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삼 전 대통령 [뉴시스]
김영삼 전 대통령 [뉴시스]

 

[일요서울] 국립외교원 외교사연구센터에서 ‘외교’라는 렌즈를 통해 우리 현대사를 조명하기 위해 오럴히스토리사업 ‘한국 외교와 외교관’ 도서 출판을 진행해 왔다. 지금까지 총 17권의 책이 발간됐다. 일요서울은 그중 공로명 전 외교부장관의 이야기가 담긴 책의 내용 중 일부를 지면으로 옮겼다.

경주 한·일 정상회담 

김영삼 대통령 방일

 

- 장관님 재임 기간에 여러 차례 정상회담이 있었는데, 특히 인상에 남는 것이 경주에서 7월6일에 있었던 한·일 정상회담이었다. 호소카와 모리히로 총리는 부임 후에 처음으로 침략전쟁이었다는 표현과 함께 상당히 진솔한 과거사 발언을 해서 가장 진일보했다고 평가되기도 합니다만, 회담이 열리기 전까지의 배경에 대해 말씀해 달라.
▲ 4월에 김영삼 대통령이 일본을 방문하게 됐다. 일본 공식방문에 따르는 궁정만찬에서 천황의 만찬사에 어떠한 내용이 나오느냐가 항상 이슈가 되는데, 큰 문제가 되지 않았다. 일본 천황도 일본 국민은 과거 역사에 대한 깊은 반성에 입각해서 서로 흔들리지 않는 신뢰와 우정을 쌓기 위해서 노력해왔다는 이야기를 하고, 자기가 수 년 전에 이야기했던 심정에 변화가 없다고 말했다. 그것은 노태우 대통령이 갔을 때 이야기인데 통석의 염을 금할 수 없다고 했다. 우리 언론에서는 여러 가지 이야기가 있었는데 일본에서는 마음 아픈 이야기다. 서로의 문화의 차이인데 그런게 크게 문제되지는 않았다. 

 

- 김영삼 정부 초기에는 한·일 간에 좋은 분위기였다. 
▲ 그런 분위기가 계속됐다. 그런데 결국은 다시 우리나라에서의 문제 재점화가 계기가 돼서, 곤두박질을 했다. 아까 이야기가 나왔습니다만 김영삼 대통령이 말씀하신 “사람이 한 발로 설 수 없는 것처럼 이웃인 한국과 일본이 서로 상부상조하고 협력하는 데 있어서의 양국의 이익이 있다”는 이야기는 진리다. 

 

- 김영삼 대통령께서 처음으로 1994년 3월24일 방일을 하시는데, 국빈방문이다. 당시 큰 문제로 북핵 문제가 있었고, 무역 불균형 문제도 많이 제기됐다. 당시 국빈방분에 이르기까지의 상황을 정리해달라. 
▲ 사실 김영삼 대통령은 취임하시자마자 미야자와 수상의 초청을 받았지만, 국내 개혁 등 여러 가지 문제로 해외방문을 하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그래서 1994년 들어와서 일본 방문을 시작으로 몇몇 국가에 방문을 했다. 한국 대통령으로서는 처음으로 인도에 공식방문을 하시고, 전통적인 우리나라의 지지국가들이 있던 남미 지역의 국가들을 순방했다. 물론 방미도 했다. 당시 4월 일본 방문이 공식방문이기 때문에 궁중행사가 있고 동시에 국회 참의원, 중의원 양원 합동회의에서 연설하는 필수 과정이 있었는데 한국 대통령으로서 일본 국회에서 연설하신 것은 김영삼 대통령께서 두 번째다. 첫 번째는 노태우 대통령이었다. 

노태우 대통령이 국회연설까지 하시게 된 것은 역시 일본 사라들의 이야기하는 군정이 끝나고, 직선제 대통령으로서 처음으로 대통령에 올랐다는 견지에서 일본 정부나 일본 국민의 저항이 덜했기 때문에 이루어진 일이었다. 그러나 김영삼 대통령의 방일 때에는 도이 다카코 사회당 당수가 국회의장이었다. 사실 도이 다카코 의장은 1960년대 말 1970년대에 걸쳐서 한국을 비판하는 이들의 선봉이었고, 저로서는 그분에 대해서 유감인 생각이 많았었는데 제가 주일대사로 갔을 때 도이 다카코 의장이 저희 부부를 초청해서 저녁을 한 번 냈다. 개인적으로 만나면 참으로 매력적인 분인데 어디서 그렇게 강한 투사적인 면모가 나오는지 알 수 없다. 

