ‘세기와 더불어’이런 거 보면서 빠져듭니다. 거기에 빠지면 이제 ‘북한은 좋은 나라’로 인식하게 되죠. 북한의 선전선동과 대남통일전략을 모르는 사람은 쉽게 그들의 ‘영항공작’에 걸려들지요. 정부 내 핵심부서에서 일하는 사람들도 충분히 그럴 위험이 있지요. 제가 굳이 예시를 하지는 않겠습니다. 게다가 ‘이해찬 세대’라고 하는 3040의 경우 전교조와 금성 출판사 등의 역사 교과서 영향을 많이 받았다고들 합니다. 그래서 생각을 변화시키기가 매우 어렵다는 전망이 나오는 거고요.

-‘북한 사정’을 어떻게 모를 수가 있죠?
▲ 북한의 선전선동을 곧이곧대로 믿기 때문이죠. 적어도 국정원은 북한 내부를 제대로 들여다본다고 하지만, 일반적인 경우는 북한의 선전물을 먼저 접하게 됩니다. 한복 입은 북한 여성이 나와서 친절하게 응대하면, 북한을 방문한 일반인은 ‘과거 우리 조선의 모습’이라면서 ‘한민족의 정통성이 이런 것인가’라고 생각하게 될 수도 있는 이치죠. 저도 북한을 여러 번 갔다 왔고, 1990년 초 노태우 정부 시절부터 노무현 정부 때까지 남북회담과 6자회담 등에서 북한 인사들과 접촉하고 회담을 해 왔지만, 겉으로 나타난 북한의 말과 행동만으로는 그들의 본질과 전략을 파악하기가 결코 쉽지 않지요. 북한에 대한 지속적이고 깊이 있는 연구와 분석이 따르지 않고서는 그 실체를 제대로 판단할 수 없지요.

-이런데도 ‘남북 경제 협력’을 해야 하나요? 경제협력이라는 것의 의미가 무엇인가요?
▲ 헌법 제4조에는 ‘대한민국은 자유민주적 기본질서에 입각한 평화적 통일 정책을 수립하고 이를 추진 한다’라고 돼 있습니다. 그것을 위해 필요한 조치 중 하나입니다. 즉, ‘자유 민주적 기본질서에 의한 평화적 통일’을 위한 수단이지, 남북 경협 그 자체가 목적이 되지는 않습니다. 물론 우리 기업이 북한에 투자해서 돈을 번다는 것은 비즈니스 베이스로 추진되어야 하고, 이는 기업경영의 기본입니다. 그러나 남북경협이 북한 독재 정권의 목숨만을 연장시키는 결과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남북경협이 북한 주민 스스로 자유시장 요소를 배울 수 있게끔 하기 위한 일종의 통로가 되어야 합니다. 북한 체제를 변화시킬 수 있는 경협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교류와 협력, 접촉을 통한 북한의 변화 유도 방식은 시간이 많이 걸리죠. 간접적으로 북한을 변화시켜 나가는 수단이지요. 그리고 직접 북한의 변화를 가속화 시켜 나가는 수단도 있습니다.
 

문재인 대통령과 北 김정은의 모습. 18일 오전 평양 시내에서의 퍼레이드 장면. 2018.09.18. [뉴시스]
문재인 대통령과 北 김정은의 모습. 18일 오전 평양 시내에서의 퍼레이드 장면. 2018.09.18. [뉴시스]

 

-직접 그렇게 만드는 수단은 무엇이죠?
▲바로 대북 심리전입니다. 직접적인 변화 수단이죠. 북한에 대해 ‘반(反)국가단체’라고 명시한 대법원 판례가 있습니다. 동독을 봅시다. 흡수통일 됐다고 하는데, 동독이 무너졌을 당시 서독이 즉각 흡수하진 않았습니다. 동독은 주민들의 자유선거에 의해 서독에 흡수통일 되는 정책을 제시한 정당을 지지하면서 그들 스스로 서독에 흡수통일 됐습니다. 민주적 투표라는 과정을 통해 흡수 통일이라는 결과에 이르렀습니다. 동독 주민들이 서독의 라디오 방송을 자유롭게 청취하면서 서독의 자유민주주의 시장경제 체제를 동경하게 되었지요. 우리도 동서독 방식으로 갈 수 밖에 없을 것입니다. 언젠가 북한주민들에 의해 통일을 위한 민주적 자유 투표가 진행되어야 합니다. 북한 주민들이 대한민국의 자유민주주의 시장경제 체제를 선택하려면 어떻게 해야겠어요? 그런데 북한주민들이 ‘남측으로 엎어지면 우리가 죽는다’ 이렇게 느낀다면,  이럴 경우 절대로 우리의 헌법적 가치에 의한 통일을 기대할 수 없겠지요. 지금은 어떻습니까? 탈북자들이 자유 찾아 남으로 넘어왔는데 제대로 살 수가 없어요. 경제적으로도 힘들고 자유도 마음껏 누릴 수 없다고 말하고 있어요. 정부여당과 대통령을 심하게 비판하면 경찰 수사를 받아야 하는 걱정을 하게 되는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이것을 북한 주민들이 안다면 비록 김정은 정권이 붕괴되고 김(金)씨 왕조(김일성-김정일-김정은)가 소멸되어 살아갈 길이 없게 될 경우라고 해도 대한민국이 아니라 중국으로 엎어지고자 하겠지요. 

