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 사람 대한으로 길이 보전하세

남산에서 본 인왕산 [사진=박종평 기자]
남산에서 본 인왕산 [사진=박종평 기자]
남산공원 입구 [사진=박종평 기자]
남산공원 입구 [사진=박종평 기자]

[일요서울ㅣ박종평 객원기자] 서울의 심장부, 남산에 올랐다. 회현역에서 남산을 향해 첫 걸음을 뗐다. 곁에서는 등산객이 켜 놓은 트로트 소리가 들렸다. 트로트 열풍이 실감난다. 한 때는 일제의 잔재로 비판받고, 낡은 문화로 외면되었던 장르였다. 세상도 사람의 마음도 간사한 듯하다. 트로트가 어떻든 우리민족에게 춤과 노래는 생명 그 자체이다. 역사 기록을 살펴보면, 부여 영고(迎鼓), 동예 무천(儛天), 고구려 동맹(東盟)과 같은 축제에서는 빠짐없이 춤과 노래가 불려졌다. 수 천 년 동안 유전자에 새겨진 춤과 노래의 끼는 오늘날 더욱 깨어났다. 방탄소년단(BTS)이 보여주듯 이제는 세계를 호령하고 있다.

남산 길에 퍼지는 트로트 소리에 귀를 팔며 남산공원 입구에 도착했다. 그제야 눈이 번쩍 뜨였다. “남산 위의 저 소나무 철갑을 두른 듯. 바람 서리 불변함은 우리 기상일세. 무궁화 삼천리 화려 강산. 대한 사람 대한으로 길이 보전하세.” 산들바람에 흔들리는 소나무 가지에서 민족에게 영원히 새겨질 단 하나의 노래,「애국가」가 손짓하는 듯했다. 2절로 인해 이미 뒤죽박죽된 애국가를 읊조리며 공원길을 따라 올랐다.

위인 동상 전시장과 부티나는 안중근 동상

안중근의사 동상 [사진=박종평 기자]
안중근의사 동상 [사진=박종평 기자]
[자료=박종평 기자 정리]
[자료=박종평 기자 정리]

남산은 시대를 망라한 우리 역사 위인들의 동상 전시장이기도 하다. 만든 시기도, 조작가도, 주관한 사람들도 제 각각이다. 회현역에서 남산공원 입구, 남산타워를 거쳐 장충단공원까지 코스는 동상 코스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공원 입구에서 길을 따라 3분 정도 올라가면 왼편에 신라 김유신 장군 동상이 처음 나타난다. 그 바로 위쪽에는 대한민국 부통령 이시영, 대한민국 임시정부 주석 김구 선생 동상이 있다. 다시 조금 더 가면 안중근 의사 동상이 나온다. 코스의 마지막 지점인 장충단 공원 부근에는 유관순 열사, 이준 열사, 사명당 대사 동상이 있다. 남산에 있는 다른 동상들로는 퇴계 이황과 다산 정약용, 애국지사 김용환 동상도 있다. 

안중근의사 동상 뒤편에는 동상을 옮긴 전말을 기록한 「안중근의사동상이안기」가 있다. 1959년 국민성금으로 조각가 김경승이 제작한 동상을 세웠는데, 1963년에 현재의 남산 위치에 옮겼다는 내용이다.

남산에 세워졌던 안중근의사 동상은 모두 세 개다. 첫 번째는 1959년 지금의 숭의대학교 위치에 세워졌고, 1963년에 남산 현재 위치에 옮겨졌다. 1973년 김경승에 의한 두 번째 동상이 제작되면서 첫 번째 동상은 전남 장성 상무대로 다시 옮겨졌다. 2010년 세 번째 동상이 이용덕에 의해 제작되어 현 위치에 세워졌다. 그 때 두 번째 동상은 첫 번째 동상이 세워졌던 숭의대학교로 옮겨졌다. 그러나 현재의 안중근 동상 주변에는 그런 사실을 설명하는 안내판이 없다. 때문에 인터넷에는 사실이 뒤엉킨 상태로 언급되고 있다. 유네스코 세계기록문화유산인 조선왕조실록을 갖고 있는 우리 민족으로서는 앞뒤가 맞지 않다. 또 김경승이나 이용덕이 제작한 동상의 경우도 얼굴은 아쉽게도 사진으로 본 익숙한 얼굴이 아니다. 사냥과 전투, 유랑의 길을 다녔던 안중근의사의 시련이 담긴 몸도 아니다. 안중근의사의 삶이 투영된 동상이라고 보기에는 너무 부티나고 둔해 보인다.

