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수 근로자’ 수식어 무색해...비극의 책임은 누구의 몫인가

박근희 CJ대한통운 대표이사가 22일 택배 노동자 사망 사건 관련 사과문을 발표하며 고개 숙여 인사하고 있다. [사진=공동취재]
박근희 CJ대한통운 대표이사가 22일 택배 노동자 사망 사건 관련 사과문을 발표하며 고개 숙여 인사하고 있다. [사진=공동취재]

[일요서울 | 양호연 기자]누군가 손끝으로 행복을 전달 받을 때, 그 뒤에는 고된 노동이 따랐다. 장시간 노동에 시달린 택배노동자는 안전망 없는 사각지대에서 생을 마감해야 했다. 올해만 13명의 사망사고가 발생한 걸 보면 ‘필수 근로자’라는 수식어가 무색할 정도다. 사고 소식이 알려지자 각종 온라인 커뮤니티와 SNS 등에서는 여전히 책임 소지를 둘러싼 갑론을박이 이어지고 있다. 대책 없는 기업, 정부의 허술한 관리‧감독, 나아가 ‘빠른 배송’에만 관심 갖는 소비자. 과연 비극의 책임을 특정 대상으로만 돌릴 수 있을지 의문이 남는다.


- 대면서비스 멈출 수 없는 핵심영역...보호 강화‧사회적 책임 강조
- 고개 숙인 CJ대한통운...“업계 방지책으론 부족해” 정부 향한 촉구도



코로나19가 확산하면서 모두가 ‘대면’에서 ‘비대면’ 방식으로 돌아설 때, 국민의 생명‧안전과 사회 기능을 유지하기 위해 대면서비스를 멈출 수 없는 핵심영역이 존재한다. 이 영역에는 보건의료종사자, 돌봄 종사자, 환경미화원 등 다양한 직군이 포함돼 있다. 이들은 코로나19 상황에서도 사회의 생명‧안전‧사회를 유지하기 위한 대면 서비스를 제공한다. 배달업 종사자, 이른바 택배기사, 택배노동자도 예외는 아니다. 이들은 ‘언택트(비대면) 소비’가 점차 확대하는 데 있어 핵심 역할을 하기도 한다.

오래전부터 필수노동자에 대한 저임금, 산재위험, 장시간노동, 안전망 사각지대 등의 열악한 근무 조건은 공론화돼 왔다. 코로나19 사태 확산에 따라 감염과 과로위험이 증가하면서 정부도 필수노동자에 대한 보호 강화에 나서는 등 사회적 책임이 강조되기도 했다.

정부 점검에도 ‘비극’
CJ대한통운, 대책 발표


필수노동자에 대한 합당한 처우와 존중은 ‘선택’이 아닌 ‘필수’로 강조되는 분위기에도 비극은 이어졌다. 최근 5년 동안 산업재해 등으로 숨진 택배기사는 21명. 안타깝게도 이 중 13명이 올해 사망했다. 택배기사의 사망사고가 잇따르자 정부는 지난 19일 CJ대한통운, 한진택배 등 주요 택배사들을 대상으로 안전보건 조치가 제대로 이뤄졌는지 확인하기 위한 긴급 점검에 나섰다.

긴급점검은 다음달 13일까지로 대리점과 계약한 택배기사 6000여 명에 대한 면담조사도 병행한다. 이재갑 고용노동부 장관은 고용노동 위기 대응TF 대책회의를 통해 “CJ대한통운, 한진택배 등의 (택배가 모이는) 주요 서브 터미널 40개소와 대리점 400개소를 대상으로 과로 등 건강 장해 예방을 위한 안전보건 조치 긴급 점검을 하겠다”며 “원청인 택배사와 대리점이 택배기사에 대한 안전 및 보건 조치를 관련 법률에 따라 이행했는지 여부를 철저하게 점검해 위반 사항 확인 시 의법 조치할 계획”이라고 설명했다.