-통일을 위해 지금 우리가 우선적으로 해야 하는 일은 무엇인가요?
▲ 바로 ‘국민 통합’입니다. 저는 평생을 자유통일을 위해 내 한 몸 바치겠다고 해서 여기까지 왔습니다. 그런데 지금 와서 보니 정부가 우리 국민들을 대상으로 편가르기를 하고 있어요. 북한 주민들이 우리를 볼 때 ‘정말 살고 싶은 나라다, 나 저기서 살고 싶다’ 이렇게 흡수되고 싶은 의지가 나오려면 여야, 지역, 계층, 세대와 상관없이 ‘자유 대한민국’이라는 기치 아래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헌법(4조)상 자유민주적 기본질서에 의한 평화적 통일이 되려면 지금은 국민통합부터 해야 합니다. 그런데 지금 어떻습니까? 계속 정부 여당이 그들을 반대하는 세력을 적대시하고 있잖아요? 그러니까 반발하고 도망가고 싶잖아요? 말로는 평화와 통일을 외치면서 편가르기 하는 것은 자가당착 아닙니까? 진정한 통일에 대한 통찰이 없어요. 정말 통일을 원한다면 먼저 우리 국민들부터 끌어안아야 합니다. 자유 대한민국의 국민이죠. 어떻게 지역과 여야, 친문과 반문이 다른 국민들처럼 취급되어야 합니까? ‘나하고 좀 달라도 괜찮아, 우리 할 수 있어’ 하는 분위기, ‘그래도 우리 대한민국 정말 살기 좋아, 더 좋게 만들어보자’ 이렇게 만들어야 된다는 거죠. ‘정치적 견해가 다른 것은 민주국가이기 때문이다’, ‘당신이 나를 싫어해도 당신은 대한민국 국민으로서 존중 받아야 한다’라는 자세를 가져야 합니다. 힘을 가진 세력일수록 더욱 포용력과 자제력이 있어야 합니다.
 

군은 24일 북한에 의한 해양수산부 공무원 사살·화장 사건과 관련, 해당 공무원이 북한의 코로나19 방역 조치에 따라 해상에서 사살되고 시신이 불태워지기까지 했다고 설명했다. 다음은 연평도 어업지도 공무원 실종사건 관련 시간대별 재구성. (그래픽=안지혜 기자) [뉴시스]
군은 24일 북한에 의한 해양수산부 공무원 사살·화장 사건과 관련, 해당 공무원이 북한의 코로나19 방역 조치에 따라 해상에서 사살되고 시신이 불태워지기까지 했다고 설명했다. 다음은 연평도 어업지도 공무원 실종사건 관련 시간대별 재구성. (그래픽=안지혜 기자) [뉴시스]

 

-그건 그렇다 하더라도 북한은 이미 조선노동당 규약 전문에 전 한반도를 석권하겠다고 밝혔잖아요?
▲북한이 남한 전체에 대해 적화통일 하겠다는 의지를 밝히고 있는 것은 사실이고 지금까지도 그것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정확히 말씀드리자면, 여전히 남북이 체제 대결을 하고 있는 셈이죠. 우리 헌법 4조에 ‘자유민주적 기본질서에 의한 평화적 통일’이라고 명시한 것처럼 저들도 여전히 적화통일의 야욕을 버리지 않았어요. 자유민주적 기본질서에 따라 평화적으로 통일을 해야 되는데, 저들은 우리를 적화통일의 대상으로, 무력통일의 대상으로 보는 것이죠. 그렇기 때문에 남북은 통일의 대상이기도 하지만 엄연히 대결의 대상입니다.

-적화통일 하겠다는 근원은 무엇이죠? 공산주의 기본 원리가 침투인가요? 왜 그런가요?
▲공산주의는 이념적으로 사회 자체를 무산 계급(프롤레타리아트)에 의한 독재를 지향하죠. 아예 그것이 옳은 방향이라고 합니다. 공산주의는 본래 칼 마르크스가 말하는 이념상의 구조인데, 지금 근데 북한체제의 본질은 공산주의냐 사회주의냐 라는 잣대 보다는 김일성-김정일-김정은에 의한 1인 독재체제라고 보는 게 더 정확합니다. 북한은 노동당이 착취하는 것을 정당하다고 봅니다. 나아가 한 사람의 무오류의 수령을 위해 전당 전군 전 인민이 무조건 복종해야 하는 체제이지요.  우리나라 역시 틀은 자유민주국가지만, 대통령이 전횡을 저질러도 내부적으로 견제가 되지 않거나 사법 시스템이 무너지게 된다면 독재의 아류로 전락하게 됩니다..  앞으로 우리 역사, 북한체제이든 우리 정권이든 그 판단은 그것이 자유민주 국가이냐, 독재 국가이냐 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기준이 되어야 합니다. 이념이 퇴조하고 실용이 지배하는 시대가 될수록 민주주의냐 반민주주의냐, 인권이냐 반인권이냐 하는 척도와 가치가 더욱 중시되어야 합니다.

