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후 문동언 경위가 수원을 찾아왔다. 주영준 차장과 조민석 보안과장도 함께 왔다.
“안녕하세요? 폭발물 사건과 이래저래 관련이 많으시네요.”
문동언 경위가 웃으면서 인사말을 했다.
“제가 또 관련된 일이 있나요?”

수원은 불편한 마음으로 물었다.
“아닙니다. 오늘은 아나톨리에 대한 조언을 구하려고 왔습니다.”
“제가 도움이 될까 모르겠네요.”
어느새 조민석 과장이 주스 석 잔을 가져다 놓았다.
“아나톨리에 관한 자료를 많이 수집해 두셨다고 들었습니다.”
“아, 네.”

수원은 인터넷 판도라 사이트에 접속해 아나톨리 게시판을 보여 주었다. 그리고 아나톨리 케레포프가 대한항공 902편에 미사일을 쏘고 강제 착륙 시킨 소련 수호이 15 전투기의 조종사 이름이란 것도 말해 주었다. 그 후 대령으로 제대한 아나톨 리가 비행학교에서 후배를 길러냈고, 그 비행학교 출신 파일럿들이 세계 각국에 퍼져 있다는 것과, 그중 상당수가 알카에다 같은 테러 조직과 연결돼 있다고 의심을 받는다는 것도 말해 주었다.

“한국에도 그 비행학교 출신자들이 있을까요?”
문동언 경위가 물었다.
“글쎄요, 그 부분에 대해서는 들은 바가 없는데요. 그런 단서라도 있나요?”
문동언 경위가 잠깐 생각하다가 입을 열었다.
“장 안토니오가 아나톨리라는 인물로부터 지령을 받고 있다는 사실은 들으셨죠? 그 아나톨리란 자가 한국말로 통화를 했다니 한국인일 가능성이 있습니다. 중국 핸드폰 번호를 사용한 것을 봐서는 한국말이 능한 중국인 같기도 하고.”
“아나톨리가 한국인일 수 있다고요?”

수원은 적잖이 충격을 받았다. 동석한 주영준 차장과 조민석 과장도 놀랐다.
“아직 확실치 않습니다. 어쨌든 장 안토니오의 통화내역을 추적해 봤더니 아나톨리로 의심되는 자가 중국 핸드폰을 통해 연락을 취했더군요. 그 핸드폰 번호 사용자에 대한 정보를 요청했습니다만, 아무래도 중국 대포폰 같습니다.”
“대포폰이요?”

“다른 사람 명의로 개통한 휴대 전화를 일컫는 속어입니다.”
수원이 묻자 문동언 경위가 설명해 주었다.
“중국에서 대포폰을 개통한 다음 국제 로밍을 신청해서 국내 통화를 한 것 같습니다. 추적이 쉽지 않지요. 전문가의 솜씨가 틀림없습니다.”
“아나톨리가 어떤 개인의 이름인가요, 아니면 조직 명칭인가요?”
“그것도 아직 모릅니다. 수사를 더 해 봐야지요. 우선 국내에 있는 중국 핸드폰의 주인부터 찾아내는 데 주력할 계획입니다. 한 차장님도 혹시 아나톨리에 대해 새로운 정보를 얻게 되면 알려 주십시오.”

문동언 경위가 자리에서 일어서는 것을 보고 수원이 참았던 질문을 던졌다.
“신용우 씨는 찾았나요?”
수원의 질문에 일어서려던 문동언 경위가 다시 앉으면서 이야기를 시작했다.
“지금 병원에 있습니다.”
“예? 살아 있다는 말씀인가요?”
모두 깜짝 놀랐다.

“예. 탈진은 했지만 생명에는 지장이 없답니다.”
신용우가 그날 아침 출근 준비를 하고 있을 때였다. 핸드폰으로 전화가 걸려왔다.
“신용우 씨인가요?”
낯선 목소리였다.
“예. 누구십니까?”

“여기 병원인데요. 어머님 성함이 계정순 씨 맞나요?”
“예, 그렇습니다만.”
“교통사고를 당하셨습니다. 지금 부산 병원에 계십니다.”
“네? 정말입니까?”
신용우는 고향이 부산이었다. 대학을 서울에서 다녀 가족은 서울에 있지만, 어머니는 홀로 부산에서 살고 있었다.