김영삼 대통령 연설 중간에 열다섯 번 정도의 기립박수가 있었다. 연설의 사이사이에 민주투사의 기개를 보였다. 이로써 한·일 이해 증진에 커다란 전기를 마련했다. 그 후에 와세다대학에 가서 강연을 했다. 국회에서의 연설은 정치적인 것이었지만, 학생들 앞에서 하는 강연이니 그야말로 한·일 양국의 일반적인 우의 증진을 위한 좋은 계기였다. 와세다대학에서 첫 마디로 존경하는 정치 선배인 신익희 전 국회의장, 부통령, 고려대학교를 설립하신 김성수 선생이 공부했던 대학에서 명예학위를 받게 된 것이 명예롭다는 이야기를 했다. 

야당 시절인 1985년에 이 대학을 방문해서 기념으로 대도무문 휘호를 남겨놓았다는 이야기를 하면서 연설을 했다. 핵 문제, 통상 문제 등 현안 문제가 있고, 일본군 위안부 문제도 어느 정도 마무리가 돼서 뜨거운 감자는 없었다. 통상 문제는 1965년 이후 우리가 일본에 문호를 연 이후에 계속 누적되어왔고, 또 하루 이틀에 해결될 수 없는 경제적인 구조상의 문제였다. 우리 수출이 신장하면 덩달아서 일본에서의 중간재 수입이 커지니까, 우리 대일 수출 확대가 무역흑자로 나타나지 않았다. 마찬가지로 중국의 대한국 무역확대가 무역흑자로 나타나지 않아서 중국은 우리에게 불만을 이야기하는데, 두 경우가 동일한 구조다. 

 

- 한국에서 문민정부가 탄생을 했고, 당시 일본에서도 아마 한·일 관계에 대한 상당한 기대가 있었다. 당시에 일본이 안보리 비상임이사국 진출을 꾀하고 있었는데 한국도 공교롭게도 비상임이사국 진출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정상회담에서 일본 측이 입후보를 단념하고 한국을 지지하겠다고 했는데, 어떤 배경에서 이런 이야기가 나온 것인가. 
▲ 그때 우리가 상당히 지지를 많이 받고 있었다. 아시아에 돌아오는 몫을 놓고 스리랑카와 우리가 경합을 했다. 그러한 분위기 속에 일본은 그동안 여러 번 비상임이사국을 해왔다. 그때만 해도 UN에서 서로 협조했고, 일본이 우리보다 앞서 가입한 나라라는 견지에서 많이 제휴했다. 특히 북한의 핵 문제가 있어서 한·일 간의 협력이 과거 어느 때보다도 긴밀하게 이루어지고 있었다. 평양방송이 참 희한한 말을 많이 쓰고 비방방송을 종종 하는데, 어느 날 일본 언론에서 북한 핵 문제와 관련해서 저에게 코멘트를 구한 적이 있다. 제가 핵통제위원장을 하다가 주일대사로 갔다는 것을 일본 언론들도 잘 알아서 가끔 코멘트를 구했다. 평양방송이 그걸 두고 “미꾸라지 먹고 용트림한다”고, 분수에 맞지 않는 짓을 한다는 뜻으로 악담을 했다. 

 

- 결국은 김영삼 대통령이 취임하고 굉장히 좋은 분위기 속에서 국회연설도 있었고, 천황도 반성한다는 표현을 써서 당시로서는 국내에서 진일보한 표현으로 받아들여졌다. 
▲ 아주 좋았던 시기다. 

 

- 다음은 한·일 월드컵 공동 개최 문제에 대해서 말씀해 달라. 
▲ 한·일 간의 협력과 관련해서 와카미야 전 아사히신문 주필의 추도회 자리에서도 나온 이야기입니다만, 1995년 제주도에서 열렸던 제3차 한일포럼에서 양측이 양국 정부에 월드컵 공동개최를 건의하는데, 이때 일본 측 막후에서 적극적으로 추진한 분이 와카미야 씨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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