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트는 빠른 속도로 바다 위를 달렸다. 차가운 바닷물이 얼굴에 튀었다.
얼마나 달렸을까? 보트가 멎었다.
신용우는 다시 그들이 안내하는 대로 보트에서 내렸다.
“여기가 어딥니까?”

신용우가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아무도 대답하지 않았다.
“우리 어머니가 다쳤다는 건 거짓말이죠?”
“그걸 지금까지 믿고 있었어?”
“순진하군. 우리가 타깃을 잘 골랐어.”

남자 둘이 빈정대며 킬킬 웃었다.
잠시 후 육중한 철문 소리가 들렸다. 커다란 창고인 듯했다. 남자들은 신용우를 문 안으로 밀어 넣었다. 그 바람에 문턱에 발이 걸려 신용우의 몸이 기우뚱했다.
“옷을 벗겨.”

운전을 하던 중년 남자의 목소리였다. 그러자 젊은 남자가 달려들어 신용우의 작업복을 벗기기 시작했다. 신용우는 거세게 반항하며 몸부림을 쳤다.
“이봐, 이봐. 걱정할 것 없어. 우릴 변태성욕자로 아는가 본데, 우리가 필요한 건 당신 몸이 아니라 이 작업복이야.”

남자들이 달래는 말에 신용우는 순순히 몸을 내맡겼다.
“여기 명찰도 있고 신분증도 있고 카드키도 다 있군. 아주 맘에 드는 친구야. 핸드폰도 좀 빌려갈게.”
신용우는 그제야 원자력발전소와 연관된 일이라는 걸 눈치 챘다.
“당신 키가 얼마야?”
중년 남자가 물었다.

“1미터 68센티입니다.”
“보기보다 훨씬 작은데? 맞을지 모르겠군.”
그들은 필요한 걸 모두 챙기자 신용우의 두 손을 등 뒤로 돌려 단단히 묶었다. 그리고 그대로 창고에 버려 둔 채 밖에서 철문을 잠갔다. 무거운 적막이 공포와 함께 밀려들었다.

“신용우가 발견된 곳은 해운대 근방의 제비 섬이었습니다. 갇혀 있던 창고는 오래전에 버려 둬 인적이 없는 곳인데, 다행히 섬 주민이 우연히 근방을 지나다가 신용우의 구조 요청 소리를 듣고 구출했다고 합니다. 납치되고 나흘 만이었습니다.”
“무슨 수사 단서라도 나왔나요?”

“전혀 없었습니다.”
수원의 물음에 문동언 경위가 고개를 가로저으며 답했다.
“신용우를 납치한 자들도 장 안토니오 일당이겠지요?”
“그런 걸로 추측하고 있습니다.”
“이경만 집에서 달러 뭉치가 나왔다 하셨는데, 그럼 국제적인 조직이 배후에 있는 게 아닐까요?”

“반핵 단체의 근거지가 본래 외국에 있지 않습니까?”
“반핵 단체와 테러집단은 달라요. 예를 들면 ‘판도라의 상자를 열지 말라’ 같은 모임은 비폭력단체예요. 대부분이 환경운동에서 파생됐기 때문이에요.”
조민석 과장의 질문에 수원이 설명했다.

“하지만 안토니오 일당은 폭탄을 터뜨리지 않았습니까? 그런 걸 보면 폭력 단체가 분명한데...”
“반핵단체가 아닐 수도 있어요. 어쩌면 단순히 이익을 좇아 움직이는지도 모르지요. 원전 건설과 관련된 토지 보상 문제에 얽혀 있다든가, 땅에 대한 소유권 때문이라든가.”

“30년 전만 해도 그런 문제가 다소 있었지만, 지금은 아닙니다. 주민들은 오히려 원자력 발전소가 들어선 것을 자랑스럽게 여기고 있습니다.”
수원의 추측에 주영준 차장이 반박했다.

12. 빈, 심야의 방문객

서울 본사로부터 급히 회의에 참석하라는 연락이 왔다. 수원으로서는 달갑지 않은 명령이었다. 지금 하고 있는 1, 2 발전소 제어시스템 이노베이션이 며칠만 있으면 마무리될 예정이었다. 이 작업이 끝나는 대로 거의 완성 단계에 있는 신 고리 발전소 쪽으로 자리를 옮기게 돼 있었다. 신 고리 3, 4호기 원전은 수원이 맡고 있는 일 중 매우 중요한 일이었다. 한국 표준형 대용량 원전으로, 획기적 방식의 건설로 세계 시장을 겨냥하고 있는 모델이었다.