-‘강철서신’으로 1980년대 우리나라 운동권은 전과 후가 나뉩니다. 그때 보면 우연히 접한 당시 문건에서 ‘당-수령-인민대중의 삼위일체’ 이런 말도 나오더군요. 어떻게 보십니까?
▲지난 1980대 초 일부 우리사회에 ‘주체사상’이 유입됐습니다. 저도 ‘강철서신’을 읽어봤고, 그 내용은 모두 북한이 우리사회의 변혁(남조선혁명)을 목표로 전파시킨 것이지요. 하다못해 그 후 친북(親北) 운동권은 ‘주체사상’으로 대 정부투쟁을 한 것이죠. 그게 유입되면서 이제 민주가 아니라 반(反)민주를 위해 투쟁을 한 격이 됩니다. 자유민주주의로 가야 되는데, 반대로 간다는 말이죠. 말 그대로 역사를 거스르는 반동입니다. 자유민주주의가 아니라 거꾸로 간 겁니다. ‘주체사상’이 가미되면서 오히려 북한체제의 특성인 반민주 개인 우상화 봉건 등 ‘독재의 아류’를 추종한 것이죠. 지금 우리의 현실은 어떤가요? 민주주의 가장 기초적 원칙인 견제와 균형이 제대로 이루어지고 있습니까? 입법, 사법, 행정 모두 한편입니다. 소위 삼위일체가 된 것이죠. 누구를 위한 삼위일체인가요? 국민을 위한 삼위일체가 아니라면 후대는 이를 반(反)민주적 독재 정권으로 평가하겠지요. 
 

일요서울은 지난 22일 오전 경기도 모처에서 26년간 국가정보원에서 근무한 유성옥 前 국가안보전략연구원장을 직접 만나 저녁까지 그와의 인터뷰를 진행했습니다. [조주형 기자]
일요서울은 지난 22일 오전 경기도 모처에서 26년간 국가정보원에서 근무한 유성옥 前 국가안보전략연구원장을 직접 만나 저녁까지 그와의 인터뷰를 진행했습니다. [조주형 기자]

 

-이번에는 좀 다른 이야기입니다. 왜 하필이면 통일에 관심을 갖게 되셨어요?
▲어릴 때 아버지가 일찍 세상을 떠나셨어요. 진주고등학교에 입학하면서 학교 도서관에서 일을 하였습니다. 청소도 하고 책 정리도 하였지요. 수업을 마치면 밤 12시 까지 도서관에서 일을 했지요. 등록금이 면제가 되었지요. 그러다 보니 책도 많이 읽을 수가 있었습니다. 그때 뭘 하겠다 그런 생각이 많지는 않았어요. 그저 안중근, 김구, 이순신, 막사이사이 등 이런 위인전을 읽으면서 재미있다는 생각을 할 정도였습니다. 남들은 학교 공부하는 데 저는 독서에 빠졌습니다. 그러다가 여름 방학이면 도서관 책 정리를 끝내고 4박 5일을 일정으로 지리산으로 갑니다. 천왕봉도 올라가고 그랬어요. 올라가서 며칠 전 읽은 삼국지 생각하면서 막연하게 ‘나도 세상을 위해 큰일을 해야 되겠다’면서 호연지기를 길렀지요. 고교를 졸업한 후 고향의 절에 머물면서 대학입시 공부를 하였지요. 그런데 하루는 당시 성철 스님과 함께 합천 해인사에 계시던 고모님이 저에게 삼천배를 해 보라고 하셨어요. 성철스님의 일화를 들려 주셨지요. 그 때 고모님이 하신 말이, 서울 명문대를 나와서 고등고시에 10번 떨어진 젊은이가 성철 스님을 찾아와 시험에 계속 낙방하는 이유가 전생에 무슨 업(業)이 있어 그런 것 같은데 큰 스님의 법문을 듣고자 찾아왔다고 했다 합니다. 그러자 성철스님이 ‘3일을 굶고 목욕재계한 후 한 번에 삼천배를 하면 만나주겠다고 했다는 거예요. 그러잖아도 고시 떨어져서 심신이 피폐한데 절을 하다가 죽는 것이 아닌가 하고 생각되어 그냥 절을 내려가다가 ’차라리 삼천배를 하다가 탈진하여 죽어 버리자‘는 마음으로 다시 해인사로 올라왔답니다. 결국 젊은이는 삼일을 굶고 몇 시간을 걸려서 삼천배를 다 마치고 나니까 이제 큰 스님이 만나자고 하셨다고 합니다. 그러자 젊은이는 스님을 뵙지 않고 절을 내려갔다고 합니다. 정작 스님을 뵙지 않아도 되겠다는 것이었죠. ‘깨달았다’는 것이죠. 전생에 무슨 업이 있어서가 아니라, 삼천배를 할 만큼 인내하면 고시에 합격할 수 있게 된다는 것을 깨달았고, 성철스님도 그것을 스스로 깨닫도록 하려고 삼천배를 시켰다고 합니다. 1년 후 그 젊은이는 고시에 합격해서 다시 큰 스님을 뵈러 왔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결국 당시 원장님도 삼천배를 했습니까? 무엇을 알게 됐습니까?
▲그날 부로 절간의 가마솥에 물을 끓이고 3일을 굶었습니다. 드디어 삼천배를 시작했습니다.  고모님께서 ‘네가 대학을 가고 출세하고 그런 걸 생각하면 할 필요 없으니 세상을 위해 뭘 할 것인지를 목표를 세워 절을 하면서 빌어라’라고 말씀을 주신 거예요. 절을 하다가 너무 힘드니까 앞에서 안 보입니다. 3월 말 한 밤중이었는데 땀이 엄청 나는 겁니다. 그러다가 퍼뜩 ‘김구, 안중근’이 생각나더라구요. 문득 ‘남북 통일!’하고 생각이 들었습니다. 분단의 아픔을 극복하는 데에 내가 뭔가 하고 싶더라구요. 그러다가 천 칠백 배 정도를 했습니다. 엄청 힘든 겁니다. 거의 기어서 법당에서 나와 누가 바가지에 떠놓은 물을 마셨습니다. 저는 물을 마신 후 그 와중에도 계속 절을 하고 있는 다른 한 사람을 위해 저도 피가 나는 무릎으로 기어서 그 사람을 위해 바가지에 물을 떠다가 갖다 놨어요. 그 후 약 이천 삼백배 정도 넘어간 시점에 같이 절을 하고 있던 사람도 ‘아이고 죽겠다’ 고 소리치면서 제가 떠놓은 물을 마시더라구요. 근데 그 물 마시는 소리가 너무 기분이 좋은 겁니다. 그 때 갑자기 제가 바라보면서 절을 했던 부처님이 살며시 미소를 지으시는 모습을 너무도 생생히 본 것입니다. 내가 얻어 마신 물을 내가 힘들게 떠 놓고 누군가 또 마시니 그 기쁨이 이루 말할 수가 없더라구요. 그 때 ‘아!’ 하고 뭔가 느꼈습니다. 이런 게 바로 불교에서 말하는 자비가 아닐까 했어요. 부처님은 남북통일도 매우 힘들지만 삼천배를 하는 마음으로 노력하면 반드시 이룰 수 있다는 답변을 주시던 군요. 저는 새벽에 날이 훤히 밝아오는 시간까지 참아가며 삼천배를 모두 마쳤고, 삼천배 당시의 경험은 제 인생에 있어 부동의 좌표가 되었지요. 그 이후 고려대학교 영문과(77학번)를 가서 4년 내내 당시 나와 있던 남북통일에 관한 책을 모조리 읽었습니다. 학교 도서관과 청계천 헌 책방에서 책을 구해 읽었지요. 당시 아무도 통일에 관심이 없었어요. 그러다가 마침내 대학원(고려대 정치외교학과)에서 통일을 전공하게 됐습니다.
 

