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노해 사진전 포스터(라 카페 갤러리) [사진=박종평 기자]
박노해 사진전 포스터(라 카페 갤러리) [사진=박종평 객원기자]
청와대 앞 분수대 [사진=박종평 객원기자]
청와대 앞 분수대 [사진=박종평 객원기자]

[일요서울ㅣ박종평 객원기자] “알면 참으로 사랑하게 되고, 사랑하면 진짜를 보게 된다. 보게 되면 소장하게 되나, 헛되이 소장하는 것은 아니다(知則爲眞愛 愛則爲眞看 看則畜之而非徒畜也).” 서울 길을 걷다 보면 자연스럽게 떠오르는 유한준(1732~1811)의 말이다. 비록 무생물이나 서울을 알게 되면 서울은 생명체인 것처럼 언 듯 언 듯 감춰진 속살을 드러낸다. 사랑이 깊어갈수록 서울은 시대마다 겹겹이 껴입은 옷들을 한 꺼풀 한 꺼풀 벗는다. 시간이 갈수록 쌓여가는 사람 무늬, 공간의 변화 속에서 진짜 서울을 찾노라면 감탄과 탄식이 절로 나온다. 그러나 알몸 서울과 벗은 옷더미는 주인이 없다. 누구라도 알고, 찾고, 사랑하면 유일한 소장자가 된다.

공자는 『논어』․「옹야」에서 “지혜로운 사람은 좋아하는 사람만 못하고, 좋아하는 사람은 즐기는 사람만 못하다(知之者不如好之者 好之者不如樂之者)”고 했다. 서울을 보면 공자의 말은 거꾸로다. 서울 속살을 찾고 알아갈 때, 서울은 비로소 그에게 손짓하고 유혹하기 시작하기 때문이다. 경복궁 서쪽 지역에서 독립문까지 걷고 나면 유독 유한준의 말이 실감난다. 공자의 말은 사람의 무늬를 찾아 걷는 행위나, 그 시간 자체에만 공감될 뿐이다.

유랑자 박노해 아지트, 서촌

유영호의 『서촌을 걷는다』에 따르면, ‘서촌’은 2000년대 들어 불리기 시작한 청운동, 효자동 일대의 별칭이다. 경복궁역 5번 출구로 나오면 고궁박물관과 경복궁이 기다린다. 답사 날은 코로나19로 휴관 중이라 입장할 수 없었다. 경복궁도 좋지만, 계획된 답사 코스가 아니라서 제외했다. 광화문으로 나와 효자로를 걷기 시작했다. 5분 정도면 경복궁 서문인 영추문(迎秋門)에 다다른다. “가을을 맞이하는 문”이란 뜻이다. 오행(五行)에 따르면 서쪽은 ‘가을’을 뜻하기에 서문에 영추문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그와 반대로 동쪽은 ‘봄’을 뜻하기에 ‘봄을 일으키는 문’인 건춘문(建春門)으로 지어졌다. 영추문을 지나 40m 가다가 좌측 길로 들어가면, ‘라 카페 갤러리’가 보인다. 2층에서는 한때 노동해방 시인으로 불렸던 박노해 시인의 사진전이 열리고 있다. 사진전의 주제는 ‘길’이다. 찍은 사진을 보면, 노동해방이나 혁명과 같은 구시대 유령은 이제 사라진 듯하다. 이제 그저 어떤 이의 삶, 공간, 자연을 찰나와 오랜 기다림 속에서 각각 낚아채 정지화면에 담는 사진가이다. 혁명 시인 박노해가 서부 영화 속 석양의 무법자였다면, 지금의 그는 한 장의 사진으로 수백 수천, 수만 줄의 시를 써대는 해질녘 산마루에서 홀로 사랑과 그리움, 아주 작지만 엄청난 크기의 희망을 노래하는 집시처럼 보인다.

