秋가 언급한 ‘영국 법안’, 한동훈과 무슨 상관?···진보 진영도 “반헌법적” 비판

추미애 [뉴시스]
추미애 법무부장관. [뉴시스]

[일요서울 | 조택영 기자] 최근 추미애 법무부장관이 피의자 휴대전화 비밀번호를 강제로 해제할 수 있는 법안 검토를 지시하면서 논란이 가열되고 있다. 야당은 물론, 여당 및 진보진영 내부에서도 반발의 목소리가 나오는 형국이다. 논란이 거세지자 추 장관은 한 발 물러서는 모습을 보였으나 여론의 비판은 좀처럼 사그라들지 않는 모양새다.

헌법상 진술거부권과 묵비권 등 무시하는 처사”···인권위, 조사 착수

일명 ‘비번 공개법’이라고 불리는 ‘피의자 휴대전화 비밀번호 공개 법안’은 사실상 ‘검‧언유착’ 의혹 수사를 받고 있는 한동훈 검사장 저격용이라는 시선이 지배적이다.

‘디지털 증거 압수수색 시 협력 의무 부과 법안’이라고 명명된 이 법안은 휴대전화 비밀번호 공개를 강제하고, 응하지 않으면 불이익을 주는 법률을 의미한다.

법조계에서는 추 장관이 근거로 든 영국 법안이 국내법상 도입하고 힘들 뿐만 아니라 정작 한 검사장에게 적용할 수도 없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최근 추 장관은 사회관계망서비스(이하 SNS)에 “어떤 검사장 출신 피의자가 압수대상 증거물인 휴대전화 비밀번호를 알려주지 않아 껍데기 전화기로는 더 이상 수사가 어려운 난관에 봉착했다고 한다”고 적었다. 이는 한 검사장을 겨냥한 발언이다.

추 장관은 또 “영국 수사권한 규제법과 같이 디지털 증거 압수수색에 대한 실효적 방안을 도입해야 한다”며 “해당 법에 따르면 암호를 풀지 못할 때 수사기관이 법원에 암호해독명령허가 청구를 하고, 피의자가 이에 불응 시 국가 안전이나 성폭력 사범은 5년 이하, 기타 일반 사범은 2년 이하의 징역형에 처하도록 하고 있다”고 밝혔다.

‘수사권한 규제법’

살펴보니

추 장관이 언급한 영국 법안은 ‘수사권한 규제법(Regulation of Investigatory Powers Act)’이다. 실제 영국에서 시행하고 있는 조항이다. 휴대전화 비밀번호를 특정해서 다루고 있는 조항은 아니다. 모든 암호(protected information)의 해제 조건 등을 다루고 있다.

해당 조항에 따르면 수사기관이 휴대전화 비밀번호에 대한 영장을 청구하면 법원이 이를 검토한 뒤 허가 판단이 나와야 하고, 피의자가 법원의 허가 명령을 어길 경우 ‘법원명령위반죄’로 처벌 받을 수 있는 것으로 전해진다.

그러나 이 조항은 이러한 처분이 인권침해를 유발할 가능성이 있어 ▲중대한 범죄 방지 ▲국가안보 목적 ▲국가 경제에 심각한 영향을 미칠 경우 중 한 가지에 해당할 상황에서만 영장이 발부되는 것으로 알려졌다. 수사기관은 법원에 영장을 청구하면서 이 세 가지 성격의 범죄 중 하나에 해당된다는 것을 입증해야 한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한 검사장과 같은 사례는 해당 법률과 사실상 무관하다는 분석이 나오고 있다.

한 검사장이 휴대전화 비밀번호를 알려주지 않는 게 국가안보 저해되거나 국가 경제에 심각한 영향을 미칠 사안이라고 보이지 않는다고 법조계 관련 전문가들은 지적하고 있다.

또 영국과 한국 법제 시스템이 달라 적용 자체가 어려울 것이라는 지적도 제기된다. 영국은 법원 명령 위반에 대해 별도의 형사처벌을 하고 있으나, 국내법상에는 법정에서의 난동이나 소란 같은 법정모욕죄 외에 마땅한 처벌 조항이 없기 때문이다.

