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회동성당 [사진=박종평 객원기자]
가회동성당 [사진=박종평 객원기자]

[일요서울ㅣ박종평 객원기자] 북촌은 넓고 아주 깊다. 가벼운 산책을 겸한 역사 인물 흔적과 현장을 찾아가는 북촌 두 번째 구간 답사를 시작한다. 공간적으로는 안국역 북쪽으로 대종교 중광터까지. 서쪽으로는 정독도서관과 안국동 사거리까지. 안국역 남쪽으로는 인사동, 조계사에서 종각역까지다.

주요 코스는 다음과 같다. 안국역 2번 출구 -> 대종교 중광터 -> 가회동성당 -> 일제강점기 탁구 챔피언 차덕화 생가터 -> 손병희 집터 -> 재동초등학교 -> 헌법재판소(박지원․박규수․이준경 집터,이상재․최린 집터, 제중원 터, 창덕여자고등학교 터, 재동 백송) -> 정독도서관․서울교육박물관(동아일보 창간사옥 터, 맹사성․성삼문 집터, 서재필․김옥균 집터, 화기도감 터, 겸재인왕제색도비, 경기고등학교 터) -> 조선어학회 터 -> 윤보선 가옥 -> 안동장로교회 -> 선학원 -> 천도교 중앙총부 옛터 -> 덕성여고(감고당 터) -> 안동별궁 터(세종 돌아가신 곳) -> 충훈부 터(해방병단 결단식 터, 강완숙 집터) -> 우정총국(민영환 동상) -> 조계사(민영환 집터) -> 조선중앙일보사 -> 민영환 순국 터 -> 삼일독립선언유적지(순화궁, 이완용 집터, 태화관) -> 서울 중심점 표지석(하나로빌딩) -> 이순신 백의종군 출발점, 의금부 터(SC제일은행 앞) -> 종각역. 

민족의 시원, 단군의 흔적 : 대종교 중광터

“우리가 물이라면 새암이 있고 우리가 나무라면 뿌리가 있다. 이 나라 한아버님은 단군이시니 이 나라 한아버님은 단군이시니.” 대종교인 위당 정인보가 작사한 개천절 노래이다. 첫 답사지로 ‘대종교 중광터’를 찾아간다. 지하철 3호선 안국역 2번 출구에서 나와 약 650미터 정도 곧바로 북쪽으로 올라간다. ‘대한불교 조계종 안국선원’이 나온다. 가다 보면 헌법재판소와 가회동 성당이 좌측에 보인다. 이후 답사할 곳이기도 하다. ‘대종교 중광터’ 표석은 안국선원과 그 옆 이도카페 사이 보도에 있다.

대종교는 독립투사 겸 민족종교가인 나철(1864~1916)이 1909년 음력 1월15일, 우리 겨레의 시조인 단군 신앙을 재조직해 결성한 종교이다. 처음의 명칭은 단군교였으나 1910년에 대종교로 바꾸었다. ‘중광터’의 ‘중광(重光)’은 이미 존재하던 단군교를 새로이 발전시켜 세웠다는 뜻이다. 설립자 나철은 민족종교인답게 일제의 탄압에 분노해 1916년 음력 8월15일 단군 등을 모신 구월산 삼성사에서 자결했다.

30년 뒤 양력 8월15일, 우리 민족은 단군의 후예 나철의 염원처럼 일제의 사슬에서 해방되었다. 나철에 이어 교단을 이끈 김교헌은 총본사를 만주에 옮기고 무장독립운동을 주도했다. 1920년, 김좌진이 이끈 봉오동 전투, 청산리 전투의 대다수 독립군은 대종교인들이 참여한 전투이다. 단군의 영험함이 승리로 이끈 듯하다. 일제강점기에는 다른 어떤 종교보다 지독한 탄압을 받았다. 초대 부통령 이시영, 독립운동가 정인보, 박찬익 등이 대종교인이다. 현재는 대종교와 무관하나 홍익대, 단국대, 경희대의 전신인 신흥대학도 대종교인들이 설립한 학교들이다.

10월3일 개천절은 대종교에서 비롯된 국경일이다. 대종교 중광터에 있던 옛 건물은 없어졌고, 지금은 불교 선원이 되어 있다. 그 역시 세상의 변화에 따른 불가피한 일이다. 불교는 다양성을 존중하는 비배타적인 종교이다. 구석에 있는 중광터 표석을 많은 사람들이 볼 수 있도록, 또 나철 선생과 일제강점기의 대종교 독립운동을 널리 알릴 수 있도록 조금만 더 적극적인 노력을 했으면 어떨까 한다. 중광터 길 건너편 옹벽 위의 한옥은 1938년에 건축된 ‘가회동 김형태 가옥’이다.

가회동 성당과 일제강점기 탁구 챔피언 차덕화

안국역에서 올라왔던 길을 되돌아 내려간다. 신식건물과 한옥이 함께 있는 가회동 성당을 지난다. 가회동․계동․안국동․인사동 지역은 우리나라 천주교 최초의 외국인 신부인 주문모(周文謨, 1752~1801) 신부가 활동하던 곳이다.

