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현궁 입구 [사진=박종평 객원기자]
운현궁 입구 [사진=박종평 객원기자]

[일요서울ㅣ박종평 객원기자] 북촌. 서울의 여느 곳이 다 그렇듯 아는 만큼 보여주는 곳이다. 조선 시대 북촌은 황현(1855~1910)의 『매천야록』에 따르면, 지금의 종각 북쪽 지역을 지칭하고, 당시 주류였던 노론 양반, 고위 관료들의 거주지였다. ‘서울 중의 서울’이라고 평가되는 곳이다. 과거의 잔영이 여전히 많이 남아 겉보기로는 조선 시대 양반들의 삶을 느낄 수 있는 한옥이 즐비한 공간이다.

북촌 답사를 시작하며

코로나 이전에는 우리나라 사람들과 외국인이 어깨를 부딪칠 만큼 붐볐다. 이번에 찾은 북촌에는 코로나에 지친 젊은 연인들과 소수의 외국인만이 보였다. 그들이 북촌을 찾는 이유는 특유의 예스러움, 맛집, 다양한 카페 등인 듯하다. 그들과 따로 또 같이 섞여 북촌 역사 속살을 찾아갔다.

북촌 답사기는 이후 여러 차례에 걸쳐 쓸 계획이다. 첫 번째 소개 구간은 북촌 중 운니동, 낙원동, 관훈동, 경운동, 원서동, 계동 지역이다. 코스는 다음과 같다. 지하철 3호선 안국역-대원군의 운현궁-교동초등학교-지석영 집터-조광조 집터-서북학회 회관터-경인미술관(박영효 집터)-민병옥 가옥-천도교 중앙대교당(수운회관, 세계어린이운동 발상지 기념비, 독립선언문 배부터)-조선건국동맹터-제생원터-현대건설 사옥(계동궁, 관상감 관천대 등)-경우궁 터-북촌문화센터-몽양 여운형 집터-인촌 김성수 옛집-이상혁 가옥-만해 한용운 유심사 터-주문모 신부 석정보름우물-서울중앙고등학교까지 구간이다. 대부분 조선 말기와 근현대 역사와 인물들과 관련된 곳이다. 옛사람의 흔적을 따라 북촌 골목길 곳곳을 살피며 쉬엄쉬엄 간다. 4시간 정도면 충분하다.

지하철 역사에서 발견한 헌법의 역사

출발점은 지하철 3호선 안국역이다. 근현대 역사 주역 대원군이 살았던 운현궁으로 가려면 4번 출구로 나가야 한다. 지하철에서 내려 4번 출구 방향을 따라 한 층 올라가 지하도 안을 걷다 보면, 왼쪽 벽에 우리나라 헌법 역사를 보여주는 안내판이 띠 형태로 설치되어 있다.

1919년 3․1운동 때, 손병희 등 33인 민족대표의 “오등(吾等)은 자(玆)에 아(我) 조선(朝鮮)의 독립국(獨立國)임과 조선인(朝鮮人)의 자주민(自主民)임을 선언(宣言)하노라”로 시작되는 ‘독립선언서’. 임시의정원 의장 이동녕, 임시정부 국무총리 이승만 등이 1919년 4월 11일, “제1조. 대한민국은 민주공화제로 함”이라고 선언한 ‘대한민국 임시헌장’. 1948년 7월 17일, “유구한 역사와 전통에 빛나는 우리들 대한국민은 기미 삼일운동으로 대한민국을 건립하여 세계에 선포한 위대한 독립정신을 계승하여 이에 민주독립국가를 재건함에 있어서”라고 시작되는 ‘제헌헌법’. 그리고 가장 최근의 개정 헌법(1987년 10월 29일), “유구한 역사와 전통에 빛나는 우리 대한민국은 3․1운동으로 건립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법통과 불의에 항거한 4․19민주이념을 계승하고, 조국의 민주개혁과 평화적 통일의 사명에 입각하여”로 시작되는 9차 개정 ‘제6공화국 헌법’ 전문까지 있다.