국가정보원 페이스북 캡처.
국가정보원 페이스북 캡처.


-대학에서 영문학 공부할 당시 어떠셨어요? 
▲ 하나 기억나는 에피소드가 있는데요, 제가 고려대 4학년 때인 1980년 봄 민주화 요구 시위를 하다가 성북경찰서에 붙잡혀 갔습니다. 유치장에서 단식 투쟁을 했어요. 그 때 김상협  총장님께서 단식 투쟁을 풀라고 여러 보직 교수님들과 같이 일부러 찾아오신 거예요. 그때 총장님과 함께 오신 분이 당시 문과대 학장이자 영문과 학과장이셨던 김치규 교수님(김종길 시인)이셨지요. 과묵하기로 소문난 그 교수님께서 유치장 너머로 제 두 손을 꼭 잡으시고는 눈물을 쏟으시던 때가 기억납니다. ‘4학년이 공부는 안 하고 왜 여기에 와 있느냐. 이제 단식 풀고 먹고 살어야지’라고 말씀하시면서 눈물을 줄줄 흘리시는데 그때 교수님의 제자 사랑에 감동을 받아 단식을 중단했고 그 후 풀려 났습니다. 저는 대학 4년 내내, 대학원에서도 과외 아르바이트를 하여 학비를 조달했어요. 영문과 4학년 봄, 김치규 교수께서 저를 교수연구실로 따로 부르셔서 ‘대학원에 진학하여 20세기 영시를 전공하는 (당신의) 제자가 되라’라고 하셨지요. 그 때 저는 ‘분단된 우리나라를 통일시키는 게 일생의 과업이라 대학원에서는 통일문제를 공부하려 한다’고 말씀드렸지요. 교수님이 그걸 들으시고는 ‘야, 너 대견하다, 그런 뜻을 갖고 있었어? 어디 유 가야?’라고 하시면 섭섭해 하시지 않고 오히려 격려해 주셨지요. 우여곡절 끝에 드디어 대학원을 갔습니다.