무궁화동산 김상헌 선생 시비 [사진=박종평 객원기자]
무궁화동산 김상헌 선생 시비 [사진=박종평 객원기자]
칠궁 내 대빈궁(장희빈 사당) [사진=박종평 기자]
칠궁 내 대빈궁(장희빈 사당) [사진=박종평 객원기자]
경복고등학교 운동장에서 본 인왕산 [사진=박종평 기자]
경복고등학교 운동장에서 본 인왕산 [사진=박종평 객원기자]

박제가 된 봉황, 임금을 낳은 후궁들의 사당, 겸재의 화실

다시 길을 나서서 효자로 길로 다시 간다. 정부 서울청사 창성동별관 앞 횡단보도 옆에는 무심결에 지나칠 수 있는 ‘대한국적십자병원  터’라는 표석이 있다. 1905년 고종황제의 칙령으로 세워진 병원이다. 대한민국이 아니다. 황제국 ‘대한국(大韓國)’이다. 한때 황제국 흔적이다. 350m 정도 올라가면 청와대 사랑채와 대고각, 분수대를 만나다. 바로 청와대 앞이다. 대고각에는 조선시대 신문고 제도를 본받아 만든 대형 북이 들어있다. 민주주의 염원과 서울 정도(定都) 600년을 기념해 윤덕진 선생이 제작․기능한 북이다. 분수대에는 청와대 상징 문양인 봉황이 조각되어 있다. 전설 속 상서로운 새이다. 성군(聖君) 또는 천자(天子)를 상징하는 새이기도 하다. 성군도, 천자도 없는 민주주의 국가에서 봉건적 권위주의가 담긴 봉황을 활용한다고 권위가 생기는 않을 듯하다.

분수대 맞은편에는 ‘무궁화동산’이 있다. 김영삼 정부에서 옛 중앙정보부 궁정동 안전가옥을 헐고 조성한 공원이다. 공원 안에는 430년 된 회화나무, 병자호란 때 주전론을 주장하고 청나라에 압송되었다가 돌아온 김상헌(1570~1652)의 집터가 있다. 조선시대 왕의 어머니가 된 선조 후궁 인빈 김씨, 숙종 후궁인 비운의 여인 장희빈, 영조 후궁인 여빈 이씨 등 7명의 후궁 사당에 입장할 수 있는 첫 관문인 ‘칠궁 안내소’도 있다. 칠궁은 무궁화동산 바로 위에 있다. 청와대를 담장 하나로 사이에 두고 있어 사전에 접수하고 표찰을 받아야 입장할 수 있다. 칠궁은 매주 일요일과 월요일에는 쉰다. 시간제 관람으로 매시 20분까지 안내소에 접수해야 입장할 수 있다. 칠궁 안에는 각 후궁들의 사당 건물이 있다. 냉천정과 수복방은 지금은 보수공사 중이다. 그들 후궁들의 삶이나 건물 양식 등에 관심이 없다면, 2~300년 된 주목이나 180년 정도 된 향나무만 바라봐도 마음이 행복해진다. 사진 촬영은 청와대 방향의 경우는 금지사항이다. 지나친 통제인 듯하다.

주한로마교황청대사관을 지나면 경복고등학교가 있다. 중국 자연이 아닌 우리나라 자연을 그리는 진경산수화(眞景山水畵)를 개척한 겸재 정선(1676~1759)의 집터 있었음을 본관 앞 잔디밭에 바윗돌이 말하고 있다. ‘화성(畫聖) 겸재(謙齋) 정선(鄭敾)의 집터’라는 글귀와 겸재 작품 「독서여가(讀書餘暇)」가 새겨져 있다. 학교 운동장 쪽에서 인왕산을 보면, 겸재의 「인왕제색도」가 그대로 튀어나온다. 겸재 이전의 화가들은 어찌 그런 진경 대신 가보지도 않는 중국의 산천을 그리는데 열정을 바쳤을까 의아할 뿐이다.

필운대 [사진=박종평 객원기자]
필운대 [사진=박종평 객원기자]
사직터널 위 딜쿠샤 옆 은행나무 아래 ‘권율 도원수 집터’ 표석 [사진=박종평 객원기자]
사직터널 위 딜쿠샤 옆 은행나무 아래 ‘권율 도원수 집터’ 표석 [사진=박종평 객원기자]

영웅 권율 흔적까지 잊혀진 필운대

다시 출발해 세종마을을 지나 ‘필운대(弼雲臺)’로 간다. 필운대는 조선 중기의 문신 이항복(1556~1618)이 명명했다는 조선 중후기 선비들의 풍류터다. 필운대는 배화여고 안에 있다. 학교 별관 좌측에 있는 나무 계단으로 올라가면, 일부에 축대가 쌓인 암벽이 보인다. 암벽에 ‘필운대’가 새겨져 있다. 이항복의 9대손 이유원(1814~1888)은 『임하필기』에서 이 글씨를 이항복의 글씨라고 보았다. 안내판에는 “백사 이항복 집터(필운대). 이 바위는 선조 때 좌의정을 지냈던 백사 이항복의 집터 부근에 있는 바위다”로 기록돼 있다. 그러나 이는 반쪽 사실이다.

