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석헌 기념관 입구 [사진=박종평 객원기자]
함석헌 기념관 입구 [사진=박종평 객원기자]
함석헌 기념관 안 [사진=박종평 객원기자]
함석헌 기념관 안 [사진=박종평 객원기자]

[일요서울ㅣ박종평 객원기자] 어지러운 세상에서 선비가 살아가는 방법에는 대개 세 가지 방식이 있다고 한다. 세상과 권력에 타협하고 굴종하며 자신의 이익을 취하는 것, 불의한 세상에 저항하고 싸우는 것, 숨어서 인내하며 때를 기다리는 것이다. 일제강점기의 지식인을 보아도 똑같다.

우리는 보통 우리 땅에 남아 적극적으로 친일했거나 변절한 사람들을 무자비할 정도로 비판한다.

또 망명해 해외에서 활동한 독립운동가들은 지극히 높인다. 그러나 그 사이에 있던 사람들은 잊거나 외면하곤 한다. 물론 그 세 종류의 사람에 대해서도 현재의 자신의 이념이나 정파에 따라 호불호로 가르고, 더하기와 빼기를 한다. 이번 답사는 보통 사람들 눈에 비친 역사에서는 보일 듯 보이지 않는 세 번째 부류의 인물들을 찾아가고자 한다. 다시 보고 깊이 알면 아주 귀하고 소중한 분들이다.

창5동 주민센터 뒤 홍명희 옛집터 안내판 [사진=박종평 객원기자]
창5동 주민센터 뒤 홍명희 옛집터 안내판 [사진=박종평 객원기자]

우리말의 바다, 『임꺽정』과 은둔자 홍명희

도봉산 방향 아래 창동, 쌍문동, 방학동에는 우리 근현대 역사를 수놓은 인물들이 머물렀던 장소들이 있다. 지금은 대부분 빌라 또는 아파트단지로 바뀌어 옛 모습을 찾기 어렵다.

“책을 읽는 것에는 돈이 들지 않고, 책을 읽으면 만 배의 이익을 얻을 수 있다(讀書不破費 讀書萬倍利).” 중국 송나라 개혁가 왕안석의 「권학문(勸學文)」 일부이다. 책도 책 나름이다. 사람마다 책 기준이 다르다. 공부한다고 하면서 소설책을 펼치면 엉뚱한 책을 본다고 혼났던 시절이 있었다. 조선 시대에도 마찬가지였다. 임금이 『삼국지연의』, 즉 『소설 삼국지』를 읽는다고 성리학자 신하들이 임금을 면박 주는 일도 있었다. 허황한 책이라며 소설의 국가 출판을 반대하기도 했다. 임금도 읽었듯 소설은 뭇 사람들을 매혹시킨다. 『삼국지연의』 같은 경우는 지식인, 리더의 필독서였다. 『삼국지연의』를 세 번 읽지 않은 사람과는 말도 섞지 말라고 하기도 했다. 우리나라 소설사에는 역사소설로 『삼국지연의』 같은 책은 아직 없다. 그러나 우리 시대의 이야기를 전하는 박경리 『토지』, 황석영 『장길산』, 조정래 『태백산맥』이 전국의 종잇값을 올려놓기도 했다.

우리나라 현대 소설 중에서 최초의 대작, 종잇값을 들었다 놓은 책은 뭐니 뭐니해도 1930년대 홍명희(1888~1968)의 『임꺽정』이다. 최근 베스트셀러인 『장길산』과 『태백산맥』도 『임꺽정』의 다른 버전처럼 느껴진다. 『임꺽정』은 그의 독립운동이다. 저작 동기를 생계를 위한 방편이라고 겸손히 말했지만, “사건이나 인물이나 묘사로나 모다 남에게서 옷 한 벌 빌어 입지 않고 순조선(純朝鮮) 것으로 만들려고 하엿슴니다. ‘조선정조(朝鮮情調)에 일관된 작품’ 이것이 나의 목표엿슴니다.”라고 했다. 외국의 다양한 문학사조 영향을 받던 시대, 식민지 조선에서, 조선 혼을 찾고, 조선 사람 마음을 울리려는 목적이 분명했다. 이는 1910년 경술국치 당시 자결했던 그의 부친 금산 군수 홍범식의 유언, “너희들은 어떻게 하나 조선사람으로서의 의무와 도리를 다하야 잃어진 나라를 기어이 찾아야 한다. 죽을지언정 친일을 하지 말고 먼 훗날에라도 나를 욕되게 하지 말아라”를 실천하는 수단이었다. 그 때문에 『임꺽정』 은 일제에 말살당해 사라져가던 우리 민속학의 보고가 되었고, 『메밀꽃 필 무렵』의 이효석이 말했던 “조선 어휘의 대언해(大言海)”가 된 듯하다.

홍명희가 은둔했던 창동의 집을 찾아간다. 지하철 1호선, 4호선 창동역 2번 출구에서 창동초등학교 방향으로 가다 보면 신도브래뉴아파트가 나온다. 103동이 그의 옛집 터라고 한다. 지금은 아파트단지가 되어 동네의 옛 모습은 전혀 알 수 없다. 1939년 말, 신간회 동지였던 김병로의 권유를 받고 일제의 마지막 발악을 피해 서울에서 당시 경기도 양주군 창동으로 이주해 지냈던 곳이다. 지금의 도봉구는 조선시대 양주군으로 임꺽정의 동네이기도 하다. 『임꺽정』을 쓴 그가 임꺽정 안으로 들어간 것이다.

