녹번산골마을 골목길 [사진=박종평 객원기자]
녹번산골마을 골목길 [사진=박종평 객원기자]
녹번산골마을 시벽 [사진=박종평 객원기자]
녹번산골마을 시벽 [사진=박종평 객원기자]

[일요서울ㅣ박종평 객원기자] 의주로(義州路). 조선 시대 서울∼고양∼파주∼개성∼평양∼의주까지 연결된 도로이다. 중국과의 육로 교류 통로였다. 임진왜란 때는 선조가 피난 갔다가 서울 수복 후 되돌아왔던 길이다. 또 자기 땅이 전쟁터가 되는 것을 원치 않았던 명나라에서 군대를 파견해 조선에 들어온 길이다. 조․명 연합군에 의해 평양성에서 패배한 일본군이 서울로 도망쳤던 길이다. 숙종의 여인이었던 장희빈(張禧嬪, 1659~1701), 납북된 시인 정지용(鄭芝溶, 1902~1950)의 사연이 실린 길이기도 하다. 현재 서울 중구 의주로 1가와 2가는 조선의 의주로에서 유래된 동 명칭이다. 통일로(統一路)는 조선 시대 의주로 구간 중 현재 서울역에서 판문점까지 국도를 지칭한다. 지하철 3호선 독립문역에서 삼송역 구간은 땅속 ‘의주로’이다.

산골마을에서 만난 앙증맞은 「향수」

낯선 곳에 갈 때는 언제나 미리 지도를 확인하고 간다. 네이버 지도를 켜 놓고 간다. 그래도 길치인지라 가끔은 헤매고, 묻기도 한다. 정지용을 찾아가는 ‘산골마을’ 입구에서도 잠시 혼란에 빠졌다. 40대쯤 되어 보이는 여성에게 길을 물었다. 몇 마디 건네기도 전에 깜짝 놀랐다. 그녀의 눈가에서 한 가닥 눈물이 주르르 흘러내렸다. 울먹이며 상(喪)을 당해 경황이 없다며 떠났다. 떠도는 이에게 부음은 허무함을 덧댄다. 눈물이 먹먹하게 가슴을 쳤다. 답사 첫 목적지에서부터 칼에 찔린 듯 아팠다.

녹번역 2번 출구 홍은동 방향 큰길(통일로) 따라 10분 정도 가면 ‘산골마을’이 나온다. 이 ‘산골’은 우리가 흔히 말하는 산골짜기나 두메산골이 아니다. 또 유골 등을 화장해 땅에 묻거나 강 등에 뿌리는 ‘산골(散骨)’도 아니다. 광물질인 자연동(自然銅), 즉 황화철강을 지칭하는 ‘산골(山骨)’이다. 부러진 뼈를 잘 붙게 해 주고, 뼈를 튼튼하게 해 준다고 한다. 산골마을은 산골을 캐는 광산이 있어 생겨난 이름이다. 통일로로 인해 녹번산골마을과 응암산골마을로 갈라져 있다가 2015년 통일로 위에 생태통로가 생기면서 43년 만에 두 마을이 연결되었다고 한다.

산골마을 산골판매소 [사진=박종평 객원기자]
산골마을 산골판매소 [사진=박종평 객원기자]
은평구 우수조망 명소 [사진=박종평 객원기자]
은평구 우수조망 명소 [사진=박종평 객원기자]

두 산골마을의 크기는 비슷하다. 전국 곳곳에서 유행처럼 번진 벽화도 있다. 다만 마을 규모처럼 소박하다. 녹번동에서 정지용을 찾는 사람들에게 벽화와 함께 있는 시벽은 필수코스라고 한다. 벽화는 ‘녹번산골드림e 동네배움터’ 바로 위편에 있다. 정지용이 한때 녹번동에 살았다는 증거인 시(詩) 「녹번리」, 불과 22세에 쓴 “넓은 벌 동쪽 끝으로 옛이야기 지줄대는 실개천이 회돌아 나가고, 얼룩백이 황소가 해설피 금빛 게으른 울음을 우는 곳, -그 곳이 참하 꿈엔들 잊힐 리야.”로 시작되는 정지용의 대표작 「향수」가 그려져 있다. 실제로 보고 나면 안타깝다. 작은 공간에 단 두 편만이 있다. 게다가 시 좌우에 있는 조선 시대 모습 그림은 7․80년대 이발소 그림이 떠오른다. 미술에 무지하다고 비난할 수 있지만, 그 그림에서는 정지용도, 녹번동도, 향수도 느껴지지 않는다. 흰색 바탕에 연두색으로 그려진 ‘향수’는 퇴색해 유심히 보지 않으면 하얀 벽처럼 보인다. 녹번마을에서 찾은 진짜 정지용 느낌은 마을 입구에서 벽화를 찾아가는 길에 만난 통일로 578-29번지 앞 ‘행복마을 빈 의자’와 꽃이 핀 몇 개의 화분이다. 구구절절한 말이나 글이 아니다. 그 자체가 압축된 ‘시’다. 「향수」를 산골마을에 맞춤한 듯 앙증맞다. 작지만 따뜻하고 여유롭고 아름다운 마을이라는 자부심을 상징하는 듯하다.