헌법 전문들을 유심히 보면 1919년 3․1운동이 빠지지 않는다. “3․1운동으로 대한민국을 건립했다”(제헌헌법~4차 개정), “3․1운동의 숭고한 독립정신”(5차~8차 개정), “3․1운동으로 건립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법통”(9차 개정). 3․1운동이 조선왕조가 아닌 대한민국의 시발점이라는 공통 인식이 전제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는 3․1운동 이후 최근까지 우리 국민 누구도 부정하지 않고, 인정하는 사실이다.

독자들이여! 아무리 바빠도 헌법을 한 번쯤 읽어 보시라! 경영학, 경제학, 인문학, 역사학, 과학기술, 자기개발, 리더십책 등이 급하고 눈에 보이는 이익을 줄지라도 잠시 덮으시라. 헌법 전문과 제1조부터 국민의 권리와 의무를 명시한 제39조까지라도 읽어 보시라. 인터넷에서 검색해 10분만 투자하면 된다. ‘바보’ 국민이 되지 않기 위한 첫걸음이다.

헌법 전문을 읽어가며 지하도를 걷다 보면, 왜 이 지하도 안에 헌법 전문 안내판이 있는지 알 수 있게 된다. 안국역 부근 북촌이 3․1운동이 기획되고 준비된 출발점이기 때문이다. 헌법 안내판 끝에 이어진 ‘3․1운동 청색지도’에는 안국역 일대가 3․1운동과 관련한 주요 장소였음을 표시해 놓았다. 다만 안내판의 주요 장소가 형식적․개략적으로 표시되어 아쉬움이 남는다.

역사를 잊은 일본대사관 공보문화원

3․1운동 안내판을 지나면, 이 동네가 얼마나 엄청난 동네인지 보여주는 ‘2(헌법재판소·감사원·북촌)·3(창덕궁)·4(운현궁)·5(경운동) 나가는 곳’ 안내판이 보인다. 4번 출구는 ‘100년 하늘문’이라는 이름이 붙어 있다. 3․1운동 100년 역사를 상징한다. 상해 임시정부 청사 대문을 모티브로 제작했고, 이 출구를 지나는 것이 임시정부 문을 여는 것과 같은 의미를 담았다고 한다. 하늘문에 대한 설명문은 입구 반대편 투명 아크릴 울타리에 있다. 그 앞에는 빨강 의자 셋과 파랑 의자 한 개가 있다. 설명문에는 없으나, 3․1운동을 상징하는 듯하다. 그런 의도였다면, 차라리 ‘태극’ 모양 의자 3개와 태극기를 형상화한 의자 1개였다면 더 좋았을 듯하다. 이 길이 삼일대로이고, 또 바로 옆 건물이 일본 문화 최전방 전초기지인 ‘일본대사관 공보문화원’이기 때문이다. 『일본의 새소식』 여름호가 게재된 게시판에서는 오늘도 일본을 알리고 있다. 씁쓸한 입맛을 다시며 운현궁으로 간다. 흥선대원군의 집이다. 아들 고종이 태어나 12살 때까지 살았던 곳, 성장한 고종이 명성황후와 혼례식을 올린 곳이기도 하다.

100여 년의 시간이 지났다. 그러나 명성황후를 살해한 일본인의 후예들이, 고종을 강제로 퇴위시키고 나라를 빼앗은 일본인의 후예들이 고종과 명성황후가 결혼식을 한 곳, 대원군의 집 바로 옆에 공보문화원을 둔 것은 이해할 수 없다. 조금이라도 반성하고, 역사의 교훈을 아는 일본인들이라면 결코 자리 잡지 않았을 곳이 현재의 운현궁 옆 공보문화원 자리다. 후안무치한 사람들이다.

흥선대원군의 운현궁

운현궁에는 여러 건물이 복원되어 있다. 노안당(老安堂)은 대원군의 일상 거처 및 식객을 모아 정치를 했던 공간이었으며, 삶을 마감한 곳이다. ‘노안’은 『논어』 중 “노인을 편안하게 한다(老者安之)”에서 따온 말이다. 현판은 대원군이 스승으로 모셨던 추사 김정희의 글씨를 집자해 만든 것이라고 한다. 역사에는 가정이 없지만, 대원군이 말년에 권력욕을 놓고 편안히 지내며 고종의 개혁정책을 적극 후원했다면 조선은 어떻게 변했을까?