-우여곡절은 대학 시절로 끝나신 건가요? 아니면 계속 힘들었는지...
▲호사다마(好事多魔)라고 해야 하나요? 꼭 하나씩 난관이 생기더라구요(허허). 1981년 9월에 고대 대학원 정외과에 들어갔는데, 1982년에 전두환 정부가 과외 금지령을 선포했습니다. 어떡합니까? 과외를 못하면 학비를 못 내는데... 눈물을 머금고 휴학계를 내고 26살의 늦은 나이에 사병으로 입대를 하였지요. 백마 9사단 자동화기 소총병으로 갔습니다. 어찌나 훈련이 힘든지 저는 불교 신자인데도, 오죽하면 ‘하나님 왜 제게 이런 시련을 주십니까’라고 기도까지 했겠어요. 그러다가 한강 하구 철책 경비를 내내 서다가 팀 스피리트 훈련 때는 통역병으로 뽑혀 색다른 경험을 하기도 했지요. 그런데 당시 9사단에서는 가장 고생한 한 개 소대를 선발하여 일산의 모 기지를 경계하는 임무를 맡겼지요. 그 기지(基地)는 뒤에 알고 보니 주요 국가(당시 안기부) 시설이었는데 국방부 부식과 함께 별도 부식도 나왔습니다. 전역을 불과 몇 개월 앞두고 우리 소대원과 함께 그 기지에 가서 초병으로 근무하였지요. 그런데 전역을 코앞에 둔 시점에 거기 직원이 절 찾아와서 ‘당신, 전역 후 뭐 할 생각이냐’라고 물어보더라구요. 그래서 ‘통일원에 들어가서 통일업무를 할 생각이다’라고 하자, 국가안전기획부(國家安全企劃部·안기부)를 추천하더군요. 그렇게 정규과정 시험을 거쳐 안기부에 들어가게 됐습니다. 그때 저는 운이 좋아 정규 과정 23기에 수석으로 합격하였지만, 통일 문제에 본격적으로 뛰어들기 위해 당시 기피부서였던 북한 파트를 지원하여 노태우 정부 때부터 거의 모든 남북관련 회담과 대북전략 수립 업무를 담당하게 되었지요.
 

대한민국 국가정보원 페이스북 캡처.
대한민국 국가정보원 페이스북 캡처.

 

-국정원과의 인연이 그렇게 시작된 것이군요?
▲그렇습니다. 나중에 알고 보니 제가 전역 직전에 근무했던 거기가 국가안전기획부(國家安全企劃部·안기부)의 심리전단의 대북방송 기지(基地)였더라구요(허허). 국정원에 입사하여 일을 하다 보니 모르는 게 너무 많아서 힘들게 박사 과정을 밟았어요. 공부할 시간이 부족하여 박사과정 6년 간 집이(일산) 멀어 퇴근하지 않고 사무실 바닥에 자리를 깔고 자고, 나중에는 아예 사무실 근처 고시방에서 혼자 생활하였지요. 불혹이 돼서 고려대에서 ‘북한 핵정책’을 주제로 박사 학위를 취득하게 됐습니다. 지도 교수님은 당시 외교부장관이셨던 한승주 선생님이셨지요. 군대에서의 우연한 인연이 이어져 국정원에 입사했고, 나중에 북한의 변화와 통일을 견인하는 심리전단의 단장이 되었고, 단장이 되자마자 심리전단에서 운영하는, 제가 근무했던 기지를 방문하였지요. 그러다가 세월이 흘러 심리전단장이던 당시 일들로 인해 투옥되기도 하고요. 인연은 참으로 모질고 길게 이어지더군요.

-국정원 일이 재밌었나요? 통일에 한걸음 더욱 다가선 것 같나요?
▲정말 재밌었습니다. 사명감을 갖고 일을 했습니다. ‘늘 사심없이 국가에 헌신하자’ ‘대한민국 최고의 대북 전문가가 되겠다’라는 생각을 한 번도 잊는 적이 없지요. ‘도덕경’에 보면, ‘천망회회 소이부실(天網恢恢 疎而不失)’이라는 말이 나옵니다. ‘하늘의 그물은 매우 넓어 엉성한 듯 보이지만 결코 빠뜨리는 것이 없다’는 것이 당시 제 신조였어요. 국정원 직원들에게 이런 말을 자주 하였고 심리전단 전 직원들이 모인 자리에서 교육을 시킨 적도 있습니다. ‘종북(從北) 세력 척결을 위해 최전선에서 싸우지만, 여러분들이 한 일이 시간이 흘러 국민들에게 알려질 때 정말 국정원이 해야 할 일을 했다고 국민들이 인정할 수 있어야 한다’라고 강조하기도 했어요.

