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국 前 법무부 장관[뉴시스]. 우측은 남한사회주의노동자동맹의 남한사회주의과학원 기관지로 알려진 '우리사상' [사진=조주형 기자]
조국 前 법무부 장관[뉴시스]. 우측은 남한사회주의노동자동맹의 남한사회주의과학원 기관지로 알려진 '우리사상' [사진=조주형 기자]

 


[일요서울ㅣ조주형 기자] 조국 前 법무부 장관의 저술작인 '양심과 사상의 자유를 위하여(책세상)'가 지난달 27일 출판가에 모습을 드러낸 가운데, 과거 그의 국가보안법 위반 전력에 관심이 모아진다. 그의 전력을 지적하기에 앞서 주목할 사건은 바로 '남한사회주의노동자동맹'이 엮인 이른바 '사노맹 사건'이다.

대법원은 지난 1995년 5월12일 '남한사회주의노동자동맹'에 대해 "그 목적, 조직 및 활동형태와 내용 등에비추어 국가의 존립, 안전을 위태롭게 하거나 헌법의 대전제인 자유민주적 기본질서를 파괴하려는 단체"라고 판시했다(대법원 1995.5.12.,선고,94도1813,판결). 

사노맹과 관련한 사건은 1990년 10월 국가정보원의 전신인 국가안전기획부(國家安全企劃部)를 통해 세상에 알려지게 됐다. 당시 안기부에 따르면 "우리 사회를 현정부와 매판자본가 계급이 미국과 일본에 종속돼 민중을 지배·착취하는 '신식민지 국가독점 자본주의사회'로 규정, 레닌의 연속 2단계 혁명전략을 추종"하는 단체다.

안기부는 이들이 '비밀문건 보관,사상학습,조직원은신처를 마련 및 운영하고 수사기관의 수색에 대항하기 위해 가스총,도검류,쇠파이프,시너,염산 등을 안가 내에 항상 비치해놓고 있었다고 전했다. '조직 보위를 위한 자결용 독극물'도 있었다는 안기부의 발표도 나왔다.
 

사상의 자유 유죄 인정 못해 1993.11.28.일자 한겨레신문 보도라고 알려진 기사. 기사의 사진 출처는 '미래한국'의 유동열 자유민주연구원장.
사상의 자유 유죄 인정 못해 1993.11.28.일자 한겨레신문 보도라고 알려진 기사. 기사의 사진 출처는 '미래한국'의 유동열 자유민주연구원장.

 

그런데, 문화일보는 지난해(9월4일자) "조국 前 법무부 장관이 사노맹 산하 기관지인 '남한사회주의과학원(사과원)' 기관지인 '우리사상' 창간호 등에 가명으로 자본주의 체제 부정 등 대한민국의 헌법적 가치를 부정하는 논문을 기고했다"고 보도한 것이다. 경찰청 치안연구소에서 30년 가까이 연구관을 역임한 유동열 자유민주연구원장은 해당 보도에서 "'우리사상'에 수록된 류선종의 글이 실제로는 조 후보자가 쓴 것임을 확인했다"고 밝힌 것이다.

실제로 대법원 판례에서는 '피고인 2'에 대해 "'사과원'이 사회주의 이론 연구 및 선전·선동을 통한 전위정당 건설과 노동자계급의 주도하에 혁명적 방법에 의하여 반동적 파쇼권력을 타도하고 민중권력에 의한 사회주의국가를 건설하는 데 목적을 두고 설립된 것으로서 '사노맹'의 활동에 동조할 목적을 가진 단체라는 사실을 확인하고서도, 반국가단체인 '사노맹'의 활동에 동조할 목적으로 '사과원'에 가입하고 사노맹이 건설하고자 하는 남한사회주의 노동자당의 성격과 임무를 제시하고 이를 위한 노동자계급의 투쟁을 촉구하는 내용이 수록된 '우리사상'을 제작 판매했다"고 명시돼 있다.

앞서 조국 前 장관은 장관 후보자였던 지난해 8월14일 "(사노맹 사건에 대해)자랑스러워하지도 않고, 부끄러워하지도 않는다"고 밝혔다. 이어 "저는 28년 전 그 활동을 한 번도 숨긴 적이 없다"면서 "법무부 장관 후보자가 되고 나니 과거 독재정권에 맞서고 경제민주화를 추구했던 저의 1991년 활동이 2019년에 소환됐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20대 청년 초국은 부족하고 미흡했지만, 뜨거운 심장이 있었다"고 덧붙이기까지 했다.

이에 일요서울은 최근 바로 그 문제가 된 '우리사상' 창간호에 실린 '류선종'의 논문을 '국민의 알 권리'를 위해 전면 공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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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부터 '류선종'의 논문이 실린 남한사회주의과학원(사과원)의 기관지 '우리사상', 중간에는 조국 전 법무부장관이 저술한 '양심과 사상의 자유를 위하여(책세상) [사진=조주형 기자]
왼쪽부터 '류선종'의 논문이 실린 남한사회주의과학원(사과원)의 기관지 '우리사상', 중간에는 조국 전 법무부장관이 저술한 '양심과 사상의 자유를 위하여(책세상) [사진=조주형 기자]

 

[PDR론-민주주의혁명에서의 좌편향, 사회주의혁명에서의 우편향]

-류선종-

차례

I. 들어가는 말
II. 'PD파'는 레닌의 진정한 계승자인가?
1. 1905년 레닌의 '플레하노프적 한계'?
2. '4월테제'와 10월혁명에 대한 왜곡
(1) '4월테제'의 배경
-독점자본주의의 성립과 민주주의혁명
-러시아혁명의 특수성
(2) '4월테제'에 대한 왜곡-'자본주의도 아니고 사회주의도 아닌' 혁명?

III. 동구 '인민민주주의혁명'에서 무엇을 배울 것인가?
1. '단계'인가 '과정'인가?-혁명의 객관적 성격과 계급세력배치의 문제
2. 혁명의 '연속'-주체의 목표

IV. 민주주의혁명에서의 좌편향, 사회주의혁명에서의 우편향
1. 'PD파'의 분화와 '좌'편향의 심화
2. 강령론의 '혁신'-'요구강령'과 '이행기강령'?
3. '사회주의적' 독점국유화?-'국가론'의 부재
4. '최대강령'으로서의 통일?
5. 계급투쟁의 관점이 빠진 파시즘관 및 '주타방'관
6. '민중권력'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V. 맺음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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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한국당 김진태 의원이 16일 서울 여의도 국회 정론관에서 조국 법무부 장관 후보자의 지명 철회를 촉구하는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김 의원이 조국 후보자가 제작에 참여했던 사노맹 기관지 '우리사상'을 들어보이고 있다. 2019.08.16. [뉴시스]
자유한국당 김진태 의원이 16일 서울 여의도 국회 정론관에서 조국 법무부 장관 후보자의 지명 철회를 촉구하는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김 의원이 조국 후보자가 제작에 참여했던 사노맹 기관지 '우리사상'을 들어보이고 있다. 2019.08.16. [뉴시스]

 

I. 들어가는 말

남한 노동자계급운동은 한국전쟁 이후 40여년 동안 진정한 자신의 깃발을 다시 움켜쥐기 위한 지난한 투쟁을 수행해 왔다. 80년대 초 변혁적 민중운동은 70년대까지의 소시민적 민주화운동과 구별의 선을 그으며 자신을 정립한다('C-N-P논쟁'의 의미). 그 속에서 '노동해방주의운동'은 맹아적으로나마 자신의 깃발을 올리기 위해 노력하였으나, 그 진정한 의미-이론적, 실천적 측면 모두에서-는 제대로 구현되지 못하였다. 이는 남한 변혁운동 내에서 '노동해방주의'가 여전히 '혁명적 민족주의' 및 '혁명적 민주주의'의 굴레에서 자유롭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실제 냉정하게 평가해 보건대 80년대 말까지의 자칭 '노동해방주의자'의 거의 대부분은 혁명적 민주주의자로서의 실천을 해왔다고 할 것이고, 진정한 의미의 노동자계급 헤게모니는 전무하였다고까지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끊임없는 '전위운동'의 모색과 노동자계급운동의 대중적 진출에 힘입어, 80년대 후반기에 이르러 드디어 "머리 속의 생각이 아닌 실제 행동으로써 노동해방주의를 옹호하고 노동자대중과 노동해방주의를 결합시키려는 노력", 즉 '노동해방주의적 실천'이 본격화된다.

남한 변혁이론논쟁의 시발점이었던 'C-N-P논쟁'을 거쳐 <노동자해방투쟁동맹>에 의해 체계적으로 정립된 '연속2단계 혁명론'은 '근본적 변혁'을 중심으로 남한 변혁을 파악하려는 최초의 성과였다. 여기에서 사회주의혁명에 대한 분명한 지향과 당면 민주주의혁명에서의 지도의 문제가 분명히 제기되었고, 남한사회의 변혁의 성격과 경로, 그리고 노동자계급의 임무에 대한 정식화가 이루어졌다.

그런데 이 이론은 정립단계에서부터 주사NL파들의 '수입품'인 '1단계 2과정론으로서의 NLPDR론'에 의하여 여러 측면에서 도전을 받았다. 그러나 현재에 이르기까지의 계급투쟁의 진전은 주사NL파의 '식민지반봉건(반자본주의)사회론'에 입각한 NLPDR론이 그 철학적 입장에서부터 전략전술론까지 전반적으로 노동자계급의 당파성에서 일탈해 있는 이론임을 드러내주었다.

이들은 '근본적 사회변혁'을 먼 미래의 것으로 상정해 놓고 있을 뿐만 아니라, 당면 변혁을 수행하는데 있어서도 자유주의 부르주아지의 영향을 벗어나지 못한 채 혁명의 진로를 흐리고 있는 것이다. 요컨대 주사NL파의 변혁이론은 실제적으로는 '불연속 2단계혁명론', 즉 '중간정부론'이라고 규정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노해동'의 분화과정 속에서 통칭 'PD파'로 불리워지는 그룹들이 등장하기 시작하였다. 등장 초기 'PD파'는 '반(反)주사, 비(非)CA', 'CA비판적 지지'(?)라는 즉자적인 틀 내에서 자기 위상을 정립하고 있었을 뿐 통일된 혁명이론은 부재하였다. 이러한 'PD파'의 혁명이론에 정합적(整合的)인 체계와 내용을 부여한 데에는 '현실과 과학'지로 대표되는 소위 '이론적 전위'(?)들의 공이 컸다.

이들이 제시하는 'PDR론'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이들은 제국주의시대의 프롤레타리아 혁명은 모두 '반봉건PDR'또는 '반독점PDR'의 두 가지로 정식화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이를 "자본주의에서 사회주의로의 이행에 조응하는 혁명, 따라서 혁명의 유형이라는 점에서 근본적 변혁에 속하는 혁명"(이창휘) 또는 "'이미 부르주아 민주주의혁명은 아닌, 그러나 아직 사회주의혁명도 아닌' 민주주의혁명"(<노동계급>그룹)이라고 성격지운다. 그럼으로써 남한 당면 변혁의 성격규정에 있어서 민주주의혁명과 사회주의혁명을 절충하는데, 이러한 입론의 근거는 사회주의적 독점국유화론이다.
 

1989년11월14일 서울신문 15면. [서울신문 캡처]
1989년11월14일 서울신문 15면. [서울신문 캡처]


둘째, 이에 기초하여 세계혁명운동사를 'PDR론'의 관점에서 재해석한다. 즉 이들은 레닌의 '성장·전화론', '노·농의 혁명적 독재'론은 플레하노프적 한계를 갖는 것으로 '4월테제' 이후 레닌이 폐기한 것을 스탈린이 잘못 복구시켜낸 것이라고 주장하면서 '성장·전화론'을 폐기한다.. 이에 따라 혁명의 단계구분을 무용한 것으로 평가하고 '1단계 2과정론으로서의 NLPDR론'을 새로이 옹호한다. 또한 이와 관련하여 동구 인민민주주의혁명의 경험도 유형론적, 도식적으로 소개하고 있다.

셋째, 이러한 혁명론에 입각하여 '최소강령-최대강령'을 폐기하고 '요구강령-이행기강령(=PD강령)'을 채택하였으며, '반파쇼'를 '반독점'과 구분하고는 단지 '전술'의 문제로 폄하한다('GD투쟁'과 '반독점PDR'). 이와 같이 '현실과 과학'지에 의해 체계화된 'PDR론'의 내부에도 일정한 이견이 존재한다. 예를 들면 '노동계급' 그룹은, '반봉건 민주주의혁명'에서는 사회주의로 성장 전화할 물적 토대가 없기 때문에 사회주의 혁명으로의 성장 전화가 불가능하였다는 윤소영 교수와 '현실과 과학'지의 주장-소위 '부르주아 혁명의 특수성'론-을 비판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상호간의 비판과 이견의 존재에도 불구하고 위의 세 가지 점은 여전히 'PD파' 내부에 자리잡고 있다(새로이 부각되고 있는 'PTR론'자들(학생운동 내의 <기수>=<선언>그룹, <청년학도의 벗>그룹 등)은 민주주의혁명 단계 자체를 부정하고 당면 변혁을 사회주의혁명으로 규정함으로써 기존의 'PD파'의 오류를 더욱 심화시키고 있다).

이상의 점은 단지 이론적인 문제가 아니다. 이러한 혁명론상의 문제점은 소위 '반파쇼전술론', '최대강령'으로서의 통일론, '파쇼하의 통일반대론'의 기초가 되고 있고, 농민들의 토지요구에 대한 무시 등의 좌편향으로 나타나고 있다(이들의 일관된 '좌'편향은 정세규정이나 전술론에서는 우편향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실제 작ㅈ년 초부터 정세가 고양기조로 전환되었을 때 이들은 '수세기', '대치기' 운운하며 움츠리고 있었다). 그리고 '경제강령'의 실현후 점차적으로 프롤레타리아트 독재를 수립한다는 논지와 계급연합권력하에서 사회주의적 국유화가 가능하다는 주장은 생산수단의 국유화로 사회주의혁명을 대체하려는 완벽한 우편향이기도 하다.

이 글에서는 'PDR'론자들의 혁명이론을 위의 점들에 초점을 맞추어 비판하고자 한다. 여기서 우리의 비판의 준거는 다음으로 요약된다. 혁명의 '성격'은 그 추진력에 의해서가 아니라 어떠한 사회적 모순을 해결하는가에 따라 결정된다는 점, 전략 '단계'의 구분지표는 사회구성체의 변화가 아니라 이를 위한 주적, 주타방, 동맹군 설정을 중심으로한 계급세력배치의 문제가 있다는 점, 또한 '경제강령'은 반드시 국가의 문제, 혁명의 문제와 결합하여 사고되어야 하며, '정치혁명'의 관점에서 '사회혁명'을 바라보아야 한다라는 점이다.

