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베평화재단, 전쟁 상처가 말하는 것 “진정한 사과가 필요하다”

사진=한베평화재단 제공
사진=한베평화재단 제공

[일요서울ㅣ김혜진 기자] 베트남 전쟁 당시 한국군에 의한 민간인 학살 관련, 이달 12일 학살 생존자들은 정부를 상대로 한 손해배상소송과 14일 국가정보원을 상대로 한 정보공개청구소송 두 건을 진행했다. 법원은 그동안 진행된 소송들에서 학살 생존자와 유가족들의 손을 들어줬지만 이에 대한 우리 정부의 대답은 20년째 ‘묵묵부답’이다. 일요서울은 지난 20일 베트남 전쟁 민간인 학살 피해자 문제를 처음 공론화한 구수정 한베평화재단 이사를 만나 자세한 이야기를 들어봤다. 

“당시 베트남에서는 인삼차가 귀했어요. 유학생 시절 한국에 들어왔을 때 인삼 도매상가에 들러 100포에 4000원짜리 인삼차를 한 트럭 정도 사서 가득 싣고 피해자들이 있는 마을에 갔어요. 제가 5분만 이야기하고 있어도 마을 사람들이 모였는데 인터뷰를 한 번 하고나면 인삼차가 동났어요. 몇 개월 후 다시 가보니까 그 저렴한 인삼차가 만병통치약이 돼 있는 거예요. 그때 알게 됐어요. 이분들이 학살 피해 이후 30년 만에 처음으로 한국 사람을 만나 그동안 응어리졌던 속 이야기를 털어놓으면서 자신도 모르게 트라우마를 치유하는 것 같더라고요.”

구수정 한베평화재단 이사는 유학생 시절, 베트남 전쟁 당시 한국군에 의해 학살 피해를 당한 사람들을 직접 만나 이야기를 들은 첫 한국인이었다. 구 이사는 당시 주변 만류에도 불구하고 베트남 전쟁 관련 공부를 위해 전쟁 당사국인 베트남으로 유학을 떠났고, 연구를 위해 베트남 정부의 공식자료를 찾으려고 부단히 노력했지만 쉽지 않았다. 매번 허탕만 치고 돌아서는데 외무부의 말단 직원이 기밀자료 한 개를 건네줬다. 한국군이 남베트남에서 행한 일들이 적힌 40페이지 분량의 문서를 보고 반신반의하며 사실을 확인해 보고자 한국군 주둔 지역 마을을 방문하기 시작했다. 마을의 위령비와 생존자들의 증언을 들으며 비로소 이 사실을 믿게 됐다. 

“처음 만난 분들이 다짜고짜 저한테 상처부터 보여주는 거예요. ‘베트남 피에타상’의 모티브가 된 학살 생존자 도안응이아는 생후 6개월 때 학살을 당해 눈이 멀었는데 그때 엉덩이도 날아가는 부상을 입었어요. 바지를 내리고 함몰된 엉덩이를 제게 보여줬어요. 팜티메오 할머니는 앞가슴 쪽에 대각선으로 크게 칼자국이 있었는데 이 상처를 보여주려고 옷 앞섶을 열어 가슴을 드러내면서 상처를 보여줬어요. 푸옌성의 한 할머니는 관자놀이에 크게 뚫린 총알구멍에 제 손가락을 넣어보라고 하셨어요.”

구 이사는 당혹스럽지 않았다. 오히려 그들이 왜 이렇게까지 하는지 알 것 같아 상처를 쓰다듬어줬다고 했다. “그냥 상처가 아니고 말을 하고 있는 거구나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이분들한테는 제가 이야기를 듣는 것만으로도 30년간 멈췄던 그때의 시간이 다시 연결되는 순간이지 않았을까 싶어요”라며 당시를 회상했다. 

2015년 ‘터닝 포인트’의 해…법·제도적 노력 동반

구 이사는 피해 생존자들을 만난 이후 1999년부터 문제를 공론화하기 위해 ‘미안해요 베트남’ 운동을 시작했다. ‘베트남 평화기행’을 통해 피해 생존자를 대면하며 상처를 조금씩 치유해 주고 함께 기억하는 활동을 이어갔다.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 모임(민변)을 포함한 14개의 시민단체와 심포지엄을 열며 기록도 꾸준히 남겨 왔다. 

구 이사에게 2015년은 터닝 포인트의 해였다. 한국에선 베트남전 한국 전투병 파병 50주년이자 베트남에선 종전 40주년이었기 때문이다. 베트남 전쟁이 환기되는 시기였다. 피해 생존자들에게는 곧 추모 50주기가 돌아오겠다는 생각이 들어 조급해졌다. 과거사를 대변하고 피해자들의 손을 잡기 위해 한베평화재단을 설립하고 민간인 학살 피해 생존자 두 명을 한국으로 초청해 함께 진상규명을 요구했다. 