서울 한복판에 있는 ‘산골’ 광산과 깜찍한 구름다리

벽화 위쪽으로 올라가면 '응암 산골마을'로 갈 수 있는 통일로 위에 만든 생태통로와 은평 둘레길이 나온다. 진관사입구(은평한옥마을)까지 가는 4코스(약 7.5km)와 생태통로를 거쳐 증산역에 이르는 5코스(약 5km)를 선택할 수 있다. 진관사 코스로 들어가면 거기에도 「향수」가 쓰인 안내판이 반긴다. 은평구를 한눈에 볼 수 있는 가장 가까운 전망대는 약 600m 거리에 있다. 전망대를 가는 동안 곳곳에는 옛 성벽 흔적처럼 보이는 돌담 같은 것이 있다. 성벽 잔해인지 어떤지 알려주는 안내판은 없다. 전망대에서 내려다보면 좌측은 63빌딩과 안산, 정면 가까이 백련산, 우측 봉산이 보인다.

잠시 쉬었다가 왔던 길로 내려가 산골마을의 상징인 산골을 찾아갔다. 산골마을 입구에서 홍은동 방향으로 조금 올라가 생태통로, 횡단보도를 지나자마자 옆쪽 산비탈을 보면, 돌에 새겨진 ‘산골판매소’와 철망이 보인다. 철망 끝에도 바위에 ‘산골’이 새겨져 있고, 거기가 들어가는 입구다. 답사 날에는 문이 잠겨 들어갈 수 없었다. 안쪽을 살펴보면, 산골을 채취하기 위한 광산으로 들어가는 입구로 보이는 낡은 건물이 보인다. 산골 실물도, 채취하는 광산 안의 풍경도 볼 수 없었으나, 서울시 한복판에서 황화철강을 채굴하고 있다는 사실이 신기할 뿐이다.

응암산골마을은 횡단보도를 건너 나무 계단으로 올라가 은평정 방향으로 가면 된다. 가다 보면 응암산골마을 방향 표지판이 나온다. 산골마을회관 체육시설로 내려가면 생각지 못했던 광경을 마주한다. 5m 내외의 아담한 구름다리이다. 마을회관과 체육시설, 텃밭을 잇고 있다. 전국 그 어디에도 이렇게 깜찍하고, 의미 있는 일상의 구름다리는 없을 듯하다. 응암 산골마을에도 벽화가 있다. 녹번 산골마을처럼 소박한 벽화다. 꽃과 나비가 주인공이다.

은혜초등학교 정문(장희빈 생가터) [사진=박종평 객원기자]
은혜초등학교 정문(장희빈 생가터) [사진=박종평 객원기자]
정지용 집터(녹번동) [사진=박종평 객원기자]
정지용 집터(녹번동) [사진=박종평 객원기자]

