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철아, 미안하다. 너는 역시 사내야”“그러니까 무기 불법 소지죄와 살인미수에 대한 죄과는 단장이 아닌 제가 져야 마땅하다고 생각합니다. 그 이유는 사건 전날 밤 제가 단장을 찾아가 이탈자를 방지하기 위해서 제가 가지고 있던 권총과 실탄을 단장에게 주고, 간부들이 보는 앞에서 배신자는 심복이라도 이렇게 쏘아죽인다는 본보기를 한 번 보여주라고 간청을 했기 때문입니다.”“그렇다면 증인이 고소를 제기한 경위는?”“지금 이 자리에는 방청인도 많고해서 상세한 경위까지 말씀드리기 어렵다고 생각됩니다만 굳이 그 경위를 말씀드리자면 제가 쓴 것같이 되어 있는 고소장은 기실 제 자신이 그렇게 쓴 것이 아니고 경찰에서 조작하도록 종용하여 그렇게 된 것입니다.”지금까지 배신자로만 여겨왔던 김관철의 입에서 뜻밖의 진술이 나오자, 김두한은 눈물을 주르르 흘렸다.“관철아. 고맙다!”이윽고 재판장으로부터 오늘 재판은 이것으로 폐정한다는 소리가 떨어지자 김두한은 번개처럼 증인석으로 날아갔다. 그리고 김관철을 와락 끌어안으며“관철아, 미안하다. 너는 역시 사내야!”이렇게 말하고는 펑펑 눈물을 쏟았다. 그야말로 감격의 눈물이었다.“단장님, 미안합니다. 그동안 심려를 끼쳐드려서….”김관철도 목이 메어 말을 잇지 못했다.

◆ 바람둥이 박인수 사건재판 이야기가 나와서 말이지만 그 무렵에 많은 사람들에게 화제의 대상이 되었던 희대의 바람둥이 박인수에 대한 이야기를 빠뜨릴 수 없겠다. 그러니까 1955년 6월 어느날이었다. 이화여대생을 비롯한 70여명의 여인을 간통한 세칭 ‘박인수 여대생 간음 사건’은 전국의 각계각층에 걸쳐 화제가 파다했던 것이다.희대의 바람둥이 박인수는 헌칠한 키에 알맞게 떡 벌어진 가슴과 어깨를 지닌 그야말로 사내다운 풍모를 갖춘 26세의 젊음이 넘치는 청년이었다. 거기다 여인들에게 세심한 주의와 예의로 호기심을 사는 이른바 사교춤의 명수였다.그는 경남 김해군 출신으로 서울 동국대학교 사학과 2학년 재학중에 6·25동란을 맞이했다.그는 6·25사변이 발발하자 뜻한 바 있어 해군장교로 입대했다. 국가관이 투철한 그는 어느덧 해군 헌병 대위가 되도록 군복무에 충실하였다.

그는 신분이며 직책이 비교적 자유스러운 활동과 많은 사람들과 접촉할 수 있어 고급 사교장에 빈번히 드나들게 되었다. 따라서 많은 여인들과의 친교가 시작되었다.이때 그와 약혼한 여인이 그의 아무런 양해도 없이 그를 배반하고 다른 남자와 결혼하게 되었다. 이에 큰 충격을 받은 그는 근무지를 이탈하여 그 여인만을 쫓아다니다가 결국 군기 문란과 무단 이탈죄로 1954년 4월 초순경에 징계위원회에 회부되어 불명예 제대가 되고 말았다. 한 여인의 배반이 가져다 준 상처는 그에게 너무나 컸다.그는 고뇌의 몸부림 끝에 마침내 세상의 모든 여인을 적으로 삼게 되었다. 결국 그를 배반한 여인과 꼭 같은 방법으로 모든 여인들에게 복수하기로 결심했다.그는 그가 말하는 여인들에 대한 복수를 하기 위하여 제대와 동시에 반납해야 할 신분증과 공무집행증을 반납하지 않고 그대로 소지한 채 현역 해군 대위의 행세를 하면서 그동안 친교로 맺어진 여인들을 찾아다니며 댄스에 열중하였다.

그는 1954년 4월부터 주로 해군 장교구탁부(L·C·I), 국일관, 낙원장 등을 무대로 그가 말하는 처녀 헌팅을 시작했다. 처녀 헌팅을 시작한지 1년여에 여대생을 비롯한 70여명의 여인을 꼬득여 여관이나 호텔에 유인하여 농락했다. 그는 검찰 수사관에게 말하기를 우리 나라 여성들의 정조 관념에 대해 너무나 정조 관념없이 쉽게 허물어져 실망했다고 토로하고 있다. 이렇게 많은 여인들을 농락하는 동안 거기에 소요되는 자금도 꽤 들었다고 한다. 그가 자금 조달 때문에 저지른 범죄 혐의를 조사중이던 검찰청 수사관은 그는 친면이 있는 여인들과 댄스홀에 드나들면서 많은 여인들과 간음을 하는 등 경제적 피해를 입혔다고 한다. 그러나 많은 피해자들이 여성들인 만큼 부끄러워 외부에 밝혀지기를 꺼렸다. 결국 피해자 중에서 간음 및 경제적 피해 사실이 밝혀진 것은 수명의 이화여자 대학생들만 수사 선상에 오르게 되었다.

그리하여 박인수는 마침내 경찰과 검찰의 문초를 받고 공무원 자격 사칭 및 혼인을 빙자한 간음죄 등으로 검찰에 기소되어 공판장에 서게 되었으며 색마라는 낙인이 찍히게 되었다.검찰의 기소 내용에는 처녀를 유린한 범죄 사실이 불과 4,5명 뿐이었으며 그가 자랑삼아 밝힌 고관이나 국회의원들의 딸을 비롯한 수십명에 대해서는 그들의 거처 불명을 이유로 기소되지 않았다. 당시 기소장에 기재된 내용을 밝히면 다음과 같다.① 아직 총각임을 기화로 해군 헌병대위로 사칭하고 결혼을 빙자하여 미혼여성의 정조를 유린할 목적으로 1954년 4월 초순경 약 15일간 서울시 사직동에 자리잡고 있는 ‘송죽여관’ 및 종로 3가 철원여관 등 여러 곳의 여관에서 이화여대 정치외교학과 2년생 임봉혁(23세·가명)과 하등의 결혼할 의사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결혼할 것처럼 속여 전후 15회나 정을 통했다.<다음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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