옛집 터를 알리는 안내판은 아파트 옆 창5동 주민센터 뒤편 주차장 위쪽 정자 앞에 있다. 안내판을 보려면 아파트 주소가 아니라 창5동 주민센터를 찾는 것이 좋다. 안내판에 기록된 주소, ‘도봉로 136다길 40’에는 오자가 있다. ‘나길’이다.

칼국수집과 아파트 정문 사이 송진우 옛집터 안내판 [사진=박종평 객원기자]
칼국수집과 아파트 정문 사이 송진우 옛집터 안내판 [사진=박종평 객원기자]

민족혼을 살리려던 동아일보 사장 송진우

주민센터를 끼고 좌측 길을 따라 2분, 100m쯤 가면 북한산한신휴플러스아파트가 나온다. 아파트 옆 등촌샤브칼국수와 정문 좌측 사이 길가에 독립운동가 겸 동아일보 사장이었던 ‘고하 송진우 옛집 터’ 안내판이 있다. 고하 송진우(1890~1945) 옛집도 아파트단지로 변했다. 일제하 민족 언론 『동아일보』를 30년간 이끌며 민족 대변인, 독립운동가로 활약했다. 1930년대 초에는 우리 역사 위인을 발굴, 조명하는 사업을 추진했다. 행주대첩의 영웅 권율의 사당을 중수했고, 충무공 이순신의 현충사를 재건하고 영정을 제작․봉안케 했다. 1936년 손기정의 베를린 올림픽 금메달과 관련한 일장기 말소사건의 책임을 지고 사장직을 사퇴했다. 일부에서 주장하는 그의 친일논란은 그 시대의 엄혹함과 지식인의 고뇌를 현재 기준으로 판단하는 무지막지한 행동이다. 그까지 친일파로 낙인을 찍는다면 일제강점기에 살았던 모든 사람들이 친일파가 될 듯하다. 그는 일부 친일파들의 변명처럼 사용되는 ‘공과(功過) 비교’ 차원을 떠난 사람이다. 민족 해방과 재건을 위해 살았던 실천가였고, 고뇌하는 참 지식인이다. 또 분열된 나라, 이념의 나라, 특정 집단과 야합한 사람들의 폭력, 극단적 신념주의자에 의한 희생자였다. 곧이어 소개될 김병로는 “나는 고(故) 고하 선생과는 40년래의 동지입니다. 선생은 열렬한 애국자이고 열렬한 배일 투사로서 일생을 통하여 조선 독립문제에 있어서는 한 시각도 쉴 새 없이 전념을 다하여오던 지사입니다. 과거에 적 일본의 억압으로 감옥 생활도 3차에 있었고, 적 일본의 유혹도 많이 받았으나 거절하고, 우리 독립에 일관하던 굳센 투사였습니다.”(동아일보, 1945.12.31. 김병로 논평)라고 했다. 그는 또 “고하 송진우가 간 뒤엔 사람이 없어. 지금 흉흉한 인심이 심상하지 않은데, 영웅은 필요 없으나 인재가 있어야 할 것 아닌가”라고 그의 능력을 높이 평가하며 슬퍼했다. 심지어 그는 그가 죽는 날에도 송진우의 이름을 부르며 영면했다고 한다.

해방 정국에서는 다른 편에 대해 물리적으로 죽이는 일이 빈번했다. 지금은 이념과 종교, 생각, 말과 글로 사람을, 얼을 죽이고 있다. 다름과 차이를 인정하는 세상이 진정한 해방, 자유, 민주주의 시대가 아닐까. 아직도 우리에겐 해방이 오지 않은 듯하다.

김병로 옛집터 안내판 [사진=박종평 객원기자]
김병로 옛집터 안내판 [사진=박종평 객원기자]

소년 의병 출신 민족 변호사 김병로

다시 맞은편 창동금호어울림아파트 쪽 횡단보도를 건너 아파트단지를 끼고 우측으로 4분, 300m쯤 가면 아파트가 끝나는 지점부터 빌라들이 나온다. 네 번째 빌라인 창희빌리지는 도봉구 창동을 특별한 공간으로 만든 사람, ‘김병로의 옛집 터’이다. 김병로(1888~1964). 구한말 두 차례에 걸친 10대 소년 의병, 100여 건이 넘는 독립운동 사건을 변호한 민족 변호사, 비타협적 민족통일전선인 신간회 중앙집행위원장, 대한민국 초대 대법원장, 평생 보수·우파였던 인물이다. 그럼에도 진보·좌파 독립운동가들을 이해했고, 독립을 위해 그들과 협력했던 진짜 보수, 진짜 우파이다. 지금은 ‘국민의힘’ 김종인 비대위원장의 조부로 기억되고 있지만, 현재의 김 위원장은 발끝도 못 따라갈 인물이다. 우리나라 독립운동사와 사법부 역사에서 그에게 빚지지 않은 사람은 없다고 과언이 아니다. 거목 중의 거목이다.