1795년 4월5일 주 신부는 계동 최인길의 집에서 첫 미사를 봉헌했고, 그 후 1801년 신유박해로 순교하기 전까지 인사동의 강완숙 집에 숨어 활동했다. 가회동성당은 계동의 ‘석정보름우름’과 함께 ‘서울천주교순례길 코스’이다. 성당 문 앞에 있는 순례 확인 스템프 안내판에 따르면, 교황청 승인 국제 순례지로 1코스(말씀의 길) 종착지, 2코스(생명의 길) 출발지라고 한다.

성당 앞에서 횡단보도를 건너 80미터 정도 내려오면 법률사무소 북촌 건물이 나온다. 1층엔 옷가게 ‘가회동 177’가 있다. 모퉁이에 표석이 하나 있다. 앳된 얼굴의 소녀 사진과 ‘챔피온 차덕화 여사의 생가 터’라는 문구가 새겨져 있다. 내용을 보면, 차덕화(1918~1984)는 “1934년, 1935년 全조선, 全만주, 全일본 탁구 챔피온”이다. 당시 언론기사를 확인해 보면, 일제강점기 최고의 탁수선수였던 것은 확실하나, 표석의 글과는 약간의 차이가 있는 듯하다.

그녀와 관련해 눈에 띄는 안내문 내용의 다른 하나는 그녀가 일제강점기 천도교 후원으로 발행된 민족잡지 『개벽』의 발행인이자 편집인이었던 차상찬(1887~1946)의 차녀란 점이다. 차상찬은 시인, 수필가, 언론인으로 우리나라 잡지의 개척자이다. 『개벽』이 폐간된 뒤에도 『별건곤』․『신여성』․『학생』 등의 잡지를 발행했다. 그의 저술에는 우리나라 역사 중 야사(野史)에 대한 것이 많다. 『조선사천년비사』․『조선사외사(朝鮮史外史)』․『한국야담사화전집(韓國野談史話全集)』 같은 책이다.

손병희 선생 집터 표석 [사진=박종평 객원기자]
손병희 선생 집터 표석 [사진=박종평 객원기자]
헌법재판소 안 재동 백송 [사진=박종평 객원기자]
헌법재판소 안 재동 백송 [사진=박종평 객원기자]

복잡한 역사의 현장, 헌법재판소 가는 길

다시 횡단보도를 건너 100미터쯤 내려가면 청담문화원과 가회동 주민센터가 나온다. 그 사이 횡단보도 앞 ‘북촌박물관’ 간판 아래 천도교 지도자, 3․1운동 지도자 ‘손병희 선생 집터’ 표석이 있다. 「3․1운동예심종결결정정문」에 따르면 손병희(1861~1922) 주소는 가회동 170번지이다. 청담문화원 입구 위쪽 일대가 3․1운동 당시 살았던 집터 자리이다. 『의암 손병희와 3․1운동:통섭의 철학과 운동』(오문환 외, 모시는 사람들, 2008년)에 따르면, 손병희는 동학을 천도교로 개칭했고, 기존의 ‘시천주(侍天主, 사람이 한울님을 모셨다)’라는 종지(宗旨)를 ‘인내천(人乃天, 사람이 곧 하늘)’으로 바꾸었다고 한다. 3․1운동 당시 운동의 대중화, 일원화, 비폭력 노선 3대 원칙을 결정하고, 기독교와 불교와의 연합을 성사시켰다. 그 과정에서 강대국에 우리나라의 독립을 청원하는 방식이 아니라, ‘독립 선언’ 방식을 주장, 관철시켰다고 한다. 「독립선언서」의 제작 및 배포도 손병희의 천도교에서 담당했다. 그에 따라 손병희는 33인 중 가장 먼저 이름이 올라 있다.

손병희 집터에서 160미터 아래 헌법재판소 안팎이 3․1운동의 천도교 지도자 최린(1878~1958)의 집터이다. 최린은 뒤에 친일파로 변했다. 『종로의 표석 이야기』(종로문화원, 2017년)에 따르면, 가회동주민센터 옆에는 또한 월남 이상재(1850~1927) 선생의 집터 표석이 있다고 나온다. 그러나 확인해 보면 센터 옆에 없다. 표석은 헌법재판소 안 오른쪽으로 끝부분에 있다. 표석이 옮겨진 듯하다. 구한말과 일제강점기 사회 운동가, 독립운동가이다. 1927년 민족주의 진영과 사회주의 진영이 연합해 독립운동을 추진했던 신간회의 창립 회장이다. 민족의 존경을 한 몸에 받았기에 그가 사망했을 때 우리나라 최초로 사회장이 치러졌다.