이러한 'PDR'론의 "이론적 문제에 대한 이론적 검토" 작업은 그 자체로서의 의미 뿐만 아니라 그 속에서 관통하는 레닌주의 혁명사상을 온전히 복구하고, 그것이 갖는 현재적 의미를 실증하는 작업이다. 그리고 이 속에서 'PDR'론은 '좌'익적 언사로 위장된 변형된 경제주의요, 정치적 무능력의 반증임을 폭로할 것이다. 그리고 이는 세계 사회주의운동의 '퇴조'를 빌미로 하여, 그간의 혁명운동의 성과를 부정해버리는 '사회민주주의'적 또는 '톨리아티주의'적 조류를 척결하기 위한 기초작업이기도 하다.
 

문재인 대통령이 9일 청와대 본관에서 조국 신임 법무부 장관에게 임명장을 수여한 뒤 악수하고 있다.2019.09.09. [뉴시스]
문재인 대통령이 9일 청와대 본관에서 조국 신임 법무부 장관에게 임명장을 수여한 뒤 악수하고 있다.2019.09.09. [뉴시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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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I. 'PD파'는 레닌의 진정한 계승자인가?

1989년초, 제1차 러시아혁명기를 전후로 한 레닌의 사상, 특히 '성장·전화론'을 폄하하는 것이 독점자본주의사회에서 살아가는 활동가의 '현대적' 인식인 양 선전하는 견해가 제출된 바 있다. 'PDR론'의 이론가 이창휘씨는 '4월테제'를 계기로 레닌이 '두가지 전술' 시기의 민주주의혁명과 사회주의 혁명의 구별이라는 관점을 폐기하고, 자본주의에서 사회주의로의 이행기에 조응하는 '반독점 민주주의혁명론'을 새로이 정립하였다고 주장하였다. 그리고 이씨는 이를 기초로 하여 남한 당면 변혁의 성격, 즉 "자본주의도 아니고 사회주의도 아닌" 혁명을 도출하는 것이다.

바로 이러한 주장이야말로 민주주의 혁명에서의 좌편향과 사회주의 혁명에 대한 우편향을 낳는 근원이 되어온 것이다. 이하에서는 먼저 1905년 시기 레닌의 혁명론이 사회주의혁명을 달성할 수 없는 '부르주아혁명의 특수성'론이었고, '플레하노프적 한계'를 벗어나지 못한 것이었다는 왜곡을 비판한 후, 'PD파'의 주장의 근거가 되고 있는 1917년 시기의 레닌의 사상을 조명하면서 이들의 '반독점PDR'론이 갖고 있는 절충성과 비실천성을 보기로 한다.

1. 1905년 레닌의 '플레하노프적 한계'?

'현실과 과학'지는 레닌은 '두가지 전술'에서 BDR에서 SR로의 '성장·전화'의 계기를 단순히 주체역량-계급동맹에서만 파악하고 있으며, '성장·전화'의 문적 계기에 대해 이해가 결여되어 있다고 평가한다. 그리하여 1905년 당시의 레닌의 사상은 토대에서의 부르주아적 발전이 가져올 반혁명의 상황을 무시한 것이었고 또한 사회주의로의 '성장·전화'를 실현할 수 없는 것으로 바라보고 있다.

이들은 그 원인으로 1905년의 레닌은 혁명적 민주주의와 인민혁명을 주장했음에도 불구하고 '플레하노프적 상식'에서 완전히 탈피하지 못한 채 러시아혁명의 부르주아적 성격을 확신하고 있었다는 점, 그리고 제국주의에 대한 인식을 전혀 획득하지 못하였다는 점을 들고 있다. 즉 1905년의 레닌은 부르주아 민주주의혁명 단계를 인정하고 있었고 '성장·전화'의 경제적 기초인 독점자본의 국유화에 대한 인식이 부재하였으므로, 토대에 있어서 부르주아적 성격-'두가지 길'의 대립으로 표현되는-과 '혁명적 민주주의독재'라는 모순되는 주장을 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이들은 반봉건 민주주의혁명 조차도 부르주아적 성격을 뛰어넘는, 그리고 자본주의를 '억제'하는 'PDR', 자본주의에서 사회주의로 이행하는 혁명으로 설명하고 있다.

그러나 이는 레닌주의 혁명론에 대한 중대한 도발이며, 기존의 모든 혁명 운동사를 자신들의 'PDR'론으로 '일색화'(一色化)하려는 망동에 불과하다. 이들 식이라면 맑스와 엥겔스, 1905년 시기의 레닌은 모두 '부르주아 민주주의자'가 되고 말 것이다. 자본주의사회에 살면서 '부르주아혁명'을 주장하였으니 말이다!(그리고 일제하 국내의 혁명적 사회주의자들의 혁명론-이래유그룹 또는 원산적색노조그룹의 '자본성 민주주의혁명'-도 자본주의를 실현하기 위한 혁명으로 보고 비판하는 희극을 낳을 것이다)
 

조국 전 법무부 장관. [뉴시스]
조국 전 법무부 장관. [뉴시스]

 

먼저 혁명의 객관적 성격이 '부르주아적'이라고 인정하는 것은, "부르주아적 발전을 해야 되느냐 하지 말아야 하느냐, 즉 토대의 자본제적 발전을 용인하느냐 거부하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자본주의적 모순의 폭발과 지양의 정도가 어디까지 도달하고 있느냐, 또는 이것이 당면한 사회주의혁명에 어떠한 근거를 제공할 수 있느냐에 주된 관심이 놓여져 있는 것이다!"

이는 바로 봉건적 잔재가 광범하고 뿌리깊게 존재하고 있는 자본주의사회라는 러시아 자본주의의 특수성이 당면한 변혁으로 무엇을 요구하는가의 문제로 직결된다. 이에 대하여 레닌은 유럽적 자본주의로의 발전의 길을 제시하였다. 이를 자본주의사회를 만들자는 생각으로 이해한다면 변증법을 다시 공부해야 할 것이다. 당시 러시아에서 유럽적 자본주의의 '발전'을 바로 자본주의의 '자기부정'으로 파악하는 레닌의 변증법을 말이다(이에 대해서는 1916년의 레닌의 다음과 같은 말이 도움이 될 것이다. "부르주아지와 기회주의에 대항하는 프롤레타리아트를 사회주의적이고 일관되게 민주적으로 조직하기 위해 부르주아 민주주의를 이용하는 것 이외에는 다른 길은 없다. 다른 어떠한 활로는 없다"). 한편 레닌은 1905년 혁명에 대한 평가에서 "러시아 혁명의 특이성은 그것이 사회적 내용에서 보면 부르주아 민주주의적인 것이었으나, 투쟁수단에 있어서는 프롤레타리아적이었다는 데 있다"라고 말하였는데, 즉 그는 혁명의 객관적 성격과 추진력의 문제를 정확하게 구분하여 사고하고 있었던 것이다.

다음으로 'PD파'는 혁명의 부르주아적 성격이라는 문제는 전략단계의 문제, 즉 동맹자의 확정을 중심으로 하는 계급세력 배치문제와 직결된다는 점을 간과하고 있다. 이에 대해서는 레닌의 다음과 같은 장문의말로 대신하고자 한다.

왜 민주주의적 투쟁조건과 사회주의적 투쟁조건이 동일하지 않는가? 그것은 전자의 투쟁에 있어서와 후자의 투쟁에 있어서 노동자는 반드시 서로 다른 동맹자를 가질 것이기 때문이다.···계급 투쟁 밖에서 사회주의란 공론이거나 혹은 소박한 몽상인 것이다. 그런데 우리 러시아에서는 현재 두 개의 상이한 사회세력의 두 개의 상이한 투쟁이 존재한다. 프롤레타리아트는 자본주의적 생산관계가 있는 곳에서는 그 어디서든지 부르주아지에 반대하여 투쟁한다. 소토지 소유자, 소부르주아층으로서 농민은 농노제도의 모든 잔재에 반대하며, 관리 및 지주를 반대하며 투쟁한다.

이러한 두 개의 상이한 이질적인 사회전쟁을 보지 못하는 것은 정치경제학 및 전세계의 혁명의 역사를 조금도 알지 못하는 사람들 뿐이다. 일거에라는 문구에 의거하여 이러한 전쟁의 이질성에 대하여 눈을 감는다는 것은 날개 밑에 머리를 숨기고 현실에 대한 모든 분석을 거부하는 것을 의미한다....오늘 농민의 지주와의 투쟁은 혁명적이다. 지주토지의 몰수는 경제적 및 정치적 발전의 현 순간에 있어서 모든 점에서 혁명적이다. 그리하여 우리는 이 혁명적 민주주의적 방책을 지지한다. 그러나 이 방책을 사회주의화라고 칭한다든지 상품 경제하에서 토지 이용의 균등성의 가능성에 대하여 자기와 대중을 기만한다면 이 것은 벌써 반동적 소부르주아적 공상이다. 우리는 이러한 일은 반동적 사회주의자에게 맡겨둔다.

1905년의 볼셰비키의 최소강령과 '두가지 전술'에 독점국유화의 내용이 없다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이것이 이창휘씨 등의 주장의 올바름을 입증해주는 것은 결코 아니다. 오히려 그러한 지적은 당시 독점단계에 들어서지 못한 러시아 자본주의의 발전상태하에서도 사회주의혁명의 현실성을 고민한 레닌의 문제의식을 이론적 정합성으로 재단하는 것이다. 레닌의 분석처럼 세계적 차원에서 제국주의시대가 1900-03년의 공황기에 성립하였다고 해서 1905년 당시에 후진 러시아가 독점자본의 지배의 시대로 나아갔다고는 볼 수 없다. 따라서 당시 '두가지 전술'에 독점 국유화 강령이 없는 것은 당연하다. 요컨대 이들은 사회경제적 발전에 따라서 경제강령도 발전한다는 점을 완전히 몰각하는 '해석자'의 입장에 서있는 것이다(실제 후일 레닌은 농업강령에 있어서 '절취지강령'을 '토지국유화강령'으로 변경하였으며, 1917년 시점에는 '반독점 국유화강령'도 제출한다).

이제 'PD파' 동지들은 레닌이 '두가지 전술'을 1917년에 집필하였다면 어떠하였을 것인가를 자문해보아야 한다. 과연 레닌이 '반독점강령'으로 성장·전화론'을 대체했을까? 요컨대 레닌의 '플레하노프적 한계'라는 'PD파'의 발상은 당시 러시아 사회에서 사회주의혁명의 현실성을 고민한 레닌의 뒤통수를 치는 훈고학(訓詁學)적, 이론주의적 사고이며, 따라서 즉각 폐기되어야 한다.
 

'류선종'이 제작에 참여했다는 사과원 기관지 '우리사상' . [사진=조주형 기자]
'류선종'이 제작에 참여했다는 사과원 기관지 '우리사상' . [사진=조주형 기자]

 

2. '4월테제'와 10월혁명에 대한 왜곡

(1) '4월테제'의 배경

독점 자본주의의 성립과 민주주의혁명

1905년 이후 러시아 자본주의는 독점자본주의로 발전해 간다. 레닌은 러시아 자본주의의 발전 속에서 생산과 자본의 집적, 대자본과 독점체의 형성이라는 자본주의의 일반적 경향을 확인한다. 러시아는 "현대 자본주의적 제국주의가 전(前) 자본주의적 관계의 특히 조밀한 그물 속에 얽혀있"지만, 독점자본주의로의 전화는 이루어졌던 것이다. 특히 제국주의전쟁은 러시아 자본주의의 국가독점자본주의로의 성장 전화를 촉진시켰다, 요컨대 경제적으로 러시아는 소생산이 압도적 우위하에 있었으나, 제1차 세계대전을 계기로 이미 국가독점자본주의-제국주의 열강 중 후진적이기는 하지만-가 되어 있었던 것이다.

여기서 레닌은 1915년 '몇가지 테제'에서 러시아 프롤레타리아트의 당면한 과제는 러시아에서의 부르주아 민주주의혁명의 완성이라고 파악하면서 동시에 1905년-1907년 혁명 이후 10년 사이에 많은 변화가 있음을 지적한다. 즉 농촌에서는 계급적 분화가 심화되어 농촌 ㅍ롤레타리아트가 형성, 강화되었으며, 제국주의 전쟁이 국내의 모든 모순을 격화시키고 노정시키고 있었던 것이다. 바로 이러한 역사적 발전은 민주주의혁명을 급속히 사회주의혁명으로 성장 전화시키는데 호조건을 창출한 것이었고, 이때 레닌은 사회주의 혁명으로 급속히 성장 전화할 민주주의 혁명이 눈 앞에 다가왔음을 분명히 인지하였던 것이다. 바로 이점이 1905년과 1914년 전후의 차이점이었다.

1905년 시기에 '반봉건'적 과제가 주된 내용이었던 민주주의적 과제는, 자유경쟁 자본주의가 독점자본주의로 교체되어 나가면서 '반독점'의 문제를 포괄하면서 제기되고 있었다. 즉 1905년 1차 러시아혁명 시기와 1914년을 전후로 한 사기의당면한 혁명은 동일하게 '반짜리즘 민주주의 혁명'이었지만, 후자에 있어서는 토대에서의 변화와 관련하여 '반독점'의 과제가 등장하였던 것이다. 그리고 독점 자본주의가 확립된 상황에서 농업에서의 '아메리카형의 길'도 그 자체로서 추구되어 질 수 없게 된다(그리고 이 시기에 짜리즘도 단지 봉건귀족과 지주의 권력만이 아니라 반동적 대부르주아지의 권력이기도 하였음을 명심하라).

그렇지만 동시에 우리는, 레닌이 러시아 자본주의가 이미 제국주의단계에 접어든 1914년 11월에도 러시아혁명의 과제를, "프롤레타리아트는 권력획득을 위해, 공화제를 위해, 토지몰수를 위해, 다시 말해 농민을 끌어들이기 위해, 농민의 혁명적 힘을 흡수하기 위해, 군사적·봉건적 '제국주의'(=짜리즘)로부터 부르주아 러시아를 해방시키"는 것으로 규정하고 있었다는 점을 명심해야 한다. 이는 독점자본주의사회가 되었다고 해서 당면 혁명의 성격이 사회주의적인 것으로 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보여준다.

왜 레닌은 독점자본주의 단계로 확실하게 접어든 러시아사회에서 사회주의혁명을 부정하고 민주주의혁명을 고수하였을가? 플레하노프적 한계에 사로잡혀서? '반독점'에 대하여 무지하여서? 그렇지 않다. 러시아 독점자본주의의 특수성으로 광범하게 봉건적 잔재가 온존하고 있었고, 이에 따라 농민과의 동맹이 여전히 중요하였으며, 계급역관계도 반(反) 자본주의가 아니라 짜리즘 타도의 문제를 둘러싸고 형성되어 있었다는 점이었다(이 점은 'PTR론자'(=1단계론자)들은 주목하길 바란다). 물론 '반독점'의 중요성이 증대되었고 짜리즘 자체가 독점 부르주아지의 국가로 성격이 변화하였으나, 세력배치의 문제는 여전히 1905년과 동일하였던 것이다.

