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로 꽤 오랫동안 알고 지낸 사이인가 봐요?”
어색한 분위기를 바꾸려고 수원이 먼저 말을 꺼냈다.
“스미스는 미국 있을 때 만났고, 소피아와 빅토르 박사는 여기서 스미스의 소개로 처음 만났어.”

아토믹캐나다, 프랑스히시떼, 웨스턴감마. 모두 이름을 들어보지 못한 회사들이었다. “치어스!” 소피아 빌리에가 활짝 웃으며 건배를 청해왔다.
그제야 수원은 소피아 빌리에를 어디서 봤는지 생각이 났다. 2년 전 미국 웨스팅하우스 도서관에서 성민과 밀회하던 여자였다. 붉은 머리에 흰 피부. 웃을 때 한껏 드러나는 잇몸.

‘스미스의 소개로 오늘 처음 만났다고?’
성민은 거짓말을 하고 있었다. 갑자기 편두통이 밀려왔다. 맥주 한 잔도 못 비우고 먼저 자리에서 일어났다.
“먼저 일어나서 죄송합니다.”
“벌써?”
“응, 좀 피곤해요.”

“그래, 푹 쉬어. 나는 좀 더 있다가 갈게.”
성민은 굳이 붙잡지 않고 손을 들어 보였다.
수원은 씁쓸한 기분으로 침실로 돌아왔다. 침대에 누우니 조금 전에 다시 본 붉은 머리의 캐나다 여자 소피아 빌리에의 모습이 눈에 어른거렸다.
‘두 사람이 아직도 연인 관계인가?’

그러면서 다시 시작하자는 청은 왜 하는 걸까?
수원은 성민에게 다시 한 번 배신감이 들었다. 성민의 구애에 잠시 마음이 흔들렸던 자신이 비참하게 느껴졌다.
잠이 올 것 같지 않아 수원은 인터넷을 연결했다. 새로운 메일이 와 있었다.

- 봉주르 onesil. 바소로뮈입니다.
대한항공 여객기 902편을 탔던 일본사람 스즈끼에 관해 더 알고 싶다고 했지요? 방법을 알아냈습니다. 스즈끼의 딸이 후지덴끼라는 회사의 서울 지사에 근무한다고 합니다. 이름은 모리무라 나쓰에라고 합니다. 행운을 빕니다.
‘모리무라 나쓰에. 후지덴끼 서울 지사.’

수원은 수첩에 메모를 했다. 서울로 돌아가는 즉시 만나 봐야겠다는 생각이었다. 일본어에 능통한 고유미와 함께 가면 도움이 될 것 같았다.
또 다른 메일도 있었다.

- 아나톨리 게시판에서 발견한 내용입니다. 무르만스크 대한항공 여객기 불시착에 관련된 이야기입니다. 작성자는 그 사건의 본질은 패권주의 국가들의 야합이라고 주장하고 있었습니다. 소련 단독으로 일으킨 게 아니라 강대국의 이해가 얽혀 있다고 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다시 올리겠다고 했는데, 하루 만에 글이 삭제된 뒤 후속 글도 올라오지 않고 있습니다.

그때 전화벨이 울렸다. 수원은 컴퓨터 창을 닫고 전화를 받았다.
“알로우”
수화기에서 프랑스 말의 굵직한 남자 목소리가 들렸다.
“헬로우.”
“죄송합니다만, 한 박사님이십니까?”
수원이 영어로 답하자 남자가 영어로 물어왔다.
“네, 맞습니다.”

“저는 프랑스히시떼 사의 빅토르입니다. 조금 전에 뵈었지요.”
성민과 함께 있던 남자였다. 악수할 때 손을 꽉 쥐어 아프던 기억이 났다.
“예. 그런데 웬일이세요?”

“실례지만 주무시지 않는다면 차 한 잔 괜찮으시겠습니까?”
인사나 겨우 나눈 사이인데 여자 숙소로 전화를 걸어 차를 마시자고 하다니. 수원은 거절하려고 하다가 전화를 건 이유가 궁금해 그러자고 답했다.
“조금만 기다리시면 제가 로비로 내려갈게요.”
수원은 백을 들고 나서면서 백 속에 있는 미니 전기충격기를 다시 한 번 확인했다.

