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 [뉴시스]
북한 [뉴시스]

 

[일요서울] 국립외교원 외교사연구센터에서 ‘외교’라는 렌즈를 통해 우리 현대사를 조명하기 위해 오럴히스토리사업 ‘한국 외교와 외교관’ 도서 출판을 진행해 왔다. 지금까지 총 17권의 책이 발간됐다. 일요서울은 그중 공로명 전 외교부장관의 이야기가 담긴 책의 내용 중 일부를 지면으로 옮겼다.

“결국 북한은 핵실험 했다”

“북한은 믿지 말고 모두 하나씩 교섭해나가야”

- IAEA와 남북 동시사찰을 통해서 확인하고 난 다음에 한다는 전제였는데, 사찰 없이 그냥 합의가 만들어진 셈이다.
▲ 우리 측에 그에 대한 기록이 없었는데, 내가 외무부장관으로 들어오고 나서 그 기록을 찾았다. 오준 대사가 그때 한승주 장관 보좌관으로 있어서 그에게 기록이 있느냐 물으니, 없다고 했다. 한승주 장관과 로버트 갈루치 대표 사이에서 무슨 이야기가 오고 갔는지 기록이 없다. 그래서 오랫동안 미스터리로 생각을 했다. 그런데 몇 년 후에 출간된 윌리엄 페리 장관의 회고록을 보니 제네바합의에 대한 챕터가 있었다. 미국이 서둘러서 1994넌에 제네바합의를 한 것은 사찰을 위해 옥신각신하며 시간이 흘러가는 것보다는 우선 북한의 핵 활동을 중지시키는 일이 더 중요하다는 생각에서 결정했다는 대목이 나온다. 그래서 내막을 이해하고 납득했다. 

- 핵 한두 개를 만들 것을 저지하기보다, 장래에 양산체제로 들어가지 못하도록 막는 것을 더 중점으로 한 합의였다는 것인가.
▲ 그런데 결국은 북한이 핵 실험을 했다. 

- 또 당시에는 플루토늄만 막는 제네바합의 자체는 결국 영변 핵시설만 본 선택이다. 북한은 파키스탄과의 외교를 통해서 우라늄 농축을 유입하기 시작했기 때문에 사실 제네바합의는 지금 와서 평가해보면 반쪽짜리도 안 되는 합의였을 가능성이 클 것 같다. 그리고 장관님께서 미국에 가서 말씀을 하셨는데, 당시 미국의 반응은 어땠나.
▲ 북한이 NPT 탈퇴라는 극약처방을 하지 않도록 방지하기 위해서, 우리 측에서는 팀스피릿 훈련이 끝나고 김일성 생일 이전인 3월 하순에 핵통제공동위원회를 열자고 미국에 제안했다. 미국도 동의를 했었고, 그다음에 우리가 북·미 고위급회담 재기는 고려해볼 만하지 않겠냐고 이야기한 데 대해서는 남북 간 비핵화공동위원회가 다시 열리기 전에 북·미 간 고위급회담을 하게 되면 북한에 잘못된 신호를 보낼 우려가 있다고 했다. 그러기 위해서 국무부에 이야기를 했더니, 다시 한 번 협의를 해야겠다는 답이 왔다. 국방부 쪽에서는 와이즈너 차관이 잘못된 신호를 주는 게 아니냐고 이야기하기도 했고, 상당히 신중하고 소극적이었다. 

- 탈퇴할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을 수도 있었겠다. 
▲ 아직 그 단계는 아니었다. 

- 그리고 장관님께서 그곳에서 일본으로 가셨는데, 도착하시자마자 북한이 NPT 탈퇴를 선언하는 바람에 결국 급거 서울로 오시게 되셨나.
▲ 그렇다. 비행기로 가는 동안에 벌어진 일이다. 황당했다. 비행기에서 오와다 하사시 차관과 통화만 하고 왔다. 

- 돌아오시고 난 다음에 주일대사가 되셨나.
▲ 3월9일경에 돌아온 걸로 기억이 되는데, 돌아오고 나니까 주일대사로 가라는 이야기가 나오기 시작했다. 그래서 오와다 차관과 전화로 협의하는데, 앞으로 한·미·일 3자 공동회의를 하는 게 좋겠다는 말이 있었다. 제가 3자 회의를 하려면 복잡할 수도 있으니까 한·미 또 미·일, 한·일 같은 양자협의를 통해서 긴밀히 접촉해가는 게 좋겠다는 이야기를 하고 돌아와서 교토대사에게 토의 내용을 전달했다.