러시아혁명의 특수성

2월혁명은 짜리즘의 타도를 가져왔으나, 권력은 부르주아지와 지주의 임시 정부, 프롤레타리아트와 농민의 혁명적 민주주의 독재기관인 소비에트에 의하여 나누어지게 되는 특수한 상황이 창출된다("혁명의 최초의 단계에서 두 번째 단계로의 과도기적 상황"). 도래한 혁명적 정세 속에서 볼셰비키의 지도력의 취약과 프롤레타리아트의 조직화 미비로 1905년 이후의 주체적 목표인 '노농의 혁명적 독재'를 수립하지는 못하였다(혁명의 '유산(流産)'의 위기). 짜리즘이라는 러시아 제국주의의 낡은 상부구조는 파괴되었고 러시아 제국주의는 '일격'을 당하였으나, '치명타'를 맞고 무너지지는 않았으며, 오히려 새로운 상부구조를 모색하고 있었다. 집권한 자유주의 부르주아지들은 반동화되고 이는 집권한 자유주의 부르주아지의 '주적'으로의 재규정과 직결된다-"제국주의적 공화국"을 지향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2월혁명의 경우 당순한 '유산'만은 아니었다. 혁명은 권력을 카데츠장, 즉 자유주의적 부르주아지로 넘겨주었지만(과거의 동요하는 반짜리즘 세력으로 새로운 지배세력으로의 전화). 프롤레타리아트에게는 소비에트라는 조직적 무기와 '계급투쟁의자유'를 주었던 것이다(레닌은 "며칠만에 러시아는-전쟁이라는 상황속에서-세계의 어떤 다른 나라들보다도 더 자유로운 민주주의적 부르주아 공화국으로 바꿔"었던라고 평가하였다). 또한 보다 중요하게는 "문제의 핵심"인 계급관계가 변하여 "서로 다른 계급이 이제 '바리케이드의 한편 그리고 다른 한변페 서 있게'"되었다. 이 속에서 레닌은 멘셰비키는 물론 기존의 볼셰비키에게도 충격을 준 '4월테제'를 발표한다.

4월테제는 요컨대 유산의 위기, 불연속의 위기에 있는 러시아혁명을 되살리고 사회주의혁명으로 진전시키기 위한 방책이었다. 1차 혁명은 일어났으나 새로이 집권한 권력은 부르주아 민주주의혁명의 괒 조차도 수행하지 않았고, 오히려 반동의 길로 퇴행하려 하였다. 그리고 당시 러시아는 '반동적 관료적 방식'의 개혁-이는 혁명의 완전한 유산이요, 러시아 제국주의의 새로운 상부구조의 창출을 의미한다-과 '혁명적 민주주의적 방식'-이는 당면한 파국과 기근을 타개하고 사회주의혁명으로의 진전을 가능하게 한다-이 존재하고 서로 투쟁하고 있었다. '임박한 파국'의 해결을 '옥포브리스ㅡ, 카데츠적 제국주의'가 수행할 것인가, 아니면 사회주의자에 의해 지도되는 소비에트가 맡을 것인가? 볼셰비키는 단호하게 후자를 택하여야 함을 선언하였던 것이다. 그리하여 레닌은 "혁명의 두번째 단계에서 그대들이 승리하기 위한 길을 준비하기 위하여 조직화, 즉 프롤레타리아트와 전체인민의 조직화라는 기적을 이루어내야만"한다고 강조하였던 것이다.

레닌은 2월혁명 후 초기에는 혁명적 민주주의 강화(소비에트로의 권력 이전)를 통하여 사회주의를 준비하고자 하였으나 소비에트의 변질이 진행되면서는, "부르주아 민주주의혁명의 문제들을 주요하고도 진정으로 프롤레타리아 혁명적인, 즉 사회주의적 행동의 '부산물'로서, 그 과정에서 해결"하고자 하였고 이것이 10월혁명으로 나타난다. 이것이 러시아혁명의 특수성이다!

특히 당시 멘셰비키는 물론이고 '낡은 볼셰비키'들의 발목을 붙잡았던 '반봉건'적 농업문제의 해결을 사회주의혁명의 승리를 통하여 해결하고자 하였고, 또한 러시아 자본주의의 새로운 단계에서 객관적으로 요구되던 '반독점'의 문제도, 사회주의 혁명의 성장 전화를 위한 투쟁 속에서 위치지워지게 된다(만약 2월 혁명이 본래의 목표대로 '노농의 혁명적 민주주의독재'를 온전히 창출하였다면 볼셰비키는 당면한 '반독점', '반봉건'의 과제를 이 권력하에서 철저하게 수행하면서 사회주의혁명으로의 성장 전화를 보다 원만하고 신속하게 이룩하였을 것이다). 바로 이러한 구체적 상황에서의 구체적 해결, 즉 '반봉건', '반독점' 등 민주주의혁명에서의 과제를 사회주의혁명을 통해 쟁취하려는 레닌의 관점이 '4월테제'에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80일전투 총매진 다지는 북한 군민연합집회 [뉴시스]
80일전투 총매진 다지는 북한 군민연합집회 [뉴시스]

 

(2) '4월테제'에 대한 왜곡 - '자본주의도 아니고 사회주의도 아닌' 혁명?

여기서 특히 문제가 되는 것은 10월 혁명의 성격과 '4월테제'를 전후로 레닌이 제시하는 경제적 조치의 성격에 대한 이해이다. '현실과 과학'지는 '4월테제'를 전후로 한 레닌의 주장들을 위의 맥락을 사상시킨 채 몇개의 문장의 조합으로 이해하고서는, 이를 자신들의 '반독점 PDR론'의 전거로 삼고 있다. 여기에는 좌우편향을 겸비한 중대한 오류가 있다.

첫째로, '4월테제' 및 '임박한 파국' 등에서 제시되는 경제적 조치의 성격을 부르주아적 한계를 넘는 것으로, 즉 "자본주의도 아니고 사회주의도 아닌"것으로 절충적으로 이해한다(좌편향).

둘째로, 레닌이 사회주의의 '도입'이 아니라고 말한 것을 직접적인 "사회주의가 아니라 혁명적 민주주의일뿐"이라고 해석하고, 그러면서 레닌은 "직접적인 사회주의혁명에 대해서는 완강히 부정"하였으며, 10월 혁명은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확립한 사회주의 혁명이 아니라 "노·농의 혁명적 민주주의 독재"를 확립한 혁명(=반독점 민주주의혁명)이었다고 주장한다(우편향).

첫번째의 문서를 보자. 이 씨는 레닌의 "아직 사회주의는 아니겠지만 더이상 자본주의도 아닐 것"이라는 구절을 인용하면서 이 '4월테제'의 조치가 부르주아적 한계를 뛰어넘는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이는 당시의 혁명의 전개과정을 사상시킨 해석에 불과하다.

'4월 테제'와 '임박한 파국' 등에서 레닌은 다음의 경제강령을 제시한다. 즉 1. 모든 지주소유지의 국유화, 2. 모든 은행의 단일한 은행으로의 합병과 그 업무에 대한 국가의 통제, 혹은 은행의 국유화, 3. 자본가의 독점적 결합체인 신디케이트의 국유화 4. 영업비밀의 폐지, 5. 기업가와 상인과 고용주 일반에 대한 강제적인 신디케이트화, 6. 주민의 소비자조합으로의 조직화 및 그에 대한 통제 등이다.

이러한 '혁명적-민주주의 통제'의 계급적 성격은 무엇인가? 자본주의도 아니고 사회주의적인 것도 아닌 절충적 성격인가? 그렇지 않다. 이러한 제반 조치들은 불철저한 민주주의혁명에서 사회주의혁명으로 이전해가는 과도적 정세, 즉 노-농독재의 경제강령이 완수되지 않았음에도 계급투쟁의 진전에 따라 프롤레타리아 독재의 수립을 향해 나아가야 했던 특수한 정세 속에서 제시된 것을 고려하더라도 그 객관적 성격은 부르주아적 한계를 뛰어넘지 못하는 것이었다.

각 조치에 대한 레닌의 입장을 간단히 살펴보자. 레닌은 토지국유화에 대하여 1905년에 "토지사유의 폐지 그 자체는 부르주아사회에서 가능한 최대의 첫"이라고 규정하고 있었다. 1917년의 기시에 그는 "이 조치는 부르주아체제의 틀을 곧바로 넘어서는 것은 아니지만, 그와 동시에 생산수단의 사적 소유에 깊은 타격을 가할 것"이며, 토지국유화는 "단지 부르주아혁명의 '마지막 단어'일 뿐만 아니라 사회주의로 향한 일보"라고 파악하게 된다. 여기서 레닌은 토지국유화를 기본적으로 부르주아적인 한계 내에 있는 것으로 파악하면서, 이 조치가 사회주의혁명과 맞물린다면 사회주의사회를 건설하는 토대가 될 것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레닌은 "은행의 국유화는 어떠한 소유자로부터도 한 푼의 코페이카도 빼앗지 않는 것"으로 평가하면서, "은행의 국유화가 흔히 사유재산의 몰수와 혼동된다면, 이러한 널리 퍼져 있는 혼동의 책임을 지고 비난받아야 하는 것은.... 부르주아 언론이다"라고 말하고 있다. 그리고 강제적 신디케이트화에 대해서도 "한편으로는 국가의 자본주의 발전을 촉진하는 수단"이며, "그러한 자본주의의 발전은 어디에서나 계급투쟁의 조직화를 초래할 것이며 조합의 숫자와 종류와 중요성을 증대시킬 것이다"라고 말하고 있다. 또한 레닌은 그 외의 제반 '혁명적-민주주의적 통제'에 대해서도 기본적으로 같은 입장을 나타내고 있다.

요컨대 '4월테제' 등에서 제시한 '혁명적-민주주의적 통제'는 독점자본에 대한 '조사', '통제', '규제'를 의미하는 것으로서, "그 자체로는 소유관계를 티끌만큼도 변화시키지 못"하며, 이윤이 존재하는 자본주의를 넘어서지 않는 방책이었다. 여기서 '사회주의로 향한 일보'가 강조되는 것은 이러한 조치가 사회주의혁명과 결부될 때, 즉 그러한 조치가 "혁명적 프롤레타리아트에 의해 지도되는 민주주의파의 혁명적 독재"가 이루어진다면, "노동자·농민·병사대표 소비에트에 의해 도입되고 규제되고 지휘된다면", 이 조치는 그렇게 될 것이다라는 맥락에서이다. 바로 이 맥락에서 "자본주의도 아니고 사회주의도 아니다"라는 말이 이해되어야 할 것이다. 레닌은 미완의 BDR이 진행되는 상황에서 PDR의 강령 또는 사회주의혁명의 강령이 아니라 사회주의혁명을 통한 BDR적 과제의 완수를 주장하였던 것이다(그리고 유의해야 할 점은 이러한 조치가 그 자체로 독립되어 제시되고 있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계급투쟁 역량의 강화의 문제와 결부되어 제기되고 있다는 점이다).
 

조선중앙TV가 북한 노동당 중앙위원회 제7기 제5차 전원회의에서 제시된 과업을 관철하기 위한 평양시 궐기대회가 5일 김일성광장에서 열렸다고 보도했다. (사진=조선중앙TV 캡쳐) 2020.01.05. [뉴시스]
조선중앙TV가 북한 노동당 중앙위원회 제7기 제5차 전원회의에서 제시된 과업을 관철하기 위한 평양시 궐기대회가 5일 김일성광장에서 열렸다고 보도했다. (사진=조선중앙TV 캡쳐) 2020.01.05. [뉴시스]

 

이상에서 우리는 러시아의 특수한 과도기적 상황하에서는 과도기적 요구로 제안되었지만 '혁명적 민주주의 국가', '노·농독재'에서 실시되었을 방책의 성격을 알 수 있다(이는 독점자본주의사회하에서의 민주주의혁명의 반독점 경제강령에 대한 성격규정의 원형이다).

두번째의 문제를 보자. 레닌이 사회주의의 '도입'이 아니라고 말한 것은 당시의 조건하에서 '즉각적'이고 '직접적'인 사회주의제도의 승리, 사회주의사회의 실현이 불가능하다는 것이지, 사회주의혁명의 서장을 열어 제껴야함을 부정한 것은 결코 아니었다. 그리고 사실관계를 보더라도 레닌이 사회주의의 '도입'을 반대한다고 말하였을 때 그 대상이 누구인가를 이들은 혼돈하고 있다. 레닌의 이 말은 볼셰비키가 사회주의를 도입하려고 한다는 멘셰비키(체레텔리 일파)와 에세르(체르노프 일파)들의 악선동을 겨냥한 것이었지, 사회주의혁명을 하지 않겠다는 것은 결코 아니었다(레닌이 도입이라는 단어에 따옴표를 친 것은 바로 이들의말을 재비판하기 위한 것이었다).

즉 레닌은 '국가와 혁명'에서 멘셰비키와 에세르가 마음에 그리고 있는 것은 "그 누구도 약속한 적이 없고, 또한 그것은 일반적으로 말해서 '도입될 수' 없기 때문에 '도입할' 생각도 가진적이 없는 바로 그 공산주의의 보다 높은 단계 혹은 국면이었다"라고 지적한 점은, 바로 레닌이 사회주의 '도입'을 부정한 것이 어떠한 의미였던가를 보여주고 있다. 그리하여 레닌은 사회주의를 '도입'하는 것은 아니지만 '설득(preach)'해야 함을, 그리고 프롤레타리아 독재 독재를 통해서만 사회주의적 조치는 도입될 수 있음을 단호하게 주장하였던 것이다.

여기서 문제는 10월혁명을 사회주의혁명으로 부르느냐 반독점 PDR로 부르느냐는 것은 아니다. 문제는 사회주의혁명을 어떻게 이해하는가,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어떻게 이해하는가이다. '현실과 과학' 등 'PDR'론자는 PDR을 "자본주의에서 사회주의로의 이행에 조응하는 변혁"으로 파악하고, "사회주의 자체와 구분되는 '이행기 속의 이행기'로서의 민주변혁기(=PD기간)"를 설정한다. 같은 맥락에서 '노동계급' 그룹은 'PDR'을 레닌의 "'혁명적 민주주의' 국가 개념에 상응하는 변혁의 상 전체"로 보고 있다.

먼저 'PDR'론자들은 'PD기간'을 사회주의혁명 과정에서 보편적으로 설정하여 '혁명적 민주주의' 자체를 유형화시켜 버림으로써, 이를 "이행기 속의 이행기"라는 독립된 역사발전단계로 인정하고 있다(사회주의에 대한 우편향).

즉 일반적으로 '사회주의로의 과도기 단계'를 설정하여, 그에 조응하는 '혁명적 민주주의권력', '인민민주주의권력' 또는 '인민연합권력' 하에서 사회주의적 국유화가 이루어진다고 파악함으로써 레닌의 프롤레타리아 독재관을 왜곡하고 있는 것이다. 레닌의 '혁명적 민주주의국가'는 남한 당면 변혁에서의 '민중권력'의 위상이 그러한 것처럼, 노-농독재의 국가, 즉 계급연합의 권력으로서 단일한 계급적 본질로 환원될 수 없다. 이는 당해 사회의 조건에 따라 상이한 계급적 본질을 갖는 국가를 가리킬 수 있으며, 그 방향은 계급투쟁에 달려 있다. 따라서 이를 역사발전단계에서 거쳐야 할 국가로 파악하는 것은 과도한 일반화이다. 만약 이와 같이 '혁명적 민주주의 국가' 또는 '민중권력'을 단지 이론적으로 단일한 계급의 국가로만 파악할 경우에는, 각 사회의 특수성에 기초한 계급 동맹, 노-농동잭, 민중권력의 성격을 구체적으로 이해하지 못하는 결과가 될 것이다(민주주의혁명에 대한 좌편향).

