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회의사당, 뉴시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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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스 베이더 긴즈버그 미 연방대법관이 세상을 떠났다. 그는 말 그대로 트럼프 치세에서 지리멸렬하고 있는 미국 진보진영의 아이콘이었다. 87세로 세상을 뜨기 전까지 최고령 연방대법관으로 재직했고, 지난 10여 년간 췌장암 등에 시달려 왔다. 긴즈버그가 암 투병에도 불구하고 연방대법관직을 내려놓지 않은 것은 미국 사회에서 연방대법관은 대통령 못지않게 중요한 자리이기 때문이다.

미국 연방대법원은 종신직인 아홉 명의 대법관들로 구성되고 법의 해석을 통해 미국 사회 변화의 방향을 결정한다. 우리나라로 치면 헌법재판소와 비슷한 역할을 하지만 중요도 측면에서는 비교가 어렵다. 종신직인 연방대법관이 사망이나 은퇴 등으로 대법원을 떠나면 대통령이 후임자를 지명한다. 트럼프 대통령이 업무 중에 가장 좋아하는 일이 연방항소법원, 연방대법원의 판사를 지명하는 일이라고 한다.

현재 미국 연방대법원은 보수성향 5명, 진보성향 4명으로 구성되어 있다. 트럼프가 긴즈버그의 후임으로 보수성향 대법관을 지명하면 미국 사회의 방향추가 보수로 확연히 기울게 된다. 긴즈버그는 세상을 뜨기 전 자신의 손녀에게 “현재 나의 간절한 소원은 차기 대선 이후까지 내 공석이 채워지지 않는 것이다”라고 말을 남겼다고 한다. 하지만, 트럼프는 긴즈버그의 소망과 상관없이 보수 대법관을 지명하려 하고 있다. 

긴즈버그의 죽음만큼이나 트럼프같은 인물이 후임을 지명한다는 사실이 안타깝다. 긴즈버그의 후임이 보수적 인물로 지명되면 미국 진보진영 입장에서는 트럼프가 재선에 실패해도 말짱 도루묵이 되고 말 것이다. 의료보험, 낙태, 소수자 인권 문제 등에서 과거로 회귀하는 판결이 나올 가능성이 높다. 트럼프의 취임 이후 미국정치는 급격히 영향력을 잃었고, 연방대법원이 미국 사회의 굵직한 현안에 대해 결정해 왔기 때문이다.

루스 베이더 긴즈버그는 1993년 빌 클린턴 대통령에 의해 종신직인 연방대법관에 지명되었다. 긴즈버그는 성(性)을 뜻하는 용어로 생물학적인 의미가 강한 섹스(sex)대신 사회적 가치가 담긴 젠더(gender)라는 단어를 처음 사용한 사람이다. 대법원에서도 낙태, 동성결혼, 투표권, 이민 문제 등에서 소수자를 대변하는 판결을 내려왔다. 이름 대신 약자인 RBG라는 애칭으로 불리고 다큐멘터리 영화가 만들어질 정도로 인기가 높다.

우리나라 대법관도 아니고 태평양 건너 대법관의 부고 소식이 안타까운 것은 우리의 사법 현실이 그의 죽음에 투영되기 때문이다. 우리나라에도 법관들은 있다. 판사, 검사, 변호사도 있고, 검찰총장, 대법원장, 헌법재판소장도 있다. 그러나 루스 베이더 긴즈버그는 없다. 그만큼 유명인사, 인기인이 없다는 것이 아니고, 소수자의 편을 들어주는 판사가 없다는 말이 아니다. 대한민국의 사법부에는 긴즈버그처럼 법의 엄정함을 상징하는 존재가 없다.

긴즈버그는 살아서는 판결로 미국 사회를 바꿨고, 세상을 뜬 뒤에는 모두에게 기억되고 있다. 반면, 이 나라의 법관들은 사법 농단으로 기소되고, 코로나19 전파 위험에도 보수집회를 허용하고, 성범죄에 유독 관대한 판결을 내려 욕을 먹는다. 이들 누구의 기억 속에도 남고 싶지 않고, 이름도 알려지고 싶지 않은 법관들에게 긴즈버그의 말을 전한다. “판사는 그날의 날씨가 아니라 시대의 기후를 고려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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