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교부 [뉴시스]
외교부 [뉴시스]

 

[일요서울] 국립외교원 외교사연구센터에서 ‘외교’라는 렌즈를 통해 우리 현대사를 조명하기 위해 오럴히스토리사업 ‘한국 외교와 외교관’ 도서 출판을 진행해 왔다. 지금까지 총 17권의 책이 발간됐다. 일요서울은 그중 공로명 전 외교부장관의 이야기가 담긴 책의 내용 중 일부를 지면으로 옮겼다.

일본군 위안부 문제

“일본군 위안부 문제 핵심은 모집 과정의 강제성이다”

- 총체적이라는 표현은 저희 아이디어였다고 볼 수 있는 건가.
▲ “일본이 조사한 결과 광범위한 지역에 걸쳐서 위안소가 설치되어 있고, 위안소에 많은 수의 일본군 위안부가 존재했던 사실이 인정되고, 위안소는 당시 군 당국의 요청에 따라 설치된 것이다”라는 내용부터 언급됐다. 그리고 총체적으로 피해자들이 본인의 의사에 반해서 일본군 위안부가 됐다는 내용이 나온다. 고노 담화가 8월4일에 발표됐고, 다음 날인 8월5일에 우리 정부가 외무부 대변인 논평을 합니다. “일본 정부가 일본군 위안부의 모집·이송·관리 등에 있어서 전체적인 강제성을 인정하고 피해자에 대한 사과, 반성의 뜻과 함께 역사의 교훈으로 삼겠다는 등의 결의를 표명한 점에 대해서 이를 평가한다. 우리 정부는 이번 조치 결과, 밝혀지지 않은 부분에 대해서는 일본 정부와 지속적인 관심을 기울임으로써, 앞으로도 계속 밝혀질 수 있길 기대한다”고 했다. 

그리고 한승주 장관은 언론인 대변인 논평에서 “이번 조사보고서는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의 전체적인 숫자가 파악돼 있지 않고, 당시 일본 정부의 구체적 역할 등이 빠져 있다. 앞으로 이 부분에 대해 일본 정부가 추가 조사를 해줄 것을 바란다”는 개인적인 이야기를 했다. 그래서 이것을 계기로 해서 우리 정부는 외교적으로 일본군 위안부 문제를 일단락 지은 것으로 삼았다. 그리고 이건 제가 외무부장관으로 부임해서도 계속됩니다만,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들에 대한 구체적인 보상을 우리 정부에서 하도록 했다. 그래서 김영삼 정부 때 시작을 해서 그 후에 김대중 정부, 노무현 정부로 이어져서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들에게 총체적으로는 4.300만 원인가요? 일본 돈 200만 엔에 해당되는 보상금이 지급됐다. 그 액수에는 정대협 중심으로 민간에서 모집된 민간기금도 일부 포함됐다. 

김영삼 정부에서도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들을 위해 무료로 아파트를 제공하고, 의료보험 무료, 기초연금을 지급했다. 그래서 지금 피해자들이 아마 백수십만 원씩 받을 거다. 그렇게 우리 정부는 보상 문제는 우리 손으로 한다는 입장을 견지해왔다. 그런데 외교적으로 일단락 지었다고 하는 내용이 다시 한·일 간의 외교 문제로 재현이 됐다. 정대협이 이와 같은 일본 정부의 조치에 대해서 만족하지 않고, 계속 이 문제를 여성 인권 문제와 결부시켜서 국제사회에 널리 호소하고 또 제네바인권위원회를 통한 호소활동도 계속해서 이슈화했다. 그래서 미국 내 여기저기 일본군 위안부 소녀상이 건립되고 다시 한·일 간 커다란 외교 문제로 재현이 됐다.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들이 제소한 문제에 대한 우리나라 헌법재판소의 결정이 가장 직접적인 원인이 됐다. 2011년에 헌법재판소의 결정이 나는데, 한국 정부가 전 일본군 위안부에 대한 손해배상을 일본 정부에 인정토록 교섭하지 않는 것은 위헌이라는 취지의 판결을 했다. 행정부가 문제 삼으니까 외무부는 교토정상회담에서 이명박 대통령이 노다 요시히코 수상에게 일본 정부에 상황이 이렇게 발전됐으니 선처하는 방법이 없겠느냐고 물었다. 제가 전해 듣기로 실무당국 간의 사전 협의에서는 이명박 대통령이 이 문제를 제기하면 노다 총리가 “알겠습니다. 선처하는 방향으로 검토해 보겠습니다” 하는 식으로 대답해서 일단락 짓기로 했는데, 양 정상 간에는 논쟁이 붙었다. 그래서 결국은 박근혜 대통령 정부가 출범해서도 계속 문제가 됐다. 