이상과 같은 경제강령 해석에서의 좌편향, 국가론·혁명론에서의 우편향은 '경제강령'을 바라보는 관점에서 기인한다. 'PD파' 논리의 근저에는 독점 국유화에 대한 경제주의적 사고, 즉 독점자본의 국유화가 '노동해방변혁' 전(前) 단계에 모두 실현되어야만 다으으로 넘어간다고 하는 사고가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 아직 2월혁명으로 독점자본주의사회에서 '반독점', '반봉건'의 과제가 실현되지 않았는데, 10월혁명을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수립한 사회주의 혁명으로 볼 수 있겠는가 하는 것이 그들의 고민의 출발점이다.

이는 한마디로 경제강령과 국가론을 병렬적으로 접합시켜 이해하는데서 생겨나는 오류이다. 다음과 같은 레닌의 말은 이씨와 같은 '통제관', '반독점관'에 대한 강력한 경고가 될 것이다. "우리가 '노동자의 통제'라는 슬로건을 말할 때, 우리는 그것을 항상 프롤레타리아트 독재와 병행시키고, 항상 그것을 후자의 바로 뒤에 둠으로써 우리가 의도하는 국가의 종류를 말한다". 여기서 레닌은 우리에게 외치고 있다. "권력없는 통제는 공문구"이며, "통제하려면 권력을 소유하여야"한다!. 레닌은 '통제'의 문제를 국가의 문제와 분리시켜 독자적인 의의를 갖는 것으로 사고하지 않았던 것이다.

요컨대 'PDR론'자들은 좌익적 언사에도 불구하고 사회주의의 임박성과 절실함을 먼 미래로 보내고 있다. 우리는 권력을 혁명적 프롤레타리아트가 틀러쥘 수 있다면 '민주주의적' 과제가 다 실현되지 못하였다 하더라도 바로 사회주의혁명으로 나아가야 하고, 미완의 과제는 그 과정에서 완수되어야 한다고 본다. 바로 이것이 그들과 우리의 차이점이다!
 

국가정보원 본청 현관 모습. [뉴시스]
국가정보원 본청 현관 모습. [뉴시스]

 

III. 동구 '인민민주주의혁명'에서 무엇을 배울 것인가?

동구 인민민주주의혁명의 경험은 몇가지 점에서 남한 변혁에 있어서 중대한 시사점을 주고 있다. 첫째, 민주주의적 요구가 '반봉건'에서만이 아니라 반제·반파시즘·반독점'에서 도출되었다는 점, 둘째, 이러한 성격을 갖는 민주주의혁명이 '인민전선권력'을 수립하고 그 권력을 공고히 하면서 급속도로 사회주의혁명으로 성장전화하였다는 점이다(이 점에서 권력의 면에서 '불연속'적이었던 러시아와 구별된다).

그런데 근래 'PD파'는 이러한 동구 PDR에 대하여 '새롭게' 이해하면서, 이를 남한 변혁의 문제로 끌어들인 바 있다. 윤소영 교수의 '선각'을 보자. 그는 1905년의 레닌의 혁명이론을 "부르주아변혁의 특수성"론이라 딱지 붙이고는, "2차 세계대전을 전후로 하여 비로소 등장하게 되는 PD라는 정식화를 여기까지 소급할 것을 제안"하였다 이러한 그의 제안은 바로 "부르주아변혁도 사회주의변혁도 아니면서...DR의 보편성과 특수성을 개념파악하려는 것이었다. 바로 이점에서 'PD파'의 혁명이론은 '일관적'인 이론임을 알 수 있다. 이 장에서 우리는 동구 PDR에서 진정 무엇을 배워야 하며 또 무엇을 버려야 하는가를 검토한 후, 'PD파'의 혼동을 비판하고자 한다.

동구 인민민주주의혁명에 대한 많은 자료들이 이미 성취된 혁명에 대한 사후적 해석인 경우가 많으므로, 우리는 나치(나찌) 치하에서 혁명을 수행하던 당시의 상황 속으로 파고 들어가서 구체적인 접근을 하고 그 핵심을 포착해야 한다. 혁명이 승리한 후 인민민주주의의 본질에 대해서 초기에는 '황금의 중간'론(폴란드의 고물카),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커치지 않는 제3의 길'론(초기의 디미트로프)이 만연되어 있었다(이는 경제의 측면에서는 바르가의 '국가자본주의론'으로 나타난다).

그러나 혁명의 발전전망을 흐리는 이러한 우익적 견해는 곧 비판되었고, 1947년 트루만 독트린과 마샬 플랜의 발표로 과거의 반파시즘 통일전선이 국제적 국내적으로 붕괴되고 동유럽 각국에서 사회주의로의 성장 전화를 위한 투쟁이 개시되자, 인민민주주의를 소급해서 '프롤레타리아 독재의 한 평태'로 파악하는 견해가 다수를 차지하게 된다(디미트로프의 불가리아 공산당 제5차 대회 보고, 소연방의 마니코프스키, 폴란드의 민츠 등) 이 입장은 인민민주주의를 단지 자본주의의 틀 내에서의 변화로 파악하는 '제3의길'론을 비판하고, 혁명의 주체가 노동자계급을 비롯한 근로인민임을 강조하였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그러나 이 이론은 인민민주주의가 전면적으로 프롤레타리아 독재의 기능을 수행하기 시작한 2단계의 시기에 의거하여 혁명론을 정식화하였기 때문에, 1단계의 성격을 역규정하여 재단해 버릴 위험성을 갖고 있다. 특히 이 경우 경제발전수준과 계급역관계에 있어서 상이한 역사적 조건을 갖는 동구 각국을 일률적으로 정리하게 되고, 반파시즘 민족해방혁명 시기의 전략적 목표와 그에 따른 동맹군의 배치의 문제를 과소평가해 버린다는 점에서 문제가 있다 할 것이다.

우리는 동구 인민민주주의혁명을 베버(Weber)식 유형론으로 이해해서는 안된다. 각국의 계급역관계와 혁명의 진행과정을 고려하지 않고, '승리한 혁명'의 관점에서 모두 사회주의혁명이고 애초부터 프롤레타리아 독재였다는 식으로 해결해버린다면 혁명과정에 대한 구체적 인식을 획득할 수 없다. 특히 인민민주주의혁명의 1단계에 대한 연구는 반드시 구체적이어야 하는 것이다.

1. '단계'인가, '과정'인가? - 혁명의 객관적 성격과 계급세력배치의 문제

남한 혁명의 전개가 '연속 2단계'이냐, '1단계 2과정'이냐는 과저 87년 '만만세'에 대한 '성격과 임무'의 비판 이후 지속된 논쟁이다. 여기서 핵심은 '단계'인가 '과정'인가하는 개념의 문제가 아니라, 변혁의 1단계의 성격 및 계급세력배치의 문제이다. 자본주의사회에서 '노동해방주의자'의 기본적인 목표는 노동해방변혁이다. 그렇지만 그것으로 나아가는데 존재하는 각종 장애물이 어떠한 성격인지, 그리고 이를 제거하기 위한 투쟁에 동맹군은 누구이고 예비군은 누구인가를 모르고서는 목적지에 도달할 수 없음은 분명하다.

먼저 "혁명에 대한 규정이 1차적으로 성격규정이고, 혁명의 성격을 규정하는 기준이 사회경제적 변혁을 어떤 방향으로 추구할 것인가에 있다"라고 한다면, 우리는 인민민주주의혁명의 제1단계와 2단계 사이에는 기본적인 성격 차이가 존재함을 발견할 수 있다. 그리고 동구의 경우 성장 전화의 과정이 평화적 방식을 취한 경우가 많았으므로-폭력적 방식을 취하더라도 비교적 쉽게 부르주아지의 반항이 분쇄된다-'단계'가 아니라 '과정'으로 이해하는 경우가 많겠으나, 그 객관적 성격은 분명히 구별되는 것이었다.

좀더 구체적으로 들어가보자. '반봉건'의 과제가 중심적으로 제기되고 있던 나라에서 1단계의 성격은 명확하다. 루마니아 공산당 1932년 제5회 대회는당면한 혁명의 성격에 대해 "루마니아는 부르주아 민주주의혁명의 완수에 직면해 있는바, 이 혁명의 임무는 '부르주아·지주 국가권력을 극력 타도하여 프롤레타리아트와 농민의 혁명적 독재를 수립하는 것이다"라고 하여 전략적 임무를 결정하고 있었다. 헝가리의 경우, 1944년말 해방 이후 임시정부는 공산당이 제안한 "헝가리의 민주적 부흥·발전의 강령"을 12월22일 공포한다.

여기에는 광범한 토지개혁과 독점국유화방침이 들어 있었고, 이 강령에 따라 국가기관의 민주화와 은행 및 주요산업의 국유화, 토지개혁 등이 추진된다. 그러나 이 혁명의 1단계가 부르주아적 한계를 뛰어넘은 것은 아니었다. 이는 1946년 9월말 공산당 제3회 대회에서 인민민주주의의 헝가리 내에도 자본주의의 근본적 모순이 존재하고 있음을 분명히 하고, 성장 전화의 방침을 확정하는 데서도 알 수 있다. 요컨대 호시카와 칼라의 말대로 인민민주주의 1단계에 있어서는 프롤레타리아 독재의 '요소'가 발생하기는 하였으나 그것은 이 단계에서는 발전의 2차적 측면을 이루고 있었고, 국가권력은 아직 부르주아 민주주의적 성격을 띠고 있었으며 사회의 기초는 여전히 자본주의였던 것이다.

다음으로 폴란드 노동자당의 1943년 3월1징ㄹ자 선언 '우리들의 투쟁목표'(일명 소선언), 1943년 11월의 '우리는 무엇 때문에 투쟁하는가'(일명 대선언)를 보자. 여기에는 은행 및 주요기업과 토지에 대한 국유화가 명시되어 있다. 또한 고도로 발전한 제국주의국가였던 체코슬로바키아의 경우 1945년 3월 공산당은 '민족전선' 창설을 주창하고 해방된 슬로바키아의 경우 1945년 3월 공산당은 '민족전선' 창설을 주창하고 해방된 슬로바키아의 코싯체시(市)에서 민족전선정부강령(일명 '코싯체강령')을 채택하는데, 그 주요내용에는 모든 협동기업체와 조직을 국가관리로 이전하는 것과 토지갷ㄱ 실시가 포함되어 있다.

그런데 이 강령의 성격에 대해서 폴란드의 마리노프스키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최소한의 강령이고 따라서 원칙적으로 특유한 부르주아 민주주의혁명이라고 하는 변화의 범위를 넘지 않았다. 그렇지만 강령을 제기한 것은 부르주아지가 아니고 맑스-레닌주의 정당이며 더우기 부르주아지의 입장에 반대하고 있다는 사실은 강령의 혁명적 성질을 규정하는데 결정적이고, 거기에 인민민주주의적 특성을 부여했다. 그리고 체코슬로바키아의 경우처럼 독점국유화가 반파시즘혁명 승리 이후 시행된 경우에도, 권력의 문제가 해결되지 않은 상태에서는 그 사회는 여전히 부르주아적 한계를 벗어나지 못하게 되고 국유화된 부분도 사회주의적인 것으로 기능하지 못하게 된다. 여기서 민주주의혁명에서 '반독점'의 성격에 대한 정확한 규정을 볼 수 있다.

요컨대 동구의 인민민주주의혁명 중 다수는 그 1단계의 성격이 "수행된 임무의 내용과 계급의 세력관계로 보아 부르주아 민주주의혁명의 범주에 들어가"는 것이었고, 단 "그 공격으 화살이 파시즘에 맞춰지고 반제국주의의 성격이 뚜렷하다는 점에서" 그리고 근로민중이 동력이 된다는 점에서 부르주아 민주주의혁명보다 훨씬 광범위한 것이었다. 단지 불가리아나 유고의 경우 반파시즘혁명투쟁 속에서 계급 투쟁의 진전이 즉각적으로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수립할 수 있을 정도로 나아갔으므로, '부르주아적 과제를 포함한 사회주의 혁명'을 수행하였다.

당시 동구 각국은 그 수준의 상이함과 발전의 특수성에도 불구하고 독점자본주의사회였다. 그렇다고 해서 당면 변혁이 무조건 사회주의혁명으로 규정된 것은 아니었고, 또한 그 성격이 절충되지도 않았다. '반봉건'이 주된 과제였던 나라에서건, '반독점'의 문제가 주된 과제였던 나라에서건 사회주의혁명과 반파시즘혁명은 명확하게 구분되었고, 또한 '성장 전화'를 거쳤다 할 것이다. 즉 "민주주의적 및 사회주의적 변혁의 제요소는 인민권력의 확립과 그 기능을 개시한 순간부터 뒤엉키고 연결되어 실제로 서로 영향을 주고 받았"지만, 혁명적 민주주의적 전환의 단계와 사회주의적 형태의 전환의 단계는 구별되었던 것이다(M.비에르트).
 

조국 법무부 장관 후보자가 1999년 월간말에 게재한 수기 ‘한 법학 교수가 체험한 한국의 감옥’ 표지. [출처는 서울경제신문]
조국 법무부 장관 후보자가 1999년 월간말에 게재한 수기 ‘한 법학 교수가 체험한 한국의 감옥’ 표지. [출처는 서울경제신문]

 

2. 혁명의 '연속' - 주체의 목표

이러한 동구의 PDR 1단계의 객관적 성격이 부르주아적 한계를 넘지 못하였다는 점을 잘못 이해하면, 스페인혁명, 그리스혁명, 중국혁명 등에 대한 스탈린적 오류가 발생할 수 있다. 혁명의 성격이 부르주아적 한계를 넘지 못한다는 문제와 권력을 프롤레타리아트가 잡아야 하고, 동요하는 부르주아 반파시즘세력에 대한 주타방이 관철되어야 한다는 문제는 별개의 문제이다.

동구 PDR은 최초로 사회주의혁명이 수행된 러시아의 경우보다는 유리한 조건하에서 진행되었고, 다수의 동구 나라에서 '연속 혁명'이 현실화된다. 즉 공산당을 중심으로 하는 -물론 공산당이 주도하지 못하는 경우도 있다- '반파시즘 인민전선'이 투쟁을 지도하고 반파시즘혁명의 승리 이후 권력을 잡는다. 그리고 이 인민전선권력이 내부 투쟁을 거쳐-새로운 '혁명'과 인민전선권력의 '파괴'를 통해서가 아니라-프롤레타리아 독재권력으로 전화한다.

