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덕수
장덕수

에스키모 늑대 사냥 이야기다. 칼에 피를 발라 얼려서 빙판 한가운데 세워 놓으면 늑대가 얼어 있는 피를 핥다가 자기 혀가 얼어버려 칼에 베인 자기 혀에서 나온 피인지도 모르고 계속 핧다가 결국 죽게 된다는 것이다. 요즘 재계 대표들이 여의도 정가를 찾아 애걸하다 외면당하고 고개를 떨군 채 돌아가는 모습을 보면서 눈앞의 이익에만 심취해 결국 죽어가는 늑대의 종말을 보는 것 같아 안쓰럽다.

재계는 정부와 여당이 추진하는 소위 공정경제 3법'인 다중대표 소송제도 도입과 감사위원 분리 선임 및 대주주 3% 의결권 제한 등이 담긴 '상법 개정안'과 사익편취 규제대상 확대·공정거래위원회 전속고발권 폐지 등을 골자로 하는 '공정거래법 개정안'이 이번 정기국회에서 통과되는 것을 꼭 막아야 한다는 입장이다.  

여당이 추진하는 상법개정안대로 하면 해외투기펀드 등의 이사회 진출을 막기 어려워 경영권 보호에 어려움이 있다는 것이고 내부거래 규제대상을 확대하는 공정거래법은 지주회사에 대한 역차별 소지가 크다는 주장이다.

박용만 대한상공회의소 회장이 지난 21일 "코로나 사태로 도저히 버티기 어렵다는 기업들 목소리가 넘쳐나고 있는데 국회가 이런 기업들 호소에 얼마큼 답변하고 있나"라며 "국회가 경제에 눈과 귀를 닫고 자기 정치에 몰두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걱정된다"고 작심 비판했다.  회장은 “기업 측 이야기는 들을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고 일사천리로 정치권에서 합의하는 데 대해 동의할 수 없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그러나 이를 추진해 온 정부와 여당은 물론이고 그동안 내심 믿었던 보수성향의 국민의힘마저 김종인 비대위원장의 '경제민주화 철학에 맞다'는 뜻에 따라 합의처리에 힘을 싣자 크게 낙담하고 있다. 국민의힘 김 위원장은 입법 불가를 설명하러 찾아온 박용만 회장에게 "그때(박근혜 대선 후보 시절) 만든 공약은 지금 법안보다도 더 강하게 만들었다"고 면박을 줬다. 

이에 대해 경영계에서는 보수정당이 뒤통수를 친 격이라는 반응이다. 코로나19로 경제가 비상인 가운데 반기업적 법안을 막아도 시원찮을 판에 도리어 선도하는 분위기를 조성하고 있다는 판단이다. 지금 경영계 상황을 옛날식으로 풀자면 시어머니와 시누이한테 호되게 당한 며느리가 그래도 내 편이라고 찾은 친정에서 '출가외인이 어딜?'이라며 엄한 아버지한테 쫓겨난 며느리 꼴이다. 

김병준 전 비대위원장이 “경제를 국가권력에 완전히 귀속시켜 버릴 법안”이라며 반대하고 김종인 위원장에 대해 “자유시장경제를 지지하는 정당 철학에 안 맞는 얘기”라고 비난했지만 우파 진영에서도 재계 편을 들어주는 소리는 매우 적다. 의원들이야 김종인 위원장 눈치를 살핀다고 하지만 예전같이 '자유시장 가치'를 훼손하는 법안에 대해 불길같이 일었던 우파진영의 동조 움직임도 없다. 도리어 재야 우파에서는 뒤늦게 쫓아와 도와 달라는 재계의 모습에 눈살을 찌푸린다.

한 재야 우파 인사는 재계에 대해 "우리가 정권을 잡으면 혼내 줘야 한다"고 단단히 벼르고 있다. 이들은 재계를 기업과 그룹 오너의 이익만 있을 뿐 공화정과 시장경제체제, 자유주의 등 '우파 가치 인프라' 구축에는 전혀 무관심한 집단으로 본다. 기업이 경영안정과 수익을 위해, 특히 우리나라처럼 정부 주도 경제시스템에서 정권과의 밀착은 불가피한 점을 인정한다.

그러나 김대중 정부 이후 역대 정권에서 재계는 기업경영의 모태인 '자유·시장·공화' 가치 인프라 구축에 너무나 인색했다는 것이다. 특히 좌파 진영에 대한 후원 규모가 우파 진영 후원 규모에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컸다고 비난한다. 재야 우파 진영에서는 한 좌파 성향 NGO에 매년 수억에서 수십억 원의 지원을 해 온 기업들을 조사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래서 우파 진영은 지금 재계의 다급한 모습에 '깨소금 맛'이다. 우파 NGO 한 대표는 "기업이 당해봐야 그들도 무엇이 잘못인지 안다. 그동안 기업은 보수정권에서도 우파진영에 대해 거지 동냥 주듯이 했다"면서 "오너 중심의 불합리한 경영이 건전한 자유시장경제 체제를 주장하는 우리의 '가치' 운동을 훼손시킨 측면도 크다"고 지적했다. 공정3법이 시장경제 가치 훼손 측면이 있지만 나서서 변호해 줄 단체나 인사는 많지 않은 것 같다.

좌파 성향의 참여연대에 맞설 만한 우파 연구소 또는 NGO는 극히 드물다. 그중의 하나가 바른사회시민회의인데 문재인 정권 출범 후 극심한 경영난을 겪고 있다. 또 전경련 등 재계 관련 단체 산하 연구소가 있지만 제 역할을 못하고 있다. 소속단체 회장단인 대기업에 불리한 법안이나 정책이 나와야만 대응자료나 만들어 낼 줄 알지 평소에 가치와 기본정책 홍보에는 등한시한다. 심지어 정기 간행물이나 보고서에 정부방침과 다른 내용이 실리면 감추거나 아예 싣지 않는 경우도 허다하다.

이번 기회에 재계는 다시 생각해야 한다. 소위 경제민주화는 불가피하다. 그러나 두 날개로 새가 날듯이 경제민주화만큼 자유시장경제를 지키기 위한 법적 사회적 환경개선도 필요하다.  기업과 오너의 이익에만 급급할 것이 아니라 건전한 사회적 인프라 구축에도 힘을 쏟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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