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들 안 된다고 했지만 꿋꿋이 버텨 프로 선수 데뷔”

[사진=장정혁 선수 제공]
[사진=장정혁 선수 제공]

[일요서울ㅣ김혜진 기자] 현재 한국에 정착한 탈북민 수는 3만 명을 넘어섰다. 이들 중 상당수는 안정적인 정착을 위해 고군분투중이다. 주변 사람들의 차별적인 시선, 사회 시스템 적응의 어려움, 가족에 대한 그리움 등 정착을 어렵게 하는 요인은 다양하다. 다가올 통일에 대비해 우리 국민이자 ‘먼저 온 통일’인 이들의 사회정착문제에 대한 고민이 필요하다. 일요서울은 [릴레이 인터뷰]를 통해 탈북민 정착의 현실을 알아보고 문제를 진단하고자 한다. 지난 28일 국내 유일 북한 출신 종합격투기 선수 장정혁 씨를 만나 자세한 이야기를 나눴다. 

“미스매치 대결에서 역전승 요인은 ‘정신력’ 덕분”
“격투기로 우울증 극복…‘한다면 하는’ 파이터 되고파”

-요즘 어떻게 지내고 있나. 코로나19 때문에 경기가 많이 줄었다고 하던데.
▲ 경기는 1년 전에 해 보고 지금까지 못하고 있다. 현재 상황을 새로운 기회라고 생각해서 평소에 못한 경험을 하고 있다. 유튜브 채널 ‘탈북파이터TV’를 운영하며 다양한 사람들과 소통하고 있고 운동도 꾸준히 하고 있다. 경기 때 만나는 다른 나라 선수들과도 소통을 하고 싶어서 영어 회화 공부를 시작했다. 코로나가 지나가면 경기를 다시 하게 될 것 같다. 

-북한에서부터 운동선수를 꿈꿨던 건가. 
▲ 북한에서는 운동을 하고 싶어도 할 수 있는 환경이 아니었다. 다만 어릴 때부터 싸움은 많이 했다. 학교에서 두 살 위 형까지 다 이길 정도였다. 어릴 때 싸움을 많이 했던 이유는 부모님이 이혼하셨는데 친구들에게 그런 이야기를 듣기 싫었던 게 크다. 무시당하기 싫어서 강한 척하려고 일부러 더 그랬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런 쪽으로 재능이 있던 것 같다. 

-탈북을 한 이유가 있나.
▲ 집에 할아버지, 할머니, 삼촌 등 같이 사는 식구가 많았다. 한 명이라도 밥을 안 먹는 게 현실적으로 도움 되는 일이었다. 그래서 엄마랑 중국에 건너가 돈을 벌어 가족들에게 보내주자 생각했는데 중국에서의 현실은 생각한 것과 반대로 지옥이었다. 

-중국에서 지내면서 고생도 많이 했다고.
▲ 13세 때 탈북을 했다. 14, 15세 정도 됐을 때 먹고는 살아야 하니까 나이를 숨기고 막노동 일을 했다. 그러다 철근이 발등에 떨어져 다쳤는데 병원 치료도 안 되고 월급도 못 받았다. 깁스하고 몇 달 집에 누워 있으면서 다행히도 낫게 됐다. 계속 이런 일들을 경험하면서 앞으로 여기서 미래는 없겠다는 생각이 들어 한국으로 오게 됐다. 

-많은 운동 중 격투기를 선택한 이유가 있나.
▲ 어머니와 함께 탈북해 중국에서 지내는 동안 한족 어른들에게 폭행을 많이 당했다. 전화 한 통으로 북송될 수도 있으니까 그냥 조용히 당할 수밖에 없었다. 당시에 인간다운 대우를 못 받다 보니까 스스로 강해져야 어머니도 지킬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들에 대한 복수심이 나를 격투기 선수의 길로 이끈 것 같다.

-한국에 처음 왔을 때 느낌이 어땠나. 
▲ 사춘기 때 중국에서 고생하고 상처도 많이 받으면서 마음속 울분이 커졌던 것 같다. 그게 한국에 오니까 터져서 우울증에 걸렸다. 6개월 동안 집에만 있으면서 어머니와 대화도 하지 않았다. 사람 만나는 것도 무섭고 싫었다. 어쩌다 친구들과 관계를 맺을 때도 먼저 다가오려고 하면 무의식적으로 밀어냈다. 지금과는 정반대의 성격이었다. 운동을 하면서 차츰 극복해 냈다. 