 안중근 어록비와 400여 년 만에 귀국한 와룡매

와룡매 [사진=박종평 기자]
와룡매 [사진=박종평 기자]

이시영, 김구 선생 동상을 지나 중턱쯤에 이르면, 고인돌과 같은 바위덩어리들이 보인다. 안중근의사의 말씀이 새겨진 18기의 어록비들이다. 그 옆에는 코로나로 휴관 중인 안중근의사기념관이 있다. 동상도 그 곁에 있다.

어록비는 안중근의사숭모회나 기업인들이 헌납한 것들이다. 한국유리공업주식회사 최태섭 회장이 세운 어록비가 가장 많다. 정주영 현대그룹 회장이 헌납한 안중근의사의 <장부가(丈夫歌) 어록비>는 눈길을 끈다. 다른 기업인들과 달리 회사명이 없이 ‘정주영’이라는 이름만 새겨져 있다. 어록비 중 가장 눈길을 사로잡는 것은 숭모회 부이사장 최성모 선생이 헌납한 <見利思義 見危授命(견리사의 견위수명 : 이익을 얻게 되면 정의를 생각하고, (나라에) 위기가 닥치면 목숨을 바친다) 어록비>이다. 이집트 오벨리스크처럼 생겼다.

그 옆에는 와룡매(臥龍梅)라는 매화나무 한 그루가 있다. 주위 나무에 비해 가냘퍼 꽃이 필 때 외에는 무심코 지나기 쉽다. 임진왜란 때 일본군은 우리나라의 각종 보물과 서적을 약탈했다. 심지어 창덕궁에서 자라던 매화나무까지 훔쳐갔다. 와룡매는 그 때 도둑질 당했던 매화나무 후계목이다.

 남산 소년 이순신과 청년 영웅 안중근

안중근의사가 감옥에서 직접 쓴 『안응칠 역사』와 직접 언급한 「재판기록」을 보면, 안중근과 남산이 큰 관계는 없다. 그럼에도 남산 언저리에 처음 동상이 세워졌고, 뒤에 기념관이 세워졌다. 그러나 남산에 동상이 세워진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남산 때문이다. 남산 아래 지금의 인현동은 이순신이 태어난 곳이다. 남산 아랫동네 출신 이순신의 기운이 훗날 안중근에게까지 닿아 불멸의 거사를 성공시킨 것으로 상상해 볼 수 있다.

이순신에 대한 기록을 살펴보면, 어린 시절과 청년 시절 기록이 불과 몇 줄 되지 않는다. 장군의 조카 이분이 지은 「이충무공행록」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나온다.

“아이들과 놀 때면 매번 진을 치고 전쟁놀이를 했는데, 아이들이 반드시 공(이순신)을 장수로 받들었다. 처음에 두 형을 따라 유학 공부를 했는데, 성공할 만한 재주와 총기가 있었으나, 매번 무인이 되고 싶은 뜻이 있었다. 22세 겨울에 무예를 배우기 시작했는데, 팔 힘과 말을 타고 활을 쏘는 것은 같이 공부했던 사람들이 경쟁 상대가 되지 못했다.”(박종평, 『난중일기』, 글항아리, 2018)

다음은 안중근의사가 직접 자신에 대해 쓴 내용이다.

“어려서부터 특성이 사냥을 즐겨, 언제나 사냥꾼을 따라다니며, 산과 들에서 사냥하며 다녔다. 차츰 장성해서는 총을 메고 산에 올라 새 짐승들을 사냥하느라고 학문을 힘쓰지 않으므로, 부모와 교사들이 크게 꾸짖기도 했으나 끝내 복종하지 않았다. …… 글은 이름이나 적을 줄 알면 그만이다. 만고영웅 초패왕의 명예가 오히려 천추에 남아 전한다. 나도 학문 가지고 세상에 이름을 드러내고 싶지는 않다. 저도 장부요, 나도 장부다.”(이은상 편, 『안중근 의사 자서전』, 안중근의사숭모회, 1979)

어릴 때 이순신과 안중근은 성격이 똑같다. 그들은 꿈도 같다. 이순신은 대장, 안중근은 영웅․장부이다. 그들은 문장으로 출세를 꿈꾸기보다 각기 활과 총을 들고 전쟁터를 누비는 꿈을 꾸었다.