더욱이 수원은 현재 제어시스템 분야에서 새로운 기술을 많이 개발하고 있는 중이었다. 그 가운데 중점을 두고 있는 것은 원자로 헤드에 부착되는 연료 제어봉 부식방지 시스템이었다. 연료 제어봉은 연료의 핵분열이 과열되지 않도록 원자로 내부에 중성자를 투입하여 속도를 조절하는 기구였다. 수원은 이 제어봉의 변화를 미리 예측해 알려주는 센서를 개량한 것이었다. 이 시스템을 한국형 원자로에 처음 시공하려는 것이었다.

“다음 주에 빈 IAEA 본부에서 중요한 회의가 열립니다. 한 박사님이 한국 대표단의 일원으로 뽑혔습니다. 그 회의 참석을 위한 준비 회의니 꼭 참석하십시오.”
수원은 할 수 없이 옷가지를 챙겨서 서울로 향했다.
수원은 KTX로 서울역에 도착해 택시로 삼성동 본사까지 달렸다. 길이 엄청나게 막혀 회의 시간 15분쯤 전에야 겨우 도착했다.
회의장 입구에서 배성민이 서성이고 있었다. 고유미와 정세찬도 함께 있었다.
“성민 씨도 회의에 참석하는 거예요?”

“응. 네가 오길 기다리고 있었어.”
“국제회의 일정은 어느 정도 돼요?”
“일주일.”
“국제회의 참석은 우리 소관이 아니잖아요. 우리는 프로젝트를 맡기 위해 초빙된 객원 연구원일 뿐인데...”
“핵 전문가들이 모이는 자리니까 참석시키는 거겠지.”
성민이 대답했다. 

“그런데 두 분은 웬일로?”
수원이 몸을 돌려 묻자 정세찬이 두 팔을 벌려 과장된 제스처를 하며 말했다.
“무용담 잘 들었습니다.”
“무용담이라니요?”
“원전이 폭발할 위기에서 홀로 원자로 관리 시스템을 지키셨다면서요?”
“참 대단해.”

고유미도 수원의 손을 잡고 흔들었다.
“실은 배 박사님한테서 네가 빈 회의에 일주일쯤 참석하게 될 거라는 얘길 듣고 찾아왔어. 부탁이 있거든.”
성민과 고유미, 정세찬은 서로 연락을 자주 주고받는 모양이었다.
“무슨 부탁?”

“모레부터 부산에서 3, 4일 정도 머물러야 하거든. 녹색운동 국제대회가 해운대서 열리는데 취재하러 가야 해. 그래서 말인데 네 오피스텔에서 좀 지내면 안 될까? 대회장소도 가깝고 숙박비도 절약하고...”
“정 박사도 함께?”

수원이 정세찬을 건너다보며 물었다.
유미는 잠시 머뭇거리다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키 번호 알려줄게.”
“어머. 정말 빌려 주는 거니? 고마워.”
유미가 호들갑스럽게 감사를 표했다.
정세찬도 고개를 꾸벅하고 인사를 했다. 수원은 내키지 않았지만 애인까지 대동하고 부탁하는 친구의 청을 차마 거절하지 못했다.

 

작가 소개 /

이상우는 추리소설과 역사 소설을 40여 년간 써 온 작가다. 40여 년간 일간신문 기자, 편집국장, 회장 등 언론인 생활을 하면서 기자의 눈으로 본 세상사를 날카롭고 비판적인 필치로 묘사해 주목을 받았다. 역사와 추리를 접목한 그의 소설은 4백여 편에 이른다. 한국추리문학 대상, 한글발전 공로 문화 포장 등 수상.

주요 작품으로, <악녀 두 번 살다>, <여섯 번째 사고(史庫)> <역사에 없는 나라>, <세종대왕 이도 전3권> <정조대왕 이산>, <해동 육룡이 나르샤>, <지구 남쪽에서 시작된 호기심>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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