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교부 [뉴시스]
외교부 [뉴시스]

 

[일요서울] 국립외교원 외교사연구센터에서 ‘외교’라는 렌즈를 통해 우리 현대사를 조명하기 위해 오럴히스토리사업 ‘한국 외교와 외교관’ 도서 출판을 진행해 왔다. 지금까지 총 17권의 책이 발간됐다. 일요서울은 그중 공로명 전 외교부장관의 이야기가 담긴 책의 내용 중 일부를 지면으로 옮겼다.

“남북 대화에 임하는 사람은 감상적 민족·동족주의 조심해야”

일본군 위안부 문제

- 북한과의 협상에서는 철저한 상호주의 접근이 필요하다는 말씀에 공감한다. 
▲ 북한 사람들도, 우리가 북한 사람들을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우리를 보고 있기 때문에, 남북 대화에 임하는 사람들이라면 단순한 감상적인 민족·동족주의는 다시 한번 검토를 하고 움직일 필요가 잇다. 

 

- 북한이 벌써 4번이나 핵 실험을 하고, 법에 금지되어 있는 우라늄 농축시설과 재처리시설을 계속 가동하고 있는 상황이다. 그래서 사실 비핵화공동선언 자체가 상당히 형해화되어 있는데, 그런 이유로 항간에는 북한이 비핵화공동선언을 폐기해야 된다는 주장들이 많다. 이에 관해 장관님 의견을 말씀해달라. 
▲ 비핵화공동선언을 폐기해야 한다는 것은 일제의 감정 없는 발상인데, 지금의 상태로 놓아두는 것이 폐기화했을 때와 효과의 차이가 있는 건 아니지 않나. 폐기를 했다고 해서 우리가 핵 개발을 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핵 개발을 하느냐 안 하느냐는 완전히 별개 문제다. 그런 만큼 비핵화공동선언을 실질적으로 폐기한 상황으로 놓아두는 게, 우리에게는 더 유리한 면이 있다고 생각한다. 우리 스스로가 무너져내일 필요는 없다. 1991년 12월에 이루어진 하나의 지나간 역사다. 그러면 그대로 두는 거다. 형해화된 건 물론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이 시점에서 폐기를 선언한다고 효과가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그대로 두는 게 소위 말하지만 우위에 있는 것이라는 생각을 갖게 하는 것이다. 

 

- 1993년 초에 김영삼 정부가 등장하고 나서 저희 외교안보연구원 식구들은 내심 장관님이 외무부장관이 될 것으로 기대를 했는데, 돌연 주일대사로 임명됐다. 그때 어떤 감회가 있으셨나.
▲ 글쎄다. 한승주 장관이 주일대사로 가지 않겠느냐고 해서 임명해주시면 기꺼이 가겠다고 했다. 신문 발령이 나서 한때는 우리 집에 밤새도록 기자들이 왔다. 장관으로 임명되면 첫 부임 소감을 딴다고 말이다. 그렇게 한승주 장관께서 장관으로 부임하시고, 저는 주일대사로 부인하게 됐다. 부임한 후 미야자와 총리가 새로이 취임한 김영삼 대통령에게 방일 초청을 했다. 당시 정부 취임 직후고 여러 가지 문제가 있고, 특히 개혁사업 등 해야 할 일들이 많아서 당장 가기는 어려우니 구체적인 시일은 외무당국을 통해서 협의 확인하라는 친서를 보냈다. 

그런데 이 친서가 공한이라기보다는 그야말로 친서였다. 그래서 당시 현안인 남북한 문제에 대해서도 이야기하고, 특히 일본 미야자와 총리가 한·일간의 다자협력이 필요하다는 이야기를 하고 한·일 관계를 미래지향적인 관계로 발전시킬 필요가 있다는 이야기를 했다. 김영삼 대통령도 흔쾌히 그 취지에 찬동을 하시고, 새로운 미래지향적인 한·일 협력관계를 구축해나가는 데 서로 노력하자는 이야기를 했다. 그래서 국내적으로 유례없는 개혁이 적극적으로 추진되어야 하기 때문에 방일을 연기했다.

