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수원  박사.”
그때 강병욱 정책처장이 들어오면서 수원의 어깨를 툭툭 쳤다.
“아, 처장님! 몸은 이제 다 회복되셨어요?”
“꿰맨 곳 실밥은 모두 뺐고, 이제 잘 아물고 있어.”

“그 정도만 다치셔서 불행 중 다행입니다.”
성민이 인사를 했다.
“덕분에 별명을 하나 얻었네.”
“뭔데요?”

수원과 성민이 동시에 물었다.
“프랑켄슈타인 강!”
강 처장의 말에 모두 큰소리로 웃었다.
“시작할 시간이 다 되었군.”

강 처장이 시계를 보면서 회의장 안으로 들어갔다. 유미와 정세찬은 손을 들어 보이며 자리를 떴다.
송기섭 전무가 주재한 그날 회의의 주제는 역시 빈 국제회의 참석에 관한 건이었다. 강병욱 처장을 단장으로 하여 핵심 연구원과 관계 부서 직원 등 다섯 명이 다음 주 오스트리아 빈의 인터내셔널 센터에서 열리는 국제회의에 참석할 거라는 내용이었다. 인터내셔널 센터에는 IAEA 본부가 있었다.

“이번 회의에는 원자력 발전 시설을 구매할 나라의 중요 오피니언 리더들이 다 모일 예정입니다. 대단히 중요한 자리입니다.”
송 전무가 서두를 꺼냈다.

“한국형 원자로 ‘APR 1400’이나 ‘APR+’의 홍보에 전력을 기울여야 합니다. 지금 여러 나라와 플랜트 수출 상담이 진행 중인 만큼, 한국형의 장점을 부각시켜야 합니다. 특히 친환경적 설계임을 강조하는 것을 잊지 마십시오. 회의가 열리는 오스트리아는 독일어를 쓰지만, 우리 원전에 관심을 가진 나라 대부분이 아프리카의 불어권이라는 사실을 알고 계시죠? 여러 분의 활동을 기대하겠습니다.”

송 전무는 여러 가지로 세심히 당부했다. 회의를 마치고 나가면서는 대표단장인 강병욱 처장에게 악수를 하며 격려했다.
안건에 비해 회의가 간단히 끝났다. 회의 참석자들은 본사에서 예약해 준 한정식 집으로 이동해 점심식사를 했다. 두산중공업의 김태우 부사장도 합석했다. 김 부사장은 빈에서 쓰게 될 여러 가지 자료를 나누어 주었다.

“원전 시장은 미국과 프랑스가 사실상 양분하고 있는 셈입니다. 그런데 미국은 스리마일 원자로 사고 이후 30년 동안 원전의 추가 건설을 포기했었지요. 그 30년 동안 우리는 꾸준히 개발을 계속해 마침내 한국형 원전을 개발했고요. 이번 팔로버디 2호기 건설에 헤드와 제어봉 구동장치를 납품하게 된 것도 그 덕택입니다.”

김 부사장의 설명을 듣고 있던 수원이 질문을 했다.
“한국은 아직 국제 시장에서 브랜드 인지도가 낮고 수출 경험이 빈약하잖아요. 신흥 원전국인 러시아 같은 나라와 경쟁해야 하지 않을까요? 묘책이라도 있나요?”

“그렇습니다. 하지만 한국의 원전 건설기술이 세계적 수준이라는 것은 많이 알려져 있습니다. 금년부터 아랍 국가에서 원자력 강국들이 치열한 수주 싸움을 하게 될 것입니다. 여기서 이긴다면 장래는 무척 밝습니다.”
김 부사장이 희망찬 목소리로 말을 계속했다.

“한국은 그동안 조선, 반도체, 전자제품, 자동차 등으로 먹고 살았지만 이제부터는 원전 수출이 효자상품이 될 것입니다. 원전 한 기를 수출하면 중형 자동차 16만 대, 대형 유조선 20척에 맞먹는 수출 효과가 발생합니다.”
강병욱 처장이 김 부사장의 말을 이어받았다.

