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단의 선 사라지는 세상을 꿈꾼다”

선무, 그럴지라도, 2020 [사진=아트센터 화이트블럭 제공]
선무는 얼굴을 드러내지 않는 작가로 유명하다.
‘그럴지라도’ 2020
[사진=아트센터 화이트블럭 제공]

[일요서울ㅣ김혜진 기자] 한국에 정착한 탈북민 수는 3만 명을 넘어섰다. 이들 중 상당수는 안정적인 정착을 위해 고군분투 중이다. 주변 사람들의 차별적인 시선, 사회 시스템 적응의 어려움, 가족에 대한 그리움 등 정착을 어렵게 하는 요인은 다양하다. 다가올 통일에 대비해 ‘먼저 온 통일’인 탈북민들의 사회 정착 문제에 대한 고민이 필요하다. 일요서울은 한국 사회에 잘 정착한 이들의 다양한 이야기를 [릴레이 인터뷰]로 전하고자 한다. 지난 9일 파주에서 개인 전시회를 진행 중인 탈북 작가 선무(작가명) 씨를 만나 이야기를 나눴다. 

-10월 22일부터 11월 29일까지 개인전 ‘내게 날개가 있다면’을 연다고. 
▲ 지난해 독일 뮌헨에서 전시를 할 때 기획자가 한국에서, 특히 고향과 가까운 파주의 헤이리 마을에서 전시회를 열면 좋겠다고 이야기를 해서 여러 기획과 논의를 거쳐 진행하게 됐다. 

-메인 포스터에 그려진 ‘선을 넘다’라는 작품은 어떤 의미가 담겨 있나.
▲ 두만강을 건널 때 내 모습을 그린 것이다. 주변의 물을 빨간색으로 표현한 건 북한을 나오는, 붉은 선을 넘는다는 의미를 상징적으로 담아본 것이다. 

-작가명을 ‘선무’라고 짓게 된 이유가 있나.  
▲ 미대 졸업을 앞두고 작품 전시를 할 시기가 다가왔다. 북한에 가족이나 친척 등이 있으니 본명을 쓰긴 어려워 작가명을 몇날며칠 고민했다. 북한을 벗어나 타향을 헤매면서 나라 없는 설움, 신분 없는 신세 등을 경험하며 스스로에 대한 고민도 해왔던 터였는데 그런 복합적인 생각들이 합쳐졌다. 결국 분단의 선이 없어져 고향에 갈 수 있길 바라는 마음이 들었고 ‘선이 없다’는 뜻의 선무라는 이름을 짓게 됐다. 

-한국에 온지 18년 정도 됐다고 했는데 아직도 북한에서의 기억이 생생한가.
▲ 당연하다. 고향을 언제든지 갈 수 있는 곳이라고 한다면 기억을 잘 못할 수도 있다. 하지만 내 고향은 갈 수가 없다는 걸 잘 알기 때문에 더욱 애증이 생기고 그리움이 생긴다. 여전히 생생하다.

-작품을 보면 북한과 주변 국가들의 모습을 그린 작품이 많은 것 같다.
▲ 분단은 남북이 원해서라기보단 주변 국가들의 영향을 많이 받지 않았나. 미국·일본·중국·러시아가 자국의 정치적 이익에 따라 남북관계를 조종하는 것에 항상 불만이었다. 다만 이제는 남북분단이 국제적 문제기도 하고 함께 해결해 나가야한다고 생각해 이를 어떻게 표현해볼까 고민했다. 그래서 6개국의 국기를 모기장에 물들여 매듭져 묶어놓는 작품을 만들고, 한국·북한·미국 지도자의 얼굴을 그린 작품이 나오게 됐다. 

-어린 아이들의 모습도 작품 속에 많이 등장하던데.
▲ 내 아이들을 데리고 다른 나라에 가보면 말이 안통해도 또래 아이들과 잘 지내는 모습을 보게 된다. 그런데 잘났다고 하는 어른들은 오히려 정치·경제적인 이익 때문에 서로를 외면하고 경계만 한다. 특히 남북문제가 그런 것 같다. 아이들만 있다면 평화가 금세 올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이들의 모습을 통해 어른을 비꼬려는 의도가 담겨있다.