맞은 편에는 1895년에 설립된 재동초등학교가 있다. ‘아침이슬’의 김민기와 양희은, 가수 서태지, 배우 배두나가 졸업생이다. 재동초등학교에서 190미터 내려오면 맞은 편에 헌법재판소가 있다. 헌법재판소 자리와 그 부근은 아주 특별하다. 조선 후기에는 당시 세도가였던 풍양 조씨들이 살았고, 『열하일기』를 쓴 박지원, 그의 손자이자 개화파였던 박규수, 구한말 갑신정변의 홍영식(1855~1884), 일제 강점기 3․1운동의 지도자 최린, 월남 이상재 선생의 집터도 있었다. 또 미국 선교사 알렌(H. N. Allen)이 고종에게 건의해 1885년에 세운 최초의 근대 의료기관 광혜원, 창덕여자고등학교도 있었다. 600년 된 백송이 지금도 건재하게 살아 있기도 하다. 재판소 안으로 들어가 오른쪽 끝으로 가면 ‘이상재 집터’ 표석이 보이고, 왼쪽으로 꺾어지면 서북쪽 언덕 위에 있는 ‘서울 재동 백송’이 보인다, 그 아래 녹지 공간에 ‘창덕여자고등학교 터’, ‘제중원 터’, ‘박규수 선생 집터’ 표석이 있다. 또 헌법재판소답게 표석 사이에는 법전과 저울을 든 ‘헌법의 수호자’(최의순 조각)가 세워져 있다.

세도가 풍양 조씨, 『열하일기』 박지원과 개화파 리더 박규수 옛 집터

“조선의 지독한 가난을 따지면 그 까닭은 모두 선비에게 있다.” 『열하일기』의 저자 박지원(1737~1805)의 말이다. 그 때나 지금이나 사회 리더들이 문제이다. 헌법재판소 자리는 조선 말기에는 세도가였던 풍양 조씨의 집과 박지원의 집이 합쳐진 공간이다. 이 터에 살았던 풍양 조씨 중 유명한 사람은 조엄(1719~1777)과 그의 손자들인 조만영(1776~1846)과 조인영(1782~1850)이다. 조엄은 1763년 통신사로 일본에 가서 고구마 종자를 가져왔다. 조만영은 헌종의 외할아버지로 군사 권력을 장악해 풍양 조씨의 세도를 만들었고, 1839년 천주교 탄압 사건인 기해박해를 주도했다. 그러나 말년에 조씨 문중 내부 갈등과 아들의 사망으로 충격을 받은 뒤 눈이 멀어 죽었다고 한다. 동생 조인영은 1817년 추사 김정희와 함께 북한산 비봉(碑峰) 신라 진흥왕 순수비를 확인한 인물이기도 하나, 형과 함께 천주교를 탄압했던 사람이다.

헌법재판소 뒤편은 『동국여지비고』에 따르면, 조선 중기의 명재상 동고 이준경(1499~1572)이 살던 집이 있었다. 이준경은 함경도에 침입한 여진족을 타일러 돌려보내고, 1555년 을묘왜변 때에는 왜구를 격퇴했다. 기묘사화로 죽은 조광조, 을사사화로 피해를 입은 사람들의 억울함을 풀어주었다.

박지원은 노론 명문가 출신으로 현재 서울 순화동 일대에서 태어났다. 백탑(현 인사동), 황해도 금천 연암협에도 살았다. 관직에 나간 이후에는 『동국여지비고』에 따르면 계생동(현 계동)에 살았다. 현재의 헌법재판소 일대이다. 그는 홍대용․박제가․이덕무․유득공 등과 함께 청나라의 문물에 주목하고, 배우려고 했던 북학파이다. 저서에는 『열하일기』․『연암집』 등이 있다. 『열하일기』는 1780년 44세에 사신단의 수행원으로 중국 북경을 다녀오는 과정 4개월여 동안의 기행문이다. 그러나 그 안에는 『호질』․『허생전』과 같은 한문 단편소설과 청나라 제도, 풍속, 과학기술, 역사철학 등에 대한 사실과 자신의 생각을 기록한 내용도 들어있다. 필사본으로 널리 퍼지면서 이를 읽은 정조로부터 비판받아 금서처럼 취급되기도 했다.

박규수(1807~1877)는 할아버지 박지원에게 직접 교육을 받지는 못했으나, 박지원의 저서인 『연암집』에 영향을 크게 받아 실학에 눈을 떴다. 박규수 또한 사신단으로 청나라에 다녀오기도 했다. 1866년 평양 감사 시절에 미국 무장상선 제너럴 셔먼(General Sherman)호를 불태우기도 했다. 천주교에 대해서는 할아버지 박지원, 아버지 박종채처럼 비판적이었다. 그러나 천주교 박해 당시 그가 관할하는 평안도에서는 한 사람의 희생자도 만들지 않았다고 한다. 1872년 두 번째로 청나라를 방문하면서 양무운동을 목격하고 흥선대원군에게 개국의 필요성을 건의했다. 거절되자 사직하고 자신의 이 헌법재판소 자리 사랑방에 출입하는 양반 자제들, 김옥균(1851~1894)․박영교(1849~1884)․박영효(1861~1939)․홍영식(1855~1884)․서광범(1859~1897)․유길준(1856~1914)․김홍집(1842~1896) 등에게 할아버지의 실학사상과 중국의 변화 등을 가르쳐 개화운동의 선구자가 되었다. 이들은 모두 갑신정변의 주역들이다. 박영효는 소설가 이광수와의 대담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그 신사상(개화사상)은 내 일가 박규수 집 사랑에서 나왔소. 김옥균․홍영식․서광범 그리고 내 백형(박영교)하고 재동 박규수 집 사랑에 모였지요. 『연암집』에 귀족을 공격하는 글에서 평등사상을 얻었지요.”(이광수, 「박영효씨를 만난 이야기-갑신정변회고담-」, 『이광수전집』, 삼중당, 1962년)