‘한국어 마술사’ 정지용이 북으로 납치된 곳 

통일로로 내려와 5분쯤 걸으면 녹번역 5번 출구 곁에 ‘녹번만화도서관’이 있다. 깔끔한 가건물 비슷하다. 열람은 가능하나 대출은 안 된다. 지하철 타기 전후, 버스 타기 전후 잠시 휴식할만한 틈새 도서관이다. 답사 당시에는 코로나19로 휴관 중이었다. 서울기록원과 서울혁신파크를 지나 정지용의 녹번동 집터로 향했다. 녹번역에서 15분쯤 걸린다. 지금은 빌라촌으로 변모해 정지용이 살던 때의 모습은 없다. 빌라 1층 오른편 귀퉁이와 맞은편 전봇대에는 각각 정지용을 알리는 안내표시가 있다. 빌라에는 <정지용 초당(草堂) 터>라는 놋쇠 안내판이 부착되어 있다. 1950년 1월에 『새한민보』에 게재된 “여보! 운전수 양반 여기다 내버리고 가면 어떡하오! 녹번리까지만 날 데려다주오”라고 시작되는 「녹번리」가 새겨져 있다. 차에 탔으나 차가 자신이 사는 녹번리까지 가지 않아 중간에서 내려 취한 걸음으로 논두렁을 걸으며 부르는 노래다. 전봇대에는 어느 직능단체협의회에서 붙여 놓은 「고향」이 있다. “고향에 고향에 돌아와도 그리던 고향은 아니러뇨 …… 고향에 고향에 돌아와도 그리던 하늘만이 높푸르구나.” 여느 전봇대처럼 각종 광고지가 붙어있고, 「고향」 위에도 덕지덕지 청테이프 흔적이 있다. 전봇대의 「고향」을 보노라니, 정지용의 삶도 「녹번리」 마지막 구절, “인생 한번 가고 못 오면 만수장림(萬樹長林)의 운무(雲霧)로다” 그대로 같다.

정지용은 충북 옥천에서 태어나 서울 창신동, 마포, 효자동, 낙원동, 재동, 북아현동, 부천 소사, 돈암동을 거쳐 1948년 녹번동으로 이주했다. 1950년 6․25 직후인 7월 녹번리에서 납치되어 북으로 끌려갔다. 그는 녹번동에서 산문집 『문학독본』과 『산문』을 출간했다. 그의 시는 물론 산문집을 보면, 그가 아름다운 우리 언어 마술사임을 확인할 수 있다. 그는 각지의 사투리도 유창하게 구사했다. 평양에서는 평양 사투리를 경상도에서는 경상도 사투리를 자유자재로 썼다. 그의 「공동제작」이란 산문에서는 시인 정지용의 예리한 감성을 느낄 수 있다. “당신은 백자기의 피부를 찌르면 무슨 혈액이 滲出(삼출)할지 짐작하시겠오?” 그가 어느 미국인에게 한 질문이다. 그 미국인은 “서양자기에는 혈액이 내비칠 수 없으므로 그것은 육체를 갖지 않은 것만 분명하오”라고 답했다. 미국인과의 대화가 사실이든 아니든 그가 백자에서 생생히 살아있는 생명체를 보았다는데 놀라울 뿐이다. 백자의 아름다움에 대한 찬사는 넘치고 넘친다. 그러나 그처럼 보거나 표현했던 사람은 거의 없었던 듯하다.

천주교 불광동 교회(불광동 교회 기념 엽서)
천주교 불광동 교회(불광동 교회 기념 엽서)

기도하는 성당 천주교 불광동 교회

정지용이 품었던 백자를 뒤로하고 다시 길을 걷는다. 10여 분쯤 가면 천주교 불광동 교회가 나온다. 성당 정면만 보아도 범상치 않다.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살펴보니 교회는 현대 건축 거장 건축가 김수근의 작품, 「노아의 방주」이다. 장충동 경동 교회, 마산 양덕 성당과 함께 김수근의 3대 종교 건축물로 평가받는다. 우리나라 100대 건축물 중의 하나이다. 건축에 무지한 입장에서 앞면만 보고 김수근만의 독창성, 고귀함을 쉽게 알 수 없었다. 성당 안으로 들어가 특징을 물었다. 기념엽서 한 벌을 받아 살펴보니 더 말이 필요 없었다. 뒤편 높은 곳에서 촬영한 모습은 교회 팸플릿에서 설명하듯 “마치 양손을 모아 기도하는 모습”이다. 서구의 거대하거나 화려한 성당과는 확연한 차이가 있다. 백자의 곡선과 달리 직선을 활용했지만, 단순함과 간결함, 불균형의 균형은 찌그러진 백자의 형태를 닮은 듯하다. 직선들을 한 곳에 집중시킨 모습은 백자에서 느낄 수 있는 뭔지 모를 경건함을 절로 일으킨다. 잠든 신심을 깨운다. 교회에는 또한 조각가 김세중의 성모마리아상, 예수상, 김대건 신부상, 고통을 이긴 평화의 십자가도 있다. 민홍철 제작 감실에서는 마음이 맑아진다. 김수근, 김세중, 민홍철의 작품들이 모두 한 사람이 제작한 듯 어울린다. 엽서에서 본 성당의 모습을 담고 싶어 뒤편 아파트로 갔다. 옥상 문이 잠겨 비슷한 모습조차 촬영할 수 없었다. 성당에 접한 일부 아파트 주민 외에는 이제는 엽서나 인공위성 사진으로만 볼 수 없는 상황이다. 귀한 예술작품이 갇혔다. 성당이나 구청, 혹은 아파트에서 이 작품을 누구라도 감상할 수 있게 방안을 찾았으면 좋을 듯하다.