개인전 포스터 [사진=아트센터 화이트블럭 제공]
개인전 포스터 [사진=아트센터 화이트블럭 제공]

-작품 활동을 하면서 가장 기억에 남는 사건이 있었나. 
▲ 첫 전시를 윈도우 갤러리에서 했는데 경찰이 찾아와 당황했던 적이 있다. 당시 작품은 어릴 때 고향의 모습, 김일성·김정일이 그려진 그림 등이 있었는데 그걸 보고 지나가던 누군가가 북한을 찬양한다고 신고했던 것 같다. 이후 전시 때도 그런 상황이 종종 있었는데 이전의 경험을 바탕으로 수월하게 대처할 수 있었다. 지금은 세상이 많이 바뀌었다고 하지만 그렇게 많이 바뀐 것 같진 않다. 여전히 사람들은 드러내는 것에 대해 민감해하고 부담스러워 한다. 그렇지만 이런 부담감을 더 줘야 할 것 같다. 통일을 이야기하는데 서로 외면하면서 어떻게 통일을 이야기할 수 있겠나. 남북이 잘 알게 된다면 ‘통일’이라는 단어도 굳이 필요하지 않을 것이다. 

-탈북 후에도 북한식 사상이 남아있던 것 같은데 마음이 돌아서게 된 계기가 있었나.
▲ 두만강을 건너서 중국에 사는 동안 김일성·김정일에 대한 믿음이 점차 사라지는 것에 허무함과 공허함을 느꼈었다. 북한에서는 김 부자를 늘 찬양하는 교육을 받아서 그들이 곧 ‘나’라고 생각했는데 내가 나를 부정하는 건 싫었다. 그런데 중국에 가보니 지도자 이름도 막 부르고 큰 나라인 중국은 오히려 밥을 굶지 않고 잘 살고 있는 것에도 의문이 들었다. 소소하게라도 계속 다름을 보게 됐던 것 같다. 

-한국에 처음 왔을 때 느낌은 어땠나.
▲ 하나원에서 나와 충청남도 공주에 있는 집을 받았다. 창문 밖에 산이 있었는데 멍하니 한참을 보고 있던 것 같다. 살아서 여기까지 오긴 왔는데 누구도 반기지도 않는 이곳에서 펼쳐질 또 다른 삶은 뭘까 두려움도 있었고 미래에 대한 걱정도 있었다. 대학에 가야겠다고 생각하고 주변에 그림 그릴만한 곳을 찾아보니 시내에서 한 시간정도 떨어진 곳에 미술관이 있었다. 가보니 충남대 교수인 미술관 관장이 경비 일을 하고 잔디도 깎고 아마추어들 그림도 봐주면서 그림도 그리라고 했다. 좋은 제안인줄 알았는데 말도 안 되는 임금을 줬다. 당시에는 그게 말도 안 되는 건지도 잘 몰랐을 만큼 세상을 몰랐었다. 

-한국에 와서 바로 미술 대학에 가야겠다는 생각은 어떻게 했나. 
▲ 한국에 오기 전 태국에 잠깐 있을 때 어떤 선교사가 한국은 끼리끼리 문화가 강하다고 했다. 학연, 지연, 혈연 등으로 돌아가는데 연고가 없으면 어디도 끼기 힘들다고 말해줬다. 학교에 가면 학연이라도 잡을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홍익대 미술대학에 지원했고 북한의 미술대학 학력이 인정돼 3학년 편입이 가능했지만 친구를 사귀기 위해 1학년으로 입학하게 됐다. 

-남북한에서 미술 대학에 다녔는데 수업 방식에 차이가 있나. 
▲ 남한에서는 실기수업을 하면 다 같이 똑같은 그림을 그려야 할 때도 있지만 자기만의 생각을 갖고 그리는 수업이 많다. 북한은 모두 한 물체를 보고 똑같이 그리는 수업이 대부분이다. 교수들의 자세도 좀 다르다. 북한은 교수가 자신의 기술을 학생들에게 어떻게 잘 전달할까를 고민하는데 남한은 그런 건 없는 것 같다. 그리면 잘 봐주긴 하는데 그게 끝이다. 대신 현장에서 작품 활동을 하는 시간강사들에게 많은 걸 배울 수 있었다. 그때 당시 나는 서울과 평양을 그리거나 고향에 대한 소재로 자주 그렸는데 교수들이 별로 안 좋아했다. 그들의 이야기만 듣고 자신감도 많이 떨어지고 겁먹었었다. 그런데 강사들이 제멋대로 작품이라도 충분히 인정받을 수 있다는 걸 알려줬다. 우물 안 개구리던 내가 처음 보는 세상이었고 괜히 두려워하고 주저했다는 생각이 들면서 자신감을 찾게 됐다. 