여기서 반파시즘 민주주의혁명을 프롤레타리아트가 얼마나 철저하게 그리고 선봉에 서서 수행하는가가 그 이후 사회주의혁명으로의 '성장 전화'에 얼마나 커다란 영향을 미치는가를 알 수 있다. 또한 민주주의혁명에서 권력을 잡는 것이 '연속혁명'을 위하여 얼마나 중요한 것인가를 알 수 있다. 반파시즘 민주주의적인 내용의 조국전선강령, 즉 '최소강령'을 완수하기 위해서도, 프롤레타리아 헤게모니가 관철되는 권력-동구에서 그 형태는 인민전선권력-의 수립이 필요한 것이다. 프롤레타리아트는 이 권력을 강화하고 '최소강령'을 완수해 나가면서 프롤레타리아 독재로의 평화적 성장 전화를 수행해 내는 것이다.

한편 이를 가능케한 것은 바로 공산당의 사상적, 조직적 역량과 '인민전선' 내에서 공산당을 중심으로 하는 '좌익 블록'의 결집이었다. 이것이 전제될 때 '노농의 혁명적 독재', '인민전선권력'은 자신을 유지-강화해 나가면서 사회주의혁명으로 성장 전화를 성공적으로 수행할 수 있는 것이다.

또한 파시즘하에서 부르주아 민주주의가 갖는 최소한의 상대적 진보성 마저도 허용되지 않는 조건에서, 부르주아 민주주의가 갖는 이중성을 노동자계급을 중심으로 한 인민대중이 주도적으로 활용하고 이를 사회주의를 위한 투쟁에 종속시킨다는 관점, 즉 사회주의혁명의 관점하에서 부르주아 민주주의를 전면적으로 철저하게 '평민적 방식'으로 밀어붙임으로써 그 한계를 폭로하고 부르주아 민주주의 틀을 파괴한다는 관점은 동구 PDR에서도 관철되고 있다. 여기서 우리는 "전인민적인 것으로서 민주주의혁명의 성격"을 인식하고 프롤레타리아트를 "인민혁명의 선도자"로 역할하게 함과 동시에, "인민 내부의 계급적대감에 대한 몰이해를 은폐하"지 않고 오히려 "민주주의 혁명이 추구하는 모든 목표들 뿐만 아니라 그에 뛰따르는 사회주의혁명의 목표들도 포괄할 수 있도록 계급투쟁의 틀과 내용을 확정하기에 힘써야 한다"는 레닌의 사상은 여전히 유의미한 것임을 확인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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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뉴스 제 2015호-4부 뉴스의 한 장면.[KTV 대한뉴스 캡처]
대한뉴스 제 2015호-4부 뉴스의 한 장면.[KTV 대한뉴스 캡처]

 

IV. 민주주의혁명에서의 좌편향, 사회주의혁명에서의 우편향

1. 'PD파'의 분화와 '좌'편향의 심화


현재 통칭 'PD파'가 급속하게 재편되고 있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이전의 'PD파'라는 명칭하에 뭉뚱그러져 있던 제반 경향성들이 본격적으로 이합집산을 개시하고 있는 것이다. 그 하나는 '사회민주주의'적 경향의 대두이고, 다른 하나는 '반제반자본 PTR론'의 등장이다. 특히 전자의 등장은 우리에게 경각심을 불러일으키고 있는 바, 이제 사상투쟁의 기본적 구도는 "NL-ND-PD" 식이 아니라 "사민주의-혁명적 노동해방주의"로 자져야 할 것이다(이는 남한 노동자계급의 전위정당건설에 포괄될 수 있는 '정파'의 범위가 어디까지인가의 문제와 직결되는 것이다). 현재 남한 노동자계급운동의 가장 중대한 해안인 '사회민주주의'적, '합법주의'적 경향에 대한 본격 비판을 위해서는 별도의 글이 필요하다고 생각된다. 따라서 여기서는 반(反) 사회민주주의적 입장을 견지하고 있는 'PD파'의 입장을 중심적으로 다루기로 한다.

당면 변혁의 성격에 대하여서 '현실과 과학'지, <노동계급>그룹은 '자본주의적인 것도 아니고 사회주의적인 것도 아닌 것'이라고 절충적으로 규정을 하면서도 민주주의변혁 단계를 인정한다는 점에서 긍정적이다. 그러나 'PTR'론자들은 아예 민주주의변혁 자체를 부정하고 당면 변혁을 사회주의변혁이라고 선언한다. 김노박씨는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이 지배적인 것으로 확립된 사회에서의 혁명은 그것이 어떠한 형태로 추진되든 결국 사회주의혁명의 성격을 띠게 된다"라고 단언하면서 "우리 사회가 당면한 혁명은 이미 사회주의 혁명의 시작이자 그 일환으로서의 반제반독점 민중민주주의혁명이다"라고 주장한다.

한편 학생운동의 <기수>=<선언> 및 <벗> 그룹은 "자본주의에서는 사회주의혁명"뿐이라는 말을 "절대적 진리"로 되뇌이면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즉 "남한 프롤레타리아트는 계급배치와 주요한 정치적, 조직적 과제가 질적으로 변화하는 전략적 단계를 연속적으로 거치면서 단 하나의 혁명을 수행할 것이다. 그것은 사회주의혁명이다". 그리고 "남한의 PDR은 신식국독자라는 자본주의가 전일화한 속에서, '프롤레타리아 혁명의 일형태', '사회주의혁명의 최초의 정치혁명'으로 위치지워질 때만 진정한 의미를 갖는다", "당면 혁명의 성격은 사회주의혁명(프롤레타리아 혁명)이고 이를 전선적 형태로 표현하면 반제반파쇼 민중민주주의 혁명이다"라고 (그런데 이상과 같은 'PTR'론자들의 주장은 '현실과 과학' 이론가들의 주장 내에 이미 내재해 있었다. 이창휘씨는 "혁명의 유형은 해당 사회의 기본모순에 조응하는 것으로서 자본주의가 일정하게 성숙되어 있는 경우 그 사회의 혁명의 유형은 사회주의혁명일 수밖에 없"고, "기본모순의 발현형태로서의 주요모순에 해당하는 것이 혁명의 성격이다. 가령 선진국의 반독점 민주주의 혁명과 신식국독자의 반제반독점 민주주의혁명은 각 사회의 주요모순에 조응하는 혁명의 성격을 일컫는 것이다"라고 말한바 있다.

'PTR'론자들은 국가독점자본주의하에서는 과거 '반봉건'적인 내용을 갖던 민주주의적 요구가 이제 '반독점', '반파쇼'에서 도출된다는 점을 완전히 망각하고 있다(남한의 경우 '반제'의 문제가 또한 동시에 제기된다). 전략단계는 그 사회의 발전수준 및 특수성, 그리고 계급역관계에서 도출되는 것이라고 할 때, 당면 전략 단계는 그것이 해결할 모순의 성격--자본주의적 모순 자체를 철폐하는가-에 있어서 그리고 계급대립관계-노자대립으로 계급대립이 전일화되어 있는가-에 있어서도 분명히 '노동해방변혁'과 상이함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

2. 강령론의 '혁신' - '요구강령'과 '이행기강령'?

'PD파'는 강령론에 있어서도 민주주의혁명과 사회주의혁명을 '사회주의적' 국유화를 매개로 하여 절충하려는 시도를 하고 있다. 이창휘 씨의 말을 들어보자. "한국 변혁운동 이론사에서는 반제반독점 PDR의 강령을 최소강령으로 규정하는 것이 관행화되어 있는데, 국제논쟁사(특히 소련의 공식적 정리)에서는 '4월테제'와 같은 반독점 혁명적 민주주의혁명의 강령을 과도강령이라고 규정하고 있으며, 부르주아 민주주의혁명의 강령적 과제를 지칭하여 최소강령이라고 부르고 있는 것이 일반적이라는 사실이다". 한편 송주명 씨는 이창휘씨가 '반독점 PDR'론으로 국제운동사를 재단한 것처럼, 맑스 이후의 국제운동사에서의 강령문제를 '이행기강령'이란ㄴ 잣대로 마구 재단하고 있다.

요컨대 'PD파'는 '최소강령-최대강령'이라는 체계는 이행기적 방책이 결여되어 있던 1905년의 도식이며, "사민주의의 범위 안에서 그 혁명적 성격을 부각시키고 있는 미완의 강령"이라고 주장한다. 즉 "자본주의 발전의 장애를 없애고 그 발전의 가능성을 일단은 최대치로 보장하는" '최소강령'은 낡은 것이며, "사회주의로의 이행의 제 일보를 의미하는" '이행기강령'이 채택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그들은 위에서 본 '반파쇼전술-반독점전략'의 도식에 맞추어 '반파쇼'는 '전술적 요구강령'으로, '반독점'은 '이행기강령'(=과도강령)으로 파악한다.
'단계'인가 '과정'인가가 개념해석 문제가 아니듯이, 이 문제도 역시 단어 사용의 문제가 아니다. 이는 맑스-레닌주의 전통에서의 개념을 완전히 뒤집어버리는 시도인 것이다. 실제 'PD파'의 '과도'강령론은 위에서 본 '반독점PDR'론과 똑같은 오류, 즉 "과도기적 혁명"론과 맥을 같이하는 것이다.

먼저 레닌은 이 '과도'란 말을 다음의 맥락에서 쓰고 있다. 즉 ",,,3.시간과 장소 등의 구체적인 조건에 따라 달라진다는 단서하에서 과도기적 요구들이 각 나라의 강령들 속에 분명히 밝혀져야 한다. 4. 코민테른은 강령에 부분적 요구를 포함시키는 것을 기회주의로 말하는 것과, 기본적인 혁명임무를 애매모호하게 하며 부분적 요구를 대체하는 어떠한 시도도 모두 단호하게 비판하여야 하며, 또한 그러한 과도기적 부분적 요구들을 위한 이론적 기초는 일반강령 속에 분명히 진술되어야 한다".

레닌은 강령 속에 과도적 요구를 포함시켜야 한다고 한 것이지, 'PD파'가 말하는 '과도강령'을 주장한 적은 한 번도 없다. 과도적 요구를 과도강령이라고 억지부리는 것은 '자본주의도 아니고 사회주의도 아닌' PDR 주장만큼이나 절충적인 견해이다. 실제로 'PD파'는 사회주의혁명에 조응하는 최대강령에 대하여 부분적인 요구를 포함시키는 것을 '과도강령'이라고 승격시킴으로써, 부분적 요구와 강령의 성격을 절충시키고 있는 것이다(코민테른의 '전술에 관한 테제'는 "자본주의의 기반 위에서 그 동요하고 있는 건물을 강화하고 개선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개량주의자나 중앙주의자의 최소 강령"을 거부하였던 것이지 레닌주의적 최소강령 자체를 폐기한 것이 아니다).

'PD파'의 이러한 강령론의 실천적 귀결은 무엇인가? 첫째는, "요구투쟁은 그 자체로는 경투이지만 정투를 매개할 수 있는 위치를 갖게"되며, "요구강령은 이행강령을 매개할 수 있다"라는 주장이다(소위 "요구투쟁전술을 통한 프롤레타리아 독재의 접근가능성"론). 둘째는, '1905년 도식'이 극복된 이후 '1917년 도식'에 이르면 "국가권력에 대한 공세가 직접적으로 사회주의적 전망을 확보할 수 있었기 때문에 이 시기의 정치투쟁은 그것과는 전혀 다른 차원의 '사회주의적 선전선동'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라는 주장이다.

여기서 'PD파'의 경제주의적 투쟁관이 단적으로 드러나고 있다. 대중의 부분적 요구라는 것은 기본적으로 '자생적'인 것이다. 대중의 부분적 요구투쟁은 노동해방주의자의 정치선동을 위한 하나의 '계기'이고 '조건'인 것이지, 그것이 강령으로 승격될 수는 없다. 하물며 그것이 '이행강령'을 매개하고 프롤레타리아 독재로의 접근가능성을 열 수는 없다. 그리고 국가권력에 대한 투쟁이 '직접적으로' 사회주의적 전망을 확보할 수 있고, '사회주의적 선전선동'이 불필요하다라는 주장은 레닌주의적 투쟁관으로부터의 완전한 일탈이다. 우리는 반문하고 싶다. 현재 남한에서 벌어지고 있는 국가권력에 대한 투쟁이 '직접적으로' 사회주의적 전망을 확보하고 있느냐고? 그러한 '1905년 도식'을 벗어나지 못한 사회주의 선전선동은 중지해야 하느냐고? 요컨대 'PD파'의 이러한 강령론에서의 '혁신'은 다름아닌 경제주의적 혁신, 자생성에 복종하는 혁신 그 자체이다.

레닌은 1906년에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맑스주의는 최고강령과 최저강령을 확실히 구별할 것을 요구한다. 최고란 상품생산의 폐절없이는 불가능한 사회주의적 사회개혁을 말한다. 최소란 상품생산의 울타리 내에서도 아직 가능한 각종 개혁을 말한다. 레닌의 이 규정에서 '최소'는 위의 개량주의자들의 '최소'의 의미와 동일한 것인가? 또한 이 규정은 '반봉건'과제에만 걸맞는 것인가? 결코 그렇지 않다! 요컨대 '최소강령', '최대강령'이라는 말은 민주주의혁명-반봉건이든 반 독점이든-과 사회주의 혁명에 있어서 전략적 계급배치계획인 노농독재와 프롤레타리아 독재가 각각 부르주아적 과제를 넘어서지 않는 과제와 사회주의적 과제를 해결하는 임무에 대응하는 강령이다. 계급투쟁의 구체적인 상황에 따라 양자가 혼재되기도 하지만 절충은 없는 것이다!

특히 노동자계급의 당면 목표인 '최소강령'을 이해하는데는 몇가지 유의해야 할 점이 있다. 첫째로, '최소강령'은 "'질서'의 조직화"가 아니라 "전쟁의 조직화"를 목적으로 한다는 점을 망각해서는 안된다. 즉 '최소강령'은 "계급의식적이고 조직된 프롤레타리아트의 힘의 크기"의 성장에 촛점이 맞춰지도록 만들어져야 하는 것이다. 바로 이 점에서 전효관씨의 '요구강령'과 다르다. 둘째는, 위의 문제와 직결되는 것으로서 '최소강령'과 사회주의혁명과의 관계를 올바르게 이해해야 한다. 즉 사회주의혁명이라는 관점없이 '최소강령'을 실현하고자 하거나, 최소강령의 실현과 사회주의혁명을 '순차적'으로 발생하는 것, 최소강령이 '선결'되어야만 사회주의혁명으로 넘어간다는 식으로 파악해서는 안되는 것이다. 바로 이러할 때만 노동자계급의 '최소강령'은 단순한 "원리선언"이 아니라 "실제적인 투쟁에 참가하는 당의 강령"이 될 수 있는 것이다.
 

대한뉴스 제 1550호-삼민투위 검찰 중간 수사 결과 발표 유튜브 캡처.
대한뉴스 제 1550호-삼민투위 검찰 중간 수사 결과 발표 유튜브 캡처.