노락당(老樂堂)은 명성황후가 왕비수업을 받고 1866년 고종과 혼례를 올린 곳이다. 이로당(二老堂)은 대원군 부인 민씨의 거처이다. 이로당 동편 뒤뜰 담장 밑에는 경송비(慶松碑)가 있다. 고종이 어릴 때 벗하며 놀던 소나무에게 정2품 관직을 내려주었기 때문에 세워진 비석이다. 현재는 옛 소나무는 없다. 담장 뒤편에 수령이 얼마 되지 않은 소나무가 보일 뿐이다.

노락당 동쪽 뒤편, 윗부분 3분의 1 정도만 보이는 일제강점기 서양식 건물은 양관(洋館)이다. 대원군의 손자 이준용이 일본인 건축가에 의뢰해 지은 것이다. 해방 직후 백범 김구 선생이 2층을 잠시 집무실로 사용하기도 했다. 현재는 덕성여자대학교 종로캠퍼스의 부속 건물이다. 

운현궁은 하절기 18시 30분, 동절기 17시 30분에 입장이 마감된다. 월요일은 다른 문화재 시설이 그렇듯 휴관한다. 사진 촬영의 경우는 결혼사진, 단체사진, 가족사진의 경우는 무료이나 3~5일 전에 인터넷 예약페이지에서 신청해야 한다.

심훈․윤석중․윤극영 모교

운형궁에서 나와 낙원상가 방향으로 100미터 내려가면 1894년 세워진 우리나라 최초 초등학교인 ‘관립교동소학교(현 서울교동초등학교)’가 있다. 담에는 학교 역사를 알려주는 안내판이 있다. 소설 『상록수』와 시 「그날이 오면」 의 심훈(1901~1936), 동요 「우산 셋이 나란히」·「반달」의 윤극영(1903~1988), 「어린이날 노래」 의 윤석중(1911~2003), 「파란마음 하얀마음」 의 어효선(1925~2004)도 교동초 출신이다. 학교 안 교동동산에는 그들의 흔적이 기념비로 제작되어 있다. 초등학생들과 답사한다면 방정환이 활동한 공간인 맞은편 천도교 건물과 ‘세계 어린이운동 발상지’ 기념비와 함께 꼭 가 봐야 할 곳이다. 『서울, 공간으로 본 역사』(장규식, 혜안, 2004년)과 『종로의 표석 이야기』(종로문화원, 2017년)에서는 교동초 교문 근처에 ‘관립 교동소학교’ 표석이 있다고 했으나, 답사 때에는 교문 주변을 공사하고 있어 확인할 수 없었다.

학교 정문 옆 베스트환전소 맞은 편 삼일대로 가에는 종두법을 들여와 우리나라 사람들이 가장 무서워했던 전염병 중의 하나였던 천연두에서 해방시킨 의학자, 국어학자, 관립경성의학교 초대 교장 ‘지석영(1855~1935) 집 터’ 표석이 있다. 표석은 서울시가 아니라 한국관광공사에서 1988년에 설치한 것이다.

조광조 집터 표석 [사진=박종평 객원기자]
조광조 집터 표석 [사진=박종평 객원기자]
지석영 집터 표석 [사진=박종평 객원기자]
지석영 집터 표석 [사진=박종평 객원기자]