서울대 정치학과 교수 김학준은 김병로의 삶을 통해 진보․좌파의 장점과 보수․우파의 문제점을 다음과 같이 지적했다. “좌우의 이데올로기적 대립이 격심한 나라에서는 대체로 좌익이 도덕적 우위를 확보하는 법이다. …… 좌익은 자기희생을 그 출발의 대전제로 삼고 있기 때문이다. 어려운 사람들을 위해, 사회의 불의를 고치기 위해, 곧 대의를 위해, 자신이 현재 갖고 있는 것은 물론 미래의 가능성까지도 모두 던지겠다는 숭고한 순교의 정신과 자세 앞에 누구도 다툴 수 없게 되는 것이다. …… 그러므로 좌익을 진정으로 평화롭게 극복하는 지름길은 우익 역시 깨끗함을 유지함으로써 우익으로서의 도덕성을 과시하는 것이다. 우익이 승리하는 곳에서는 우익의 끊임없는 자기 쇄신과 청결성 유지가 있었음을, 그리하여 좌익이 진정으로 두려워하는 것은 탄압이나 감옥이 아니라 우익이 부정부패를 과감히 척결하고 <집안청소>를 단행하는 것임을 역사는 보여주고 있다.”(『가인 김병로 평전』, 김학준, 민음사, 1988년)

김 교수는 보수․우파의 정신적 기둥으로 김병로의 길을 제시하고, 그의 삶을 우익 보수주의가 귀감으로 삼을 것을 제안했다. 김 교수의 글이 1988년에 씌여진 것이다. 30년이 흐른 지금의 진보․좌파와는 동떨어진 흘러간 옛 이야기로 보인다. 보수는 여전히 변하지 않았고, 진보는 보수를 욕하면서 어느덧 낡은 보수와 쌍둥이처럼 닮았다. 진짜 진보가 땅으로 꺼진 듯하다.

1934년, 김병로의 창동 이주는 창동이 일제말 은둔 지식인의 집결지가 된 원인이다. 이 글의 시작점이 된 인물인 홍명희(1939년), 정인보(1940년) 송진우, 박명환과 그의 아내 소설가 장덕조가 모두 그의 집을 중심으로 모여들었다. 그 때문에 그의 창동 거주 이후 창동을 관할하는 양주경찰서에는 당시 애국지사를 감시하는 고등계가 설치되었고, 창동 주재소에는 고등계 형사가 상주하면서 이들 애국지사를 감시했다. 그들은 일제와의 타협하는 대신, 굴복하는 대신 차라리 침묵을 택했다. 식민지 조선에서 버티던 지식인의 선택지의 하였다.

암흑이 깊을수록 새벽이 가까이 온다는 진실, 한겨울 신새벽의 모진 추위가 가면 해가 뜬다는 사실을 그는 알고 있었다. 그가 견뎌낸 집과 그 주변은 이제 옛 흔적이 없다. 빌라와 아파트가 가득하다. ‘김병로 옛집 터’ 안내판은 DH C Tower와 창희 빌리지 사이에 있다.

정인보 옛집터 안내판 [사진=박종평 객원기자]
정인보 옛집터 안내판 [사진=박종평 객원기자]

지금도 외면당하는 민족사학의 거두 정인보

“흙 다시 만져 보자 바닷물도 춤을 춘다. 기어이 보시려든 어른 님 벗님 어찌하리. 이 날이 사십년 뜨거운 피 엉긴 자취니 길이 길이 지키세 길이 길이 지키세.”

초등학교 때 배웠고, 광복절날이면 들리는 감격스러운 「광복절 노래」이다. 민족사학자, 독립운동가, 교육가, 근대 최후의 양명학자, 시조 시인 정인보(1893~1950)의 염원이 담겼다. ‘김병로 옛집 터’에서 큰길인 도봉로로 나가면 그 맞은편 시내버스 정거장 옆 Jun간판 부근이 그가 일제의 탄압을 피해 1940년부터 해방 때까지 살았던 옛집 터이다. 안내판은 간판가게 앞 큰길에 붙어있다. 큰길을 곧바로 건널 수 있는 횡단보도가 없다. 위쪽이나 아래쪽 횡단보도를 이용해야 한다.

역사학자 정인보는 식민지 조선에서 패배주의와 변신의 논리 대신 ‘빛’을 찾았다. 「5천 년간 조선의 얼」(동아일보, 1935~1936년 연재)이다. 최남선·이광수 같은 이들이 일제 말 타협과 굴종, 변신을 했던 반면 그는 “언제나 진(眞, 진짜)은 살아남고 가(假, 가짜)는 사라지는 법이니 행여나 한 사람이라도 포기하지 말지어다. 일체의 책임이 나 한 사람에게 있다는 사실을 통감하여야 한다.”라면서 끝까지 해방을 기다렸다. 최남선이 만주국 건국대학 교수로 간다는 소식을 듣고는 최남선의 집 앞에 냉수를 떠놓고 곡을 했다고 한다. 최남선이 몸은 살아있을지언정, ‘얼’이 죽었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그는 변절하는 동지들과 달리 자신이 찾았던 ‘조선의 얼’을 바탕으로 회유와 압박에도 굴하지 않고 이겨냈다. 그가 말하는 ‘얼’은 조선이 조선인 까닭이다. 조선인이 일본인이 될 수 없는 까닭이다. 내가 나이고, 내가 남이 아니게 만드는 정신이다. 그의 ‘얼’ 정신은 오늘날에도 유효하다. 그가 말하듯 ‘얼 빠진 놈’이 되지 않아야 한다. 창동에 살았던 이유는 김병로와 홍명희를 따라 일제로부터 버텨 내기 위한 은둔 선비의 길이었다.

