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중근 의사의 말 새겨진 마스크 쓴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기림비 [뉴시스]
안중근 의사의 말 새겨진 마스크 쓴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기림비 [뉴시스]

 

[일요서울] 국립외교원 외교사연구센터에서 ‘외교’라는 렌즈를 통해 우리 현대사를 조명하기 위해 오럴히스토리사업 ‘한국 외교와 외교관’ 도서 출판을 진행해 왔다. 지금까지 총 17권의 책이 발간됐다. 일요서울은 그중 공로명 전 외교부장관의 이야기가 담긴 책의 내용 중 일부를 지면으로 옮겼다.

일본군 위안부 문제

경주 한·일 정상회담

- 최근에 아베 정부가 검증을 이류로 고노 담화에 흠집을 내려 시도했다. 그중에 증언 청취가 제대로 일어나지 않았고, 한국 정부의 압력에 의해서 졸속이었다는 식으로 징집에 강제성이 없음을 강변했다. 한국 정부가 일본에 압력을 가해서 그런 조치가 됐다고 이야기할 수 있는 것인가. 
▲ 거기서 유실됐을 가능성도 있는데, 문서가 없다로 강제성을 인정 못하겠다니 말이 안되는 거다. 그래서 결국 증언 청취라는 방법을 취하게 되고, 그런 과정에서 우리가 일본 정부와 문구 하나를 두고 따진 건 아니다. 기본 정신에 입각해서 논의하고, 그들이 가지고 나온 초안이 우리로서 받아들일 수 있는 건지 여부를 판단하는 것다. 이시하라 노부오 전 관방부장관이 증언한 것처럼, 한국 정부와 일일이 교섭을 할 필요는 없었다는 건 맞다. 

- 장관님 재임 기간에 여러 차례 정상회담이 있었는데, 특히 인상에 남는 것이 경주에서 7월6일에 있었던 한·일 정상회담이었다. 호소카와 모리히로 총리는 부임 후에 처음으로 침략전쟁이었다는 표현과 함께 상당히 진솔한 과거사 발언을 해서 가장 진일보했다고 평가되기도 합니다만, 회담이 열리기 전까지의 배경에 대해 말씀해 달라. 
▲ 미야자와 총리가 1992년 1월에 방한했고 김영삼 대통령이 1993년 2월25일에 취임한 뒤 미야자와 총리의 방한 초청이 있었다. 그런데 사정으로 실현이 안 되니까 양국의 정상회담이 하루속히 이루어져서 상견례를 하는 게 급했다. 그래서 11월에 호소카와 모리히로 총리를 초청했다. 그래서 제주도, 서울 등 개최지에 대한 여러 이야기가 있었는데, 김영삼 대통령이 경주로 정했다. 정상회담에서 경주를 제외한 배경에 대해서 설명을 했다. 경주에서 열리게 돼서 처음에는 수뇌회담을 1시간 전체 회의 45분으로 마무리하려고 했는데, 무려 2시간 반 걸렸다. 김영삼 대통령은 11월7일에 경주에 오셨다. 그 전날까지는 날씨가 좋았는데, 막상 이날은 날씨가 나빴다. 김해에서 헬리콥터를 타로 경주로 갈 예정이었는데, 헬리콥터가 뜨지를 못해서 육로로 왔고 저도 그 육로로 같이 모시고 왔다. 

김영삼 대통령이 “우리나라에는 비나 눈이 오면 반가운 손님이 온다는 이야기가 있다”고 농담을 하니까, 호소카와 총리도 일본에도 “비 온 후에 땅이 굳는다”는 속담이 있다고 화답했다. 그때 김영삼 대통령이 “한국 방문이 처음이 아니지 않는냐” 하는 이야기를 하니까, 세 번째라고 대답했다. 구마모토현 지사로 있을 때 대전에 온 적이 있고 참의원으로 있을 때도 방한해서, 이번 방한이 세 번째라고 설명을 했다. 일본 측이 처음에 제주도를 제안했는데, 김영삼 대통령이 “제주도는 좋은데 제주도에 왔던 고르바초프가 제주도 방문 후에 실각을 해서, 징크스가 있는 것 같아 경주로 했다”고 했다. “경주는 신라가 3국을 통일한 승장의 장소다. 호소카와 총리의 성공을 빌기 위해서, 경주로 한다”는 이야기부터 시작됐다. 

