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길은 오로지 탈출뿐이다

[일요서울ㅣ정재호 기자] 북한인권국제연대 문국한 대표는 ‘장길수 가족’ 탈북을 주도한 주인공이다. 문 대표는 지난 1999년 문구 사업을 위해 중국에 진출했다가 알게 된 조선족 여성을 통해 길수 가족과 친척을 소개 받았다. 당시 15명이나 되는 길수 가족은 굶주림을 견디다 못해 북한을 탈출했다. 문 대표는 지난 7월28일 일요서울과의 만남에서 “20년째 북한인권운동을 해왔지만 북한의 인권상황과 중국에서 떠돌는 탈북자 인권상황은 변한 것이 없다”며 안타까워했다. 지난 2000년 문 대표는 길수 군과 그의 가족이 경험한 북한의 인권실태를 글과 그림으로 알리기 위해 ‘눈물로 그린 무지개’라는 제목으로 출판했다. 현재 책은 절판됐다.

-“간절한 소망이 있습니다”

그림설명 1 – 북한 천지 어디를 가나 나이 어린 ‘꽃제비’들이 득실거립니다. 그러나 그들에게도 인정은 있습니다. 어쩌다 장마당에서 얻은 빵 한 조각이라도 서로 나누어 먹습니다.[북한인권국제연대]
그림설명 1 – 북한 천지 어디를 가나 나이 어린 ‘꽃제비’들이 득실거립니다. 그러나 그들에게도 인정은 있습니다. 어쩌다 장마당에서 얻은 빵 한 조각이라도 서로 나누어 먹습니다.[북한인권국제연대]

 

<이동학 스토리>
가난한 살림 속에서도 아이들은 아버지인 나를 몹시 걱정했다. ‘우리 집에서 아버지가 제일 고생합니다. 그런데 아버지의 몸이 제일 약하니 걱정입니다’ 하면서 내 건강을 염려하는 아이들이었다. 당시 아내는 장마당에 나가서 여러 가지의 중고품 장사를 하였는데, 점심에는 집에까지 왔다 갈 시간이 없으므로 장마당 음식을 조금씩 사 먹고는 했다. 그래서 그런지 아이들은 내 식사에 대해 신경을 썼다. 

맏이는 음식점에서 내가 좋아하는 국수를 사들고 와서 먹으라고 내 놓는가 하면, 딸아이는 두부탕 밥을 사오기도 했고, 막내 역시 찰떡과 순댓국을 가져오기도 했다. 아이들은 이렇게 개별적으로 이것저것을 사와서 먹으라고 권할 뿐 아니라 때로는 둘이서, 셋이서 함께 사가지고 올 때도 여러 번 있었다. 
어떤 때에는 낮에 저희들끼리 거리에서 음식을 사서 먹다가 아버지 생각에 몇 개씩 남겨서 집에 가지고 와 내 입에 넣어주기도 했다. 지금도 그때를 생각하면 눈시울이 젖어든다. 비가 오고 땡볕이 내려쪼여도, 눈보라치는 추운 날씨에도 굴하지 않고 넝마 같은 옷을 입고 밤이나 낮이나 그 공장에 가서 살다시피 하던 아이들이었다. 이 글을 쓰는 순간에도 눈물이 난다. 

공장 도적질을 해야 했던 2년7개월의 짧지 않은 기간에 아이들이 단속되어 매를 맞은 것이 얼마이며, 옷을 찢기고 빼앗긴 것은 또 얼마인가. 빼앗긴 옷이나 신발, 수건 같은 것은 난로 아궁이에 들어가 재가 되어 없어지거나 기계실을 닦는 걸레로 이용됐다. 그렇게 되면 또다시 장마당에 가서 중고품들 중에서 제일 값이 싼 것으로 사야 했는데, 아무리 싼 것을 산다고 해도 그런 일이 자주 있기 때문에 그것도 문제였다. 
그러나 옷이나 신발을 빼앗기고 그것을 다시 장만하느라고 돈이 드는 것보다도 매를 맞는 것이 더 문제였다. 앞에서도 이야기 했지만 그 공장에는 안전부 순찰대, 무장 보위대, 산업 보위대, 직장 경비조를 비롯해 4중 5중의 경비진이 있는데 그 중 어느 단속 경비진에게도 붙잡히지 않는 다는 것이 쉽지 않기 때문이다. 

단속되면 그에 따르는 고문은 대단했다. 주먹으로 때리고 발로 차고 그 매를 맞고 아이들은 온몸에 커다란 멍이 들곤 했다. 아이들이 매 맞는 것을 보면 부모들은 다시는 그곳에 보내려고 하지 않는다. 그러나 아이들은 또다시 공격 전선에 나섰다. 그곳을 공격해야 자기도 살고 모든 식구들이 살 수 있기 때문이다. 또 거기에 가야 아이들의 웃음도 있고 노래도 있기 때문이다. 