그의 민족사학은 지금도 잊혀졌고 외롭다. 반면에 그가 비판하고 싸웠던 일제의 식민사학은 여전히 살아있다. 게다가 입으로 식민사학을 비판하는 사람들이 넘쳐나지만, 그들은 그의 저술을 주목도, 깊이 연구하지도 않는다. 그의 심오한 저술을 이해할 수 있는 실력이 없기 때문이다. 그의 저술이 세상에서 당당히 빛 발하는 날, 그 날이 식민사학을 진짜 극복하는 날일 듯하다.

정인보 옛집 터에서 다시 쌍문파출소를 찾아 5분, 300m 가면 근처에 있는 세광골드타운이라는 빌라가 있다. 영화배우 문예봉(1917~1999)과 극작가 임선규 옛집 터이다. A동세광골드타운 주차장 입구 적벽돌 담벼락에는 안내판이 훼손된 채 붙어있다. 문예봉은 친일 및 월북, 월북 이후의 북한 정권 찬양으로 우리 사회에서는 쉽게 용납될 수 없는 인물이다. 

한민족이여. 천하통일의 꿈을 꾸라

“실패한 인생”. “하느님의 발길에 차인 사람”. 현대 대표적 사상가, 종교인, 역사가, 언론인, 시인, 독립운동가, 인권 및 민주 투사, 우리나라 최초로 노벨평화상 후보로 추천된 인물, ‘한국의 간디’, ‘한국의 예수’ 등으로도 불린 함석헌(1901~1989)이 남들 평가와 완전히 다르게 스스로 평가한 말이다.

문예봉, 임선규 옛집터 안내판 [사진=박종평 객원기자]
문예봉, 임선규 옛집터 안내판 [사진=박종평 객원기자]

그를 찾아간다. 문예봉․임선규 옛집 터에서 백운중학교를 지나 한신중학교 방향으로 약 800m 가면 ‘건너다 보면’에 도착한다. 1983년에 지금의 기념관이 된 이 집으로 이사해 귀천할 때까지 머물렀다. 쌍문역 4번 출구에서 걸어서 10분이면 갈 수 있다. 기념관에는 그의 삶을 알려주는 많은 자료 등이 전시되어 있다.

전시관에는 없는 내용이나, 가끔 떠오르는 그의 이야기가 있다. “침략주의가 좋은 거야 아니지만, 5천 년 역사에 국경선 밖에 한 번 나가 본 일이 없고, 만주족, 몽고족, 흉노 말갈족도 꾸고 나중엔 동해 바다 섬 속에서 호랑이 소리 한 번 못 들어보고 자란 일본족 조차도 빈말로나마 꾸어본 ‘천하통일’의 꿈을 감히 한 번도 꾸어 본 일이 없으니, 이게 어떻게 된 민족일까? 그래 오늘날 지구를 둘로 나누는 싸움의 일선이 되면서도, 이까진 미국 어느 큰 회사의 중역자리만도 못할 자리 하나 다투기에 나라의 힘을 송두리째 다 죄겨 결단을 내고 있는 건가? 야, 참 작구나, 근시로구나, 썩었구나! 희랍은 어린애 손바닥만 해도 서양 문명의 횃불을 들었고 유대는 가난 애기 발잔등만 해도 인류의 나갈 행길을 내지 않았나? 땅이 좁아 못했다는 소리는 못할 것이다. 로마도 테베강 옆 조막 같은 일곱 언덕에서 싸우던 것들이 세운 것이 아니며 영국도 북해에서 도둑질해 먹던 해적 떼가 일으킨 것 아닌가. 사람이 적어도 못했다는 소리도 못할 것이다. 일을 틀지게 못하 것은 정신이 작고 옅기 때문이요. 정신이 옅은 것은 숨을 깊이 쉬지 못하기 때문이다. 숨이 어디서 오나? 하늘에서 온다. 하늘 기운을 마시지 못하기 때문에 정신이 작다.”(함석헌, 『함석헌 자전적 인생론』․「씨알의 설움」, 정우사, 2003년)

현실의 이전투구를 보면, 숨이 막힌다. 함석헌처럼 생각하는 사람들도 넘칠 텐데, 그들 모두 다 어디 가고 모두 벌거벗고 매일 ‘중역자리’를 위해 싸우는가. 오늘도 TV엔 쌈박질만이 넘친다. 넋 놓고 싸움구경하는 사람들도 넘친다. 이제는 한 번이라도 모두가 ‘천하통일의 꿈’을 한꺼번에 꿔보았으면 좋겠다.

창동역에서 시작한 인물들 흔적을 따라 도착한 ‘함석헌기념관’까지는 네이버 지도로는 40여 분 정도이다. 그러나 안내판을 찾고, 읽고, 잠깐이라도 사색하고, 횡단보도 등을 건너다 보면 최소한 70분 정도가 걸린다.