목숨 걸고 보아야 할 조광조 집터 표석

서북학회와 3․1운동, 방정환 등의 흔적을 찾기 위해서는 낙원상가 방향으로 50미터 아래 횡단보도를 건너가야 한다. 횡단보도를 건너며 우측 중앙분리대 녹지대를 보면, 표석이 하나 보인다. 조선 중종 때 개혁정치가 ‘조광조(1482~1519)의 옛 집터’ 표석이다. 조선을 신진사림의 나라로 만든 토대를 구축한 인물이다. ‘나뭇잎에 쓰인 주초위왕(走肖爲王 : ‘趙’가 왕이 된다)’이라는 반대파 음모론으로 그와 그를 따르는 사람들이 사약을 먹고 죽었다. 훗날 그는 반대파와 달리 역사의 주인공이 되었다. 조광조의 도학정치나 왕도정치 역시 지금의 이념 정치나, 비실용적 정치와 비슷한 듯하다. 종로문화원에서 발행한 『종로의 표석 이야기』(2017년)에는 표석 위치가 삼일대로 438(낙원동 9)로 되어 있으나 오류이다. 표석이 횡단보도 중간에 있다. 차량에서는 빨간 불일 때, 도보 이용자는 녹색 불일 때만 볼 수 있다. 살펴볼 시간이 촉박하다. 자세히 살펴보려면 교통사고의 위험으로 목숨 걸고 보아야 한다. 500년 전 인물의 집터가 정확히 그곳이라고 꼭 집어 단정할 수도 없다. 누구라도 언제나 안전하게 편안히 볼 수 있도록 인근 도로변 보도로 옮겨 놓으면 좋을 듯하다.

횡단보도 건너 종로떡집 모퉁이를 돌면 건국빌딩주차장이 나온다. 주차장이 ‘서북학회 회관 터’이다. 서북학회는 대한제국 말기에 평안도, 황해도, 함경도 출신 인물들이 만든 교육을 통한 국권회복 단체이다. 건국대의 전신으로 1946년에 설립된 조선정치학관도 이 건물에서 시작했다. 1909년 완공된 회관 건물은 현재는 건국대 캠퍼스로 이전, 복원되어 건국대 박물관으로 사용되고 있다. ‘서북학회 터’ 표석은 횡단보도에서 안국역 방향 50미터 위쪽 기린스제이제이옥션 앞 삼일대로변에 있다.

경인미술관 (박영효 집터) [사진=박종평 객원기자]
경인미술관 (박영효 집터) [사진=박종평 객원기자]

갑신정변 주역 박영효 집터

건국주차장에서 인사동 네거리를 지나 안국역 방향으로 올라가다가 수도온누리약국에서 우측 길로 들어가면 경인미술관이 나온다. 철종의 부마였고, 갑신정변의 주역, 훗날 친일파로 변질한 ‘박영효 집터’이다. 김옥균, 홍영식, 서광범 등이 모여 갑신정변을 모의했던 곳이다. 1884년 갑신정변이 실패한 뒤에 몰수되었고, 일제강점기에는 친일파였던 민영휘의 아들 민대식이 소유했다. 원래 집은 현재 남산 한옥마을로 옮겨져 복원되었다.

부마가 되기 전의 박영효의 집은 숭인동 롯데캐슬천지인아파트 일대이다. 부마가 된 뒤에는 별장으로 만들어 귀족과 일본 관리들만 출입케 했다고 한다. 숭인동 집은 1914년 천도교에서 매입해 수리하고 정원을 꾸미면서 ‘상춘원’이라고 명명했다. 1919년 1월 오세창, 최린 등이 이곳에 머물고 있던 손병희를 방문해 독립운동의 3대 원칙을 정했고, 천도교 지도부가 3․1운동을 계획했다. 3․1운동 주모자로 체포된 손병희 선생이 1년 동안의 수감 생활 후 이곳에서 치료를 받다가 돌아가신 곳이기도 하다. 갑신정변 주역 박영효의 관훈동 집터는 몰수, 친일파의 집이 되었고, 친일파가 된 박영효의 숭인동 집터는 천도교가 매입해 독립운동의 근거지가 된 인연들이 있다. 어느 공간에 사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어떻게 사느냐가 더 중요한 것임을 보여준다. 

경인미술관은 답사 중 각종 전시회를 관람하며 잠시 쉬어갈 만한 곳이다. 경인미술관에서 나와 삼일대로 쪽으로 약 60여 미터 가다가 좌측 주차장 뒤에 보이는 한옥은 ‘경운동 민병옥 가옥’이다. 1930년대 개량한옥이다. 간송미술관의 전신인 보화각을 설계한 근대 건축가 박길용의 작품이다. 민병옥은 민영휘의 손자, 갑부 민대식의 아들이다.