[사진=장정혁 선수 제공]
[사진=장정혁 선수 제공]

-종합격투기 운동은 어떻게 시작하게 됐나.
▲ 우연히 TV에서 격투기 경기를 보게 됐다. 험한 운동이지만 마음속의 힘듦이나 스트레스가 없어지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갈 길이라고 생각했지만 어머니는 반대했다. 그래도 이 운동을 하고 싶어서 혼자 전국을 돌아다니며 운동시켜 줄 만한 곳을 찾아다녔다. 그런데 다들 귀찮으니까 받아주지 않았다. 북한에서 온 애가 어떻게 프로 파이터가 되냐는 말도 서슴없이 했다. 다행히 여명학교에서 내 꿈을 응원해 줘서 체육관에 다닐 수 있도록 도와주고 열심히 해 보라고 응원도 해 줬다. 그러면서 처음 글러브를 끼게 됐다.  

-훈련을 하면서 힘든 부분은 없었나.
▲ 육체적인 훈련은 자고 나면 회복되고 나중엔 적응돼서 힘든 걸 몰랐다. 가장 힘든 건 선배들에게 당하는 정신적인 압박이었다. 당시 우울증을 앓던 내가 감당하기는 배로 힘들었다. 북한에서 왔다고 색안경을 끼고 보기도 했는데 훈련 때 빨간색 옷을 입고 가면 빨갱이라는 소리도 들었다. 현실적으로 할 수 있는 대처가 없으니 참을 수밖에 없었다. 체육관에 갈 때 늘 발걸음이 무거웠지만 꿋꿋하게 3년을 버텨 냈고 결국 프로 데뷔를 하게 됐다. 시합에 나가기 위해 힘든 과정들을 버텨 내다 보니 자신감도 생기고 한층 성장한 게 느껴졌다.

-프로 데뷔무대 때, 일본 챔피언과의 대결에서 기절했다가 역전승을 했다고.
▲ 일본의 현역챔피언 니시카와 야마토와 대결이었다. 미스매치였다. 첫 시합에 챔피언을 만난 거니까. 챔피언도 사람이겠지 생각하고 싸웠는데 첫 판에 기절했다. 그때 두 가지 생각이 들었는데 여기서 못 일어나면 북한 군인들한테 잡혀 죽는다고 생각했고, 3년 동안 힘들게 버텨 온 시간이 억울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시합 하나만 보며 모든 걸 감수하고 참았기에 정신력으로 일어날 수 있었다. 매번 경기를 하면서 느끼지만 당시 내가 실력은 부족했을지 몰라도 그 친구보다 정신력은 위였던 것 같다. 

-힘든 훈련기간은 어떻게 이겨낼 수 있었나. 
▲ 당시 집이 용인이라 서울에서 학교기숙사 생활을 하며 운동을 했는데 한번은 라면을 사먹을 돈이 없어 눈물이 난적도 있다. 다른 선배들은 부모님이 와서 소고기 사 주는 걸 보면서 어린 마음에 더 힘들기도 했다. 그때마다 학교 선생님들의 응원과 함께 운동하는 몇몇 선배들의 도움이 컸다. 그때는 밥 한 번 사 주고 따뜻한 말 한마디 해주는 게 정말 고마웠다. 나중에 더 잘돼서 그들에게 보답하는 삶을 살고 싶다. 

-갖고 싶은 수식어가 있나.
▲ ‘한다면 하는 파이터.’ 어릴 때부터 지금까지 뭔가를 해야겠다고 마음먹으면 대부분 좋은 결과를 이뤄 냈다. 중국에 살 때 중국어를 열심히 독학한 덕에 지금은 자막을 안 보고도 내용 대부분을 알아듣는다. 우울증 때문에 음악의 힘을 빌려 보고자 기타도 독학을 했는데 만족할 만한 실력을 키울 수 있었고, 운동도 다들 안 된다고 했지만 결국 프로 데뷔도 하고 지금까지 실패 없이 뛰어 왔다. 

-정착에 어려움을 겪는 후배 탈북민들에게 해 주고 싶은 이야기가 있나.
▲ 어떤 상황에서도 포기하지 말라는 말을 한다. 포기하지 않는다고 잘사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잘 못살 수도 있다. 다만 포기하지 않으면 인생에 후회는 안 남는다. 프로 데뷔를 하는 데 3년이 걸렸고 매일 포기하고 싶은 마음이었지만 그걸 이겨냈기에 지금의 내가 있다고 생각한다. 

-앞으로 꿈꾸는 미래는 어떤 것인가. 
▲ 지금까지 그래 온 것처럼 내 한계에 계속 도전하고 싶다. 다만 선수는 영원히 할 수 없을 테니까 나중에 제자도 양성하고 싶다. 또 나중에 통일이 됐을 때 격투기 종목이 없는 북한에 잠재력 있는 친구들을 모아 길거리 싸움이 아닌 제대로 된 스포츠를 알려주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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