-요즘에는 뭘 하시면서 시간을 보내십니까? 통일을 위해 이제 어디서부터 무엇을 할 계획입니까?
▲요즘에는 책을 많이 읽어보려고 합니다. 운동도 열심히 하고 있지요. 축구와 수영을 워낙 좋아하는데 코로라 19로 인해 집 근처 수변을 뛰는데 만족하고 있습니다. 글도 많이 쓰면서 연구에 몰두하고 있습니다. 바로 ‘북한 비핵화’와 ‘남북 통일’에 대한 것입니다. 작은 글 하나 쓰는데도 엄청 많은 노력이 요구되더군요. 좋은 자료를 찾아서 한참을 헤매기도 합니다. 그것도 좋은 자료인지 아닌지를 알려면 다 읽어보고 판단도 해야 하고요. 좋은 글을 읽는다는 게 핵심입니다. 좋은 책이면 더욱 좋고요. 그렇다고 해서 전문 서적만 보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그러니까 여백을 잃더라구요. 삶도 팍팍해지고 시각도 협소해지고요. 시집과 소설, 인문서적 즉, 역사, 철학, 심리학, 종교 서적 등을 틈틈이 읽습니다. 얼마 전 에는 김형석 교수께서 쓰신 ‘100년을 살아보니’라는 책을 읽었는데, 제 삶의 지침서가 되더군요. 60을 갓 넘긴 사람이 어떻게 살아야 할지 되돌아볼 수도 있고, 그동안 살아 온 시간이 얼마나 소중한 것이었는지를 알 수 있기도 하고요. 

-북한 비핵화와 남북 통일을 생각하는 데에 견지해야할 태도나 시각, 관점이 있나요?
▲북한과 안보문제 연구의 특징은 ‘정보와 첩보’라는 특수성이 중요하지요. 하지만 거기에 함몰되면 안 됩니다. 오히려 보편적인 식견, 일반성이 필수적입니다. 인문학, 심리학, 철학적 판단과 함께 소설까지 포괄해야 합니다. 가령 북한의 대남전략을 판단할 때 ‘삼국지’ 속 조조와 제갈공명이라면 이런 경우 어떤 생각을 할까? 이런 겁니다. 그래야 전망을 할 수가 있습니다. 이런 역사성이 나와야 하죠. 단순히 팩트(Fact)만 보면 분석이 어렵습니다. 좋은 정보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해석이 달라집니다. 우리가 북한을 우리 방식으로 이해하는 것과 비슷한 방향이 나오는 이유죠. 반대로 북한이 우리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근원적인 차이도 거기에서 나옵니다. 그 쪽의 관점이 고착되어 있기 때문이죠. 독특한 체제 특성을 가진 북한도 인간의 생각과 감정이 들어가는데 그게 결합이 안 되면 제대로 된 판단과 예측을 할 수가 없는 것이지요. 인간과 사회 및 국가 본질에 대한 연구. 그게 꼭 필요합니다. 심리학 공부가 특히 중요하지요. 그렇게 통합적으로 봐야 북한을 제대로 볼 수가 있어요. 김정은과 김여정의 관계는 도대체 무슨 관계일까요? 인간에 대한 공부를 하면 또 해답을 얻을 수도 있습니다. 많은 독서와 사고, 고민이 필요합니다. 단순히 첩보만 본다거나 노동신문만 읽다가는 결국 하루아침에 무너질 수도 있는 모래성을 쌓을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저도 매번 매일 부족함을 많이 느낍니다. 사람의 시간은 한정되어 있는데 독서와 연구, 운동을 두루 병행하는 일이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지요. 

-북한 연구를 통해 우리가 배울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요? 원장님은 어떤 부분을 배우셨습니까?
▲‘겸손함’을 배우고 있습니다. 북한에 대한 정보는 항상 변하기 때문이죠. 호수가 썩지 않으려면 물이 흘러야 한다고 하죠? 그리고, 나이가 들면 자기가 완성됐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성공해 본 내가 살아보니 그러 하더라’는 이런 식이에요. 이는 스스로 망가지는 길이기도 합니다. 이것은 물이 빠져나가지 못하는 썩은 호수와도 같은 거죠. 항상 오픈 마인드로 유지한다고 생각하시면 이해하기 쉬울까요? ‘나 또한 틀릴 수 있다’라는 생각하면 될 것 같아요. 사람은 항상 옳다고 할 수 없는데, 대부분이 자신이 옳다고 믿는 겁니다. 상황과 조건은 변화하기 때문에 변하는 만큼 제 생각이 틀릴 수 있어요. 북한 연구를 하다보면 ‘일말의 가능성’을 생각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그러다 보니 세상을 대하는 자세로 확장되기도 합니다. 세상으로부터 고립되지 않으려면 귀를 열고 상대방의 말을 들으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절대로 제 자신만이 옳다고 생각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이는 연구뿐만 아니라 우리 일상의 삶에도 그대로 적용되지요.
 

27일 오후 서울 종로구 세종문화회관 계단 앞에서 열린 '한미동맹 강화 촉구 집회'에 참석한 한 한미안보연구동아리 회원이 북한 인공기에 '대한민국은 자유민주주의 국가다'라는 문구를 적고 있다. 이날 집회에서 한미안보연구동아리는 주한미군 방위비를 지급하고 한미군사 훈련을 재개할 것을 정부에 촉구했다. 2019.01.27. [뉴시스]
27일 오후 서울 종로구 세종문화회관 계단 앞에서 열린 '한미동맹 강화 촉구 집회'에 참석한 한 한미안보연구동아리 회원이 북한 인공기에 '대한민국은 자유민주주의 국가다'라는 문구를 적고 있다. 이날 집회에서 한미안보연구동아리는 주한미군 방위비를 지급하고 한미군사 훈련을 재개할 것을 정부에 촉구했다. 2019.01.27. [뉴시스]