화무십일홍(花無十日紅) 권불십년(權不十年) 장희빈

열흘 가는 꽃이 없고, 10년 가는 권력도 없다고 한다. 청춘도, 아름다움도 마찬가지다. 어느 때, 어느 곳에서나 진리다. 숙종의 왕비였다가 희빈으로 강등되었고, 43세에 사약을 받고 죽었던 여인 장옥정의 삶이 그렇다. 희빈(禧嬪)에서 ‘희(禧)’는 호이고, ‘빈(嬪)’은 정1품을 뜻하는 품계이다. 이름 대신 흔히 ‘장희빈’으로 불린다. 실록에서는 정치적 상황에 따라 ‘장녀(張女)’로 비하되기도 했다. 불광동의 폐교된 은혜초등학교 일대에 장희빈 생가가 있었다고 전해지나, 이제는 흔적조차 없다. 장희빈의 집안이 역관 집안이었기에 불광동 인근에 정착했던 듯하다. 불광동은 도성 밖 의주로 출발점과 같기 때문이다. 중국에 오가는 사신단을 수행하는 역관 거주지로는 안성맞춤인 곳이다.

장희빈은 영화와 드라마를 통해 널리 알려졌지만, 대개는 악독한 여인으로 묘사된다. 그런 까닭인지 안내판도 없다. 그러나 장희빈이 처한 사회정치적 환경을 보면, 일방적 판단이다. 장희빈 가문은 중인인 통역관 출신이고, 심지어 어머니는 노비 출신이다. 어머니로 인해 태어날 때부터 노비였으나 뒤에 집안 재력을 바탕으로 양인이 되었다. 아버지의 사촌으로 남인계 역관 출신 거부였던 장현의 주선으로 어린 나이에 궁녀가 되었다. 장현은 그녀를 후원해 숙종 곁에 다가갈 수 있게 했다. 타고난 미모를 무기로 숙종의 사랑을 쟁취했다. 훗날 경종이 될 아들도 낳았다. 내친김에 인현왕후를 몰아내고 왕비가 되었다.

한 여인으로 그녀는 한때나마 완벽히 성공했지만, 성공 과정은 기득권 세력과의 전쟁이 일상이었다. 정치적으로는 후원자 남인과 반대파 노론의 제로섬게임과 같은 권력투쟁이 빈번했다. 그녀를 사랑했던 남자 숙종의 마음도 변덕스러웠다. 한눈팔기와 변심이 반복되었다. 남자는 신하로부터 권력을 탈환하기 위해 그녀를 장기판의 말로 쓰기도 했다. 남자는 목표를 달성한 뒤 늙고 영양가 없는 천한 출신의 그녀를 끝내 완전히 버렸다. 그녀 시대는 젊은 임금과 노회한 신하가 권력을 다투었고, 양반 신하들은 주류와 비주류로 갈려 사활을 걸고 싸웠다. 그녀의 후원자였던 비주류 양반들의 한계도 분명했다. 그녀 역시 무기였던 아름다움 또한 시간이 갈수록 퇴색했다. 현실이 냉혹할수록 독해졌고 독해질수록 남자는 더 멀리 도망쳤다. 살아남으려 몸부림칠수록 반대파가 파놓은 수렁은 깊어졌다. 그녀의 삶을 보면, “화무십일홍 권불십년”이다. 그러나 그녀는 신분 사회에 도전했고, 용기로 맞섰다. 시대의 한계를 정면돌파 했던 여장부였다. 의주로에는 더 많은 삶의 이야기가 있다. 남은 이야기는 여러분 몫이다.

녹번 산골 마을 
주소 은평구 녹번동 71-35
응암 산골 마을  
주소 은평구 응암동 34-27
산골판매소 
주소 은평구 녹번동 산1-94
정지용 집터 
주소 은평구 녹번동 126-10
천주교 불광동 교회 
주소 은평구 통일로 786
장희빈 생가터 
주소 은평구 불광동 331번지 일대

저작권자 © 일요서울i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