전태일열사 옛집터 안내판 [사진=박종평 객원기자]
전태일열사 옛집터 안내판 [사진=박종평 객원기자]

아! 전태일 열사여! 당신은 아직도 현재형

“우리는 기계가 아니다!”,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 “노동자를 혹사하지 말라!” 1970년 11월 13일. 흐린 겨울 초엽. 오후 2시. 차가운 북풍에 맞서려는 듯 온몸에 불붙은 한 청년이 달리다 쓰러졌다. 「근로기준법」을 꼭 껴안고 소리쳤다. “내 죽음을 헛되이 말라! …! …!” 외마디 절규 뒤로 그는 말을 잃었다.

우리 역사에는 신분과 차별에 저항한 사람들이 많다. 고려 때 만적, 망이․망소이를 비롯해 조선의 홍경래, 임꺽정 등이다. 현대에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1970년, 22세 청년 노동자 전태일(1948~1970.11.13.)의 죽음은 왕조시대와 전혀 다른 일이다. 산업화 시대의 빛과 그림자를 드러낸 강렬한 저항의 첫 불꽃이었다.

‘함석헌기념관’에서 700m쯤 가면 ‘전태일 옛집 터’가 있다. 현재 삼익세라믹아파트 112동이 그 자리다. 함석헌과 전태일은 직접 인연이 없었다. 그러나 전태일의 분신자결 소식은 깨어있는 시민 모두에게 충격을 주었고, 함석헌도 예외가 아니었다. 1년 뒤인 1971년 11월 13일. ‘전태일 1주기 추모집회’에서 그는 “전태일을 살려라!”라는 강연을 했다. 그는 말했다. “태일을 죽인 것은 이 나지, 이 70이 되어서도 아직도 욕심을 이기지 못하고 이 살 속에 갇혀 있는 이 나지”(「전태일을 살려라」). 참된 지식인이라면 누구라도 얼굴을 들 수 없는 일이다. 청년의 죽음은 질주하는 성장주의가 만든 비극이었고, 노동자의 삶을 외면했던 모든 이들의 책임이었기 때문이다.

‘함석헌기념관’에서 경남아파트, 창경초등학교를 거쳐 ‘전태일열사 옛집터’로 가는 길은 발걸음이 천근만근이 된다. 전태일의 절규가 메아리쳐 오는 듯하다. 전태일은 오늘도 대한민국에서 현재 진행형이다. 기업가․경영자․자본가에 의한 노동자 차별은 여전하다. 게다가 지금은 같은 식구였던 노동자가 노동자를 차별한다. 대기업 노조가 중소기업 노동자의 권리를 침해한다. 정규직이 비정규직을 차별한다. 노동자도 다 같은 노동자가 아닌 세상이다. 노동조합 하나 만들기 어려운 시대에 불붙은 몸으로 저항했던 전태일 후예들 중 일부는 이제는 귀족이 되었다. 같은 노동자 등에 빨대를 꽂거나, 고통을 외면한다. ‘동일노동 동일임금’, ‘무노동 무임금’을 주장하던 이들이 차별을 당연히 여긴다. 노동 위에 군림하는 노동자 옷을 입은 노동자, 노동하지 않는 노동자, 싸움 전문 노동자(?)도 많다. 노동자 옷을 입은 집단들 끼리 패권 싸움을 한다. 때가 되면, ‘노동자 만세!’, ‘노동 만세!’, ‘전태일을 살려내라!’, ‘근로기준법을 지켜라!’를 외친다. 내 노동은 노동이고, 다른 이의 노동은 노동이 아닌 세상이다. 내 노동은 비싸고 다른 이의 노동은 싸구려이다. 전태일 열사가 통곡할 일이다.

‘전태일 옛집 터’로 가는 길, 아파트 사잇길에 떨어져 밟힌 은행에서 나는 똥 냄새가 그냥 그 냄새로 여겨지지 않는다. ‘운동판’과 ‘정치판’, ‘노동판’에서 진동하는 냄새처럼 느껴진다. 사람은 없고, 이념만 있다. 공동체는 없고, 패거리만 있다. 헌신은 없고 이익만 있다.

‘옛집 터’ 안내판은 아파트 안에 없다. 아파트 107동 뒤편에 있는 아파트 후문 밖, 창경초등학교 담벼락 근처에 있다. 안내판 속 글을 보다보면, 지금의 여러 운동가에게 다시금 이제는 빛바랜 책이 되어버린 『어느 청년 노동자의 삶과 죽음-전태일 평전-』(전태일기념관건립위원회 엮음, 돌베게, 1983년)을 가슴으로 읽기를 권하고 싶은 생각이 든다. 이미 퇴색했고, 변질된 그들이 새로이 변할 거라고 여겨지지 않지만.