정독도서관 입구 표석들 [사진=박종평 객원기자]
정독도서관 입구 표석들 [사진=박종평 객원기자]

갑신정변의 주역들의 집터 : 홍영식, 김옥균, 서재필, 유길준, 서광범 

광혜원은 갑신정변의 주도자 중의 한 사람인 홍영식을 처형하고, 집을 몰수한 것을 고종이 알렌에게 주어 병원으로 개조한 것이다. 알렌이 홍영식의 집을 얻어 광혜원을 연 것은 역사의 아이러니다. 김옥균과 홍영식, 박영효 등의 개화파는 갑신정변을 일으켜 보수파를 공격했다. 보수파 민영익(1860~1914)은 개화파의 공격으로 칼에 맞아 죽어갔다. 그때 알렌이 치료해 살려냈다. 그것이 계기가 되어 고종은 서양 의술을 높이 평가했고, 알렌에게 갑신정변의 주도자 홍영식의 집을 주었다.

광혜원은 제중원으로 이름이 바뀌었다가 뒤에 세브란스 병원, 세브란스 의과 대학, 연세대 의대 부속병원으로 바뀌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광혜원 건물은 연세대 의대 옆에 재현되어 있다.

민영익은 초기에는 일본과 미국을 견학하면서 개화파로 갑신정변 세력과 함께했으나 미국 방문 이후 개화파와 달리 거꾸로 보수화되었다. 한때 같은 꿈을 꾸고 같은 방향을 보았던 사람들이, 세상을 바라보는 눈을 바꾸고, 권력 다툼에 서로 적이 되어 목숨을 노리고, 또 복수하는 무서운 교훈이 있는 곳이 광혜원․홍영식 집터이다.

헌법재판소 일대의 박규수 집터를 중심으로 반경 200미터 이내에는 갑신정변 주역들의 모두 살고 있었다. 이웃의 홍영식, 정독도서관 지역의 김옥균과 서재필, 유길준, 덕성여고 남쪽 지역의 서광범, 현 종로경찰서 일대에 김홍집이 살았다.

양반 중의 양반들이 살았던 북촌, 북촌 중의 북촌에서 개혁․개방, 부국강병의 새로운 꿈을 꾼 사람들이 함께 모여 고뇌했던 공간이 헌법재판소 일대이다. 헌법재판소에서 나와 다시 북쪽으로 120미터 정도 올라가 재동초등학교 삼거리에서 서쪽으로 170미터 정도 가면 오른쪽으로 정독도서관으로 차량이 올라갈 수 있는 입구가 나온다. 그 입구 앞 큰길에 3․1운동의 영향을 받아 1920년 4월에 창간된 민족언론 ‘동아일보 창간사옥 터’ 표석이 있다. 동아일보는 1926년에 광화문으로 이전했다. 입구를 따라 올라가면 왼편에 ‘성삼문선생 살던 곳’, ‘중등교육발상지(경기고등학교)’, ‘화기도감터(조선시대 화포 제조기관)’ 표석들이 줄지어 있다. 정독도서관은 고려말 조선 초의 재상 맹사성(1360~1438), 세종․단종 때 사육신 성삼문(1418~1456)이 살았던 곳이다. 구한말에는 김옥균과 『독립신문』 발행인 서재필의 집도 있었다. 1905년의 을사오적, 1910년 경술국치 때의 경술국적인 박제순(1858~1916)의 집도 있었다.

김옥균 집터 표석은 도서관 입구 쪽에 있는 교육박물관 뒤편에 있다. 박제순은 나라를 배반했지만, 그의 손자 박승유는 일제의 군대에 입대해 중국에서 탈영해 독립군을 찾아가 독립운동에 투신했다. 혼란한 시대에 핏줄과 권력, 금력보다 민족을 선택한 사람이다.

정독도서관 안 광장으로 가면, ‘서울 구 경기고등학교’ 안내판이 있다. 도서관이 되기 전에 경기고등학교가 있었다는 안내문이다. ‘구’를 한글로만 써 놓았다. ‘구(舊)’처럼 한자를 병기하던, 아니면 ‘옛’자로 바꾸어 의미를 쉽게 알 수 있게 해야 할 듯하다. 도서관 건물은 경기고등학교 본관 건물로 1938년에 건축된 등록문화재이기도 하다.