천도교 중앙대교당 [사진=박종평 객원기자]
천도교 중앙대교당 [사진=박종평 객원기자]
제생원 터 표석 [사진=박종평 객원기자]
제생원 터 표석 [사진=박종평 객원기자]

3․1운동과 이종일 선생, 어린이의 벗 방정환

민병옥 가옥 골목길을 지나면 ‘천도교 중앙대교당’이 나온다. 3․1운동 당시 천도교 중앙대교당은 신축 중이었다. 마당에는 ‘천도교 3․1운동 마당’ 안내판이 있다. 대교당 옆 건물인 수운회관 정문 우측 기둥 아래에는 서울시에서 제작한 ‘독립선언문 배부 터’ 표석이 있다. 안내판에는 ‘독립선언서 배부 터’로 되어 있다. ‘독립선언서’가 맞다. 「독립선언서」 본문은 최남선이 썼고, 추가된 공약 3장은 한용이 썼다. 최남선은 3․1운동 기획부터 참여했으나, 33인에는 들어가지 않았고, 한용운은 33인에 들어갔다. 

정문 좌측 기둥에는 ‘개벽사 터’ 동판이 붙어 있다. 개벽사는 천도교의 언론사로 잡지 『개벽』, 방정환이 주관한 아동잡지 『어린이』, 여성잡지 『신여성』 등을 발간해 일제강점기 민족의식을 고취했다.

정문에서 나와 좌측으로 돌자마자 ‘세계 어린이운동 발상지’ 기념비가 있다. 기념비 뒤에는 어린이 운동의 창시자, 어린이날을 만든 방정환의 글이 새겨진 비석이 보인다. “삼십년 사십년 뒤진 옛 사람이 삼십 사십년 앞 사람을 잡아 끌지 말자. 낡은 사람은 새 사람을 위하고 떠 받쳐서만 그들의 뒤를 따라서만 밝은데로 나아갈 수 있고 새로워질 수가 있고”라는 글이다. ‘꼰대’가 많은 세상에서 한 번 더 생각해야 할 이야기다.

기념비가 있는 이 터는 「3․1운동 예심종결 결정문」에 따르면, 3․1운동 33인 민족대표 중의 한 사람인 이종일 선생 집터이다. 천도교 인쇄소인 보성사 사장 이종일은 1919년 2월 27일 보성사에서 인쇄한 「독립선언서」 2만여 장을 이곳으로 옮겨왔다. 28일 전국으로 배포해 3․1운동의 횃불을 들었다.  『종로의 표석 이야기』에 따르면, 종로 이북은 불교 학생, 종로 이남은 기독교 학생, 남대문 밖은 천도교 학생들이 배포했다. 또 보성사 인쇄 당시 일제 형사가 목격했으나, 이종일이 손병희에게 받은 5천 원을 주고 눈감아 달라고 했다고 한다. 당시 지방 면장 월급이 30~40원 정도였으니, 엄청난 금액을 뇌물로 준 것이다. 인쇄 후 운반 중에도 검문에 걸리기도 했으나 무사히 이종일의 집으로 옮겼다. 천도교 중앙대교당과 수운회관을 중심으로 여러 안내판이 설치되어 있다. 그러나 3․1운동을 전국의 들불로 만든 이종일 선생의 집터 표지석은 물론 이종일 선생에 대한 안내판 조차 없다. ‘독립선언문 배부 터’ 표석에도 이종일 선생이 언급되어 있지 않다. 서울시나 종로구에서는 이종일 선생에 대한 안내판이나 집터 표지석 설치를 적극 고려할 필요가 있다.

삼일대로에서 안국역 방향으로 50미터 쯤 올라가면 서울노인복지센터 분관이 있다. 분관 앞 삼일대로 가에 ‘조선건국동맹 터’ 표석이 보인다. 맞은 편은 운현궁 입구이다. 해방 1년 전인 1944년 8월 10일에 몽양 여운형(1886~1947) 등에 의해 설립된 국내 비밀독립운동단체이다. 1945년 8월 4일 일제에 발각되어 일부 간부가 투옥되기도 했다. 여운형의 집은 건국동맹 터에서 300미터 정도로 가깝다.