두 분이 공통으로 추진하고 있던 게 국내 개혁이다. 그래서 국내 개혁 문제를 화두로 삼았고, 김영삼 대통령은 호소카와 총리가 분명한 역사관을 갖고 한국에 대해서 이야기를 해준 데 대해서 대단히 감명을 받았다는 이야기를 했다. 호소카와 총리가 처음부터 역사르 직시한다고 이야기를 했다. 저는 사실 신민단이 집권하고 나서, 간부들이 역사를 직시한다는 이야기를 하기 때문에 새로운 일본 사람들, 신일본인이 탄생했다는 이야기를 하기도 했다. 호소카와 총리가 “우리 두 나라는 기본 가치관을 공유한다. 서로 협력하고, 각자의 역할을 하겠다”는 각오를 이야기하면서 “역사를 직시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는 발언을 했다. “진실을 말하고 또 직시하지 않고서는 진정한 우호관계는 없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모든 관계의 전제로서 일본인은 이를 강하게 인식할 필요가 있다”는 이야기를 했다. 그래서 일본의 식민지배하에서 모국어 교육의 기회를 뺏기고 타국의 언어 사용을 강제당하고, 창씨개명까지 하는 이상한 일들이 강제되고, 일본군 위안부 문제, 노동자의 강제연행 등 견디기 어려운 고통을 강요당한 데 대해서 깊이 사죄하고 반성을 했다. 가해자로서 반성하고, 다시 한번 사죄드린다고 진솔한 말을 했다. 

그래서 이에 대해서 김영삼 대통령은 “한·일 간에 서로 2시간이면 왕래하는 나라인데, 사람이 한 발로 설 수 없는 것과 같이 일본도 혼자 할 수 없다. 서로 협력하는 것이 긴요하다”고 말했다. 그리고 당선 직후 “우리나라 외교의 기축을 미국, 일본으로 하겠다고 말하고 일본과의 관계를 이처럼 공개적으로 선언한 것은 쉬운 일은 아니었다”고 이야기를 했다. 그 다음에 “과거 정부는 배상 문제를 주장했는데, 피해자는 우리가 우리 손으로 품어야 한다. 이것이 나의생각이다”라는 생각을 다시 한 번 밝혔다. 또 특히 훗카이도에서 조업을 하는 한국 어선에 대한 규제의 필요성에 대한 이야기도 있었다. 

중국 문제에 관한 서로의 인식을 이야기하면서, 호소카와 총리가 자기가 중국의 올림픽 개최를 지지했고 빌 클린턴을 설득했다는 이야기를 했다. 북한 문제의 대응에 있어서도 김영삼 대통령은 “북한이 일본에도 위협을 위협이 되니 한·일 간에 협력을 하자”고 했고, 일본 정부는 이에 대해 “북한 핵 문제 해결 없이는 일본으로서는 북한과 관계 정상화를 할 수 없다”는 입장을 분명히 이야기했다. 그리고 조총련(재일본조선인총엽합회) 자금이 북핵 개발에 이용된다는 문제를 우리가 제기했다. 이에 대해서 호소카아 총리는 미국 측에서도 이야기를 듣고 있고, 여러 가지 조사하고 제지하는 방안을 요구받고 있다고 이야기했다. 

그리고 청소년 교육 문제, 양국의 이해를 증진하기 위해서 양국의 지식인, 정부 관계자들, 지식인 유경험자들의 의견 교환이 필요하다는 생각에서 양국 정상이 한일포럼 개최를 지지했다. 그래서 12월에 서울에서 제1차 한일포럼을 가지게 됐다. 그 다음에 기자회견에서 호소카와 총리가 역사인식에 대해 직접 이야기했다. 창씨개명을 강요하고, 조선어 교육을 금지하고, 일본어를 강제적으로 사용하도록 했다는 이야기를 해서 대단히 획기적인 반응을 일으켰다. 그야말로 1945년 이후에 민주주의 일본이 새롭게 모습을 드러내는구나 하는 느낌을 줬다. 호소카와 총리는 퇴임한 후에 내송록이라고 하는 회고록을 발표했다. 내송록이란 안으로 자기 스스로를 돌보고 꾸짖다는 뜻이 있다고 했다. 그 회고록을 보면 경주 회담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다. 경주 기자회견에서 자기가 사죄를 했는데, 사실 그 내용이 사무국의 안에는 없었다는 거다. 호소카와 총리가 비행기 안에서 기획을 해서 창씨개명, 모국어 교욱 금지 등 구체적 예를 들어서 단순한 사죄가 아니고 비인도적인 행위에 대해서 진솔한 말을 썼다는 거다. 

이와 같은 역사인식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한·일 간에 역사인식 문제로는 서로 크게 부딪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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