 

-북한 연구를 통해 ‘겸손함’을 배웠다고요? 
▲항상 제가 모르는 게 정말 많더라구요. 무엇을 하든, 어떤 위치에 있든, 겸손해야 합니다. 그리고 지나치지 않고 중심과 균형을 잡을 수 있는 중용의 자세를 견지해야 합니다. 북한이든 어떠한 상황이든, 사람이든, 국가정책이든 언제든 변할 수도 있고, 내 생각과 다른 대안도 있을 수 있다는 점. 자만하지 않고 끊임없이 공부하고, 고민해야 진실에 접근할 수 있습니다. 자신을 열어두는 게 매우 중요하지만, 그렇게 쉬운 것만은 아니더군요. ‘나도 틀릴 수 있어’, ‘나도 꼰대가 될 수 있어’라고 생각을 할 수 있어야 정말 ‘꼰대’가 되지 않지요. 내가 알고 있는 게 작은 부분에 불과하다는 점을 인정할 때 비로소 깨닫게 됩니다. 소크라테스가 ‘너 자신을 알라’고 하였지요. 가장 중요하고 어려운 화두입니다.

-현재 정부 여당이 북한을 대하는 방향, 야당을 대하는 방향 등에 대해서는 어떻게 보셨어요?
▲세상을 볼 때 완전한 흑과 완전한 백은 없습니다. 사실은 온통 회색빛인데, 검고 하얀 것에 대한 농도의 차이가 있을 뿐이죠. 그걸 인정하면 상대를 죽어라고 미워할 필요가 없어요. 그렇다고 원칙도 없는 기회주의자가 되어서도 안 됩니다. 그런데  현재 우리 상황은 그렇지 않습니다. 역사적으로 봐도 통상 탄압받는 쪽은 약자입니다. 현실적으로 칼 가진 사람이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지, 칼자루를 쥔 사람이 세상을 바꿀 수가 있나요? 힘이 있기 때문에 더욱 겸손해야 하는데 지금 정부는 그렇지 못합니다. 힘을 가졌을 때 좀 더 아량을 베풀고 관대해야 합니다. 포용력을 가진 정부라고 국민들이 얕볼까요? 정부여당은 야당과 비판세력의 말을 들으려고 하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정부가 국민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이런 점에서 그 사람들은(전부는 아니지만) 삶을 대하는 태도에 공부가 많이 부족하다는 느낌입니다. 그들 중에는 부끄러운 줄 모르는 사람들이 매우 많아요. 역사를 보면, 권력을 장악한 사람들 중에는 중상모략에 능한 사람들이 많죠. 좀 더 겸손해야 하는데 많은 이들이 그렇지 않아요. 오만하고 사악하기도 합니다. 사람들은 늘 부족하다고 불평과 불만을 합니다. 저도 그럴 때가 적지 않았습니다. 운칠기삼(運七技三)이라는 말이 있죠. 인생에는 운(運)도 따라야 합니다. 저는 하늘에 맹세코 정치관여와 국고손실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렇지만 투옥되는 고초를 겪었어요. 그게 인생인 거예요. 지난 4월 파기환송심 판결 시 재판장님이 그러시더군요. 다른 말씀은 안 하시고, ‘안타깝다. 피고인이 그 때 그 자리에 있어 이런 일이 일어났으니까 마음 잘 다스리면서 살아가시라’라고 하시더군요. 비록 유죄 확정 판결을 받았지만, 참 고마운 마음이 들더군요. 공직생활 내내 최선을 다해 정직하고 성실하게 살았지만 옥고까지 치르게 되었지요. 운(運)이 나빴다고 말하는 사람도 많더군요. 그러나 운(運)은 계속 움직인다는 뜻을 갖고 있어요. 운(運)이 움직인다는 걸 깨달으면 낙심할 것도 없고 무엇보다도 겸손해집니다. 지금 모든 것을 가졌고, 그것들이 확고해 보여도 운처럼 움직이게 마련이지요. 내가 부족한 것을 인정하고 진정으로 우리사회가 공정과 정의, 기회의 균등으로 나아가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그래야 좋은 운을 계속 잡아 둘 수가 있습니다.
 

8일 서울 삼성서울병원 장례식장에 지난 7일 사망한 故 이재수 전 기무사령관의 빈소 위치가 안내되고 있다. 2018.12.08. [뉴시스]
8일 서울 삼성서울병원 장례식장에 지난 7일 사망한 故 이재수 전 기무사령관의 빈소 위치가 안내되고 있다. 2018.12.08. [뉴시스]

 