20세기에 환생한 불멸의 이순신, 안중근

이순신과 안중근은 담대한 가슴, 수많은 독서를 통한 풍부한 지혜를 갖은 활과 총의 명사수였다. 출세, 권력, 부를 탐하지 않았다. 혼돈이기에 안중근은 천주교인으로 하나님을 믿었다. 전쟁터에서 이순신은 국가와 백성, 군사들의 운명을 하늘에 의지했다. 그들은 전쟁터에서 자신을 잊었고(亡身), 가족까지 잊었다(亡家). 필사즉생(必死則生)의 자세는 두 위대한 영혼이 한 몸이었음을 보여준다. 죽음조차 일본군의 총탄 때문이었다. 이유와 형식은 다르나 각기 일기와 자서전으로 자신의 삶을 남겼다. 안중근은 환생한 이순신이다. 차이점도 있다. 두 사람의 변곡점은 32세이다. 32세 이순신은 무과 급제로 나라를 구하는 첫 발을 내딛었다. 32세 안중근은 침략 원흉 이토 히로부미를 사살하고 순국했다.

기묘하게도 32세는 두 사람을 잇는 고리이다. 너무나 닮았기에 32세 이전의 기록을 남긴 안중근의 『안응칠 역사』는 기록가 이순신의 비어있는 32세 이전의 모습을 상상하게 해 줄 수 있다. 또한 천주교인 안중근에게 하나님이 히로부미 사살을 허락하지 않았다면, 32세 이후의 안중근도 이순신처럼 전쟁터를 돌다가 끝내는 이순신처럼 불패의 명장이 되어 역사의 별이 되었을 듯하다.

『안응칠 역사』와 이순신의 『난중일기』를 연결해 읽어보면, 청년 이순신을 안중근에게서 볼 수 있고, 중년 안중근을 이순신에게서 발견할 수 있다.

 안중근의사의 잘린 손가락과 사진의 비밀

아르헨티나의 혁명가 체 게바라 사진은 그의 삶이나 뜻과 달리 세계적 히트 상품이다. 우리나라 사람들조차 아주 익숙하다. 우리 민족에게는 체의 사진과 달리 그 자체로 자부심을 주는 안중근의사의 사진이 있다. 히로부미를 사살한 직후 여순 감옥에서 촬영된 왼손의 잘린 손가락을 배에 얹힌 사진이다. 그 사진에는 두 가지 비밀이 있다. 첫째는 일반적으로 알려진 사진에 있는 왼편 가슴 부위의 하얀 띠이다. 그 하얀 띠에는 아주 유심히 보지 않으면 알 수 없는 글자가 씌여 있다. 안중근의사의 자(字)인 ‘안응칠(安應七)’이다. 기존의 여러 사진에는 흰 띠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그런데 이돈수 한국해연구소장이 입수한 독일 인류학자 한스 네버만(Hans Nevermann) 소장 사진을 보면, 흰 띠는 안중근의사의 명찰이다. 일제는 안중근의사를 범죄자로 여기고 그의 가슴에 명찰을 붙이고 사진을 찍었다. 또 그들은 안중근의사의 특징이라고 할 수 있는 절단된 손가락을 눈에 띄도록 배에 얹히게 했다. 이 사진 역시 일제의 폭력을 증명하는 증거이다.

둘째는 손가락을 자른 단지(斷指)이다. 안중근의 재판기록 등을 보면, 일제는 집요하게 단지 이유를 물었다. 그들은 우리민족의 ‘단지’ 의미를 이해할 수 없기에 마치 일본 야쿠자와 같은 폭력배의 행동으로 본 듯하다. 안중근의사는 단지에 대해 1909넌 동지 12인과 나라를 위한 단체를 만들고 결의와 맹세의 표시로 왼손 약지를 끊고, 흐르는 피로 태극기에 ‘대한독립’이라고 썼다고 한다. 본래 단지는 우리 민족에게 효도 상징이다. 병환으로 위태로운 부모를 살리기 위한 최후 수단으로 손가락을 잘라 그 피를 어버이 입에 넣는 일이 많았다. 단지는 조선시대에 일상적이었다. 훗날 효종이 되는 봉림대군이 세자일 때 위독한 인조를 위해 단지를 시도하기도 했다. 일제강점기인 1920~30년대에도 흔했다. 심지어 『동아일보』 기사를 보면, 근대화된 1962년에도 청소년들이 어버이를 위해 단지한 사례가 나올 정도이다. 12인의 단지는 충과 효가 하나라는 전통적인 생각을 반영한 것이다. 그러나 조선역사에서 나라에 대한 충성 맹세로 단지한 사례가 거의 없기에 안중근과 단지동맹원의 단지는 더욱더 특별하다.