『신증동국여지승람』, 『임하필기』, 『한경지략』에서는 모두 이항복의 장인인 임진왜란 영웅 도원수 권율(1537~1599)의 집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오늘날과 달리 조선 중기에는 조선 남자들 대부분이 처가살이했다. 그 때문에 저명한 선비든 학자든 출생지가 외갓집인 경우가 많다. 젊은 이항복도 권율의 사위가 되었기에 권율의 집에서 처가살이했다. 이 때문에 필운대 집터는 이항복의 집터이기도 하나, 본래 집 주인인 권율의 집터라고 해야 한다. 안내판은 ‘장인 행주대첩의 영웅 도원수 권율과 사위 좌의정 이항복 집터’로 하는 것이 보다 타당하다.

‘필운대’ 글씨 주인공 이항복, 이항복의 호(號) ‘필운’ 때문에 권율을 제외하는 것은 절반의 사실이다. 게다가 ‘필운’에는 의도하지 않았을지라도 그 시대의 정서를 반영한 사대사상이 담겨 있다. 필운의 유래 때문이다. 중종 32년(1537년) 명나라 사신이 왔을 때, 중종은 명나라 사신에게 백악산과 인왕산에 대해 개명 요청을 했고, 명나라 사신은 각각 ‘공극(拱極)’과 ‘필운’으로 고쳐주었다고 한다. 한 나라의 왕이, 자신의 왕궁 뒷산, 옆 산 이름을 사대관계에 있는 사신에게 요청했다는 것은 자부할 일은 아닌 듯하다.

필운대에서 잊혀진 권율의 흔적은 인근 사직터널 위쪽에 별도의 표석으로 남아있다. 올해 11월까지 복원될 딜쿠샤(Dilkusha) 옆, 460년 된 은행나무 아래 1988년에 설치한 ‘권율 도원수 집터’ 표석을 발견할 수 있다. 근거는 이유원의 「월암(月巖)」이란 글 때문으로 보인다. 그는 돈의문 밖 서성(西城) 아래 있는 ‘월암’이라는 바위 아래 권율의 집이 있었고, 그곳으로 이항복이 장가들었다고 했다. 이는 이유원이 쓴 다른 글인 「필운대(弼雲臺)」에서 말한 권율의 집과는 위치상 차이가 난다. 딜쿠샤는 3․1운동을 세계에 알린 앨버트 테일러(1875~1948)의 집으로 최근에 복원되기 시작했다. 민족의 영웅 권율이 서촌 한 곳에서는 잊히고, 다른 한 곳에서는 관심조차 받지 못하고 있다. 잠시 살다가 간 사람조차 그 흔적을 복원하려 세금을 쓰는 마당에 서울은, 종로구는 왜 권율을 외면하는가?

46살에 문과에 급제한 권율 장군

권율은 임진왜란 때, 이순신과 더불어 선무1등공신이다. 임진왜란 3대첩 중 하나인 행주대첩의 주인공이다. 임진왜란 4대 육상 전투 중 두 개인 이치대첩과 행주대첩의 주인공이다. 국가의 군대를 이끈 총사령관이다. 절대 열세를 탁월한 쿠데일(coup d'oeil, 혜안)로 유리한 지점을 선점해 승리했다. 쿠데일은 나폴레옹의 지형 활용 능력에서 비롯된 말이다. 권율은 이치, 독산산성, 행주, 파주에서 쿠데일을 발휘했다. 나라를 지켜낸 위대한 영웅 권율에 대한 조선왕조실록을 살펴보면, 문신 출신 장수 권율에 대한 사관이나 사헌부, 사간원의 비판 기록이 많다. 46살에 35명 중 25등으로 문과에 급제했던 늦깎이 권율, 붓 대신 칼을 든 문신 출신 장수 권율에 대한 시기와 질투, 현장을 모르는 탁상공론의 전형처럼 느껴진다. 권율의 삶을 본다면, 지금 청년들의 시련은 아무것도 아니다. 청년들이여. 권율을 보라. 32세에 29명 중 12등으로 무과에 급제한 이순신을 보라. 나이, 시기, 성적도 중요치 않다. 그 시간을 어떻게 활용해 미래를 준비하느냐가 삶을 결정한다. 