관천대 (현대건설 빌딩 안) [사진=박종평 객원기자]
관천대 (현대건설 빌딩 안) [사진=박종평 객원기자]

미니 첨성대가 있는 역사 공간 현대건설 빌딩

안국역 방향으로 140미터 정도 올라가면 안국역 사거리가 나온다. 사거리를 건너 현대건설 사옥 쪽으로 간다. 현대건설 사옥 자리는 조선 초기에는 제생원,승문원,관상감(서운관)이, 조선 후기에는 경우궁·계동궁이, 근대에는 휘문고가 있던 곳이다. 제생원은 1397년에 세워진 빈민 치료 및 미아 보호소, 의녀(醫女) 양성기관이다. ‘제생원 터’ 표석은 사거리에서 현대건설 쪽으로 가기 직전 계동길과 현대건설 사이 모퉁이 소나무 아래에 있다. 승문원은 외교 문서를 담당하던 기관이다. 승문원 표석은 없다. 관상감은 천문·지리·측후 등을 담당했던 기관이다. 경우궁은 정조의 후궁이고, 순조의 어머니인 수빈 박씨의 사당이다. 계동궁은 흥선대원군의 조카이고 고종의 사촌 형 이재원의 집이다. 현대건설 건물 정면 입구쪽으로 20미터 쯤 가면 좌측 위에 ‘현대’ 표석이 있다. 그 앞 도로변에 ‘계동궁 터’ 표석이 있다. 1884년 갑신정변 때에는 고종과 명성황후가 사당인 경우궁, 계동궁에 잠시 머물기도 했다. 정변의 주역 김옥균 등은 경우궁에서 혁신 내각을 꾸미기도 했다. 그 뒤 휘문고등학교가 세워졌다.

현대건설 빌딩 정면에서 좌측 끝 부분에 하늘을 관측하는 시설인 관상감 관천대가 복원되어 있다. 세종 16년인 1434년에 세워졌다. 보물 제1740호이나 안내판에는 표시가 되어 있지 않다. 또 안내판에는 “현대건설 사옥이 들어선 이 터에는 조선 초에 서운관이 있었다”로 나온다. 이는 세종 때 서운관이 관상감으로 명칭 변경되었기 때문이나, 명칭 변경에 대한 설명은 없다. 관천대의 별칭은 첨성대이다. 창경궁에 있는 보물 제851호 관천대는 1688년에 세워졌다. 창경궁 관천대는 2.2미터, 이 관천대는 3.4미터, 경주 첨성대는 9.4미터로 크기의 차이가 있다. 외형을 보면, 창경궁 관천대보다 이 관천대가 경주 첨성대의 축소판처럼 닮았다. ‘관상감 터’ 표석은 현대건설빌딩 옆 버스정거장을 지나 아라리오뮤지움인스페이스 건물 우측 입구에 있다.

현대빌딩 서쪽 출구로 나와 계동길을 따라 가회동쪽으로 몇 걸음 옮기면 구두수선 박스와 전봇대가 있다. 전봇대 옆에 ‘경우궁 터’ 표석이 있다. 50미터 쯤 올라가면 왼편에 북촌문화센터가 있다. ‘계동마님댁’으로도 알려진 근대 한옥을 서울시가 매입해 북촌을 알리는 공간으로 활용하고 있다. 잠시 들려 한옥의 자취를 살펴보고 쉬었다 가는 것도 좋다. 북촌 지역에는 곳곳에 이와 같은 공간들이 있다.

건국준비위원회의 공간, 친일과 좌파, 중도파의 공간

북촌문화센터에서 30미터 정도 올라가면 사거리가 나온다. 우측 현대건설 사옥 뒤편 쪽으로 80미터 정도 올라가면 부대고기집, 한성부동산, 안동칼국수집 등의 가게가 있다. 부대고기집은 『상록수』의 심훈 형 심우섭(1890~1946) 집터이다. 심우섭은 이광수의 『무정』에 나오는 신문기자 신우선의 모델이다. 일제강점기 경성방송국에서 조선어방송을 담당했다. 동생 심훈과 달리 친일 논란이 있는 인물이다.

현대부동산 자리는 사회주의 운동가, 독립운동가 및 월북 인사인 홍증식(1895~?)의 집터이다.

