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 미사일 [뉴시스]
북한 미사일 [뉴시스]

 

[일요서울] 국립외교원 외교사연구센터에서 ‘외교’라는 렌즈를 통해 우리 현대사를 조명하기 위해 오럴히스토리사업 ‘한국 외교와 외교관’ 도서 출판을 진행해 왔다. 지금까지 총 17권의 책이 발간됐다. 일요서울은 그중 공로명 전 외교부장관의 이야기가 담긴 책의 내용 중 일부를 지면으로 옮겼다.

“북핵, IAEA 사찰 충실한 이행, 남북한 상호사찰 통한 해결 원칙”

“북한에 대한 사찰 없이 제네바합의 이루어져”

- IAEA가 특별사찰을 요구하게 되는 갑작스러운 위기 상황 속에서 우리 정부의 정권교체도 일어났고, 장관님께서는 1993년 3월 초에 전격적으로 워싱턴을 방문하셔서 고위급회담에 참여하셨다. 당시 미국 국무성 정무차관, 국방성 차관 그리고 국가안전보장회의(NSC)의 보좌관에 이르기까지 모든 외교·안보 담당 인사들과 연쇄접촉을 하신 것으로 알고 있는데, 그때 어떤 말씀을 하셨는지 저희 입장은 무엇이었는지 설명을 부탁드린다. 

▲ 기본적으로는 새로운 우리 정부의 북한 핵 문제 대한 입장을 전달하고 IAEA의 사찰을 어떻게 실시할 것이며, 그 결과를 우리가 어떻게 가져가야 하느냐는 선택을 논의한 게 주된 목적이다. 북한 핵 문제는 IAEA 사찰의 충실한 이행과 효과적인 남북한의 상호사찰을 통해서 해결해야겠다는 게 하나의 원칙이다. 구조가 그렇게 되어 있다. 그래서 IAEA의 확고한 대북한 조치를 한·미가 어떻게 지시하고 지원하느냐다. 

그다음에 남북관계의 긴장과 북한의 NPT 탈퇴라는 돌발적인 사태를 방지하기 위해서 우리가 어떤 대북 노력을 해야 하는지에 관해 미국 측과 협의하겠다는 입장이다. 현장에서는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도록 IAEA에 최대한 지원을 하자는 방안이 하나였고, 그다음에 IAEA 특별사찰 진전 여부를 잘 보아가면서 3월18일 팀스피릿 훈련 종료 후 적절한 시기에 핵통제위원회 회의를 하는 방안을 검토해보자는 방안이 있었다. 그리고 이러한 것을 뒷받침하기 위해서 미·북 간 고위급회담을 하면 어떻겠느냐는 게 우리 정부의 생각이었다. 

- 북한이 극한 상황을 선택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 우리가 미국 측에 북·미 고위급 접촉을 제안했다는 것인가.
▲ 동시에 일본 고이즈미 준이치로 내각이 당시 대북관계 개선을 위해서 활발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그래서 일본의 대북한 관계 교섭을 활용할 길을 모색하기 위해 일본과도 협의하라는 지시를 받고 갔었다. 

- 당시에 윌리엄 클락 동아태차관보나 피터 타노프 국무성 정무차관, 아니면 프랭크 와이즈너 국방부촤관 등에게 연쇄적으로 그런 내용들을 말씀 하셨을 거라고 생각한다. 이 극한 상황을 완화시키기 위해서 북·미 고위급 접촉을 해야 된다는 이야기를 미국에 권유하는 내용이었다고 본다. 어떤 의미에서는 1992년 초에 있었던 캔터와 김용순의 접촉에서 북·미 고위급회담을 원하는 북한에 대해서 어느 미국 교포의 증언에 일부 내용이 나왔던 것으로 알고 있는데 북한의 조건은 어떤 것이었나.
▲ 캔터와 김용순 사이의 회담에서는 미국 측이 IAEA의 핵안전조치협정을 조속히 타결하고 한반도비핵화공동선언 지시사항을 합의해서 서명과 비준을 빨리하라는 이야기였다. 아직 비준이 안 되었을 때다. 그다음에 IAEA 사찰을 받으라는 것이었다고 한다. 김용순, 북한 측이 그토록 원하던 북·미 고위급회담 정례화를 미국 측에서 이야기하면서 이 조건을 들어야 관계가 이루어진다고 했다고 한다. 