공자는 『논어』․「술이」에서 “나는 태어날 때부터 지혜로운 사람이 아니라, 옛것을 좋아해 힘써 찾아 배운 사람이다(我非生而知之者 好古敏以求之者也)”라고 했고, 『논어』․「계씨」에서는 “태어날 때부터 지혜로운 사람은 최고이고, 배워서 지혜로운 사람은 다음이고, 살기 어려워 배우는 사람은 또 그다음이다. 살기 어려워도 배우지 않으면 최하 사람이 된다(生而知之者 上也 學而知之者 次也 困而學之 又其次也 困而不學 民斯爲下矣)”고 했다. 송시열은 『송자대전』․「심명중에게 답하다」에서 “지혜로운 사람이라고 누구나 반드시 행동할 수 있는 것이 아니고, 행동하는 사람이라고 누구나 지혜로운 것은 아니다(知者未必能行 行者未必能知)라고 했다. 권율은 찾아 배워 지혜를 얻고, 행동으로 실천한 사람이다.

서촌 답사 코스 중 들려야 할 곳

필운대에서 종로도서관을 지나 황학정을 향해 가면 입구에서 황학정 국궁전시관을 만난다. 수천 년 동안 우리민족을 상징했던 우리나라의 각종 활과 화살, 세계 각국의 활과 화살을 한꺼번에 볼 수 있는 진귀한 전시관이다. 임진왜란 때 자주 언급되었던 우리나라 장기(長技)인 편전(片箭)과 일본 활의 차이를 확연히 알아볼 수 있다. 활과 관련된 각종 프로그램도 매월 운영되고 있다. 전시관에서 조금 더 올라가면, 전통 활인 국궁 연습장인 황확정이 나온다. 황학정에서 심신을 단련하는 국궁을 배울 수 있다. 황학정에서 토지 신과 곡식 신에게 제사를 지내던 ‘사직단’ 방향으로 내려가면 단군성전, 선조가 왕위에 오르기 전에 살았던 집인 도정궁지도 길가에 면해 있다. 현재는 도정궁지를 알려주는 표지판은 없다.
 
서촌 지역을 돌다 보면, 아는 만큼 보이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여기저기 많은 유적 또는 인물 관련 흔적들이 넘쳐난다. 서정주 등의 『시인부락』이 탄생한 ‘통의동 보안여관’, 두말할 필요 없이 영원불변한 위인인 세종대왕 생가터, 박제가 된 천재 시인 이상 집터, 이순신 초상화를 그렸던 이상범 화백 집터, 「미인도」의 화가 천경자 집터, 『별 헤는 밤』의 시인 윤동주 하숙집터, 서럽디 서러웠던 소의 화가 이중섭이 마지막으로 거주했던 친구 집, 「사슴」 시인 노천명 집터, 존경받는 정치인 신익희 선생 가옥, 「사미인곡」의 정철 집터, 무궁화동산에 있는 박정희 대통령이 절명한 궁정동 안가터, 박정희 대통령을 절명시킨 김재규 중앙정보부장 집, 독립운동가 김가진 선생 집터, 발레리나 강수진 외할아버지이자 꼽추 화가 구본웅 집터, 독문학자 겸 시인 김광규 집, 미술관이 된 배우 이민정이 외갓집이자 한국화 거장 박노수 화백의 집, 사회주의 독립운동가 겸 화가 이여성 집터와 그의 동생으로 월북을 택했던 「군상」의 화가 이쾌대, 여성 공산주의 운동가 앨리스 현 집터, 매국노 이완용 집, 조선의 마타하리 김수임 집, 춘원 이광수 집, 이항복의 10대손이며 아나키스트 독립운동가 우당 이회영 기념관 등등이 있다. 이들 근현대 인물들의 삶을 보면, 삶이 얼마나 고된지, 또 역사가 얼마나 무서운지 알 수 있다. 독립운동가, 매국노, 친일파, 변절한 지식인과 예술가, 좌우의 극단 대립이 일으킨 파괴된 삶의 낱낱이 볼 수 있고, 경종을 울려준다. 이들 장소를 찾아가거나 관련 자세한 정보를 알고 싶다면, 유영호의 『서촌을 걷는다』를 참고하면 큰 도움을 받을 수 있다. 취향에 따른 유적만 찾아간다면 4시간 정도 소요된다.

세종대왕 나신 곳 
주소 서울시 종로구 자하문로41
황학정국궁전시관 
주소 서울시 종로구 사직로 9길
라 카페 갤러리 
주소 서울시 종로구 자하문로10길 28
필운대 
주소 서울시 종로구 필운동 산 1-2
딜쿠샤
주소 서울 종로구 사직로2길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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