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 [뉴시스]
북한 [뉴시스]

 

[일요서울] 국립외교원 외교사연구센터에서 ‘외교’라는 렌즈를 통해 우리 현대사를 조명하기 위해 오럴히스토리사업 ‘한국 외교와 외교관’ 도서 출판을 진행해 왔다. 지금까지 총 17권의 책이 발간됐다. 일요서울은 그중 공로명 전 외교부장관의 이야기가 담긴 책의 내용 중 일부를 지면으로 옮겼다.

“북한은 급한 불이 IAEA 사찰 문제였다”

“북한의 NPT 탈퇴 사태 오기 전 조치협의 위해 미국에 갔다”

- 핵통제위원회 이야기를 더 나눠보고 싶다. 짧은 기간이었지만 상당히 집중적으로 여러 번에 걸친 회의를 했다. 특히 북한 측 최우진 대표를 비롯해서 인상이 남는 분들이 꽤 있었을 것 같다. 우선 협상 상대로서 최우진 부부장에 대한 인상은 어땠나. 
▲ 최우진은 그때 북한 외교부차장이었다. 차관급이고, 어디 대사를 지내고 온 사람인데 아프리카 조그만 나라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원장님도 함께 봤지만 판에 박힌 북한 관리다. 

- 저는 인상 깊었던 게 굉장히 강경한 이야기를 하면서도 웃고 있는 등, 굉장히 표정이 많은 분이었다고 생각이 든다. 
▲ 북한 대표 가운데 군인 대표로 김영철 소장이 나왔다. 지금은 그분이 대남정책을 한 손아귀에 쥐고 있다. 

- 당시 그분에게 어떤 인상을 가졌나.
▲ 적대적이며 강경했다. 전형적인 북한 군인이다. 

- 한국 측 대표 구성원도 상당히 막강했다고 생각이 든다. 한국 대표단은 어떤 식으로 구성되어 있었나.
▲ 일단 강만수 경제개발차관이 경제개발 대표로 와 있었고, 임동원 씨는 초기에 통일부차관으로 있었다. 반기문 씨가 그때는 미주국장을 그만두고 워싱턴에 가기 위해 대기하는 상태였는데 장관특별보좌관으로 있었다. 반기문 씨가 8월경에 미국에 가게 되어서, 6차인가 7차부터는 정태익 미주국장이 대표로 있었고, 통일원에서는 계속 정대규 씨가 남북대화사무국에 상근대표로 있었고, 청와대에서 하정규 씨가 외교안보비서관으로 있었다. 그다음에 총리실에서 홍순길 정책심의관, 과학기술처에서는 안전심사관, 그다음에 군에서 대표가 왔는데, 어느 시기에는 장군 한 명도 있었다. 

핵통제위원회가 2주가 멀다 하고 열리니까 바빴다. 그래서 훨씬 후의 일인데, 제가 1993~1994년 주일대사로 있을 때 하루는 저희 관저에서 오케이션이 있어서 서울에서 대표단이 왔다. 그런데 그중에 한 사람이 자신이 반기문 공사의 친구라고 했다. 반기문 씨가 부친상을 당했을 때 본인이 상주 역할을 했다고 했다. 그래서 저는 모르는 일이라 언제 반기문 공사가 부친상을 당했는지 물었다. 우리가 핵통제위원회 할 때라고 했다. 반기문 씨가 일절 이야기를 안 한 거다. 그래서 반기문 씨를 만나서 어떻게 그랬느냐고 물었더니, 회의가 끝나면 그 길로 충주 내려가서 상주 일을 하고 또 새벽같이 올라왔고 했다. 반기문 씨가 그런 면이 있다는 건 알고 있었는데 그렇게 철저한 줄은 몰랐다. 

- 저는 가장 막내 역할을 하던 김진수 사무관이 가장 기억에 남는다. 그분이 모두발언문을 매번 썼는데 회의가 많았기 때문에 참 어려운 일이었다. 지금 아마 사우디 대사를 하시는 듯하다. 그 당시에 굉장히 어려운 작업들을 불평 없이 하셨다. 
▲ 외교안보연구원에서는 당시 윤덕민 연구위원과 김영호 박사 둘이 와 줬다. 