 

3. '사회주의적' 독점 국유화? - '국가론'의 부재

당면 변혁의 성격을 규정하고 성장 전화의 문적 토대를 이해하는 문제에서 '독점국유화' 강령은 매우 중요한 사안이다. 그런데 '현실과 과학'지는 민주주의변혁 이후 성취되는 '독점국유화'는 그 자체로 '사회주의적' 부문을 창출하며 따라서 혁명의 성격은 '부르주아적 한계'를 뛰어넘는다고 주장한 바 있다('PTR론'자는 말할나위 없고). <노동계급> 그룹은 이를 받아, '연속2단계혁명론'의 독점국유화론은 민주주의혁명에서 사회주의 혁명으로 성장 전화하기 위한 물질적 기초가 탈락되어 있는 '강제전화론'이라고 비판한 바 있다. 이하에서는 당면 변혁의 성격을 규정하는데 있어서 논쟁의 촛점이 되고 있는 '독점국유화'의 의미를 살펴보기로 하자.

독점자본주의시대에 있어서 '독점국유화'는 민주주의변혁과 '노동해방변혁'이 서로 긴밀하게 연결되는 고리이다. 당면 변혁이 쟁취할 독점 자본의 국유화는 이후 사회주의적 제도의 '맹아'가 될 것이다. '독점국유화'는 독점자본을 반대하고 그들을 약화시킨다는 의미에서 일정 정도 반자본가적 성격을 띠고 프롤레타리아트의 투쟁을 활성화하는 유리한 조건을 주며, 또한 이것이 확보된다면 '노동해방변혁'으로의 이행을 위한 유리한 전제조건이 마련될 것임은 분명하다. 당면 변혁이 승리로 종료한 후 예상되는 것은 바로 독점 자본을 국유화하는데 있어 그 방향성과 계급적 귀속을 둘러싼 치열한 계급투쟁일 것이며. 프롤레타리아트의 투쟁역량도 바로 이속에서 급속히 성장할 것이다(특히 노동자에 의한 공장의 접수와 관리가 중요하게 추진될 것이다). 바로 여기에 독점국유화의 강령의 중차대한 의의가 있다!

그러나 이러한 독점국유화의 성격을 사회주의적인 것으로 보아서는 안된다. 먼저 독점 자본에 대한 수탈이 자본주의 일반의 타도를 의미하지 않으며- '파괴'되는 것의 계급적 성격-이는 후자로의 가능성을 열었을 뿐이지 현실성으로 전화시킨 것은 아니다. '독점 국유화'가 이루어졌음ㅇ도 사회 전체의 수준에서 임금노동과 이윤의 법칙이 통용될 것이고, 경제운용의 기본원리는 시장경제원리일 것이다. 그리고 이 '민주주의적' 국유화는 전체 사회적 생산에 대한 계획화의 실현을 일정에 올릴 수 없고, 또한 중요하게는 비독점자본과 소상품생산, 소농경영에 대한 프롤레타리아트의 지배력, 즉 그 부분에 대한 사회주의적 관점에 선 지원과 통제를 수행할 수 없다('건설'의 계급적 성격). 즉 당면 변혁으로 쟁취할 '독점국유화에서도 프롤레타리아트의 불불(不拂)노동은 여전히 다른 계급에게 귀속될 것이다(이상의 점에서 '반혁명' 책동의 근거가 있다).

사회주의적 요소는 프롤레타리아 독재와 생산수단의 사적 소유의 철폐를 통해서만 가능하다(PD권력 하에서 사회주의적 요소가 도입될 수 있다는 것은 '선진변혁론'적 발상이다!). 권력의 문제가 해결되지 않은 상태하에서는 여전히 자본주의적 굴레를 찢어버리지 못한 상태라 할 것이다. '반봉건'이 과제로 되는 사회에서 민주주의 변혁이 '부르주아적' 성격을 갖는다는 것은 말할 필요도 없다. 그러나 '반독점'이 과제로 되는 시기에서는 이 문제가 혼돈될 수 있다. 사회가 독점자본주의사회이므로 '노동해방변혁'을 위한 '물질적 전제'가 성숙하고 '노동해방변혁'으로의 전진의 '가능성'이 훨씬 높아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은 '노동해방변혁'으로의 길이 시작되는 최후의 경계점에 접해있는 것 뿐이다(제2장에서 본 '4월테제'에서의 반독점강령에 대한 이해를 참조하라)

이러한 상태에 있는 '반독점'을 완전히 '반자본주의적'인 것으로 만드는 것, 즉 이를 사회주의를 위한 첫걸음으로 만드는 것은 프롤레타리아 독재의 수립이다. 따라서 '반독점'이 주요과제일 때도 여전히 성장 전화는 필요한 것이다. 프롤레타리아트의 우세로만이 아니라 결정적 승리로 변전시키는 것-이는 누누이 강조되다시피 숫적 우세나 구성의 문제가 아니다!-바로 이것이 민주주의변혁 이후의 유동적 상황에서 생산수단을 전적으로 프롤레타리아트에서 귀속시키고 사회주의를 위한 승리를 쟁취하는 유일한 길이다(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권력을 혁명적 프롤레타리아트가 틀어쥘 수 있다면 '반독점' 과제가 다 실현되지 못하였다 하더라도 즉각 사회주의혁명으로 나아가야 하고, 미완의 과제는 추후 완성될 것이다).

이러한 사고에 대해서 '현실과 과학'지는 '정치주의', '토대와 무관한 반파쇼론' 운운하고 있다. 한편 <노동계급> 그룹도 역시 이를 '강제전화론'(?)이라고 명명하면서 터무니없게도 폴 폴트 정권과 비교하고 있다. 여기서 바로 좌경적인 '사회주의적' 국유화론을 주장하는 'PD파'의 우경적 오류가 나타난다. 그들은 국가론과 경제강령문제를 병렬적으로 이해하는 것이다. 원론적으로 사회주의로의 이행은 자본주의 내부에서 사회주의적 경제제도의 발생을 통해서가 아니라, 물질적 전제의 성숙과 계급적대의 심화 위에서 정치혁명을 위한 프롤레타리아 독재의 수립으로 자본주의적 요소를 제거해 가는 과정이라 할 때 '권력에 의한 전화'는 당연하고도 필연적인 것이다. 요컨대 'PD파'는 독점 국유화를 둘러싼 계급전쟁의 성격을 파악하고 이에 대한 프롤레타리아트의 태도를 결정짓는 방식이 아니라 반독점국유화의 사회주의적 성격을 선험적, 이론적인 면에서 자동적인 것으로 파악함으로써 반독점국유화를 둘러싼 투쟁에 무력감을 노정하고 말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PD파'가 왜 통일되어 있는 하나의 '반제반파쇼전략'을 '반파쇼전술'과 '반제반독점전략'으로 구분하고서는, 후자의 우위를 자꾸 강조하는가를 알 수 있다. '정치혁명'과 '사회혁명'을 혼합시키는 이러한 견해는 '경제강령' 실현 후 점차적인 프롤레타리아트 독재 수립이라는 논지로 빠지게 되고, 따라서 경제주의적 전략, 전술관을 갖게 될 수밖에 없다. 그리고 그러한 PDR의 성공은 사회주의사회로 '진화'해가는-'성장 전화'가 아닌-'과정'을 겪는 것으로 사고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요컨대 반파쇼의 경제적 토대로서 반독점을 설정할 때 상부구조에 대한 투쟁이 전략과 구분되는 전술적 의미를 갖는다는 것은 일고의 가치도 없는 소리라 할 것이다. 반파쇼는 자체가 전략이다.

이점에서 <기수>=<선언>그룹은 '현실과 과학'지의 독점국유화관이 '경제주의'적인 것이라고 올바르게 진단하고 있다. <기수>의 다음과 같은 비판은 그들의 'PTR론'의 좌편향에도 불구하고 유의미하다. "'생산수단의 사회화-심지어 국유화'로 사회주의혁명의 정의를 대체하는 것은 완전히 오류이다.···이런한 정의는, 생산수단의 사회화의 기나긴 과정이 오직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전제로 해서 가능하다는 것을 간과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프롤레타리아 독재는 완전히 새로운 형태의 국가장치에 기반하는 '비국가로서의 국가'수립의 문제이며, 그것은 부르주아국가의 파괴에 의해서만 가능하다는 것을 간과한다.

그리하여 '생산수단의 사회화'를 이야기하면서도 그 전제를 마련하는 정치혁명이 얼마나 첨예한 계급투쟁 속에서만 가능한가를 무시하는 것이다. 현실 계급투쟁의 상황을 모두 '반독점'이라는 잣대로만 재면서 경제강령의 문제를 물신화시켜 버리는 '현실과 과학' 그룹의 견해에 대하여 이들은 '국가론의 부재'와 '사회주의혁명의 결핍'이라고 비판한 것이다. '반독점'은 당면 변혁에 있어서 핵심적 경제강령이지만, 그것은 변혁의 총체적 과정 속에서 프롤레타리아트가 수행해야 할 하나의 임무, 과제인 것이지, 그 자체가 '혁명'인 것은 결코 아님을 명심하여야 한다.
 

대한뉴스 제 1550호-삼민투위 검찰 중간 수사 결과 발표 유튜브 캡처.
대한뉴스 제 1550호-삼민투위 검찰 중간 수사 결과 발표 유튜브 캡처.

 

4. '최대강령'으로서의 통일?

'PD파'의 통일운동에 대한 태도는 임수경 씨 방북 투쟁에 대한 비난에서 명시화되기 시작하였다(이는 실제 '공동올림픽 개최투쟁'을 반대하고 '독재올리픽 반대투쟁'을 제기하였던 목소리에서 예고되고 있었다). 이 입장은 이후 '선혁명 후통일론', '파쇼하의 통일반대론', '약한고리론' 등 그럴싸한 문구로 자신들의 통일투쟁에 대한 방관과 무능력을 포장하였다. 이는 "통일 그 자체는 남한 혁명의 최대강령의 하나이지 최소강령의 하나는 아니라고 생각한다"라는 주장으로 압축된다.

이러한 주장에 근거하여 'PD파'는, 남한 정권은 '반통일세력'이 아니라 '흡수통합'을 지향하는 '통일지향세력'이며, 파쇼타도 이전까지의 통일 운동은 오히려 적을 이롭게 한다는 실천적으로 극히 유해한 주장까지 제출한 바 있다. 그러나 통일을 둘러싼 현실의 계급투쟁 앞에서 'PD파'는 동요하기 시작하였다. 그리하여 이창휘씨는 "과도적 연방제 통일은 최소강령의 문제이며 통일의 완성은 최대강령의 문제"라고 하면서 살짝 후퇴하였고, 'PD파' 내에서는 통일 투쟁에 대한 자신들의 취약점을 위로해주는 말로 "통일투쟁이 전선의 강화에 복무하는 한에서 이를 지지한다"라는 그럴듯한 문장이 유포되기 시작한다.

'PD파'의 '최대강령'으로서의 통일론에 대한 비판은 이미 많은 글들에서 수행되었으므로 자세한 것은 미루기로 하고 여기서는 이창휘씨가 주장하는 '최소강령'으로서의 통일론의 맹점, 즉 민주주의혁명의 한 구성부분, 계급투쟁의 일환으로서의 통일투쟁의 의미를 제거해버리는 점에 비판을 모으기로 한다.

'분단'이라는 '민족모순의 특수형태'는 남한 자본주의하에서 소부르주아적 '민족주의'를 항상적으로 창출한다. 이는 '분단고착화'를 요구하는 남한 자본주의와 파쇼권력과 적대적으로 대립하게 된다(소위 '흡수통일론'은 기본적으로 남한 자본주의체제에 대한 잘못된 평가에 기초하고 있다). 이러한 민중진영의 민족주의에 대한 노동자계급의 입장은 무엇인가? '노동해방주의자'는 쁘띠적 민족주의로는 결코 통일을 이루어낼 수 없다는 점을 잘 알고 있다.

여기서 '노동해방주의자'는 그 소부르주아성을 확인함과 동시에 그 혁명성을 최대한 고무시키고 반파쇼투쟁으로 묶어세워야 한다. 이것이야말로 '인민혁명의 선도자'로서의 태도일 것이다. 요컨대 우리가 통일을 최소강령이라고 확정한다는 것은 남한 민중의 통일열기가 혁명적 민주주의적이라는 것, 그리고 노동자계급은 이를 지도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PD파'는 다음과 같은 어리석은 질문을 할 것이다. "통일은 당면 변혁 이전에 가능한가?", "그러면 최소강령에 조응하는 당면 변혁 이전에 과도적 연방제통일(최소강령)이 실현될 수 있다는 말인가?"라고. 이는 위에서 본 최소강령이 '실현'되는 것은 변혁이 승리하고 난 뒤이다. 핵심은 최소강령이 언제 실현될까하는 문제가 아니다. 최소강령은 파시즘에 대한 투쟁의 정식화이다! 그외의 강령과 마찬가지로 그 '실현'은 여러 '방식'을 취할 수 있고 가장 바람직한 것은 '민중권력' 하에서의 최소강령 실현이다.

그러나 그렇지 못하는 경우라 하더라도 노동자계급의 투쟁역량 증대에 유의미하면 활용해야 하며, 나아가 그 속에서의 역량 증대를 통하여 '최소강령'의 온전한 실현으로 나아가야 한다. 요컨대 'PD파'가 주장하는 점, 즉 과도적 연방제 통일이 '최소강령'의 문제라고 주장하는 것은 통일을 단지 하나의 '제도'로만 보는 것이며 '투쟁' 속에 있는 것으로 보지 못하는 입장이라 할 것이다.
 

해당 뉴스는 지난 1990년대 초반부터 중반까지 북한에 의해 자행됐던 대형 간첩공작 사건이었던 조선노동당 중부지역당 사건을 다루고 있다. [대한뉴스 1926호 캡처]
해당 뉴스는 지난 1990년대 초반부터 중반까지 북한에 의해 자행됐던 대형 간첩공작 사건이었던 조선노동당 중부지역당 사건을 다루고 있다. [대한뉴스 1926호 캡처]

 

5. 계급투쟁의 관점이 빠진 파시즘관 및 '주타방'관

근래 남한 신식민지파시즘에 대하여 몇가지 잘못된 견해가 유포되고 있다. 가장 큰 문제점을 갖고 있는 것은 <인민노련> 내 일부의 '부르주아 민주주의로의 이행' 테제이다. 이들은 '6·29선언' 이후의 변화를 "지배계급 주도하의 개량", "부르주아 민주주의로의 점진적 이행"으로 파악하고 그 동력으로서 소위 '3저 호황' 등의 예를 들면서 남한 자본주의가 자립화, 탈종속화 추세로 가고 있다고 본다. 이들의 주장은 파시즘하에 포섭되어 있는 부르주아 민주주의제도에 대한 과대평가에 기인하고 있으며, 이후 '6공화국' 정권의 '공안정국' 창출, 민중운동에 대한 노골적 탄압, 민자당의 창당 등에 의하여 경험적으로도 파산되었다(그러나 이후에도 이들은 여전히 이러한 관점에 서서 '민중당' 중심의 사고와 실천을 하고 있는 것이다).