 이토 히로부미를 사살한 총알

 

안중근의사 권총과 총알 [사진=박종평 기자]
안중근의사 '십자 총알' 사진 [사진=안중근의사기념관 제공]
안중근의사 권총과 총알 [사진=안중근의사기념관 제공]
안중근의사 권총과 총알 [사진=안중근의사기념관 제공]

안중근의사의 총알에는 ‘십자(十字)’가 새겨져 있다. 이에 대해 몇 가지 주장이 있다. 첫째는 안중근의사가 직접 새겼다는 것, 둘째는 새겨진 것을 구입했다는 것이다. 직접 새겼다는 주장에는 안중근의사가 천주교인이기에 십자가처럼 십자를 새겼다는 주장과 총알의 파열효과를 통해 살상력을 높이기 위한 목적이라는 주장이 있다.

일본인들은 안중근의사와 그의 동료들에게 반복적으로 집요하게 ‘십자’에 대해 물었다. 1800년대 말과 1900년대 초에 총알에 홈을 내 살상력을 높이는 일이 빈번했다. 때문에 안중근의사가 의도적으로 ‘십자’를 팠다면, 안중근의사를 잔인한 암살자로 만들 소재로 활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안중근기념관에 요청해 받은 안중근의사의 권총과 총알 사진을 보면, 총알에는 분명히 푹 파인 ‘십자’가 있다. 재판기록을 보면, 이토 히로부미를 사살할 때 사용한 총과 총알은 윤치종에게 받은 것이고, 총알에는 십자가 본래부터 새겨져 있었다고 한다. ‘십자’는 안중근의사가 직접 새긴 것도, 또 구매한 것도 아니다.

다만, 천주교인 안중근의사 입장에서는 ‘십자’가 새겨진 총알이 손에 들어온 것은 하늘의 뜻이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어머니에게 보낸 편지에 안중근의사는 “이 현세의 일이야말로 다 주(主)의 명령에 걸린 바”라고 했기도 했고, 아침에는 늘 기도를 했다고 했기 때문이다.

안중근의사 의거는 천주교인으로서는 하늘의 명령이었고, 하늘을 대신해 악인을 심판한 행동이다. 대한국인으로서는 의병참모중장으로 참전해 적군 수괴를 사살한 전투행위였다.

이토 히로부미를 사살한 뒤 그가 외친 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코레아 우라! 코레아 우라! 코레아 우라!.” ‘코레아 우라’는 재판기록에 따르면 정확한 우리말 뜻은 “대한국(大韓國) 만세”이다.

유난히 푸른 하늘, 푸른 남산

안중근의 혼이 담긴 터를 떠나 남산타워로 길을 잡는다. 경사진 길에 눈부신 푸른 하늘이 나무 사이로 쏟아진다. 남산타워에서 가쁜 숨을 잠시 고르며 사방을 둘러본다. 이 얼마나 아름답고 귀한 도시인가. 멀찍이 동서남북 멋진 산들의 병풍이 쳐져 있다. 햇볕에 반짝이며 비단결처럼 도시를 흐르는 한강도 보인다. 남산타워에서 장충단공원 쪽으로 방향을 잡아 몇 걸음 가다 보면, 「서울의 중심점」표지가 공원 한쪽 바닥에 설치되어 있다. 그 표석이 바로 오늘의 서울 중심을 가리킨다. 전통 활터인 석호정을 지나 신라호텔 방향으로 가다보면 좌측에 한글학자 최현배 선생 기념비가 나온다. 더 내려가면 동국대학교 입구가 나오고, 오른편 남산터널 방향으로 가면 숨어 있는 듯한 유관순 열사 동상이 있다. 다시 장충단공원으로 가면 독립운동가 이한응선생기념비, 이준열사 동상, 파리장서비, 장충단비, 사명대사동상을 만날 수 있다. 회현역에서 출발해 걷고 보고 느끼다 보면, 4시간 30분 정도 걸린다. 그 시간 동안 지난 100년의 고통과 아픔을 되새길 기회다.

남산 답사의 마지막 울림은 최현배선생 기념비 뒤편 울타리 벽에 있는 「임」이라는 시이다. “임이여 어디 갔노. 어디메로 갔단 말고. 풀나무 봄이 되면 해마다 푸르건만. 어찌하다 우리의 임은 돌아올 줄 모르나.” 남산에서 만난 수많은 우리의 ‘임’이시여 이 혼란한 시대에 어디에 계십니까.

안중근기념관 주소 용산구 후암동 30-80
남산서울타워 주소 용산구 남산공원길 105
장충단공원 주소 중구 장충동 2가 1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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