-대학 생활 중 적응하기 어려웠던 건 뭔가. 
▲ 수업에서 사용되는 용어 중 절반 이상이 외국어·외래어였다. 쉬는 시간에 교수한테 조선말로 좀 해달라고 여러 번 말해도 쉽게 안 고쳐졌다. 그래서 수업시간마다 그때그때 물어보기도 했다. 또 학교 친구들이 처음에는 다가오지 않았는데 신입생 술자리에서 북한에서 왔다고 이야기하고 혹시 말하다가 오해를 살 수 있는 말을 할 수도 있으니 가슴아파하지 말라고 했다. 태국에 있을 때 한국에서 대학생들이 봉사를 왔는데 간식을 권유하는 학생에게 ‘일없어요’라고 했더니 얼굴이 새파래져 나까지 당황했던 기억이 있어서다. 그때 경험으로 인해 친구들에게도 특별한 감정이 있어서 그런 게 아니니 오해 말라는 말을 해줬고 4년간 친구들과 잘 지냈던 것 같다. 

(좌) 가보고싶다, 2020 (우) 따징, 2020
(좌) 가보고싶다, 2020 (우) 따징, 2020 [사진=아트센터 화이트블럭 제공]

-새로운 땅에서 예술 활동을 하면서 사는 게 쉽지 않을 것 같은데.
▲ 딱히 예술이라고 구분 짓기 보다는 나는 그냥 내가 하고 싶은걸 하는 것이고 그걸 할 수 있다는 것에 고마움을 느끼며 살고 있다. 남들이 어떤 예술가로 봐주길 원하기보다는 보이는 대로, 부르고 싶은 대로 불러주면 좋겠다. 

-한국 사회에서 북한 출신이라는 편견 때문에 힘들었던 적도 있나. 
▲ 그림 그리는 사람들 사이에 있다 보니까 일반 직장인들의 삶에 대해선 잘 모른다. 가끔 이야기를 들으면 직장에서는 편견에 부딪히게 되고 상처를 받기도 한다는데 내가 경험한 주변 친구들에게는 그런 느낌을 받은 적은 없었다. 예술계는 현실도 논하지만 미래지향적인 것을 논하는 게 많은데 편견을 가지면 논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다행히 그런 편견은 없었고 때론 슬프지만 북한 출신인 게 내 장점이 될 수 있고 재산이 될 수도 있다고 이야기해주는 친구들이 많아 큰 도움이 됐다.

-지금의 과정까지 오는데 주변 사람들의 도움도 컸다고.
▲ 학교에서 만난 시간강사들과 친구가 돼서 지금까지도 잘 지내고 있고 그 친구들이 작품 활동을 하는데도 많은 도움을 줬다. 또 학교에서 사귄 친구들 중에 일본인 친구도 있었는데 그 친구 덕에 대학원 입학도 포기하지 않고 갈 수 있었다. 다양한 인연들 덕에 많은 어려움을 극복할 수 있었다. 

-화가를 꿈꾸는 후배 탈북민들에게 해 주고 싶은 말이 있나.
▲ 그냥 멋대로 살라고 한다. 각자 삶이 달라서 내 조언보다는 자기 생각대로 사는 게 중요하다고 이야기 해주고 싶다. 다만 주변에 어떤 친구를 사귀는지는 정말 중요하다. 남한 사회에 처음 와서 사귀는 친구가 누구인지에 따라 삶이 달라질 수도 있기 때문이다. 물론 평소 내가 갖고 있는 생각과 비슷한 생각을 가진 친구들과 만나게 될 텐데 그걸 잘 생각해봐야 한다. 남한에는 북한에 없는 역사가 많다. 그걸 알려줄 수 있는 친구를 만나야 알게 될 수도 외면하게 될 수도 있는 것이다. 

저작권자 © 일요서울i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