교육박물관 근처 녹지에는 ‘겸재 인왕제색도비’가 있다. 비에는 겸재 정선의 「인왕제색도」가 인왕산 방향으로 붙여져 있다. 도서관에서 인왕산을 보면, 「인왕제색도」 속 인왕산과 비슷하기에 문화부에서 세운 것이다. 도서관 안에는 쉴 곳이 많고, 한가롭게 앉아 쉬는 사람들도 많다. 답사 중 쉬었다 가거나, 시간이 많다면 도서관에서 책을 보다가 가기에도 좋다.

유길준은 갑신정변 연루자로 1885년 체포되어 당시 포도대장 한규설의 별장인 취운정(현재 감사원 자리)에 7년간 연금 생활을 하면서, 『서유견문』을 저술했다. 취운정은 정독도서관에서 인왕산 방향 삼청동에 있다.

님은 갔습니다. 아아 사랑하는 나의 님은 갔습니다

정독도서관에서 나와 ‘안국동 윤보선가’ 쪽으로 2분쯤 가다 보면, 작은 삼거리가 나온다. 삼거리 윤보선가 담장 맞은편 한옥 건물 아래 ‘조선어학회 터’ 표석이 있다. 국어학자 주시경(1876~1914)의 제자들인 이윤재, 최현배 등이 만든 단체이다, 현재의 한글학회의 전신이다. 오늘날 한글 표기 기준이 된 「한글 맞춤법 통일안」을 발표했고, 1942년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큰 탄압을 받았다.

‘윤보선가’는 제4대 대통령 윤보선(1897~1990)의 집이다. 담장을 따라 1분 정도 가면 단풍이 든 담쟁이로 둘러싸인 안동장로교회가 나온다. 안동교회는 외국인 선교사와 무관하게 우리나라 사람들이 주도해 1909년에 설립한 북촌 양반들의 교회이다. 기독교 신앙과 학교를 통한 나라 살리기 운동을 했다. 1945년 8월 안동교회에서는 해방 후 대한민국 해군의 아버지, 초대 해군참모총장인 손원일(1909~1980) 제독이 해군을 창설하기 위한 목적으로 해사대(海事隊)를 결성하고, 교육하기도 했던 곳이다.

교회 바로 옆에는 교회 부속 한옥으로 문화 활동 공간으로 활용되는 ‘소허당’이 있다. 안동교회 주변에는 안동교회의 역사 또는 해사대에 관한 안내판은 없다. 다시 1분 쯤 내려가면 덕성여고 후문과 선학원(禪學院)이 나온다. 덕성여고 안 남쪽 지역이 서광범 집터이다. 갑신정변 때, 수구파를 제거하기 위한 행동대원들이 그의 집에 대기해 혁명을 준비했다.

선학원(禪學院)은 1921년 만해 한용운, 도봉(道峰)·석두(石頭)·남천(南泉) 스님 등이 항일 민족불교 투쟁을 위해 설립했다. 또 여운형 등 독립운동가의 모임처이기도 했다. 선학원 입구에는 한용운이 쓴 「독립선언서 공약 3장」과 그의 시, 「알 수 없어요」․「님의 침묵」, 선학원의 역사를 보여주는 사진이 안내판으로 제작되어 있다.

「님의 침묵」의 일부를 읽어 본다. “님은 갔습니다 아아 사랑하는 나의 님은 갔습니다. 푸른 산빛을 깨치고 단풍나무 숲을 향하여 난 적은 길을 걸어서 차마 떨치고 갔습니다. …… 날카로운 첫 「키스」의 추억은 나의 운명의 지침을 돌려놓고 뒷걸음쳐서 사라졌습니다. …… 우리는 만날 때에 떠날 것을 염려하는 것과 같이 떠날 때에 다시 만날 것을 믿습니다. 아아 님은 갔지마는 나는 님을 보내지 아니하였습니다. …….” ‘님’을 국어책, 국어 선생님들의 해석처럼 하지 않아도, 꼭 ‘조국’처럼 읽지 않아도 그저 좋은 시다.

노부부 벽화 [사진=박종평 객원기자]
노부부 벽화 [사진=박종평 객원기자]

왕비의 눈물이 담긴 감고당과 세종대왕이 돌아가신 곳

선학원에서 덕성여고를 돌아 율곡로 쪽으로 나오면 북쪽으로는 정독도서관 방향, 남쪽으로는 안국역 방향이다. 정독도서관 방향으로 60미터 올라가면 왼편에 ‘옛 천도교 중앙총부 터’라는 안내판이 나온다. 이 터는 천도교 등 종교계 지도자들이 모여 3․1운동 계획을 논의한 장소이다. 현재는 덕성여자중학교가 들어서 있다. 다시 60미터 올라가면 덕성여고와 여중을 연결하는 육교가 있다. 육교 아래 오른쪽 벽에는 그래피티 벽화 작가 원영선씨가 그린 ‘노부부벽화’가 있다. 어느 늙은 부부가 입맞춤을 하는 벽화이다. 그림이 너무 따뜻하다. 늙어서도 이들처럼 사랑할 수 있고, 또 아름답게 늙어갈 수 있기를 벽화를 보면서 기원한다.