한번은 맏이가 ‘전선’에 나갔다가 심한 타격을 받았다. 그 애는 그 공장 4층 되는 작업장 건물에서 안전부 순찰대원들에게 단속되어 쫓기게 되었는데 붙잡히면 당할 고통을 생각하여 작업 계단을 마구 뛰어 내렸다. 그러자 뒤쫓아 오던 이들이 깨진 벽돌장을 우리 맏이에게 던졌는데, 그 벽돌장이 바로 머리 정수리에 맞았다. 피가 흘러 온 얼굴과 잔등, 옷에 범벅이 됐다. 맏이는 그 후부터 자주 머리가 아프라고 했다. 그날 아내는 눈물을 많이 흘렸다. 

또 한 번은 막내가 안전부 정치대학 학생들(그 공장 보안 사업을 위해 2개월 간 내려와 있었다)한테 맞아서 고생한 적이 있다. 그때 막내 아이가 발에 채여서 얼굴이 퍼렇게 멍들고 머리가 터진 채로 집에 왔다. 현장에 있던 아이들의 말에 의하면, 스무 살이 채 되지 않는 정치대학 학생들이 우리 막내를 발로 차서 넘어뜨린 다음 다시 번쩍 들어서 땅바닥에 내동댕이쳤다고 했다. 막내가 기절해 일어나지 못하자, 아이를 질질 끌고 가서 옆에 있는 물웅덩이에 피 묻은 얼굴을 씻게 하고는 보냈던 것이다. 

막내는 그 후부터 머리가 자주 아프다고 했다. 이처럼 ‘공격선’에 나선 아이들 치고 그런 봉변을 당하지 않는 이들이 드물었다. 또 어떤 아이들은 깜깜해서 보이지 않는데다가 급히 뛰어다니다 유산물 통에 빠지기도 하고, 전기 배선에 감전되는 경우도 많았다. 그나마 그것이 교류가 아니라 직류이기에 다행이었다. 
한창 공부나 해야 할 나이에 헌 누더기 옷을 걸치고 ‘생활 전선’에 나선 북조선 아이들. 여기저기서 자식들이 매를 맞고 피투성이가 되어도 마음대로 항의 못 하는 상회. 나는 우리 어린 자식들만이라도 보호해야 되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리고 우리 가정을 지키려는 것이 가장으로서의 내 임무가 아닌가 생각했다. 살길은 오로지 탈출뿐이다. 북조선 탈출! 그 길만이 나와 우리 아이들과 우리 가정을 지키는 유일한 길이라고 믿었다. 

그림설명 2 - 하루에 겨우 두어 시간이나 들어올까 말까 하는 북한의 전기 사정이니, 불이 들어오는 시간이면 명절 기분입니다. [북한인권국제연대]
그림설명 2 - 하루에 겨우 두어 시간이나 들어올까 말까 하는 북한의 전기 사정이니, 불이 들어오는 시간이면 명절 기분입니다. [북한인권국제연대]

 

<장길수 편지>
중국에 와보니 북한과는 먹는 것이 달랐지만, 이곳 역시 저에겐 자유의 세상이 아니었다. 나는 숨어사는 몸으로 하루를 살면 하루를 살았다 했다. 만일 누가 나를 신고하면 내 앞날이 어떻게 될지 몰랐다. 한국 사람이 나를 찾아와 무슨 큰 재료가 없는가 하고 알아보다가, 보통 노동자나 농민인 것을 알고 돈 몇 품 쥐어주고 돌아갔다. 중국에는 감시가 너무 심해 매일매일 숨어서 살아야 하니 우리는 과연 어디에서 살아야 하는지, 한국에 계시는 큰아버지 큰어머니가 불쌍한 우리에게 사랑을 줬으면 좋겠다. 자유로운 세상에 가서 마음껏 배우며 뛰놀고 싶다. 그날은 과연 언제일까 그립다. 그날을 꼭 기다리겠다. 

 

<이민국 편지>
나는 이 중국 땅을 삶의 종착점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저 한국 가는 중간 지점에 불과하다 생각했다. 중국의 어린이들처럼 학교 갈 나이에 학교도 못 가고 장마당에 가서 장사를 하지만, 잘 팔지도 못하고 공안의 눈치만 봤다. 길을 걸어도 잠을 자도 중국 공안들이 언제 올까 누가 또 잡혀가는 건 아닌지 두렵기만 했다. 어제는 어머니가 잡혀 북쪽으로 넘겨졌다. 나는 잡혀간 어머니를 찾아 북한으로 다시 들어갔다가 국경 경비대에 잡혀 죽도록 맞고 지내다가 탈출해 다시 중국으로 건너갔다. 오늘은 이렇게 살아서 편지를 쓰지만, 내일은 온 가족이 또 잡혀갈지 모르는 운명. 유랑민 생활이 언제 끝이 날 것인지. 한겨레 한 동포인 대한민국 국민들이 나와 내 가족의 운명을 죽음에서 구원해 주기를 바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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