둘째는, '현실과 과학' 그룹의 계급투쟁의 관점이 빠진 환원론적 파시즘관이다. 구체적으로 예를 들어보면, '현실과 과학' 그룹은 "신식민지파시즘은 신식민지국가독점자본주의로부터 필연화되는 정치적 상부구조"라고 하여 신식국독자와 신식파시즘을 일 대 일의 조응관계로 보고 있다. 그리고 이들은 1989년 중반 제출되었던 반동부르주아지 내의 두 가지 정치적 경향으로서의 '파시즘적 보수대연합론'과 '자유주의적 보수대연합론'의 존재와 그 사이의 길항관계의 문제를, 파시즘을 물적 기초와 무관하게 파악하여 자유주의적 부르주아지가 파쇼를 '개조'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정치주의'적 입론이라고 비판하고 있다.

이러한 파시즘관과 '보수대연합'에 대한 논평은 "자본축적의 일반법칙에서 출발하여 어떤 형태의 국가가 필연적으로 도래하게 됨을 연역해내고, 매개물로서의 계급갈등을 간과하여 그것의 효과나 가능성마저도 완전히 무시해버리는 경제주의적 환원론적 경향"이라고 할 수 있다.

'자유주의적 보수대연합'의 의미는, 신식국독자의 위기가 심화되면 반동부르주아지는 자기 유지의 전략으로 부르주아 민주주의진영을 제한적으로 활용하는 형태를 취할 수 있으며, 이러한 지배블럭은 베네주엘라나 멕시코-이들 나라도 신식민지국독자사회이다-에서와 같은 형태의 상부구조로 나타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를 무시하고 신식민지국가독점자본주의하에서 반동부르주아지는 언제 어느때나 '파시즘'만을 취할 뿐이고, '자유주의적 보수대연합'의 가능성은 원천적으로 봉쇄되어 있다고 주장한다면, 계급투쟁의 변화하는 생생한 현실을 간과한 채 '공식'만을 외우게 될 것이다(물론 현재의 남한 신식국독자의 취약성으로 보건대 신식민지파시즘의 형태가 지속적일 것이라는 점은 분명하다).

다음으로 '현실과 과학'지를 비롯한 'PD파'의 소위 '전술적' 주타방론을 살펴보자. 이들의 '주타방'론은 얼핏보기에 우리의 입장에 유사한 듯 보인다. 그러나 여기에서는 중요한 차이가 있다.

'PD파'는, 구식민지의 민족부르주아지는 '전략적' 동맹자였지만, 신식민지에서는 그 중 일부만 '전술적' 제휴세력으로 지위가 변화하는데, 레닌시대와는 달리 '주타방'은 "고립시키는 것이 아니라 분할견인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이들은 그 근거로서 러시아에서는 자유주의 부르주아지가 새로운 사회의 지배계급으로 자신을 조직할 역사적 전망이 있었지만, 신식국독자사회에서는 자유주의 부르주아지는 그러한 '역사적 전망'을 상실하였고 또한 물적 토대가 취약하므로 '주타방'의 의의는 '반감'된다고 주장한다.

그리하여 이들은 과거 대통령선거시기의 경험을 실용적으로 적용하여 자유주의 부르주아지의 '우파'에게는 "타격을 통한 견인"이라는 방식을, '좌파'에 대해서는 "전술적 제휴라는 방식으로 적극적으로 견인"이라는 방식을, '좌파'에 대해서는 "쩐술적 제휴라는 방식으로 적극적으로 견인"이라는 방식을, '좌파'에 대해서는 "전술적 제휴라는 방식으로 적극적으로 견인"하는 방식을 취한다는 소위 '분할견인론'을 제창하였다. 그런데 대통령선거 이후 "전체를 고립화의 대상으로 설정하는 것, 즉 전통적인 주요타격방향을 고집하는 것은 좌편향이 될 것"이라는 주장이 김대중에 대한 짝사랑의 표현이었음이 갈수록 명확해지게 되자, 이창휘씨는 "분할견인론"이 오류였음을 인정하게 된다. 그러나 여전히 '주타방'에서의 "연대 혹은 제휴를 통한 폭로"라는 주장은 고수되고 있다. 또한 'PD파'는 레닌의 '3자 정립론'도 '특정 상황'에 기초한 것일 뿐이라고 깎아내리면서 폐기를 요청하는 데까지 나아가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PD파'의 "타격을 통한 견인"이라는 정책은 레닌적 '3자 정립론'에 입각한 주타방론과 완전히 무관하다.

반동, 개량, 혁명의 '3자 정립론'은 단지 러시아에서 세 계급의 태도를 정세적인 것으로 파악한 결과가 아니었다. 그것은 그 세 가지 태도가 당면한 민주주의 혁명을 위해 러시아의 사회경제적 토대에서 도출되는 기본적인 태도임을 해명하고 이에 기초한 계급배치계획으로 제기된 것이었다. 이진경씨는 2월 혁명 이후 '3자 정립론'의 변화를 들어 이를 정세적인 것이라고 주장하기도 하나, 이는 2월혁명의 의미를 완전히 간과하는 주장이다.

2월혁명 이후 레닌은 새로이 '카데츠의 우측', '카데츠', '사회민주주의자와 사회혁명당', '볼셰비키'라는 네 개의 그룹을 주요한 정치세력으로 들고 있다. 그런데 이것은 "혁명의 최초의 단계"로서 2월혁명이 종료된 후 두번째 단계로 전진하기 위한 세력배치계획으로서의 당연히 요청되는 변경의 결과였다(프롤레타리아 정당과 소부르주아 정당의 구분과 소부르주아 정당에 대한 주타방 설정). 요컨대 'PD파'와 같이 계급배치계획을 유동적이고 전술적인 것으로 파악하는 것은 혁명의 단계구분의 의의를 올바로 파악하지 못하는 것이라 하겠다.

다음으로 중소자본의 '진보성'을 독점자본과의 대립 속에서 도출하면서 자유주의 부르주아지에 대한 태도를 결정하는 'PD파'의 견해를 검토하자. 독점자본주의시대에서 '자유경쟁'의 요구는 역사를 거꾸로 돌리려는 환상일 뿐이며, 따라서 중소자본의 '자유경쟁'의 요구는 'PD파'의 주장처럼 결코 '진보적'인 것이 아니다. 즉 자유주의 부르주아지의 태도를 중소자본 일반에 대한 설명-독점자본과 대립하고 있다는 것-으로 대체할 수는 없는 것이다.

남한 노동자계급은 당면 민주주의혁명을 유산시키는 최대의 위험세력으로서 자유주의 부르주아지를 주목해야 한다. 물론 신식국독자사회에서 비독점 중소자본의 '단독' 지배가 이루어질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환상이며, 또한 신식민지파시즘국가에서 고전적 의미의 '자유주의'가 실현될 수 없음도 명백하다(그러한 권력은 반혁명의 공세로 무너지거나 또는 스스로 반동화할 것이다).

그러나 현재 비독점부르주아지의 정치적 대변자인 자유주의 부르주아지의 개조방안이 갖는 이데올로기적 영향력과 그들의 정치력의 강대함을 망각해서는 안된다(실제 일시적이지만 이들이 혁명적 정세를 이용하여 집권할 가능성이 있으며, 집권한 자유주의 부르주아지는 곧장 반동화할 것이라는 점, 그리고 이는 바로 민족민주혁명의 '유산'이며 신식국독자의 새로운 상부구조의 창출-'자유주의'라는 이데올로기로 한층 더 포장된- 임을 한시라도 잊어서는 안된다). 바로 여기서 '고립화', '무력화' 방침이 필연적으로 도출되는 것이다.

요컨대 'PD파'의 "타격을 통한 견인"이라는 정책은 실질적으로 그들이 그렇게 비난해 마지 않는 <노해동> 다수파의 "일면투쟁, 일면단결"론과 사고의 뿌리에 있어서는 차이가 없다. 즉 이들은 자유주의 부르주아지에 대해 '견인', '연대', '제휴'를 중심으로 사고하고 있으며, 그리하여 전략적 통일전선체 속에 자유주의 부르주아지를 포함할 것인가하는 문제에서 계속적으로 동요하고 있는 것이다. 특히 이 문제는 중요하다. 'PD파'는 그들이 '신식국독자-반체반독점 NLPDR론'을 제기하던 초기에는 "반제반파쇼 민족민주전선(민족주의적 내지 자유주의적 부르주아지 및 기타 사회세력들까지도 포함)"이라는 통일전선건설방침을 제출하고 있었는데, 이후에 '민중운동연합'론으로 변화한다(이는 소위 '분할견인론'에서 '전술적 주타방론'으로의 변화와 결부되어 이루어진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PD파'의 주타방과 통일전선에서의 절충과 동요는 이후에도 계속 된다. 이는 88년부터 풍미한 소위 '두 개의 전선'론이라는 관점에서 단적으로 드러났다. 즉 단일한 반파쇼전선을 노동자계급과 대부르주아지가 주도하는 '경제적 사회적 민주화전선'과 파쇼와 보수야당이 주도하는 '정치적 민주화 전선'으로 형이상학적으로 구분하고는 전자야말로 노동자계급의 진정한 투쟁전선이므로 이것에 집중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이 '두 개의 전선'론은 당시 "5공청산"에 매달려 있던 소부르주아 정치주의자-'주사파'와 <노해동> 다수파로 대표되는-들에 대한 비판에서 출발하였지만, 그 귀결은 계급투쟁에 대한 단계론적 이해와 프롤레타리아트의 임무에 대한 의도적 축소였던 것이다. 노동자계급 중심이라는 거창한 구호하에서 실제로 이루어졌던 것은 현실의 '정치전선'의 헤게모니를 자유주의 부르주아지에게 자발적으로 양보하는 것이었던 것이다.

'주타방'을 명확하게, 농민과 소부르주아지를 자유주의 부르주아지의 헤게모니로부터 분리시키고 자유주의 부르주아지를 '고립화', '무력화'시킨다는 정책으로 이해하지 않는다면, 프롤레타리아트를 중심으로 하는 민중대연합으로서의 통일전선체- '좌익 블록'의 문제를 흐리게 되며, 자유주의 부르주아지가 '역사적 전망'이 없다는 극히 경제주의적 이유로 그들에게 '면죄부'를 발부해줄 수 있다. 그리고 보다 중요하게는 현실의 계급 투쟁의 진전에서는 자유주의 부르주아지를 '견인'한다는 명목하에서 정치적 무능력을 노정하거나 오히려 '견인'되어 버리는 결과를 낳을 것이다(과거 대선시기의 '분할견인론'의 실천적 귀결을 보라).

소심한 'PD파'는 '전략적' 주타방이 설정된다면 자유주의적 부르주아지에 대한 '견인'을 포기하는게 아니냐고 우려하지만, 주타방 설정이 자유주의 부르주아지와의 부분적 '제휴'를 거부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우리는 현재 대중에게 헤게모니를 행사하고 있는 자유주의 부르주아지를 대중으로부터 차단하기 위해서라도 보다 적극적으로 그들과의 제휴-사안별 정치연합의 가능성-를 모색할 것이다. 현재의 시기에서 민중통전체의 맹아로서 '국민연합'을 노동자계급 중심으로 확고히 구축하는 것과 보수 야당을 포함하는 '비상시국회의'를 꾸려나가는 것은 결코 배치되지 않는다는 점은 이에 대한 실증이다.
 

대한뉴스 제 2015호-4부 뉴스의 한 장면.[KTV 대한뉴스 캡처]
대한뉴스 제 2015호-4부 뉴스의 한 장면.[KTV 대한뉴스 캡처]

 

6. '민중권력'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당면 변혁을 어떻게 성취하여야만 프롤레타리아트의 해방을 담보하는 사회주의혁명으로 나아갈 수 있는가? 이에 대해 파쇼권력의 완전한 타도 위에서 민중이 주도하는 민주정부, 즉 '민중권력' 수립을 통해서 가능하다는 인식은 현재 혁명적 노동자계급운동 내에서는 공유되어 있는 듯하다. 그러나 우리의 판단으로는 그 공유의 수준이 추상적, 선언적이다. 즉 당면 변혁단계에서의 쟁취할 권력의 위상에 대한 공통된 인식이 문제로 되고 있는 것이다.

먼저 <선언>과 <벗>그룹은 그 권력은 프롤레타리아트 독재 밖에 없으며, 이것이 아닌 어떠한 권력을 상정하는 것 자체가 잘못된 것이라고 주장한다. "프롤레타리아 독재가 아닌 것은 아직 프롤레타리아트가 완전히 분쇄하지 못한 부르주아권력일 뿐"이며 부르주아 독재와 프롤레타리아 독재 사이에 끼어들 수 있는 것은 이중권력 상태나 무정부적 혼란 뿐으로 새로운 국가형태가 있을 수는 없다는 것이다. 즉 이들은 프롤레타리아 독재가 아닌 '민중 권력, '민주정부' 등을 말하는 것 자체를 '중간정부'를 설정하는 소위 'GDR'적 사고와 동일시하는 극좌적 편향을 보여주고 있다.

한편 이점에서 '현실과 과학'지는 당면 변혁으로 수립될 권력을 '민중연합권력'으로 설정하고 이는 프롤레타리아 독재로 '성장·전화'할 것이라고 보고 있는바, <선언> 및 <벗> 동지들에 비해서는 상대적으로 구체성과 현실성을 띠고 있다. 그러나 이들은 각 권력의 성격을 잘못 파악하고 있으며, 또한 '민중연합권력'을 사회주의혁명의 과정에서 거쳐야 할 '역사발전단계'로 파악하는 과도한 일반화를 범하고 있다.
wkr요컨대 이러한 경향들은 모두 당면 변혁의 구체적인 세력관계 속에서 생기는 변수를 포섭하지 못한 채 "민중권력", "프롤레타리아 독재" 만을 주장하게 되는 방향으로 나아가게 되는 것이다.(좌익적 언사 속에서 배양되는 정치적 무능력!)

여기서 우리는 당면 변혁에서의 권력의 상을 구체적으로 그려볼 필요가 있다.

첫째로, 우리는 '현실과 과학' 그룹처럼 '민중연합권력'을 단지 시간적 순서로만 파악해서는 안된다. 그렇지 못하면 <선언> 및 <벗> 동지들이 우려하는 '중간정부론' 식이 되고 말 것이다. 우리가 강조하는 것은 러시아 혁명에서의 레닌의 '혁명적 민주주의독재'론의 의미와 같이, 당면 변혁으로 창출될 권력은 그 향방이 계급투재엥 달려 있는 불안정하고 유동적이며 모순적인 권력이라는 점이다.

레닌의 '혁명적 민주주의 독재'론은 민주주의혁명이 사회주의 혁명으로 '성장·전화'하는 시기에 있어서 정치권력의 성격을 해명하는 획기적인 사상이었다. 레닌은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세상사가 모두 그렇듯이 프롤레타리아트와 농민의 혁명적 민주주의독재도 과거와 미래를 갖는다. 그것의 과거는 전제정, 농노제, 왕정, 특권과의 투쟁이다.···그것의 미래는 사유재산에 대한 투쟁이자, 고용주에 맞선 임노동자의 투쟁, 사회주의를 위한 투쟁이다."