-투옥됐던 첫 날 어땠습니까? 만감이 교차하는 밤이었을 텐데요...
▲최근 서울시장이 스스로 목숨을 끊었죠. 제가 투옥되던 첫 날, 하늘에 맹세코 깨끗하게 살았다고 자부하는데, 정말 너무 원통한 겁니다. 아니 어떻게 이런 시련이 내게 오는가 싶더라구요. 조 기자님, 故 이재수 장군님 기억하시죠? 오죽하면 저도 당시 죽음으로써 무고함과 억울하다는 것을 보여 줘야겠다 싶었습니다. 그런데 감방 안에 아무것도 없는 겁니다. 정말 아무것도 없어서 (극단적인) 시도 자체가 안되더군요. 결국 독방 배치를 요청해서 매일 108배를 하게 됐습니다. 열악한 좁은 감옥에서 생각보다 쉽지 않습니다. ‘부처님, 제가 통일을 위해 일생을 바치겠다고 사심 없이 일했는데, 제게 왜 이런 시련을 주십니까’라고 물었습니다. 소리를 내지는 않지만 이미 울부짖는 상태였죠. 어느 날 부처님께서 제게 말씀을 주시더군요. ‘통일이라는 게 매우 어렵다. 누군가의 희생과 헌신이 필요한 데, 감옥 생활에서 모진 고초를 받는 것 또한 통일을 위한 길이다. 어디서 장관되고 권력자 되고 하는 게 통일에 기여하는 것이 아니다. 지금 네가 진정으로 통일에 헌신하고, 기여하고 있는 것이다. 세상을 원망하지 말거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저는 통일이라는 필생의 꿈을 이루기 위해 국가기관인 국정원에 지원하여 열심히 일했으니, 이제는 민간 영역에서 그 꿈을 계속 이어 갈까 합니다. 이 세상이 알아주지 않더라도 묵묵히 걸어 갈 것입니다. 늘 감사하면서요.

-과거 독립운동이나 의병 했을 당시처럼 말이에요?
▲그렇습니다. 당시 조정은 부패하고 권력다툼만 연신 일어나는데, 관군은 도망가고 백성들은 잔인하게 희생당하고. 그때 일어선 게 의병입니다. 계급과 녹봉도 없이 움막에서 지내면서 싸웠던, 바로 그 의병정신이 나라를 지킨 거죠. 지금은 연구실이 창문도 없는 골방이 이지만 비판에만 그치는 연구가 아니라 실행 가능한 대안을 찾는 연구를 하기 위해서지요. 그래서 연구원 이름도 ‘진단과 대안’으로 했습니다. 새로운 것 같지만, 사실 근무했던 공직생활의 ‘전략부서’의 업무와도 비슷한 셈이죠. 서울에 연구원을 내려니 돈이 워낙 많이 들어서 움막에서 나라 찾기 운동 하듯이 여기로 온 겁니다(허허). 제가 해보겠다고 한 겁니다. 지금은 수감생활이 발목을 잡아 할 수 있는 게 이제 이것뿐입니다. 온전한 세월이 복원(復元) 되려면 몇 년이 걸릴지 알 수 없습니다. 그래서 앞으로는 ‘북한 비핵화’와 ‘남북 통일’을 이루기 위한 전략서(書)를 써보려고 합니다. ‘책’이라고 하니 ‘사마천’이 생각나는군요.

-궁형(宮刑)을 받고 ‘사기’라는 책을 쓴 중국 고대의 인물 말인가요?
▲그렇습니다. 사마천은 권력에 아부하지 않다가 죽을 위기에 처했잖아요? 결국 궁형(宮刑)을 받았는데, 그렇게 역사에 불후의 역자인 ‘사기(史記)’를 남깁니다. ‘사기’라는 게 대단한 영웅전은 아닙니다. ‘인간 이야기’, ‘사람 이야기’를 합니다. 많은 왕조가 등장하죠. 사마천이 볼 때 그 중에서도 흥하는 왕조는 ‘덕(德)’을 갖춘 인물이 있을 때, 망하는 왕조는 ‘덕(德)’ 있는 인물이 사라질 때 시작됩니다. ‘덕(德)’이라는 건, 지혜와 인품과 지식을 고루 갖춘 사람을 뜻하는 것입니다. 지금도 마치 그와 같지 않습니까? 조 기자님도 최재형 감사원장의 이야기를 알고 계실 겁니다. 요즘에는 옹졸하고 싸우기 좋아하는 사람들이 득세하다 보니 덕을 갖춘 인물을 찾기가 힘듭니다. 그런데 이 정부안에도 그런 분이 계시던 군요. 그 분을 보면서 세상에 희망이 없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했어요. 사마천이 궁형(宮刑)을 받고서도 사기를 남겼듯이 저도 그런 자세로 살아가고자 합니다. 우리의 현실을 개탄하고, 북한 정권에 대해 비판만 하지 말고 어떻게 할 것인지 그 답을 찾아보려 합니다. 말 그대로 ‘진단과 대안’을 밝히고자 합니다. 북한 비핵화는 어떻게 이룰 것이며, 남북 통일은 어떻게 할 것인지 말이에요. 그것이 제게 남은 통일을 향한 과제입니다. 책이 빨리 나오길 바라지만 설익은 것은 맺지 못한 것 보다 못하다는 생각으로 안으로 제대로 온축(蘊蓄)된 책을 준비할까 합니다!


※ 2편에 앞서 1편(관련 기사)에서 보실 수 있습니다-

대한민국 국가정보원. [국정원 페이스북]
대한민국 국가정보원. [국정원 페이스북]

 


==========

관련기사

저작권자 © 일요서울i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