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인권 상황. 중국 탈북자 생생한 이야기...“변한 게 없다”

[일요서울ㅣ정재호 기자] 장길수 씨는 1991년 1월 북한을 탈출했다. 그리고 2001년 6월 가족과 함께 중국 베이징 주재 유엔난민고등판무관실(UNHCR)에 진입해 탈북자로선 최초로 난민 지위를 인정받아 남한에 올 수 있었다. 그러나 그는 새로운 꿈과 희망을 향해 다시 2008년 캐나다로 떠났다. 그가 탈북해 중국에서 저술한 ‘눈물로 그린 무지개’라는 책은 지난 7월부터 일요서울에 연재 중이다. 북한, 중국, 한국, 캐나다로 이어지는 그의 삶은 파란만장하다. 일요서울은 현재 캐나다에 거주하는 장길수 씨와 지난 23일 서면 인터뷰를 통해 그의 근황과 과거에 경험했던 일들에 대해 들어봤다. 

-‘가족들’ 뿔뿔히 흩어져 캐나다 거주, 남한 탈북 생활 ‘처절’

문국한 – 장길수 씨가 큰아버지라 부르는 북한인권국제연대 문국한 대표는 ‘장길수 가족’ 탈북을 주도했다. 문 대표는 1999년 문구 사업을 위해 중국에 진출했다가 알게 된 조선족 여성을 통해 길수 가족과 친척을 소개 받았다. 당시 15명이나 되는 길수 가족은 굶주림을 견디다 못해 북한을 탈출했다. 문 대표는 2000년 길수 군과 그의 가족이 경험한 북한의 인권실태를 글과 그림으로 알리기 위해 ‘눈물로 그린 무지개’라는 제목의 책을 출판했다. 현재 책은 절판됐다. 

장길수 [본인제공]
장길수 [본인제공]

 

 

- 장길수 씨가 저술한 ‘눈물로 그린 무지개’라는 책을 일요서울에 연재 중이다. 감회가 어떠한가.
▲ 처음 한국에 도착했을 때 북한의 인권 실상을 알려야겠다는 마음을 가졌으나 이리저리 생활에 바쁘다는 핑계로 잊고 살 때가 많았다. 하지만 변하지 않은 북한의 실상에 대해 제가 저술했던 책이 미약하게나마 도움이 되고 있어 기쁘고 감사한 마음이다. 

 

- 캐나다에 거주하는 것으로 알고 있다. 어떻게 생활하고 있나.
▲ 현지 회사에 취업해 기술을 배워 지금은 개인사업을 하고 있다.

 

- 지금 캐나다에선 누구랑 같이 살고 있나. 혹시 도와주시는 분이 계신가.
▲ 캐나다로 함께 온 친형, 친구와 함께 살고 있다. 특별히 누군가에게 도움을 받진 않고 있다. 

 

- 건강은 어떤가.
▲ 별 탈 없이 잘 지내고 있다. 

 

- 결혼을 계획하고 있는 여자 친구는 있는가.
▲ 아직까지는 여자 친구나 결혼 계획은 없다.

 

- 북한의 뉴스나 소식은 계속 관심을 갖고 보는가.
▲ 매일 북한 관련 뉴스를 보고 있다. 캐나다에서 일어나는 일보다 한국, 북한의 소식에 더 관심이 간다. 

 

- 북한에서의 삶은 어땠나.
▲ 북한에 있을 땐 다른 세상을 잘 알지 못했다. 모든 세계가 전부 우리처럼 굶주림에 시달리다 죽어 가는 줄 알았다. 내가 살던 시골 마을에선 내 친구들을 포함해 많은 사람들이 굶어 죽었다. 너무 배고파 뱀, 쥐, 곤충, 풀 등 먹을 수 있겠다 싶은 것은 가리지 않고 먹었다. 

 

- 북한의 추석은  어땠나.
▲ 북한도 추석은 남한과 비슷하다. 각지에 흩어져 있는 가족들이 고향집에 모인다. 그리고 한 해 수확한 곡식으로 음식을 만들어 제사도 지내고 벌초도 간다. 식량이 있을 땐 찹쌀떡, 송편 등을 해 먹었다. 또 가족들이 모여 카드 게임도 했다. 그러나 북한에선 지역을 오고 가려면 통행증을 따로 발급 받아야 한다. 그리고 교통 사정도 좋지 않아 가족 모두가 고향에 모여 추석을 보내기가 정말 어렵다. 내가 북한에 있을 때 평양에서 함경북도까지 가려면 기차로 한 달이 걸렸다. 

 

- 북한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일은 무엇인가.
▲ 내 아버지는 학교 선생님이다. 아버지는 회의가 있을 때 점심을 드시기 위해 도시락을 싸갔다. 어머니는 없는 살림살이에 어떻게든 쌀을 마련해 아버지의 도시락을 쌌다. 아버지는 그렇게 귀한 도시락을 항상 절반만 드시고 남겨와 막내인 나에게 먹으라고 주셨다.