다시 방향을 돌려 안국역 방향으로 간다. ‘천도교 중앙총부 터’를 지나 왼쪽 편 덕성여고 왼쪽 정문 기둥 아래를 보면, ‘감고당 터’라는 표석이 놓여 있다. 감고당(感古堂)은 숙종이 인현왕후 민씨(1667~1701)의 친정을 위해 건립한 집이다. 숙종과 장희빈에 의해 왕비에서 쫓겨난 인현왕후 민씨가 궁궐에서 나와 머물렀다. 1866년 명성황후가 왕비로 책봉된 곳이기도 하다. 명성황후가 인현왕후의 삶을 돌아보며 ‘감고당’이란 이름을 지었다고 한다. 감고당 건물은 현재는 여주시에 옮겨져 있다. 인현왕후는 장희빈이 폐비가 된 후 복권되었으나, 35세의 나이에 사망했다. 왕비에서 폐비, 다시 왕비가 되었던 여인, 자식이 없어 홀대 받았던 비운의 여인이다. 그녀를 모델로 어느 궁녀가 쓴 『인현왕후전』이 전한다. ‘감고당 터’에서 안국역 방향으로 완전히 나오면 안국빌딩이 있다. 화단에 ‘안동별궁 터’ 표석이 있다.

안국빌딩과 건설 중인 서울공예문화박물관 자리가 안동별궁 터이다. 『종로의 인물』(종로문화원, 2018년)에 따르면 세종이 막내아들 영응대군을 위해 집을 지은 곳, 세종이 사망한 곳, 아들 문종이 즉위한 장소이기도 하다. 또 성종이 월산대군(1454~1488)에게 하사한 집이 있던 곳, 1882년 세자였던 순종과 세자빈 민씨가 가례를 올린 곳이기도 하다. 그 후 풍문여고가 있다가 현재는 서울공예문화박물관이 건립되고 있다.

인사동 방향으로 횡단보도를 건너 북인사안내소 아래를 보면, ‘충훈부 터’ 표석이 있다. 충훈부는 조선시대에 오늘날로 치면 국가보훈처와 같은 역할을 담당하는 기관이다. 1953년 종로 보신각을 복원할 때, 전쟁 중 파괴된 충훈부 건물에서 나온 기와를 일부 가져다 사용했다고 한다.

‘충훈부 터’ 바로 뒤편 노래연습장 앞에는 해군본부가 세워놓은 ‘해방병단(海防兵團) 결단식 터’ 표석이 있다. 해방병단은 1945년 11월11일 육지, 서울 한복판인 이곳에서 미군정청의 인가를 받아 결성된 ‘바다를 방어하는 군사 단체’이다. 손원일이 초대 단장에 취임했다. 대한민국 해군의 뿌리이다.
 
순교자 강완숙과 주문모 신부 숨결이 어린 곳

‘충훈부 터’와 ‘해방병단 결단식 터’가 있는 인사동 북쪽 지역, 현 관훈동 135번지 일대는 1801년 신유박해 때 순교한 여성 천주교인 강완숙(1760~1801, 세례명 골롬바)의 집터, 중국인 주문모 신부가 숨어있던 집터라고 한다(『순교자 강완숙 역사를 위해 일어서다』(조광 외, 가톨릭출판사, 2007년).

강완숙은 한국 천주교회사와 여성사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 중의 한 사람이다. 양반가의 부녀자, 동정녀, 과부 등 여성신앙공동체를 만들어 교육시킨 최초의 지도자이기도 하다.

그녀는 충청도 내포 출신 양반가 여인이다. 고향에서 천주교에 입교한 뒤, 1791년 신해박해 때 체포되었다. 그로 인해 남편과 별거하고 시어머니와 이복 아들과 함께 상경했다. 그녀는 서울에서 주 신부를 조선에 입국할 수 있게 자금을 지원했다. 1794년 12월23일 밀입국한 주 신부가 1795년 서울에 도착해 활동하다가 밀고로 체포될 위기에 처하자 주 신부를 그녀의 집 창고에 숨겨주었다. 3개월에 걸친 시어머니 설득 후 안채로 옮겨 모시고, 6년 동안 그녀의 집에서 전교 활동을 하도록 도왔다.

주 신부가 있는 그녀의 집은 성당과 같았다. 강완숙은 정조의 이복형제인 은언군(철종의 할아버지)의 부인 송씨와 며느리 신씨와 같은 왕족은 물론 양반 여성과 궁녀 강경복, 자신의 여종과 같은 하층 여성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여성을 입교시켰다.

