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수혁 주미대사는 지난 6월 기자간담회에서 미·중 갈등과 관련해 “우리가 (미·중 사이에서) 선택을 강요받는 국가가 아니라 이제는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국가라는 자부심을 갖는다”고 말해 ‘한미동맹의 가치’를 흔드는 발언으로 논란을 일으킨 적이 있다.

우리나라는 경제력이 세계 12위권으로 선진국 문턱에 와 있지만 아직도 강대국은 아니다. 남북통일은 미·중·일·러 등 주변 4강의 역학관계에 의해 영향을 받고 있으며, 안보는 북핵으로 인해 혈맹인 미국의 조력 없이는 지탱하기 어려운 상황에 놓여 있다. 만약 우리나라가 강대국이 된다면 미·중 사이에서 눈치를 살필 필요가 없을 것이며 한미동맹도 수평적 동맹으로 발전하게 될 것이다.

이 대사의 문제 발언은 계속된다. 이 대사는 지난 12일 국정감사에서 “한국이 70년 전 미국을 선택했기 때문에 앞으로도 70년간 미국을 선택하는 것은 아니다” “우리 국익이 돼야 미국을 선택하는 것”이라고 발언했는데, 이는 주미대사의 말이라고 믿기엔 수준 이하로 가히 충격적이다. 국익을 기준으로 판단·결정한다는 것은 주권국가의 당연한 권리지만 고위 외교관의 발언은 직설은 피하고 외교적 수사로 풀어야 한다.

그러자 미 국무부는 이 대사의 발언에 대해 “70년 역사의 한미동맹과 역내의 평화와 번영을 위해 한미동맹이 이룩한 모든 것이 매우 자랑스럽다”고 논평했다. 거친 이 대사의 발언에 대해 세련된 외교적 화법으로 대응했지만, 불편한 내색을 드러낸 정면 반박이다.

이 대사는 한 발 더 나아가 ‘서해 민간인 피격·유기 사건’과 ICBM 등 신형 미사일을 앞세운 북한의 심야 퍼레이드는 외면한 채, 신뢰할 만한 근거도 제시하지 않고 “미국도 종전선언에 공감대를 가지고 있다”고 했다.

그러나 최근 미국은 전시작전권 조기전환에 부정적인 입장을 피력하고 방위비 대폭 증액을 주장하고 있다. 특히 안보협의회 공동성명에는 ‘주한미군 현 수준 유지’라는 문구가 이례적으로 빠져 있다. 또한 미국은 종전선언보다 비핵화가 우선이라는 입장이다. 이런 차이점들은 한미동맹이 견고하지 않다는 증좌다.

서애(西厓) 유성룡(柳成龍)은 ‘인재등용·애민정신·실리외교·제도혁신’의 리더십을 발휘하여 임진왜란이라는 국난을 슬기롭게 극복한 조선 최고의 명재상이다. ≪징비록≫은 유성룡이 임진왜란의 원인·경과·결과를 피와 땀과 눈물로 쓴 ‘임진왜란의 종군기록’이다. 백성과 사직을 제대로 지켜내지 못한 것을 부끄러워한 반성의 기록문은 또 있다. 바로 ‘감사(感事, 감회에 젖은 일)’라는 한시다. 이 시 중에는 이런 구절이 있다.

“治亂無定形(치란무정형, 치란은 정해진 것이 없으나)/人爲可以卜(인위가이복, 사람의 일로 점칠 수 있도다) 廟堂坐麟楦(묘당좌린훤, 조정에는 인원만 앉아 있고)/邊鄙多朽木(변비다후목, 변방에는 썩은 사람 많았었다) 千兵非所急(천병비소급, 많은 병사가 급한 것이 아니라)/一將眞難得(일장진난득, 장수 하나 얻기가 참으로 어려웠다)”

유성룡이 피눈물로 그려낸 ‘징비록과 감사의 교훈’을 조선의 왕들과 위정자들은 금세 잊어버렸다. 역사의 교훈을 망각하면 반드시 가혹한 재앙이 따르는 법. 임란이 끝나고 30년 후에 일어난 정묘호란과 병자호란으로 조선은 다시 전화(戰火)에 휩싸이게 된다.

자유와 평화는 거저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 ‘평화를 원하거든 전쟁에 대비하라’는 말이 있다. ‘천하수안 망전필위(天下雖安 忘戰必危)’. ‘천하가 비록 편안할지라도, 전쟁을 잊어버린다면 반드시 위기가 찾아온다.’ 한미동맹의 위기를 챙기는 진정한 장수(외교관) 얻기가 이렇게 힘든가.

한반도를 둘러싼 외교안보 상황이 심상치 않다. 11월 3일 미국 대선을 앞두고 국제정세가 요동치고 있다. 트럼프, 바이든 중 누가 당선돼도 대혼란은 불가피하다. 미국이 대선 후유증에 빠져들면 미·중 패권전쟁은 격화될 것이고 중국의 강압 외교는 도를 넘을 것이다. 이런 혼란을 틈타 북한이 다시 핵·미사일 도발을 할 수도 있다. 최근 북한의 심야 군사 퍼레이드 행진은 ‘북한 비핵화 희망’의 장례 행렬과 다름없다.

정부의 외교안보 역량이 시험대에 올랐다. 한·미 간 갈등이 불필요하게 증폭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동맹유지와 국익확보를 조화시킬 수 있도록 의견 차이를 조율해 안보 변수를 줄여야 한다. 문재인 정권의 반일정책은 한·미·일 삼각 안보 공조를 흔드는 것이며 중국에만 좋은 일이 된다. 미국 대선 후 한·미, 4강 외교 전반을 재점검해 조정 보완하는 획기적인 정책전환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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