김수영 시 조형물(발다닥공원) [사진=박종평 객원기자]
김수영 시 조형물(발다닥공원) [사진=박종평 객원기자]
김수영문학관 [사진=박종평 객원기자]
김수영문학관 [사진=박종평 객원기자]

자유를 꿈꾸며 비상한 목마른 시인, 김수영

“풀이 눕는다. 비를 몰아오는 동풍에 나부껴 풀은 눕고 드디어 울었다. 날이 흐려서 더 울다가 다시 누웠다. 풀이 눕는다. 바람보다도 더 빨리 눕는다. 바람보다도 더 빨리 울고, 바람보다 먼저 일어난다.”(김수영, 「풀」 )

시인 김수영(1921~1968)은 몰라도 「풀」이라는 시는 한 번쯤 들어보거나 어디선가 보았을 듯하다. 그 주인공 김수영이 기다린다. ‘전태일 옛집 터’에서 ‘김수영길’로 접어들면 ‘김수영문학관’, ‘방학동 은행나무’, ‘연산군묘’를 알리는 이정표가 나온다. ‘김수영문학관’은 그의 있는 그대로의 날것을 볼 수 있는 공간이다. 붉은 펜으로 수정한 육필원고와 작품 초고 등이 전시되어 있다. ‘

김수영문학관’까지는 25분 이상 걸린다. 도로명 ‘김수영길’을 통해 걸어가는 중에는 걷기 편한 길이 마중한다. 아파트 옆 ‘발바닥공원’에 만든 ‘발자국길’이다. 그 길가에는 ‘김수영길’을 눈으로 보여준다는 듯, 파란색 계열의 타일로 만든 「푸른하늘을」 시비가 있다.

“자유를 위해서 비상하여 본 일이 있는 사람이면 알지. …… 어째서 자유에는 피의 냄새가 섞여 있는가를. 혁명은 왜 고독한 것인가를. 혁명은 왜 고독해야 하는 것인가를.”

몇 걸음 더 가면, 이제는 날카로운 기운이 꺾인 듯한 녹슨 쇠판에 「풀」이 새겨져 있다. 쇳 냄새와 풀냄새의 어울리지 않는 조합이다. 자유, 비상, 피, 혁명, 고독, 풀, 비, 울음, 바람, 웃음이라는 그의 시어들이 주는 자극과 쾌감 그리고 씁쓸함, 비릿한 피 맛을 느끼다 보면, 문득 김수영문학관에 도착한다.

김수영은 우리나라 대표적인 자유시인이다. 중앙일보 이재광 기자는 『이 땅에 문화를 일군 사람들』(세상의 창, 2001년)에서 그에 대해 한편으로는 가족의 생계는 물론 자기 입 하나 간수 할 수 없는 룸펜, 술과 살고, 술에 찌든 예술가, 자존심만 있는 사람이었고, 다른 한편으로 해방 후 가장 주목받는 시인으로 평가했다. 시인 신경림은 『신경림의 시인을 찾아서』(우리교육, 1999년)에서 그에 대해 “앞을 찾아서 달리는 살아있는 정신”이라고 평가했다, 그러나 문학관에 있는 그의 시와 산문을 읽다 보면, 무책임한 룸펜일 수밖에 그의 고독과 절망, 분노의 속살이 보인다. 그는 폐쇄적이고, 독선을 강요하고, 틀을 강압하는 세상과 불화할 수밖에 없는 ‘자유 그 자체’, ‘온 몸이 자유’였던 사람이다. 목마른 자유를 위해 술로 목을 적셔 갈증을 태워야 했던 사람이다.

문학관은 코로나로 부분 개관 중이다. 사전 예약을 해야 하며, 시간당 10명이 관람 가능하다. 12시부터 오후 2시까지는 소독작업으로 관람할 수 없다. 김수영의 도봉구 본가(시루봉로 23나길 36-11)와 그의 묘소, 시비(도봉로 404, 도봉서원 아래)도 인근에 있다. 김수영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김수영문학관을 시작으로 본가, 시비, 묘소 등을 코스로 잡아 산책해도 좋을 듯하다.

방학동 은행나무 [사진=박종평 객원기자]
방학동 은행나무 [사진=박종평 객원기자]
연산군 묘소 [사진=박종평 객원기자]
연산군 묘소 [사진=박종평 객원기자]

99.9%가 그저 인정하는 최악의 군주, 연산군

40~60년대의 탁한 부자유와 쇳덩이같은 억압과 싸우는 그의 공간에서 벗어났다. 큰 숨으로 자유를 들이키고 나면 멀리서 푸른하늘 뒤로 도봉산이 보인다. 최소한 이 순간만큼은 가슴이 탁 틔인다. 그의 시대보다는 그나마 자유로운 시대라 몸이 가볍다. 400m 쯤 가면 그의 시대 정도는 급도 안될 암흑시대, 광기시대 주인공이 기다린다. 연산군(1476~1506)이다.

연산군묘는 원당샘공원, 서울시 기념물 제33호인 ‘방학동 은행나무’와 붙어있다. 원당샘공원은 600년 전 파평 윤씨 일가가 정착해 이용했던 샘이다. 은행나무 수령은 560살 이상이다. 흥선대원군이 경복궁 재건 당시 징발할 대상이었으나, 마을 주민들의 간청으로 제외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고 한다. 은행나무 앞에 답사 주인공 연산군 부부묘가 있다. 연산군은 성종과 폐비 윤씨의 아들이다. 1494년에 임금에 올랐다. 즉위 초에는 각종 개혁정책을 추진했으나, 기득권 세력과의 갈등 속에서 무오사화, 갑자사화를 일으켰다. 말기에는 각종 실정을 반복하다가 중종 반정으로 왕위에서 쫓겨났다. 강화도에서 유배중 사망했다.