“이번 빈 회의에서 유수한 세계 원전 회사들이 필사적으로 정보 전쟁을 벌일 거야. 특히 프랑스와 미국에서 우리 한수원 박사의 제어봉 부식 예보 센서 개발에 관심을 보일 거야.”

강병욱 처장이 자랑스러운 눈길로 수원을 바라보았다.
“아직 가설 단계일 뿐입니다. 학술지에 과장되게 나가는 바람에...”
겸연쩍다는 듯 수원이 얼굴을 붉혔다.
“게다가 한 박사는 프랑스어를 잘하니까 이번 회의에 없어서는 안 될 사람이지요.”

강 처장이 덧붙였다. 
“한 박사는 독일어도 잘합니다. 물리학뿐 아니라 언어에도 천재라는 소리를 종종 들었지요. 영어, 불어, 독어 모두 원어민 급이랍니다.”
김 부사장이 준 자료를 넘겨보던 배성민이 거들었다.
“탐내는 자들이 많겠는데요.”

“그러게요. 누군가 채가면 국가적 손실이죠. 우리의 보배니까 잘 지켜야 합니다.”
김태우 부사장의 말에 다들 웃음을 터뜨렸다.
식사를 마치고 난 수원과 성민은 택시를 타고 올림픽 공원으로 향했다. 세계 유명 작가들의 조각품이 부드러운 토성 능선을 배경으로 곳곳에 서 있었다.
“수원이는 지구상에서 제일 살기 좋은 곳이 어디라고 생각해?”
성민이 엄청나게 큰 엄지손가락 모양의 조각 앞에 서서 물었다.

“그거야 우리나라죠.”
“한국이 제일 살기 좋은 곳이라고? 왜?”
성민이 말도 안 된다는 듯 고개를 흔들었다.
“우리나라니까.”

간단하게 대답한 수원이 잠시 뜸을 들이고는 말을 이었다.
“어머니와 아버지가 태어나 자라셨고,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지키셨고, 증조할아버지와 할머니가 사셨고...”

성민은 피식 웃었다.
“뿌리 깊은 나무는 바람에 아니 흔들릴새, 꽃 좋고 열매 많나니...”
성민이 갑자기 용비어천가에 나오는 구절을 읊었다. 그러고는 한마디 툭 내뱉었다.
“부럽다.”

성민의 얼굴이 갑자기 쓸쓸해졌다.
“뭐가요?”
“그 튼튼한 뿌리가.”
성민은 목소리까지 침울해졌다. 수원은 무슨 뜻인지 몰라 성민의 입만 빤히 바라보았다.
“미국에 있을 때 연구원들한테 똑같은 질문을 했더니 하와이라고 답하는 사람이 많더군.”

성민이 조금 전의 화제로 다시 돌아갔다.
“성민 씨는?”
“난 스위스나 프랑스의 노르망디 같은 곳을 계절 따라 돌아다니면서 살고 싶어. 연구 같은 골치 아픈 일에서 어서 벗어나고 싶어.”
“그래요? 난 연구에 몰두할 때가 가장 재미있던데.”

“영락없는 과학도로군. 그나저나 세계 각국을 돌아다니며 살려면 젊었을 때 준비를 단단히 해두어야 하는데...”
성민이 나직이 말했다. 얼굴은 여전히 수려했지만, 표정에는 긴 그늘이 드리워져 있었다.

 


작가 소개 /

이상우는 추리소설과 역사 소설을 40여 년간 써 온 작가다. 40여 년간 일간신문 기자, 편집국장, 회장 등 언론인 생활을 하면서 기자의 눈으로 본 세상사를 날카롭고 비판적인 필치로 묘사해 주목을 받았다. 역사와 추리를 접목한 그의 소설은 4백여 편에 이른다. 한국추리문학 대상, 한글발전 공로 문화 포장 등 수상.

주요 작품으로, <악녀 두 번 살다>, <여섯 번째 사고(史庫)> <역사에 없는 나라>, <세종대왕 이도 전3권> <정조대왕 이산>, <해동 육룡이 나르샤>, <지구 남쪽에서 시작된 호기심>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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