1800년 11월부터 시작된 천주교 탄압으로 1801년 2월, 이가환․정약용․이승훈․권철신 등이 체포되었고, 2월 말에는 그녀와 윤점혜 등 여성 신도도 체포되었다. 이가환과 권철신은 옥사했고, 이승훈은 참수되었다. 그녀가 체포되기 직전 주 신부는 은언군 부인 송씨 집으로 숨었으나, 박해가 심해지자 주 신부는 자수했고 새남터에서 효수되었다.

『황사영백서』에 따르면, 그녀는 주 신부의 행방을 묻는 6차례에 걸친 고문에도 발설하지 않아 그녀를 고문하는 형리들이 그녀를 사람이 아닌 귀신이라고 감탄했다고 한다. 감옥에서도 전교하며 순교를 독려했다. 음력 5월 22일, 그녀는 8명의 순교자들과 함께 서소문 밖 형장에 끌려갔고, 가장 먼저 참수되었다.

송혜영은 『초기 천주교와 강완숙의 활동 연구』(성신여대 석사논문, 1998년)에서 그녀에 대해 “여성에게만 무조건 희생을 강요했던 유교적 사회 체제와 남편과의 불화로 인해 불행했던 결혼 생활에 대한 불만을 교회 활동으로 해소할 수도 있었다고 볼 수 있다”고 했다. 그러나 그녀가 충청도 내포에서 자발적으로 천주교 서적을 구해 읽고 입교한 것을 보면, 사회 체제나 불행했던 결혼생활 보다는 지식을 바탕으로 스스로 신앙을 체화시킨 신앙인으로 보는 것이 옳을 듯하다. 그녀는 남녀차별, 신분사회에 대해 신앙의 힘으로 도전했던 사람이다.

민영환 지사 동상 [사진=박종평 객원기자]
민영환 지사 동상 [사진=박종평 객원기자]
안국빌딩 앞 안동별궁 터 표석 [사진=박종평 객원기자]
안국빌딩 앞 안동별궁 터 표석 [사진=박종평 객원기자]

민족의 운명을 짊어지고 순국한 민영환 의사

안국역 6번 출구 근처 현 종로경찰서 일대는 개화파 김홍집(1842~1896)의 집이 있던 곳이다. 김홍집은 조선의 마지막 영의정이다. 3차에 걸친 갑오경장을 추진했다. 1896년 2월 고종의 아관파천으로 김홍집 내각이 붕괴되고, 친러정권이 수립되자 광화문 앞에서 군중에 의해 살해되었다. 종로경찰서 정문 근처에 세워진 ‘의학교 터’ 표석 내용에는 “의학교는 1899년 대한제국에서 김홍집의 집에 설립한 최초의 근대의학 교육기관이다”라고 김홍집의 집 터를 알리고 있으나, 그와 별도의 김홍집에 대한 안내판은 없다.

다시 안국동 사거리로 가서 조계사앞 사거리로 가다 보면, 조계사 입구 전에 우정총국 건물이 보인다. 우정총국은 조선 말기 우편 업무를 담당하던 관청으로 개화파 홍영식이 책임자였다. 1884년 12월4일, 우정국 개설축하연을 이용해 김옥균․홍영식 등이 갑신정변을 일으켰다. 우정총국 기념관에는 홍영식의 흉상과 구한말 우편제도와 관련된 물품들이 전시되어 있다.

우정총국의 안국동 쪽 담 모퉁이에는 조선 말기 순국지사인 민영환(1861~1905)의 동상이 서 있다. 그는 1905년 11월30일, 을사조약을 체결케 한 을사5적을 처형하고 조약 파기를 주장하며 자결했다. 민영환 선생이 살던 집 표석은 조계사 정문 옆 주차장 앞 도로변에 있다. 동상은 몇 차례 위치 이동을 거치면서 지금의 외진 위치에 있게 되었다. 1957년 건립 당시 세워진 안국동 로타리로 이전해 많은 사람들이 그의 삶을 알 수 있게 해야 할 듯하다.

조계사 앞에서 횡단보도를 건너 조계사 앞 사거리 쪽으로 가다 보면, 고풍스러운 건물이 있다. 농협이 있는 건물이다. 1926년에 완공되었다. 당시 조선일보, 동아일보와 함께 민족의 3대 신문사였던 조선중앙일보의 사옥이 있었다. 몽양 여운형이 사장이었다. 베를린올림픽 때 손기정 선수의 사진을 신문에 실으면서 일장기를 삭제해 당시 같은 일을 했던 동아일보와 함께 무기정간 처분을 받고 결국에는 폐간되었다. 손기정 선수의 마라톤 우승도 민족의 기개를 드높였지만, 그의 가슴에 있는 일장기를 삭제한 민족언론사들의 용기도 잊지 않아야 한다.

조선중앙일보 건물(농협)을 돌아 SM면세점으로 오면 대리석 기단 위에 한옥의 방문처럼 생긴 조형물이 있다. ‘충정공 민영환 어른께서 자결하신 옛 터’라고 씌어 있다. 글씨 아래에는 그가 자결한 뒤, 피 묻은 옷이 보관된 방에서 핏빛 대나무가 돋아났다는 이야기에 근거한 대나무도 형상화해 놓았다. 