연산군에 대한 일반적인 평가는 모두 최악의 군주이다. 그러나 신동준 박사를 비롯해 몇몇 전문가들은 연산군을 새롭게 보고 있다. 『연산군을 위한 변명』(신동준, 지식산업사, 2003)의 경우는 대표적인 저술이다. 그는 “연산군이 만고의 폭군으로 몰린 근본 원인은 무엇보다도 연산군의 폐위라는 역사적 사실에서 찾아야만 한다. 연산군은 돌연변이처럼 갑자기 나타난 미치광이 폭군이 결코 아니었다. 다만 다른 왕보다 제왕의 풍류를 즐겼고 왕권 강화에 남다른 집착을 보였다는 점이 다르다면 다르다”고 보았다. 

변원림 박사의 『연산군-그 허상과 실상-』(일지사, 2008년)에서는 보다 더 세밀히 연산군의 진실을 고민하고 있다. “연산군이 폐위된 후 조선의 왕들은 허위를 지킬 뿐이었으나, 단 한 사람도 연산군과 같이 권신들의 손아귀에서 벗어나려는 시도를 한 왕이 없다. 권신들은 성리학의 명분을 내세우며 왕을 능멸하고 국민을 착취하여 점점 비대해져 갔으므로, 결국 자체내의 분열을 가져와 당파싸움이 극심하게 되었던 것이다. 조선의 왕권은 연산군의 패배로 종막을 고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는 또 “연산군이 폭군의 이름을 받은 것은 오히려 그가 대왕다웠음을 알리는 것이다. 연산군이 비록 실패하기는 했으나, 그는 진실로 국가의 안정과 번영을 위해 노력한 대왕으로 인정되어야 한다는 생각을 했다.”고 기존의 연산군에 대한 인식과 평가를 완전히 뒤엎고 있다. 뭇 사람이 사슴을 말이라고 하면 사슴도 말이 된다. 연산군의 진실이 무엇이든, 역사의 사실은 가끔은 뒤집어 보면, 보이지 않던 진실이 보이기도 한다. 사슴이든 말이든 다른 이들의 이야기만으로 단정하거나 믿지 않았으면 좋겠다.

강화도 교동에 묘가 있었으나, 부인 신씨의 요청으로 1513년에 현재의 묘소로 이장되었다. 맨 위에 있는 묘 중 왼쪽이 연산군, 오른쪽이 부인 신씨 묘이다. 맨 아래는 연산군 딸과 사위, 가운데는 의정궁주 조씨의 묘이다. 매주 월요일은 정기휴일이다. 11월부터 1월까지는 오후 4시 30분까지만 입장할 수 있다.

간송옛집 [사진=박종평 객원기자]
간송옛집 [사진=박종평 객원기자]

민족 문화의 수호신, 간송 전형필

연산군묘에서 안맹담(1415~1462)․정의공주(?~1477)묘역까지는 400m이다. 정의공주는 세종의 둘째 딸이고, 안맹담은 정의공주의 남편이다. 정의공주는 한글 창제의 숨은 주역이라고 한다.

정의공주 묘역에서 ‘간송 옛집’까지는 약 9분, 800m이다. 가다보면 ‘서울 방학동 전형필 가옥’이라는 이정표가 나온다. 민족문화유산 수호자 전형필(1906~1962)의 호가 ‘간송’이다. 그가 수집한 문화유산은 12점이 국보, 10점 보물, 4점이 서울시 지정 문화재가 되었다. 그의 수집품 중에서 가장 중요한, 우리 문화유산에서 가장 의미있는 것은 단연코 국보 제70호,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인 『훈민정음해례본』(1446년)이다. 세종이 한글을 창제한 뒤, 곧바로 만들게 했던 한글을 만든 원리와 문자 사용 방법을 설명한 책이다. 세종은 혜레본이 발간된 즉시 한글을 ‘훈민정음’이라는 이름으로 세상에 공표했다. 간송은 625전쟁으로 인한 피난 중에도 다른 그 어떤 보물보다 이 책을 소중히 여겨 피난 갈 때 품에 넣고 갔고, 잘 때도 베개 속에 넣고 지켰다. 

방학동의 이 ‘간송 옛집’은 간송이 수많은 문화재를 수집할 수 있는 재력의 바탕이 된 곳이다. 간송의 양부 전명기 선생이 인근 농장과 경기도, 황해도에서 오는 소출을 관리하기 위해 건립했다. 집 뒤 언덕 위에는 왼편 간송 부부의 묘, 오른편 양부 전명기 선생의 묘가 있다. 묘소에는 들어갈 수 없다. 아래에서는 묘소가 잘 보이지 않으나, 키가 크거나 까치발을 들어야 한다. 현재는 코로나로 인해 사전 전화 예약 후 관람이 가능하다(02-954-5757). 관람인원도 10명으로 제한되고, 단체 관람이나 문화해설도 안된다. 된다. 월요일은 휴관한다. 집 안쪽에 있는 ‘서울 방학동 전형필 가옥(등록문화재 제521호)’ 안내판에는 ‘아버지 전명기’라는 부분이 있다. 이는 정확히 말하면 간송의 ‘양부 전명기’를 뜻한다. 간송의 아버지는 ‘전영기’이고, 작은 아버지이자 당숙이었던 전명기에게 간송이 양자로 갔기 때문이다. ‘간송 옛집’에 대해서도 일부 이정표와 집안 안내판의 경우는 2012년 국가등록문화재 제521호 ‘서울 방학동 전형필 가옥’ 등재를 기준으로 하고 있다. 2016년에 ‘간송 옛집’으로 변경되었으니, 혼돈을 주지 않기 위해서 이정표와 안내판 명칭을 수정해야 한다.