 

- 탈북을 결심하게 된 계기는 무엇인가.
▲ 북한과 국경을 마주한 중국은 하루 세 끼 흰쌀밥에 고기반찬으로 먹는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나는 정말 그런 세상이 있는지 확인해 보고 싶었다. 

 

- 북한에서 중국으로의 탈북 과정은 어떠했나.
▲ 지금은 어떤지 잘 모르지만 내가 탈북할 당시엔 군인들에게 발각되면 총알이 날아왔다. 그래서 인적이 드문 곳으로 군인들의 눈을 피해 영하 20도 되는 혹한을 견디며 국경을 건넜다. 지금 생각해도 너무나 끔찍한 순간이다.

문국한 대표[뉴시스]
문국한 대표[뉴시스]

 

- 탈북 이후 문국한 대표를 만나기 전 중국에서 어떻게 생활했나.
▲ 탈북자 신분으로 아무런 외부의 도움이 없이 살아간다는 건 정말 힘든 일이다. 당시 내 나이는 15살이었지만 외할아버지와 함께 도매시장에 가서 자전거에 한가득 야채를 싣고 골목을 다니며 팔았다. 그리고 외삼촌을 따라 중국 가정의 하수구, 쓰레기를 청소했다. 그러나 항상 중국 공안에 잡힐까 두려웠다. 거처가 중국 공안으로부터 위험하다고 판단되면 우리 가족은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 집 밖으로 뛰쳐나와 도망쳤다. 그나마 나는 가족과 함께 중국으로 와 보호 받을 수 있었지만 어린 나이에 홀로 탈북한 친구들은 구걸을 하며 살다 매 맞아 죽거나 추위를 못 이겨 동사했다. 탈북자 신분이기 때문에 그 누구도 신경 쓰지 않았다. 

 

- 중국에서 어떤 계기로 문 대표를 만났나.
▲ 중국에 있으며 한국에 가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그러던 중 큰아버지(길수 씨는 문국한 대표를 큰아버지라 부른다)를 사업상 도와주던 분이 우리의 사정을 알게 됐다. 그리고 문 대표를 소개시켜 줬다. 

 

- 중국에서 그림을 그리게 된 계기는 무엇인가.
▲ 북한을 탈출해 중국에서 생활할 때 큰아버지는 북한 인권 실상을 알리기 위해 내가 북한에서 겪었던 일상을 글과 그림으로 그려 달라고 부탁했다. 글과 그림 실력이 뛰어나진 않았지만 솔직하게 전달하면 된다는 마음으로 썼다.

 

- 문 대표를 만난 이후 중국에서의 삶이 어떻게 변했는가.
▲ 큰아버지를 만나 우리는 한국에 갈수 있다는 희망을 가지게 되었다. 큰아버지는 아무런 조건 없이 우리 가족에게 의식주를 제공해 주고 보호해 줬다. 그 덕분에 우리 가족은 북한의 실상을 알리는 글과 그림을 그렸다. 그 일부가 바로 지금 일요서울에서 연재하는 ‘눈물로 그린 무지개’라는 책이다. 
   
 

- 중국에서 길수 씨와 같이 탈북했던 어머니가 북송 당한 것으로 알고 있다. 어떻게 하다 그런 일이 발생했나.
▲ 어머니께서 중국 식당에서 일을 하다 식당 주인의 신고로 중국 공안에 잡혀 북한으로 송환되었다.

 

- 혹시 어머니의 최근 근황을 알고 있나. 전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무엇인가.
▲ 어머니가 중국 공안에 잡혀 북한으로 강제 송환된 후 우리가 중국에서 북한 인권을 알리는 글과 그림을 그린 것을 북한에서 알고 내 어머니를 정치범 수용소로 보냈다고 들었다. 우리 어머니는 북한 당국에 심문 받는 과정에서 북한 인권을 알리는 글과 그림은 자신이 모두 한 것이라 했다는 말을 전해 들었다. 혹시라도 우리가 북송되어 피해를 당할까 그렇게 자백한 것이다. 어머니는 수용소로 이동하는 기차에서 뛰어 내렸고 철로에 떨어져 정신을 잃어 보위부가 다시 끌고 갔다는 것이 내가 들은 마지막 소식이다. 어머니의 생사는 아직 모르지만 이 자리를 빌려 사랑해, 보고 싶어! 라는 말을 하고 싶다. 