안동칼국수집은 독립운동가, 건국준비위원회 위원장, 조선체육회장 여운형의 집터이다. 여운형도 송진우와 마찬가지로 해방정국인 1947년에 암살되었다. 1918년 파리 만국평화회의에 김규식을 파견해 독립을 청원했고, 1919년 상해 임시정부 임시의정원 의원을 맡았었다. 1929년 영국 식민정책을 비판했다가 영국 경찰에 체포되어 본국으로 압송되어 수감생활을 했다. 1933년 조선중앙일보 사장으로 손기정 선수 일장기 말소 사건 책임을 지고 사퇴했다. 1948년 건국동맹을 조직했고, 해방 직후 조선건국준비위원회를 조직하고, 9월 인민공화국을 선포하기도 했다.

‘여운형 집터’ 표석은 안동칼국수 맞은 편 이탈리안 레스토랑 앞 길가에 있다. 지나왔던 ‘경우궁 터’ 표석에서 가회동쪽 대각선 방향에 있는 보헌빌딩은 여운형이 1945년 8월 15일, 건국준비위원회를 창립했을 때 본부가 있었던 임용상의 집터였던 곳이다.

김성수 옛집 대문 [사진=박종평 객원기자]
김성수 옛집 대문 [사진=박종평 객원기자]
유심사 터 (한용운) [사진=박종평 객원기자]
유심사 터 (한용운) [사진=박종평 객원기자]

3․1운동 기획과 준비 공간 : 김성수 옛집과 한용운 유심사

여운형의 집에서 다시 거꾸로 내려와 가회동 쪽으로 약 190미터 올라가다 계동감리교회를 지나자마자 우측 골목으로 들어가면 인촌 김성수(1891~1955) 옛집이 있다. 중앙학교(현 중앙고등학교)를 인수하고 잠시 교장을 맡았던 김성수가 서울에서 살던 집이다. 3․1운동을 기획, 준비했던 장소이다. 문이 닫혀 있어 안을 볼 수 없다. 일제 말기 김성수의 행적에 대해서는 친일 논란이 많다. 그러나 김성수의 공과를 보면, 과오보다 공로가 훨씬 큰 인물이다. 진짜 친일파와 구분해야 할 인물이다. 닫힌 문을 개방해 시민들이 청년 김성수의 열정과 노력의 진면목을 보여주는 것도 필요할 듯하다. 물론 언제나 색안경만 끼고 사는 사람들이 있지만, 그들의 색안경까지 겁낼 일은 아닌 듯하다.

되돌아 나오면 바로 앞에 ‘이종열(1875~1945)과 그의 후손 이상혁의 집’이 있다. 현재는 개방되어 그림이 전시되고 있다. 그리 큰 집은 아니나, 소박한 옛 한옥의 모습을 살펴볼 수 있다.

이상혁 집에서 30미터 정도 올라가다가 우측 골목으로 들어가면 만해 한용운이 운영하던 불교 잡지 『유심』을 출판한 ‘유심사 터’가 나온다. 「3․1운동 예심종결 결정문」 속 주소지이다. 3․1운동 직전, 보성고 교장 최린은 유심사를 방문해 불교계의 3․1운동 참여를 요청했다. 한용운도 동의하면서 유심사는 불교계의 3․1운동을 주도한 공간이 되었다.

지금 집 대문에는 “유심당은 가정집입니다. 목소리를 조금만 낮춰 주세요”라는 당부의 말이 붙어 있다. 북촌이 소위 말하는 핫플레이스가 되면서 예의 잃은 방문객들로 소란스러워지자 생긴 호소문이다. 북촌 곳곳은 과거의 인물들이 거쳐간 곳이기도 하나, 현재를 살아가는 사람들 공간이기도 하다. 관광을 하건 답사를 하건 목소리를 낮추고, 또 불쑥불쑥 문을 열거나, 무례하게 사진을 찍는 일은 무조건 삼가야 한다.