- 실무는 분기2과에서 과장이 계속 보좌를 했던 걸로 기억을 한다. 그렇게 22차례 접촉했고, 공동위원회가 13차례, 위원 실무접촉이 8회 있었다. 한때는 사찰규정에 대해 논의 한 적도 있었다. 그러다가 SCM에서 팀스피릿 훈련을 재개한다는 발표가 나면서 공격당하기 시작했고, 1993년 1월에 마지막으로 남북 위원장 접촉이 있었다. 그 당시에 위원장으로서 어떤 내용을 이야기하셨는지 말씀해 달라. 
▲ 위원장 접촉은 다음 공동위원회를 만들기 위한 발판을 구축하기 위해 합의를 도출하려고 했는데, 시종일관 결국은 팀스피릿 문제로 다투게 되어 결국 공동위원회가 13차로 끝나고 말았다. 그래서 마지막에 핵통제위원회 접촉이 위원장 접촉으로 끝나는데 성과 없이 끝나지 않았나 싶다. 

- 핵통제위원회가 성과 없이 결렬된 이유를 무엇 때문이라고 보나. 또 그를 통해 얻은 교훈이 있다면 후배들에게 말씀해 달라. 
▲ 당시 전체적인 환경이라고 생각하지 않으면 원인을 정확히 파악하기가 어렵긴 했다. IAEA가 2월25일 결국 특별사찰을 결의하는데, 이미 12월부터 특별사찰 이야기가 부단히 나오기 시작했다. 북한이 추출한 플루토늄의 양이 얼마인지가 관심사였고, 2~3킬로라는 이야기까지 나오면서, 원자탄 두 개분 정도는 확보했을 거라는 추측이 많이 회자됐다. 그랬기 때문에 북한으로서는 더이상 남북 핵 논의가 아무런 의미도 소용도 없다는 생각을 한 것 같다. 그리고 우선 눈앞에 급한 불이 IAEA 사찰 문제였기 때문에 결국 북한으로서는 서서히 최종 결심을 할 단계에 들어가는 과정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 쪽에서도 북한이 NPT 탈퇴를 선택한 가능성이 커진 이 사태가 굉장히 심각하다는 걱정을 많이 했고, 어떻게 하면 우리가 잘 관여할 수 있을지 고민이 많았다. 

- 북한이 NPT를 탈퇴할지도 모른다는 위기감은 없었나.
▲ 위기감이야 있었다. 북한이 NPT를 탈퇴하는 사태가 오기 전에 우리가 어떤 조치를 할 수 있는지를 협의하기 위해 미국에 간 것이다. IAEA 특별사찰 관련해서 핵통제위원회 회의를 갖는 것이 그러한 사태를 피하는 방법이라는 생각으로 미국 측과 시기를 협의했다. 

-여기서 한 가지 묻고 싶다. 당시에 노태우 정부에서 김영삼 정부로 전환이 됐다. 핵 위기 상황 속에서 1992년 12월 말에 선거가 있었다. 같은 보수정당이기는 했지만 정권이 바뀌게 되는 양상이었는데, 그때 우리 두 정부의 대북정책이나 또는 핵 문제와 관련된 입장에 차이가 있었나.
▲ 큰 차이가 없었던 거 같다. 기본적으로는 보수정권이었다는 게 커다란 이유고 미국과의 교류를 서두르려는 게 그때 새롭게 대통령에 취임한 김영삼 대통령의 의향이었다고 나는 알고 있다. 그래서 당시 제가 미국과 협의를 위해서 나갈 때, 상부의 의지라는 이야기가 있었다. 그러한 상부의 의향을 받들어서, 이 사태를 어떻게든지 관리해 나가자는 생각이 강했다. 

저작권자 © 일요서울i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