계훈제 흰고무신 [사진=박종평 객원기자]
계훈제 흰고무신 [사진=박종평 객원기자]

민주화운동의 거목, 청렴한 흰 고무신

백기완이 “학처럼 나래를 가졌으되 땅을 쓸어안고 살아왔”던 사람이라고 불렀던 사람이 있다. 그의 별명은 평생 신었던 ‘흰 고무신’이다. 청렴의 상징이다. 독립운동가, 교육자, 언론인, 민주화 운동가였던 계훈제(1921~1999)이다. 간송 옛집에서 그의 옛집까지는 800m 정도이다. 지금은 ‘방학2동공영주차장’과 ‘마을극장 흰 고무신’으로 변모했다. 그의 흰 고무신에서 비롯된 이름이다. 그의 1997년 8월 12일, 광복절을 앞둔 시점의 일기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나온다. “나는 조국을 택하느냐 가족을 택하느냐 옆눈질할 겨를 없었다. 나는 조국을 택했다. 태양이 우주를 환하게 하는 것처럼 조국의 환함을 택했다. 가족은 엉망이 되었다. 보상받을 길은 없다. 그러나 그것으로 마음은 든든했다.”(계훈제, 『흰 고무신 – 계훈제, 미완의 자서전-』, 삼인, 2002년)

그는 수많은 민주화운동가들이 타협하거나 변절할 때도 언제나 자신의 자리에 있었다. 보상을 바라지도 않았다. 명예를 구하지도 않았다. 그렇다고 유명하지도 않다. 영웅적 투사도 아니다. 그러나 그가 있어야 할 자리에 묵묵히 있었다. 세상 사람들의 눈, 그의 잘난 동지들의 눈에는 거목이 아니었다. 그가 가고 난 지금, 민주주의를 팔아 권력을 누리고, 치부하는 오늘의 그의 옛 동료와 후배들을 보면, 그는 진짜 거목이다. 자신의 경력을 팔거나, 과장하거나, 끼리끼리 네트워크로 생존하거나, 권력에 영합해 한몫 잡는 오늘의 그들과는 품격이 다르다.

1998년 7월 27일 일기에서는 죽음을 준비한 듯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이제 나는 가야 한다. 온갖 허물을 몸과 마음에 새겨 놓은 채 하나도 풀어보지 못하고 가야 한다. 누더기 셔츠를 벗어 던져야 하는데 알몸이 헌 것을 어찌하랴. 새로 나려고 애쓴 것만이라도 초월자는 기억하여 주소서. 저곳이 가까웠는가. 하나도 준비 없이 가야 하나. 나는 제대로 된 인간이 못 된다. 그럴진대 무엇을 기대할 것인가.” 

헌 알 몸 하나만 남았던 민주화의 산 증인. 계훈제 선생이 그리운 시절이다. 그때의 그 순수함, 정열은 어디 가고 권력욕만 가득한 사람들이 넘치는가.

계훈제 옛집에서 가장 가까운 지하철역은 지하철 1호선 방학역이다. 25분 정도 걸린다. 이들 코스를 둘러보면 대략 최소 3시간 30분 이상 소요 된다. 

창동역에서 시작한 인물들의 길을 따라 걸으면 최소 4시간 30분 이상 걸린다. 자세히 둘러보고 간다면 물론 아주 부족한 시간이다. 도심을 통과하는 구간이 많다. 그 역시 사람 사는 동네를 지나는 것이고, 그 시대 사람들도 지금과는 다르나 사람 사는 동네를 지났으니, 그러려니 하며 걸으면 된다. 전태일열사 옛집 부터는 아파트 단지도 지나나 고즈넉한 맛도 있고, 김수영문학관에 이르는 길은 풍경도 좋다. 연산군묘에 이르는 길도 산책으로 좋다. ‘간송 옛집’에서는 비록 복제본들이나 간송 소장품을 볼 수 있고, 옛 집 자체가 주는 따뜻함과 여유로움도 느낄 수 있다. 이들의 길을 따라 현재에서 어떤 삶을 살 것인지 생각하며 걷는다면, 지금의 팍팍한 삶에 그나마 위로가 될 듯하다.

홍명희 옛집터 
주소 도봉로 136나길 40 (창동)
송진우 옛집터 
주소 도봉로 136가길 69 (창동)
김병로 옛집터 
주소 도봉로 134길 14 (창동)
정인보 옛집터 
주소 도봉로 595-1 (쌍문동)
문예봉·임선규 옛집터 
주소 도봉로 133길 32 (쌍문동)
함석헌기념관
주소 도봉로 123길 33-6 (쌍문동)
전태일 옛집터 
주소 해등로 195 삼익세라믹아파트 112동 (쌍문동)
김수영 문학관 
주소 해등로 32길 80 (방학동)
연산군 묘
주소 방학로17길 46 (방학동)
안맹담과 정의공주 묘역
주소 방학동 산63-1 
간송 옛집
주소 시루봉로 149-18 (방학동)
계훈제 옛집(마을극장 흰 고무신)
주소 시루봉로 15마길 13(방학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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