- 조건이 한 가지가 더 있었던 것으로 알고 있다. 남북 상호사찰이 있지 않았나.
▲ 미국에서 만났을 때는 없었다고 했다. 그런데 그 후에 미국이 남북 상호사찰을 빨리 실시하라는 조건을 추가했다고 했다. 

- 캔터와 김용순 사이에서는 그런 이야기가 없었다는 말인가.
▲ 그렇다. 남북 간 합의가 되고 핵통제위원회 설치에 대한 교섭이 이루어지고 있으니까 그런 조건을 집어넣었던 모양이다. 추가 조치가 언제 나왔는지 지금 기억나지 않는데, 그 일 때문에 미국 내에서도 불만이 많았다고 한다. 미국의 도움으로 북한이 골대를 잡아 옮기게 됐다는 비판이다. 결국 IAEA 안전협정, 남북 비핵화공동선언 서명 비준, IAEA 사찰, 남북 상호사찰 순의 조건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결국 NPT 탈퇴 위기를 막는 방법으로 북·미 고위급 접촉을 시도해보려고 하는 듯하다는 이야기를 우리가 했다. 

- 북·미간 고위급 접촉을 하라고 우리 측에서 이야기한 것은, 결국은 우리로서는 북한에 턱을 하나 받쳐주는 셈이다. 
▲ 우리로서는 양보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우리는 줄곧 남북 간의 원칙에서 이야기 했는데, 그런 원칙만 가지고는 해결이 안 되니까 현실론의 방법으로서 생각한 것이다. 제1차 접촉이 있었으니까 제2차 접촉을 미끼로 내던지는 것도 결과적으로는 북한의 과격한 행동을 어느 정도 견제하는 방법이라고 생각을 했던 거다. 

- 결국 나중에 북·미 고위급회담으로 발전해나가는 계기가 되었나.
▲ 결국 그렇게 된 추세다. 이야기가 좀 궤도에서 벗어납니다만 1993년에 제네바합의가 이루어질 때는 마지막 순간에 굉장히 급전이 됐다. 그전까지 우리 측은 북한 핵의 형상을 확실히 파악한 후에 북·미 간의 확고한 합의가 이루어질 수 있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니까 제네바합의가 서명되기 전에는 북한에 대한 사찰이 있은 후에 서명이 이루어진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는데, 그런 과정 없이 제네바합의가 이루어졌다. 그리고 이에 대한 미국 측의 해명이 없었다. 

- 결국은 과거 핵 기록, 플루토늄을 추출해서 핵무기를 만들었을 의혹이 있기 때문에 의심 시설을 봐서 북한의 과거 핵 흔적을 확인해야 된다는 게 특별사찰을 하게 된 원인이었는데, 결국 제네바 합의에서는 그 문제를 아예 덮어놓고 미래마 보는 식으로 갔다. 제네바 합의가 결국 경수로가 완성된 다음에야 실제로 북한의 핵 상환에 대해 볼 수 있게 만들어 버렸다는 생각이 든다. 
▲ 특별사찰을 했더라면 그 결과를 가지고 이야기할 수 있는데, 그렇지 못했다. 제네바합의를 교섭하러 넘어갔을 때인데, 가기 전에는 북한 측에서도 제네바합의를 원하는 상황이었다. 북·미 접촉이라는 결과물이 나오기 전에는 확고하게 북한의 상황에 대해 알아야겠다는 생각을 미국 실무자들도, 우리 측도 가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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