- IAEA가 북한이 핵 안보 조인을 했고, IAEA 사찰이 이루어지고 있는 상황인데 우리는 왜 구태여 남북 동시사찰을 또 시도했나. 상호사찰이라는 틀로 북한과 협상을 했는데, 그 상관관계를 우리가 어떻게 보아야 하나.
▲ 두 가지 시스템이 움직이니까, 시스템의 논리로서 우선 이야기해보겠다. 남북 간의 상호사찰과 핵통제위원회는 남북 비핵화 합의에 따라 움직인 것이고, IAEA는 NPT 시스템하에서 나온 것이다. 미국에 가서 협의하는 과정에서 이런 이야기가 나온다. 윤 원장도 기억이 나겠습니다마는, 우리가 핵통제공동위원회 토의 5~8차에 군기지에 대한 사찰 논의가 있지 않았나. 그런데 북한의 군부는 군기지 사찰에 대해서 굉장히 과민했다. IAEA라고 하는 제3자가 하루 빨리 군기지 사찰을 하면 실질적인 효과가 있겠다고 미국 측과 이야기했다. IAEA 특별사찰 속에 군기지 사찰을 반드시 넣자고 제안하나, 미국 쪽은 동의를 했다. 그렇게 되니까 북한으로서는 점점 특별사찰을 받기 어려운 상황이 됐다. 그러니까 북한이 IAEA 사찰을 처음에 받기 시작할 때 오판을 한 가능성이 있었다고 생각된다. 

- 결국 핵협상을 지금까지 거의 25년 이상 해오고 있는데, 처음에는 남북이 하다가 미국과 북한으로 이어지고, 결국 6자회담으로 진화하는 과정 속에서 점점 우리가 당사자로서 주도한다는 측변이 퇴색되는 의미도 섭섭한 면이 있는 것 같다. 전반적인 북핵 협상 과정을 담당해오고 지켜보셨는데, 당시의 경험을 토대로 지금의 북핵 협상과 관련해 조언을 해주시겠나.
▲ 제일 뼈저리게 느끼는 것은, 남북 교섭에서 대소를 막론하고 우선 첫째 신뢰관계가 없는 상황이기 때문에 전통적인 교섭 방법밖에 없다. 전통적인 교섭 방법이란 상호주의 방식이다. 상대방이 하나를 내놓으면 이쪽도 하나를 내놓으면서 벽돌을 하나하나 쌓아가는 방식이다. 우리가 선의를 생각을 하니까 저쪽도 선의로 호혜적인 입장에서 해주리라고 기대한다면 대단한 착오다. 그러나 말이 쉽지, 사람들이 그렇게 쉽게 믿을 수 없는 상대방을 믿고 일을 하겠냐는 이야기들을 많이 하시겠지만 실제로 남북 고위급회담 준비회의르 할 때 토론하는 과정에서도 한 분이 “우리가 호의로 한다면 북한도 같은 민족인데 호의적으로 나오지 않겠습니까”하는 말을 하기도 했다. 

그 가장 전형적인 예가 이인모 석방 문제 때다. 대표단 내부에서 선의론을 가지고 의견이 갈려 많은 논쟁을 했다. 상호주의 교섭 방법은 공산주의자들이 많이 썼다. 저는 모스크바에 가서 그들에게 상호주의라는 말을 무수이 들었다. 모스크바에는 외교관리단지총국(우페데카)이라는 기관이 있었는데, 소련 외무부 산하 기구다. 외교관이 소련에 가서 운전사, 가정부, 비서를 구할 때 반드시 외교관리단지총국을 통해서만 현지인을 고용할 수 있었다. 그리고 아파트를 구해달라고 하면, 자신들이 한국에 가면 아파트를 해줄 것인지에 대해 확답을 받고 문서를 받았다. 
이처럼 그냥 믿지 않고 모두 하나씩 교섭해나가는 것이 북한과의 교섭에서 철칙이라고 색각한다. 박근혜 대통령께서 신뢰프로세스라는 표현으로 대북정책의 전개를 이야기했는데, 신뢰가 없으니까 그게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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