 

- 길수 씨 아버지는 가족들의 탈북을 반대해 끝까지 북한에 남은 것으로 알고 있다. 이후의 소식은 알고 있나.
▲ 아버지는 김일성, 김정일 부자의 역사를 학생들에게 가르치던 선생님이다. 북한 당국에 철저하게 세뇌되신 분이셨다. 그러나 가족이 탈북한 이후 많이 힘들어 하시며 죽기 전에 자녀들을 보는 게 소원이라고 하시는 말씀을 전해 들었다. 나도 아버지가 너무 보고 싶다.

 

- 북한은 김정일에서 김정은으로 최고지도자가 바뀌었다. 길수 씨가 있을 당시와 비교했을 때 북한이 변했다고 보는가.
▲ 시간만 지났을 뿐 북한은 거짓말처럼 아무것도 변한 것이 없다. 오히려 더 악랄한 방법으로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세계를 위협하고 국민을 탄압할 뿐이다. 지금 이 시간에도 많은 북한 국민들이 굶주림과 북한의 폭정에 죽어가고 있다. 
       
 

- 중국에서 한국으로 오게 된 과정 쉽지 않았던 것으로 안다. 어떤 과정을 거쳤는지 말해 달라.
▲ 우리 가족은 탈북자 중 처음으로 중국 주재 유엔난민고등판무관실(UNHCR)에 진입했다. 중국 공안에 강제로 끌려 나갈 수도 있었기 때문에 가족이 서로 묶을 수 있는 끈과 북한에 송환되기 전 목숨을 끊어야겠단 생각으로 쥐약을 준비했다. 다행인지 당시 중국은 올림픽을 준비하고 있었다. 세계 언론에 이 사건이 보도됐고 중국 당국은 우리를 필리핀으로 추방해 결국 대한민국에 입국할 수 있었다. 우리 가족으로 인해 북한인권의 실상을 세계 언론에 알리는 계기가 됐다.
그러나 중국 당국은 이 사건을 계기로 대대적인 탈북자 체포를 벌여 많은 분들이 피해를 보셨다고 들었다. 늦었지만 이번 기회를 통해 죄송한 마음을 전하고 싶다. 

 

- 중국 베이징 소재 유엔난민고등판무관실(UNHCR) 사무소에 진입하기로 한 것은 누구의 아이디어였으며 그때의 감정은 어땠나.
▲ 큰아버지의 생각이었다. 아무도 시도해 본 적 없었기 때문에 많이 무서웠다. 특히 중국 같은 공산주의 국가는 의지만 있다면 유엔 사무실에도 진입해 우리를 끌어 낼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막상 진입할 땐 죽을 각오를 했다.  

 

- 한국에 처음 도착했을 때 어떤 기분이 들었고, 어떤 과정을 거쳐 어디에 정착했나.
▲ 처음 도착했을 때 모든 것이 꿈만 같았다. 몇 달 동안은 계속 꿈을 꾸는 듯했다. 북한에 계신 부모님, 형제, 친구들 생각이 났다. 하나원에서 3개월 정도 사회 적응 훈련을 받았다. 그리고 서울에 정착했다.

 

- 한국 생활에서 어려운 점은 무엇이었나.
▲ 제일 힘들었던 건 사고방식과 생활방식이었다. 그래서 친구를 사귀는 것도 힘들었다. 

 

- 길수 씨가 2011년 캐나다로 유학 갔다고 한국 언론에 보도 됐다. 갑자기 유학을 결심하게 된 계기는 무엇인가.
▲ 2008년 한국에 정착했던 많은 탈북자들이 해외로 이주했다. 나도 다니던 학교를 잠시 휴학하고 잠깐 동안 해외에서 외국어도 배우고 경험도 쌓고 싶었다. 그리고 외국어를 배우면 세계에 북한 인권의 실상을 알리고 어머니의 생사를 알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소망도 있었다. 

 

- 캐나다에서 앞으로의 계획은 무엇인가.
▲ 현재 하고 있는 사업을 꾸준히 성장시켜 안정이 좀 되면 북한 인권의 실상을 알리는 데 좀 더 적극적으로 활동하고 싶다.

 

- 북한, 중국, 한국, 캐나다까지 길수 씨가 원하든 원치 않든 4개국을 경험했다. 비교되는 점은 무엇인가.
▲ 나는 독재와 자유민주주의를 양측에서 경험했다. 국민의 자유를 억압하고 인권을 하찮게 여기는 권력자는 사라져야 한다. 나에겐 자유와 인권을 보장받아 살고 있다는 게 얼마나 큰 축복인지 모른다. 

 

- 추석을 맞이해 독자들에게 하고 싶은 말은?
▲ 코로나19로 모두가 힘든 시기지만 그래도 일요서울 독자들께선 즐겁고 행복한 추석 보내시기를 간절히 바란다. 이 글을 읽고 계신 것만으로 독자들께선 북한인권 운동에 동참하고 계신 것이라 생각되어 너무 감사하다. 

장길수 [본인제공]
장길수 [본인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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