어머니가 다쳤다는 말에 신용우는 혼이 나가는 듯했다. 무조건 밖으로 뛰어나가 차를 몰고 나섰다. 그런데 차가 발전소 지역을 빠져나갈 무렵 핸들이 이리 저리 흔들리기 시작했다. 갓길에 세워 놓고 내려서 살펴보니 왼쪽 앞바퀴에 바람이 빠져 있었다. 바퀴 옆면이 칼로 그은 듯 예리하게 찢겨 있었다.

신용우는 차 트렁크를 열었다. 바닥 덮개를 열고 스페어타이어를 꺼냈다. 이상하게도 새로 사서 넣어둔 스페어타이어마저 바람이 빠져 있었다.
“무슨 일이십니까?”
신용우가 안절부절 못하고 있을 때 지나가던 택시가 멈추어 섰다. 뒷좌석에 누군가 타고 있었다.
“차바퀴가 펑크 났습니다. 급한 일로 가는 중인데, 합승해도 될까요?”
택시가 잘 안 다니는 외진 길에서 택시를 만나자 신용우는 반가운 마음에 청을 했다. 

“어디까지 가시는데요?”
뒷좌석의 젊은 남자가 물었다. 이른 아침인데도 선글래스를 끼고 있었다.
“부산까지 갑니다. 아님 택시 잡을 수 있는 큰 길에서 내려 주셔도 됩니다.”
“마침 같은 방향이군요.”
신용우는 차를 갓길에 세워두고 택시에 올라탔다. 신용우가 타자마자 운전사가 차 문을 잠갔다. 그와 동시에 옆 좌석의 남자가 눈앞에 권총을 들이밀었다.
“아니, 왜 이러십니까?”

“알 것 없으니 입이나 다무시지.”
신용우를 태운 차는 빠른 속도로 달리기 시작했다.
“지금부터 우리가 하라는 대로만 하면 무사히 살아 돌아갈 것이고, 잔꾀를 쓰거나 반항하면 이 세상에서 사라질 거요. 알았어? 계정순 여사의 외아드님이자 김소희의 남편이며 신예지의 아빠 신용우 씨.”

젊은 남자가 위협조로 말하며 신용우의 가족사항을 읊어댔다. 신용우는 소름이 쫙 끼쳤다. 이들 말을 듣지 않으면 자기 하나의 목숨이 문제가 아니라 전 가족이 보복을 당할 거라는 두려움이 밀려왔다.
“자자, 너무 겁먹지 말고. 우선 이것부터 써.”
남자는 덜덜 떨고 있는 신용우에게 검은 안대를 건넸다. 신용우는 안대를 받아 착용했다.

“휴대폰 어디 있어? 음, 여기 있군.”
남자가 신용우의 주머니를 뒤져 휴대폰을 꺼내 손에 쥐어주었다.
“우선 회사에 전화를 걸어. 독감에 걸려 한 이틀 꼼짝 못하게 됐다고 얘기하라고.”

신용우는 시키는 대로 전화를 했다.
20분쯤 지났을까. 차가 멈추었다. 그들은 신용우의 등을 떠밀어 차에서 내리게 했다.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지만 익숙한 바닷바람이 코끝을 스쳐 지나갔다. 조그만 항구 같았다.
보트 엔진 소리가 들렸다.
“자, 앞으로 가!”

신용우는 공포에 질려 다리가 후들후들 떨렸다. 그들은 손을 잡아끌어 신용우를 모터보트에 태웠다.

 

작가 소개 /

이상우는 추리소설과 역사 소설을 40여 년간 써 온 작가다. 40여 년간 일간신문 기자, 편집국장, 회장 등 언론인 생활을 하면서 기자의 눈으로 본 세상사를 날카롭고 비판적인 필치로 묘사해 주목을 받았다. 역사와 추리를 접목한 그의 소설은 4백여 편에 이른다. 한국추리문학 대상, 한글발전 공로 문화 포장 등 수상.

주요 작품으로, <악녀 두 번 살다>, <여섯 번째 사고(史庫)> <역사에 없는 나라>, <세종대왕 이도 전3권> <정조대왕 이산>, <해동 육룡이 나르샤>, <지구 남쪽에서 시작된 호기심>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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