하지만 정부 발표 직후 사망소식은 끈이지 않았다. CJ대한통운 택배 노동자가 근무 중 휴게실에서 쓰러져 지난 21일 숨진 사실이 드러난 것. 이로써 올해 CJ대한통운 관련 숨진 택배 노동자는 총 6명이 됐다. CJ대한통운은 소속 택배노동자의 연이은 사망으로 논란이 되자 지난 22일 대국민 사과 기자회견을 열고 택배기사 및 택배종사자 보호 종합대책 발표에 나섰다. 정태영 CJ대한통운 택배부문장은 기자회견에서 ▲작업시간 단축 방안 ▲선제적 산업재해 예방 대책 ▲작업강도 완화를 위한 구조 개선 ▲상생협력기금 조성 등을 골자로 하는 종합대책을 발표했다. 이와 함께 박근희 CJ대한통운 대표이사도 “책임을 통감하고 머리 숙여 사과 드린다”며 고개 숙였다. CJ대한통운의 발표 대책에는 매년 500억 원을 투입해 택배기사의 인수업무를 돕는 분류지원인력 4000명을 내달부터 단계적으로 투입한다는 내용이 포함돼 있다. 이와 함께 택배기사들이 오전 업무개시 시간을 조정할 수 있는 시간 선택 근무제도를 활용할 수 있도록 한다는 내용도 있다.

사측은 그간 논란돼 온 산재보험 가입 여부에 대해서도 입을 열었다. 올해 말까지 전체 집배점을 대상으로 산재보험 가입 여부 실태조사를 진행할 계획이라는 것. 내년 상반기 안에 모든 택배기사가 가입할 수 있도록 해 선제적인 산업재해 예방안을 마련하겠다는 취지다. 이후에는 산재보험 적용 예외신청 현황도 주기적으로 점검할 예정을 밝히기도 했다. 아울러 전체 택배기사를 대상으로 지원하는 건강검진 주기를 내년부터 2년에서 1년으로 줄이며, 뇌심혈관계 검사 항목도 추가한다. 더불어 외부 전문기관의 컨설팅을 통해 건강검진 시 이상소견이 있는 택배기사를 대상으로 집중관리체계를 도입하기로 했다.

정 부문장은 “배송 물량은 택배기사의 수익과 직결되는 문제이기 때문에 제안하고 협의하면서 진행할 예정”이라며 “회사의 일방적인 관점으로 진행할 생각은 없다”고 말했다. 다만 “코로나19로 택배물량이 늘었기 때문에 건강검진 결과와 연결하겠다”고 덧붙였다.

“의미 있는 진전”
‘늑장대응’ 비판도


정부와 해당 기업의 발표가 이어지자 여론의 반응은 상반된 모양새다. CJ대한통운 조치를 반기며 정부에 보완 요청을 하는 이들도 있었지만, 일각에서는 뒤늦은 늑장대응이라는 비판도 따랐다. 택배노동자과로사대책위원회는 CJ대한통운의 발표에 대해 “그간 대책위가 과로사 대책으로서 일관되게 주장해온 내용으로, 택배 노동자들의 장시간 노동을 줄일 수 있는 실효성 있는 대책”이라는 내용을 담은 입장문을 발표해 의미 있는 진전으로 평가할 만하다는 입장이다. 반면 정의당은 “택배업계들은 추석 전 2067명의 분류작업 인력을 투입할 것을 정부를 통해 약속했으나 실제로는 400명에도 미치지 못하는 인력만을 투입했다”며 “결국 정부와 택배업계들이 뒷짐을 진 것”이라고 지적했다. 이어 택배업계의 재발방지책만으로는 부족하다며 정부 차원의 책임있는 조치를 촉구했다.

더불어 일부 소비자들 사이에선 ‘빠른 배송’을 쫓는 행태를 지양해야 한다며 관련 택배 서비스 이용 거부를 실천하는 등 각성 분위기도 오가는 상황이다. 이와 함께 택배업계의 근로환경 개선에 힘써달라는 목소리도 높아졌다. 주부 A씨는 한 지역 커뮤니티 게시판을 통해 “평소 새벽배송이나 당일배송 등 빠른 배송 시스템의 장점을 이유로 자주 이용해왔는데 반복되는 과로사에 마음이 불편해진 것이 사실”이라며 “얼마 전 기사를 통해 산재 대상에 해당하지 않는 택배 기사들이 많다는 내용을 접했는데, 이들의 근로 환경을 제대로 구축해 줘야 소비자 입장에서도 더 좋은 서비스를 받을 수 있다는 점을 알고 기업들이 적극적인 개선에 나서주길 바란다”고 전했다.

한편 고용노동부는 최근 ‘코로나19 사회의 필수노동자 안전 및 보호 강화 대책’의 필수노동자 보호를 위한 추진체계 구성‧운영안을 통해, 다양한 분야별 필수노동자 실태 및 애로사항을 파악하고 맞춤형 개선‧지원대책 추진을 위해 범정부적 추진체계가 필요할 것으로 판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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