법정 증인으로 채택된 인물이 정당한 사유 없이 불출석했을 때 과태료를 부과하는 등의 형사소송법 조항이 있을 뿐이다. 이는 영국처럼 ‘법원명령위반죄’ 같은 형법 조항을 따로 만들어야 하는 셈이다.

한 발 물러선 ‘법무부’

전문가들은 법원명령위반죄 같은 입법도 사실상 국내에선 불가능할 것이라는 견해를 내놨다. 시스템과 역사적인 배경도 다르다는 지적이다.

더욱이 해당 법 조항에 대해, 영국 등 해외에서도 인권침해 소지가 있다며 반발하고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미국 연방대법원 역시 암호를 국가가 강제로 제시하도록 하는 것은 위헌이라고 판시하고 있다.

국내에서도 추 장관 발언 이후, “반헌법적”이라는 목소리가 거센 상황. 헌법상 진술거부권과 묵비권 등을 무시한다는 취지로 논란은 지속되고 있다. 야당뿐만 아니라 민주사회를위한변호사모임(민변)과 참여연대 등 진보단체들도 헌법에 위배된다며 강도 높게 비판하는 상황이다.

한 검사장도 입장문을 내고 “헌법상 자기부죄금지‧적법절차‧무죄추정원칙 같은 힘없는 다수 국민을 보호하기 위한 자유민주주의의 기본 원칙을, 오로지 자기 편 권력 수사에 대한 보복을 위해 이렇게 마음대로 내다버리는 것에 국민들이 동의한 적이 있는지 묻고 싶다”고 비판했다.

논란이 확산되자 법무부는 해당 지시의 배경으로 한 검사장 사례 외 ‘n번방 사건’을 언급하기 시작했다. 법무부는 입장문을 내고 “이 같은 법안 연구를 추진하게 된 건 n번방 사건과 한동훈 연구위원 사례 등을 계기로 디지털 증거에 대한 과학 수사가 날로 중요해졌기 때문”이라며 “인터넷상 아동 음란물 범죄와 사이버 테러 등 새로운 형태의 범죄에 대한 법 집행이 무력해지는 데 대한 대책 마련이 필요하다는 고민이 있었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향후 각계의 의견을 수렴하고 영국과 프랑스, 호주, 네덜란드 등 해외 입법례 연구를 통해 인권보호와 조화를 이루는 방안을 모색하겠다”며 “법원 공개 명령시만 (비밀번호를) 공개하도록 하거나 과태료 등 다양한 제재 방식을 검토하는 방안, 인터넷 상 아동 음란물 범죄나 사이버 테러 같은 일부 범죄에 한정하는 방안 등을 검토 중”이라고 전했다.

여당 내에서도 부정적인 기류가 나타나는 모양새다. 법제사법위원회 소속 박범계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지난 16일 라디오 방송에 출연해 “민주당은 전통적으로 개인의 인권을 우선시해 왔다”며 “추장관이 말한 부분이 민주당을 지지하는 분들에 대한 공감대를 얻기는 부족한 상황”이라고 말했다. 박성민 최고위원도 같은 날 라디오 인터뷰를 통해 “헌법상 가치를 넘어서는 안 되는 금도가 있다”고 밝혔다. 이낙연 더불어민주당 대표도 지난 17일 “진술거부권과 방어권을 훼손한다”고 비판했다.

한편 비번공개법 법안 제정을 검토하겠다고 나섰던 추 장관에 대해 국가인권위원회(이하 인권위)가 조사에 착수했다. 지난 17일 시민단체 법치주의 바로 세우기 행동연대(법세련)는 “인권위 홈페이지를 통해 접수했던 진정 사건에 대해 이날(17일) 조사관이 배정됐다”고 설명했다. 인권위는 통상 진정서가 접수되면 해당 진정이 조사 대상 범위에 해당하는지 등 요건을 검토하는 절차를 거친다. 이 과정에서 진정 요건을 충족하는 경우 정식 진정으로 접수, 담당 조사국에 조사관을 배정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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