석정보름우물(주문모, 김대건 신부) [사진=박종평 객원기자]
석정보름우물(주문모, 김대건 신부) [사진=박종평 객원기자]

주문모와 김대건 신부의 흔적과 서울중앙고

되돌아 나와서 80미터 위로 올라가면 우측에 ‘석정보름우물’이 있다. 보름 동안은 물이 맑고 다시 보름 동안은 흐려진다고 생긴 이름이다. 한국 최초의 외국인 신부였던 중국인 주문모(1752~1801)가 1795년 서울 계동에서 첫 미사를 드릴 때 이 우물물로 세례를 주었다고 한다. 1845년 한국인 최초 신부 김대건이 계동에서 활동할 때 이 물을 성수로 사용했다고 한다. 주문모 신부는 계동에서 정약종, 황사영을 만났고, 천주교 탄압으로 순교자가 잇따르자 1801년 자수해 5월 한강 새남터에서 순교했다. 천주교 명동대성당에서 시작하는 ‘서울천주교 순례길’ 18개 구간 중 6번에 해당하는 장소이기도 하다. 현재의 우물 모습을 보면 옛 우물은 아닌 듯하고, 새로이 복원한 것으로 보인다.

다시 100미터 쯤 올라가면 서울중앙중․고가 나온다. 답사 날은 문이 닫혀 들어갈 수 없었다. 밖에서 보면 교문부터 안쪽 건물까지 ‘리틀 고려대’처럼 보인다. 1915년 인촌 김성수가 인수한 뒤 1937년에 본관을 새로 건축했기 때문이다. 현재도 고려대와 함께 고려중앙학원이 운영하고 있다. 학교 안에는 ‘6․10만세운동 기념비’와 ‘3․1운동 책원비’가 있다.  『종로의 표석 이야기』에 따르면, 중앙고등학교 자리는 본래 대한제국 헌병대장, 임시정부 국무총리였던 독립운동가 노백린(1875~1926) 선생이 상해 망명 전까지 살았던 집터였다. 그래서 고등학교 본관 오른쪽 강당 아래 화단에는 ‘노백린 집터’ 표석이 있다고 한다.

‘3․1운동 책원비’는 3․1운동을 기획한 곳이기 때문이다. 1919년 1월 도쿄 유학생 송계백이 중앙고보 숙직실로 찾아와 교장 송진우, 교사 현상윤(1893~?)에게 도쿄 유학생들의 「2․8독립선언서」 초안을 전달했다. 그를 계기로 보성고 최린 교장과 신문관 최남선이 숙직실, 김성수의 집에서 모여 3․1운동을 기획, 준비했다. 현상윤은 역사학자, 고려대 초대 총장을 역임했다. 『조선유학사』․ 『조선사상사』를 저술했다. 일제 말기 친일을 했고, 6․25전쟁 때 납북되었다. 집터는 가회동 1-35이고 길가에 ‘기당 현상윤 선생 집 터’ 표석이 있다.

근현대 역사와 관련한 북촌을 소개한 책으로는 『서울, 공간으로 본 역사』, 『서울 근현대 역사기행』(염인호․장규식․정재정, 혜안, 1998)을 참고하면 좋다. 십여 년이 지난 책으로 지금과는 미세한 차이가 있으나, 그 차이점 역시 서울의 새로운 역사가 된다. 『종로의 표석 이야기』는 빠진 곳이 있고, 세세한 정보나 인물 또는 사건들의 연결성은 부족하나 최신 정보를 담고 있다. 다음 주에는 가회동 성당부터 북촌을 이어서 소개할 예정이다. 

운현궁 
주소 종로구 삼일대로 464(운니동 114-10)․
지석영 집터  
주소 종로구 낙원동 2
조광조 집터 
주소 종로구 낙원동 278-1 
서북학회 회관 터 
주소 종로구 낙원동 280
박영효 집터 
주소 종로구 관훈동 30-1
민병옥 가옥 
주소 종로구 경운동 66-7
천도교 중앙대교당 
주소 종로구 경운동 88
조선건국동맹 터 표석 
주소 종로구 경운동 89-4
상춘원 표석 
주소 종로구 숭인동 72-13
현대건설(제생원, 관천대, 경우궁, 계동궁 등) 
주소 종로구 원서동 206
여운형 집터 
주소 종로구 계동 140-8
김성수 집터 
주소 종로구 계동 132-1
유심사(한용운) 터 
주소 종로구 계동 43
서울중앙고등학교 
주소 종로구 계동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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