그래서 2년 반 동안 정상회담이 열리지 못한 결과를 초래한 것은 참 유감스럽지만 뒤늦게나마 작년 12월에 이 문제가 해결이 됐고, 지금 아직 만족하지 않은 일부 국내의 여론이 있습니다만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문제로 한·일 관계가 발전하는 데 문제가 되는 것은 우리나라 국가 이익을 위해서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 그래서 해결되는 건 아니다. 우리가 이 점에 있어서는 어느 정도의 절제를 발휘할 필요가 있는 거 아니냐는 생각을 했다. 

 

- 고노 담화가 나오는 과정에서 협상을 담당했던 일본 측 인사들의 역할이 컸지 않나 하는데, 고노 장광 외의 일본 측 인사들의 역할은 어떠했나.
▲ 이사하라 노부오는 실무진에서 대표 원로 같은 존재다. 내무관료 출신인데도 전향적이다. 그 위에 있었던 게 고토다 마사하루 관방장관이다. 고토다 관방장관은 재직 시에 선처를 해달라는 뜻에서 두세 차례 찾아가서 직접 이야기도 들었다. 역시 일본의 요소에는 국내 문제뿐만 아니라 국제적으로 일본이 가야 하는 방향을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런 분들 중에 한 사람이 고토다 관방장관이었는데, 일본 정부 내외에서 많은 존경을 받는 사람이다. 고토다 관방장관은 자미당 부총재로 있었고, 나카소네 야스히로 내각에서 관방장관을 해왔다. 1998년 김대중 대통령의 일본 방문이 있었고, 또 장쩌민 주석의 방문이 있었다. 그리고 이듬해에 김대중 대통령과 오붙이 게이조 총리 공동 커뮤니케에서 전향적으로 미래지향적인 역사인식에 대한 양측의 생각이 표명됐다. 특히 과거사에 대한 일본의 사죄의 뜻이 표명됐다.

그러니 장쩌민 주석이 일·중 사이에서도 그렇게 하자고 요청하니까 일본이 거절을 했다. 화간 난 장쩌민 주석은 인민복을 입고 와세다대학에 가서 강연을 하면서 역사인식에 대한 강한 불만을 표명했다고 했다. 그래서 1999년에 아사히신문 칼럼에서 “일본 정부가 패전 후에 일본 제국주의에 대한 역사 총괄을 소홀히 한 것은 사실이다. 왜냐하면 패전하고 나서 일본 정부의 가장 큰 관심사는 천황제를 어떻게 유지하느냐는 것이었는데, 만약 역사 총괄을 엄격히 하게 되면 전쟁 책임이 결국은 천황에게 미치기 때문에 의식적으로 애매하게 한 것이 있다. 그런 상황을 이해해달라” 하는 이야기를 했다. 그리고 또 가혹한 행위를 했다고 가르치는 것에 대해서도 “사실 교실에서 너희 아버지, 할아버지, 삼촌이 이런 나쁜 짓을 했다고 가르치기가 참 어렵다 그런 점에서 어려운 걸 이해해달라”고 하면서, 일본의 지도자는 이 문제에 대해서 겸허해야 한다는 이야기를 강조했다. 일본에도 그러한 양식 있는 사람들이 있다는 거다. 이번에 베이징에서 갑자기 서거한 와카미야 요시부미 전 아사히신문 주필 같은 사람이다. 

 

- 최근에 아베 정부가 검증을 이유로 고노 담화에 흠집을 내려 시도했다. 그중에 증언 청취가 제대로 일어나지 않았고, 한국 정부의 압력에 의해서 졸속이었다는 식으로 징집에 강제성이 없음을 강변했다. 한국 정부가 일본에 압력을 가해서 그런 조치가 되었다고 이야기할 수 있는 것인가. 
▲ 일본군 위안부 문제 핵심은 모집 과정의 강제성인데, 우리 한국사회 상식으로 그 시대를 산 사람들은 분명 강제로 끌려간 거다. 김종필 전 총리도 일본 사람들 앞에서 호통 치는 게 바로 이 이야기다. “우리 눈으로 직접 봤고, 그러므로 한국에서는 상식이다”라는 거다. 또 관련 문서는 전쟁 후에 일본이 태워버렸다. 민감한 건 다 태운 거 아닙니까? 패전하고 나니까 당시 총독부 건물, 지금 중앙청 경복궁 뒤에서 산더미 같은 문서들을 태우고 있는 걸 가회동에 살았기 때문에 저도 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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