2015년을 기점으로 문제 해결을 위한 법적·제도적 노력도 시작됐다. 2018년에는 ‘시민평화법정(재판부, 김영란·이석태·양현아)’을 열었다. 법적 효력은 없었지만 재판부는 피해자들의 손을 들어줬다. 우리 사회에 이 문제를 한 번 더 알리는 계기가 된 것이다. 시민평화법정 준비를 도운 신민주 연꽃아래 대표는 “피해자 응우옌티탄이 증언을 하며 최후진술에서 ‘기억해 달라’고 할 때 많은 사람들이 눈물을 흘렸다”면서 “법정에 온 참전군인분들도 묵묵히 재판 내용을 듣고 있었다”라고 기억했다. 

인식의 전복 → 기억 소환 노력 → 사과는 언제?

베트남 전쟁 민간인 학살 피해 문제가 처음 제기됐을 때는 ‘인식의 전복’이었다. 아무도 몰랐던 사실이기 때문이다. 1999년부터 꾸준히 문제가 알려지면서 폭넓진 않지만 지속적인 관심이 이어졌다. 구 이사는 “학교에서 강의를 할 때 베트남전 한국군 증오비를 물어보면 대부분 들어봤다고 대답한다”면서 “자세히 몰라도 이 문제를 어느 정도 알고 있는 것 같다”고 말했다.  

우리 정부는 문제가 처음 수면 위로 드러난 1999년부터 20여 년이 지난 지금까지 일관된 자세를 취해 왔다. 시인하지도 부인하지도 않고 침묵만 유지하는 것. 김대중 정부가 처음 이 문제에 유감을 표하고 일정 조치를 취했지만 진정성 있는 사과는 없었다고 구 이사는 말했다. 노무현·문재인 정부에서도 ‘유감’이라는 우회적 표현만 전해졌다. 가장 최근 나온 정부의 입장은 학살 피해자인 청원인들에 대한 국방부 답변서가 전부다. ‘한국군 전투사료에는 학살 관련 사실이 없다’ ‘베트남과 공동조사 여건 형성이 안 된다’ 청원인이 요청한 것을 들어줄 수 없다는 게 결론이었다. 

그렇다면 베트남 정부의 입장은 어떨까. 구 이사는 “베트남 정부가 ‘과거를 닫고 미래로 가자’고 했지만 우리가 뜻을 오역하는 부분이 있다”면서 “‘닫다’라는 뜻이 완전히 문을 닫는 게 아닌 살짝 제쳐두고 완전히 끝나지 않았음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통일된 지 얼마 안 된 베트남에서 ‘과거사 청산’은 약간 미뤄 두고 ‘통합’을 먼저 이야기하는 단계라고 보고 있다.

구 이사는 “대통령이 공식 사과를 해도 한-베 간 문제를 완전히 해결한 걸까 하는 고민도 든다”면서 “역사 문제는 그런 의미에서 쉽게 해결되기 어렵다고 생각한다. 지울 수 없기 때문에 끝까지 기억하고 끊임없이 성찰해야 한다. 문제를 해결하며 교훈을 얻고 성찰을 멈추지 않아야 다시 문제를 반복하지 않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과정의 기록]

1. 국정원 보유 퐁니·퐁넛 학살사건 조사 ‘목록’ 공개 소송
중앙정보부(現국정원)는 1969년 박정희 대통령의 지시로 당시 마을에 주둔해 있던 청룡부대 장병을 대상으로 학살사건을 조사했다. 조사 기록에 대한 ‘목록’을 공개 청구했으나 외교문제와 개인정보를 이유로 비공개했다. 이에 재판부는 1,2심 모두 국정원의 비공개처분을 취소했다. 

2. 국가배상소송 제기
퐁니·퐁넛 학살 생존자 응우옌티탄은 민변 변호사들을 대리인으로 선임해 원고가 되어 2020년 4월 21일 대한민국을 상대로 국가배상법에 따라 베트남 전쟁 민간인 학살에 대한 위자료의 배상을 청구했다.

3. 베트남전 시기 한국 군대에 의한 피해사건 조사에 관한 특별법 발의
20대 국회에서 베트남 전쟁 민간인 학살 등을 조사, 명예회복, 한베 인권과 평화 유대 강화, 국무총리실 산하 민간위원으로 구성된 조사위 설치 등의 내용을 골자로 한 법안을 발의했지만 임기 만료로 자동 폐지됐다. 

4. 유엔인권이사회 진정 준비 중
민변 국제연대위원회와 베트남전쟁 진상 규명을 위한 TF는 퐁니·퐁넛 학살과 하미 학살에서 한국군이 자행한 국제인도법 위반, 고문방지협약 위반, 여성폭력 행위가 인권을 침해했다는 주장과 더불어 진실·정의·회복 및 재발방지와 과거사 진상규명, 의무를 다하지 않았다는 주장을 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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