그런데 그 당시 일부에서는 일본군 위안부(일제하 일본군위안부 피해자) 문제가 커다란 현안이었다. 그래서 그 문제가 어느 정도 해결되기 전에는 국가 원수의 방일이 쉽지 않을 듯하다는 옵서버들의 관측도 있었고, 또 관계 당국에서도 그런 생각들이 많이 있었다. 이 시점에서 일본군 위안부 문제는 대단히 커다란 한·일 간의 문제로 부각되었고, 당연히 주일대사로 가게 될 경우에 첫째 난문이었다. 1991년12월에 피해자 김학순 씨가 도쿄지방재판소에 제소를 하게 되면서 일본군 위안부 문제가 부상이 됐다. 특히 일본의 리버럴한 언론인 아사히 신문에서 이 문제를 대단히 크게 취급하니까, 자연히 우리 국내에서도 이 문제가 취급됐다. 그래서 단숨에 한·일 간의 문제일 뿐만 아니라, 한국의 사회문제로 다루어지게 됐다. 우리나라에서는 정대협(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이 이 문제에 적극 개입했다. 

또 하나 이렇게 타오르는 불에 기름을 부은 사건이 있다. 당시 가토 고이치 관방부장관이 일본군 위안부 문제의 보상에 관한 일본 언론의 보도와 관련해서 “보상 문제는 이미 1965년에 청구권 문제로 해결이 됐다”는 이야기를 해서 우리 국내에 더욱 큰 반발을 일으켰다. 그렇게 이 문제 해결이 시급하게 부상하는 상황에서 1991년1월에 미야자와 총리가 한국을 방문하게 됐다. 그래서 방문 전에 어느 정도 해결이 되어야 했고, 이때 가토 고이치 관방 장관 이름으로 가토 담화 가 발표됐다. 

이 가토 담화에서는 위안소의 설치나 일본군 위안부의 모집, 모집하는 사람들에 대한 감독, 위안시설의 축조·증강, 위안소의 경영·감독, 일본군 위안부의 위생 관리 및 신분증 발급 등에 일본 정부의 관여는 분명히 있었다고 인정했다. 일본 정부로서는 적극적으로 출신지 여하를 막론하고 일본군 위안부로 필설의 담을 수 없는 신고를 겪은 데 대해서 새삼 충심으로 사죄하고 반성의 뜻을 표한다는 이야기를 했다. 이때 가토 담화 속에는 모집 과정에서의 강제성을 언급하는 내용이 빠져 있어서 대단히 많은 비판이 제기됐다. 정대협은 1990년11월에 결성이 됐다. 앞서 1980년 윤정옥 교수가 일본군 위안부 문제에 대해서 조사해서 발표했고, 특히 사회학과 교수들이 관심을 갖고 연구·조사한 결과들이 연이어 발표되면서 우리 국내에서는 이 문제가 여성 인권 문제로서 부상했다. 

일본군 위안부 문제는 그 성격상 그동안 우리가 한·일 교섭을 할 때 논의되지 않았다. 우리 문제의식 속에도 없었다. 오히려 일반적인 징용·징집에 있어서의 강제성 범주 속에서 논의는 됐지만, 꼭 집어서 일본군 위안부 문제에 대해 논의하지는 않았다. 그런데 이 문제가 1991년12월에 피해자 김학순 씨의 제소로 부상이 되면서, 급속히 사회문제화되고 나아가서는 한·일 간의 커다란 이슈로 부상했다. 그래서 저는 1993년4월21일 부인에 앞서서 정대협을 찾아갔다. 그때 정대협 회장으로 계시던 이효재 박사와 서울대학교 사회학과 정진성 교수와 대화를 나눴다. 피해자들의 증언 문제에 대해 상의했던 기억이 난다. 그래서 부임하자마자 가토 담화가 나올 때, 일본 정부가 조사하는 과정에서 밝히지 못했던 일본군 위안부 모집의 강제성 문제가 규명이 되겠다는 생각이 있었다. 

우리 정부의 당시 가장 큰 관심은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들의 인간으로서의 존엄성 문제, 명예회복에 있었기 때문에 이것이 일본 정부의 손에 의해서 밝혀져야만 되겠다는 게 가장 중점이었다. 그래서 제가 부임한 후에도 계속 이 문제에 관해서 일본 정부와 긴밀히 협의를 하고 있었는데, 일본 측에서는 강제적인 수단을 동원해서 모집했다는 문서상의 증거가 나오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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