서울 시내에 많은 표석이 있지만, 대개 사실을 알리기 급급한 표석들이다. 그와 달리 이 조형물은 정성이 가득하다. 조각가 백문기의 노고가 빛나는 작품이다.

해방병단 결단식 터 표석 [사진=박종평 객원기자]
해방병단 결단식 터 표석 [사진=박종평 객원기자]
서울 중심점 표지석 [사진=박종평 객원기자]
서울 중심점 표지석 [사진=박종평 객원기자]

3․1운동 33인의 회합지 태화관, 이순신의 백의종군 출발점

면세점에서 몇 걸음 더 가면 ‘삼일독립선언유적지’ 표석이 있다. 태화빌딩 앞이다. 태화빌딩이 있는 곳은 중종이 순화공주를 위해 지어준 궁이라서 ‘순화궁’이라 불렸고, 인조 어머니 인헌왕후의 아버지 구사맹(1531~1604)이 살았던 곳이기도 하다. 근대에는 일제가 매국노 이완용(1858~1926)에게 그 땅과 집을 주었다.

인사동 요릿집 명월관 주인 안순환이 이완용으로부터 인수해 명월관의 별관으로 만들었고 태화관이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1919년 3․1운동 때, 민족지도자 33인이 이 태화관에서 모여 「독립선언서」를 낭독했다. 태화빌딩 앞에는 ‘3․1운동 100주년 기념비’가 2019년에 별도로 세워져 있다. 태화빌딩 안 1층 로비 한쪽 벽에는 「독립선언서」를 펼치고 회의하는 민족대표 33인의 모습을 그린 「민족대표 삼일독립선언도」가 걸려있다. ‘순화궁 터’ 표석은 태화빌딩 앞 화단에 있다.

태화빌딩 인사동 방향 옆 건물 하나로빌딩 안에는 ‘서울의 중심점 표지석’이란 표석이 들어있다. 빌딩 로비에 있는 대한제국 건양 원년(1896년)에 제작된 서울 중심 지점을 표시한 돌이 있다는 내용이다. 건물 로비로 들어가면 표석 내용처럼 ‘표지석’이 투명 아크릴박스에 들어있다. 표지석 옆에는 하마석이 생뚱맞게 함께 있다. 조선시대 양반들이 말을 탈 때 밟고 오르게 만든 돌이다. 중심점 표지석과 어울리지 않는다. 또 표지석이 건물 안에 있어 표지석이 있는지도 알기 어렵다. 건물 밖으로 꺼내 시민들이 쉽게 접할 수 있게 해 주고, 하마석 역시 간격을 분리해 두어 표지석의 의의를 돋보이게 하는 것이 좋을 듯하다.

종각역으로 나오면, 2번 출구 앞 SC제일은행이 있다. 그곳은 1597년 삼도수군통제사 이순신이 한산도에서 체포되어 의금부 감옥에 갇혔던 바로 그 의금부가 있던 곳이다. 종로 큰 길 쪽 제일은행 빌딩 아래 ‘의금부 터’ 표석과 ‘10 의금부 터 – 서울천주교순례길 코스-’안내판이 함께 있다. 최근 들어 2번 출구 근처 화단에 ‘충무공 이순신 백의종군로 출발지 ①’이라는 안내판과 ‘충무공 이순신 백의종군로 START 1’이라는 스탬프를 설치해 놓았다.

그러나 그 코스가 어떻게 되는지는 제대로된 설명이나, 코스 2, 3, 4 등과 같은 지점에 대한 안내도 없다. ‘서울천주교순례길 코스’에 비하면 안내판 설치 자체에만 의의를 둔 듯 무성의하다. 서울 시내 백의종군로는 바로 이 지점부터 남대문, 용산, 동작대교, 이수역, 사당역, 남태령까지가 이순신의 백의종군길이다. 이왕이면 이순신의 백의종군길을 구체적으로 알 수 있도록 표기해 주면 좋을 듯하다.

안국역에서 출발해 천천히 걷고 인터넷으로 자료를 찾아 더 확인하고, 정독도서관과 조계사 등에서 잠시 쉬었다가 종각역까지 돌아오면 4시간이면 충분히 살펴볼 수 있다.

대종교 중광터 
주소 종로구 가회동 4-7 대한불교 조계종 안국선원
가회동 성당 
주소 종로구 가회동 30-3
손병희 선생 집터 
주소 종로구 가회동 170-4
헌법재판소 
주소 종로구 재동 83
정독도서관 
주소 종로구 화동 2
안동장로교회 
주소 종로구 안국동 27 
선학원 
주소 종로구 안국동 40
감고당 
주소 종로구 재동 83
해방병단 결단식 터, 순교자 강완숙 집터 
주소 종로구 관훈동 139-3
민영환 선생 자결하신 터 
주소 종로구 공평동 1
삼일독립선언유적지 
주소 종로구 인사동 194-27
이순신 백의종군로 출발지 표석 
주소 종로구 공평동 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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