바로 여기서 그는 이 프롤레타리아트와 농민의 혁명적 민주주의독재를 유형론적으로 사고하려는 경향에 대하여 경고를 보내면서, 민주주의혁명에서 사회주의혁명으로 전화하는 시기 동안의 정치권력, 즉 민주주의혁명으로 수립될 권력이 갖는 '모순성'-민주주의 일반의 실현에 대한 이해의 통일성과 사회주의로의 진전에 대한 이해의 대립성-과 '유동성'-권력의 귀속이 최종적으로 어느 계급으로 갈 것인가가 확정되지 않은 불안정성 및 역전가능성-을 해명하고 있다.

요컨대 민중권력의 '최대치'는 프롤레타리아 헤게모니가 담보되는 민중권력일 것이고, '최저치'는 노동자계급의 독자성이 보장되는 협정-협정 파기가 필연적으로 예고되는-하에서 자유주의 부르주아지와의 연합권력일 것이다. 이 권력의 향방은 이 새로운 시기의 계급투쟁에 달려 있다. 바로 이것이 당면 변혁이 가져올 권력의 상이다. 만약 당면 변혁의 결과 수립된 권력 내에서 프롤레타리아 헤게모니가 관철되고 있다면-이것이 남한 '노동해방주의자'의 주체적 목표이며, 우리는 이를 위하여 모든 노력을 다해야 한다- 이 권력은 즉각적으로 프롤레타리아 독재권력으로 전화할 것이고, 민주주의적 과제를 부수적으로 수행하면서 '노동해방변혁'으로 곧장 달려갈 것이다. 그렇지 못하다면 이 불안정한 권력은 '혁명의 유산'으로, 즉 부르주아지를 '새롭게' 강화시키는 방향으로 나아갈 것이다. 요컨대 당면 '민중권력'은 바로 하나의 독재에서 다른 하나의 독재로 진행해 가는 투쟁의 과정에 있는 권력임을 분명히 해야하며, 이를 고정적인 새로운 '권력유형'으로 바라보아서는 안되는 것이다.

둘째로, 우리는 프롤레타리아 헤게모니를 선험적으로 전제해서는 안된다. 우리는 철저하게 '현실주의자'이어야 하며 계급 역관계의 냉정한 현실에 기초하여 전략계획은 수립되어야 한다. 정세는 객관적이다. 객관적으로 도래하는 혁명적 정세는 주체, 즉 '노동해방주의자'와 그에 의해 조직화된 대중의 준비정도를 고려하면서 도래하지 않는다. 여기서 우리는 당면 변혁의 귀결이 부르주아지의 집권일 수 있다는 점을 애초에 부정해서는 안되는 것이다.

남한 현대사의 경우만 보더라도 '4월 혁명'기, 80년 '서울의 봄'에서 광주 봉기의 시기 등과 같이 혁명적 정세는 주체의 준비를 기다리지 않고 도래함을 알 수 있다. '4월혁명'을 예로 들어보자. 그것이 '노동해방주의자'의 계획에 의하여 도래했던가? 그렇지 않다고해서 그것을 '혁명'이라고 명명해서는 안되는가? 또는 '민중권력'이 수립되지 않았다고 해서 '혁명'은 아닌가? 4월혁명은 권력이 한 계급에서 다른 계급으로 이전되었다는 점에서 분명히 '혁명'이었다, 이 시기 남한 사회에는 두 가지 길의 선택이 있었다. 당시 신식민지국가독점자본주의로의 성장 전화를 요구하던 남한 자본주의를 안정적으로 재생산해 줄 수 없었던 민주당권력을 무너뜨리는 반동 부르주아지들에 의한 반혁명이냐? 아니면 민주당권력을 무너뜨리는 반동 부르주아지들에 의한 반혁명이냐? 아니면 민주당권력이라는 유리한 조건하에서 '노동해방진영'의 역량강화를 통한 '노동해방변혁'으로의 성장 전화인가? 후자의 길은 거의 무망하였고 역사는 전자의 길을 걸을 수밖에 없었으며, 남한 프롤레타리아트에게 민족민주혁명의 재수행이라는 고통스러운 과제가 다시 부과되었다.

우리는 여기서 혁명적 정세의 도래가 수학공식같이 프롤레타리아 헤게모니가 관철되는 권력의 수립으로 직결된다는 사고는 매우 낭만적이며 따라서 위험한 것임을 알 수 있다. 특히 현재 남한의 '노동해방진영'의 역량을 고려해본다면 더욱 그러하다. 이와 함께 우리가 또한 명심해야 하는 것은 도래할 혁명적 정세에서 계급역관계상 창출될 권력이 프롤레타리아 헤게모니가 관철되지 않는 권력이라도-노동자계급 및 근로인민의 독자성이 보장되고 자유주의 부르주아지 등이 권력에 참여하는 형태일 수도 있다-그것을 최대한 프롤레타리아트의 역량 강화를 위하여 활용하여야 하고, 또한 그 창출을 위하여 노력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즉 우리가 '민중권력'을 설정하는 것은 이러한 구체적인 정세와 계급 역관계에 따른 제반 가능성과 그 속에서 프롤레타리아트의 '정치력'을 고려해 설정하는 것이지, '민중권력' 자체를 고정불변한 것으로 사고하는 것이 아님을 분명히 하고자 한다.

한편 'PD파'는 파시즘 대 PD라는 전략적 대비하에서 '반파시즘 일반민주주의/반파시즘 중간정부'를 전술적 범주로 고려할 수 있다고 말한다. "최대한 발전하였을 때조차도 부르주아 민주공화제의 틀을 벗어나지 못"하는 '진보적 민중민주운동세력의 중간정부'의 가능성을 인정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들에게서 문제는 혁명적 정세의 귀결이 '그러한 중간정부' 수립으로 귀결된다면, 변형된 형태이지만 기존 전략단계는 종료한다는 것, 그리고 그 '중간정부' 그 자체에 여러가지 변화가능성-'민주주의민중공화국'으로 전화할 것인가 아니면 반동화할 것인가-을 내포하고 있으므로 즉각적인 새로운 투쟁이 필요하다라는 점은 간과되고 있는 것이다.
 

조국 민정수석이 14일 오후 청와대 춘추관에서 국정원, 검찰, 경찰 개편 방향 등 '권력기관 구조개혁 안'을 발표하고 있다. 2018.01.14. [뉴시스]
조국 민정수석이 14일 오후 청와대 춘추관에서 국정원, 검찰, 경찰 개편 방향 등 '권력기관 구조개혁 안'을 발표하고 있다. 2018.01.14. [뉴시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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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 맺음말

우리는 이상에서 'PD파'의 '좌'편향적, 경제주의적 변혁이론을 비판하기 위하여, 러시아혁명에서 레닌의 혁명이론과 동구 인민민주주의혁명의 경험을 검토하고, 남한 변혁운동상의 몇 가지 쟁점을 다루었다. 이속에서 우리는 다시 한번 남한 당면변혁을 '노동해방변혁단계'와 질적으로 구분되는 '민주주의변혁단계'라고 규정한다. '신식민지성'이라는 남한 자본주의의 특수성과 현재 계급투쟁의 진전정도와 계급역관계는 사회주의로의 최종적 이행에 앞선 예비적 단계로 반제반파쇼반독점의 내용을 갖는 변혁을 요구하는 것이다. 그 내용을 요약하자면 다음과 같다.

1) 자본-임노동관계 일반을 철폐하는 것이 아니라 예속적 독점자본과 제국주의의 지배를 타도하여 부르주아지와 프롤레타리아트의 계급대립을 전일화하는 변혁이다. 바로 이러한 의미에서 당면 민주주의변혁은 자본주의적 생산양식 자체를 부정하지 못하며-예를 들면 중소자본의 성장의 기회는 보장된다-, 따라서 사회주의혁명과는 질적으로 상이하다. 이 규정이 "생산력을 발전시키는 부르주아 민주주의혁명, 자본주의적 발전의 전망을 갖는 BDR"을 뜻하는 것이라고 비판하는 것은 이 규정의 원뜻과 완전 무관하다.

2) 완전한 정치적 자유를 계급투쟁에 부여하여 '노동해방변혁'으로 성장 전화할 발판을 형성하는 변혁이다. 즉 독점국유화강령, 농업강령 등도 바로 이러한 노동자 계급의 투쟁역량 강화에 복무하게끔 사고되어야 한다.

3) 프롤레타리아트의 헤게모니하에서 민주주의를 지지하며 비타협적으로 투쟁하는 민중 일반의 연합권력에 의하여 수행되는 변혁으로서, 통일된 민주주의 민중공화국 수립을 목표로 하는 민족적 과제와 민주적 과제가 통일된 변혁이다. 이 점에서 '통일투쟁' 등의 소 부르주아의 투쟁에 대한 '지도'의 관점이 중요하다.

이러한 당면 혁명은 첫째로, 주체가 프롤레타리아트와 근로인민이라는 점과, 둘째로, 남한사회 내에 '노동해방사회'를 위한 물질적 기초가 충분히 마련되어 있다는 점에서, '노동해방변혁'으로의 급속한 성장 전화의 길을 필연적으로 걷게 된다. 요컨대 "민족민주혁명 속에는 이미 이 혁명을 사회혁명으로 전환시키는 장래성이 포함되어 있"으며, 당면 혁명은 바로 '노동해방변혁'의 서막으로서 '노동해방변혁'을 위한 물적 토대를 제공할 것인 바, 당면 혁명과 '노동해방변혁'은 "동일한 사슬의 두 고리"인 것이다! 우리는 '노동해방변혁'으로의 이행의 연속성을 강조할 뿐만 아니라, 전략단계 마다의 특수한 주요과제를 규정하고 실현해내야 한다.

'페레스트로이카'를 계기로 하여 현존 사회주의국가에서의 사회주의건설의 문제점을 교정하려는 움직임이 시작되었다. 그러나 그 교정을 위한 투쟁은 레닌주의적 원칙에 입각해서 이루어지지 못하고 오히려 레닌주의를 수정하는 방향으로 이루어졌다. 그 결과는 세계 사회주의운동의 후퇴였고 패배였다. 문제는 레닌이 '제1강화기'에 등장한 사회민주주의적 경향에 대한 투쟁 속에서 맑스주의의 혼을 수호하였듯이, 현시기에 있어서 우리의 임무는 '페레스트로이카'와의 투쟁 속에서 맑스-레닌주의의 혼을 수호하고 이 위기를 남한 변혁의 수행을 통하여 타개하는 것이다. '스탈린적 편향'에 의해 만들어졌던 '봉쇄된 위기'는 그 해결주체의 잘못된 실천과 맞물리면서 폭발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우리는 이러한 세계 사회주의운동의 후퇴현상과 대조적으로 남한 '노동해방변혁운동'은 성장하고 있음을 명심하여야 한다. 80년대 후반기 이후 남한 변혁운동진영 내에서는 본격적인 '노동해방주의자'가 등장하였고, 이는 노동자계급 대중운동과 급속히 결합해 가고 있다. 그리고 아직 그 영향력에 있어서 미약하지만 세계 어느 나라 못지않게 남한의 노동해방진영이 전투적이고 원칙적인 관점을 견지하고 있음은 남한 사회의 발전전망을 밝게 해주고 있다.

이 글은 바로 이러한 '노동해방주의' 운동진영 내에서 강령논쟁의 재개를 요청하는 글이다. 자유주의적 부르주아지의 품안에 노동자계급의 운동을 가두어 놓으려는 기회주의적 입장은 여전히 '대동단결'을 외치고 있고, 페레스트로이카의 바람 속에서 사회민주주의적, 의회주의적 입장은 호시절을 만난듯 '혁명적 노동해방주의'의 종언을 떠들고 있다. '선행(先行) 노동계급의 사상'인 '낡은(?)' 맑스주의를 '창조적(?)'으로 '계승 극복 발전(?)'시켰다는 '주체사상'을 가지고 진군하는 노동자계급의 시야를 흐리는 실천, 또 다른 측면에서 '맑스주의의 위기'를 운운하면서 스스로 '혁명'이라는 무기를 놓아버리는 실천은 종식되어야 한다. 철저하게 전투적인 그리고 과학적인 '노동해방주의'의 입장에 굳걷히 선 노동자계급의 강령! 바로 이것이 필요하다!

그리고 또한 이 논쟁은 단지 '말'에 의해서가 아니라 '행동'을 담보하는 강령논쟁이어야 할 것이다. 즉 당면한 계급투쟁에 대한 조직적 지도와 개입없이 "이론의 완결성을 구비한 후에 실천하자!"는 식, 또는 "선전 후에 선동하자!"식이라면 정말 곤란하다. "모든 나라 사회주의자들이 이끌리는 이 이론(맑스주의 이론)의 저항할 수 없는 매력은 바로 그것의 엄격하고 최고로 과학적(사회과학에서 최후의 말이다)인 특질과 혁명적인 특질을 결합시켰다는 사실에 있다"는 레닌의 말처럼 '혁명성'없는 '과학성'은 무의미하다. 그리고 서로의 입장에 대한 철저한 비판과 동시에, 타 정파에 대한 '분파'적 태도가 아니라 혁명적 노동해방주의진영 전체의 강화라는 관점이 견지되어야 할 것이다. 동지들! 모두 "우리의 이론은 도그마가 아니라 행동의 지침이다"라는 맑스의 말을 명심하자! 우리는 레닌의 말투와 비유를 써먹기 위하여 논쟁하는 것이 아니다.

동지들! "사상이 인민을 장악할 때 그것은 힘으로 전화한다"라는 레닌의 말을 명심하자. 진군하는 노동자계급을 자신의 해방사상, 즉 '혁명적 노동해방주의'로 물들여야 한다. 바로 이것만이 우리의 활로이다. 파쇼정보기관의 추적과 함께 유난히도 추웠던 또한번의 겨울이 가고 생명이 고동치는 봄이 왔다. 그 하나나의 변화를 놓치지 말고 주목하라. 어느 순간 이 산천은 진달래꽃으로 붉게 물들어 뜨겁게 타오르고 있음을 발견할 것이다. 동지들! 역사발전의 '자연사적(自然史的) 필연법칙'을 굳게 믿고 우리의 실천으로 그 법칙을 구현해내자! 승리는 우리의 것이다!!

"혁명은 역사의 기관차이다(맑스)"
 

1946년 5월 1일 노동절을 맞아 평양의 노동자들이 마르크스, 엥겔스, 레닌, 스탈린, 김일성의 대형초상화를 들고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를 지지하는 시위를 하고 있다. (사진=미디어한국학 제공) 2020.03.15. [뉴시스]
1946년 5월 1일 노동절을 맞아 평양의 노동자들이 마르크스, 엥겔스, 레닌, 스탈린, 김일성의 대형초상화를 들고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를 지지하는 시위를 하고 있다. (사진=미디어한국학 제공) 2020.03.15. [뉴시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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