“하이!”
로비 의자에 앉아 기다리고 있던 빅토르가 엘리베이터에서 내리는 수원을 발견하고 벌떡 일어섰다. 몸집이 거대해 거인처럼 보였다.
“주무시지 않아 다행입니다. 아까는 좀 더 얘기를 나눠 보고 싶었는데 먼저 올라가셔서 섭섭했습니다. 저쪽으로 갈까요?”

빅토르가 로비 끝에 있는 오픈 바를 가리켰다. 웨이터가 없는 심야 바라서 빅토르가 카운터까지 가서 주스 두 잔을 들고 왔다.
“주문하신 대로 오렌지 주스입니다. 맛이 어떨는지...”
빅토르가 잔을 내밀었다.

“한 박사님의 원자로 제어 시스템에 관한 논문, 저도 흥미롭게 읽었습니다. 그 한 박사님을 이렇게 직접 만나다니 영광입니다.”
작년 학술 세미나에서 발표했던 내용을 이야기하는 것 같았다.
“감사합니다.”

“한국형 원자로인 APR1400 프로젝트에 참여하고 계시지요?”
“참여라기보다는 그냥 고용된 직원에 불과합니다.”
수원은 극히 말조심을 했다. 자신을 통해 한국 원자로 수출에 관한 정보를 얻으려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심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그 때 갑자기 정신이 몽롱해지면서 빅토르의 얼굴이 흐릿하게 보였다.
‘앗! 약을 탔구나.’
수원은 정신을 잃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쓰면서 핸드백에서 전기 충격기를 꺼냈다. 그리고 있는 힘을 다해 테이블 앞으로 엎어지면서 빅토르의 몸에 전기 충격기를 갖다 댔다.

지지직.
빅토르의 얼굴이 일그러지면서 괴물처럼 변했다.
“헬프 미!”
수원은 있는 힘을 다해 소리 지르고는 정신을 잃었다.
얼마를 지났을까? 수원이 눈에 하얀 천장이 들어왔다.
“한 박사, 정신 좀 들어요?”
강병욱 단장의 목소리였다.
“여기가 어디예요?”
“병원. 괴한이 누군지 알아요?”
‘괴한?’

수원은 정신이 멍해 생각이 금세 떠오르지 않았다.
“한 박사를 챙기는 동안 도망치는 바람에 괴한을 잡지 못했답니다. 큰 호텔에는 가끔 외국인 고객을 노리는 강도들이 있답니다.”

수원은 그제야 빅토르가 생각났다. 빅토르가 주스에 약을 탄 것이 분명했다.
수원은 괴한의 정체를 밝히려다가 입을 다물었다. 배성민이 혹시 난처해질지도 모른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또한 한국 대표단이 괴한의 습격을 받았다면 문제가 복잡해질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강병욱 단장과 호텔 측의 추측대로 그냥 단순 강도 미수사건으로 넘기는 게 좋을 거라는 판단이 섰다.
‘성민 씨와 빅토르는 무슨 관계지?’

‘빅토르는 무슨 목적으로 나를 납치하려 했을까?’
의문이 꼬리를 물었다.
배성민, 정말 모를 사람이었다.

13. 일본인 승객의 미스터리 

한국 대표단은 빈 회의를 성공적으로 끝내고 귀국했다. 수원은 심야에 찾아온 빅토르에 대해서 성민에게 끝까지 말하지 않았다. 사건을 아는지 모르는지 수원을 대하는 성민의 태도에는 변함이 없었다.

인천 공항에 도착하자 고유미한테서 문자 메시지가 왔다.
- 출장은 즐거웠어? 오피스텔 빌려 줘서 고마웠어.
고맙다는 답신을 보내자 곧바로 다시 메시지가 왔다.
- 일본인 승객의 딸, 모리무라 나쓰에를 찾았어.

오스트리아에서 마리아 바소로뮈의 메일을 본 후 나쓰에를 찾아 달라고 이메일로 부탁해 두었더니 그새 알아 놓은 모양이었다. 수원은 얼른 고유미에게 전화를 걸었다.
“나쓰에를 찾았다고?”
“그럼. 내가 누군데. 내일 만나기로 약속도 해두었어. 서울에서 하루 더 있어도 되지?”

그렇잖아도 수원은 이튿날 저녁 오후 늦게 있을 귀국 보고 회의에 참석한 뒤 고리로 내려가게 돼 있었다.
“통역은 걱정 마. 내가 해 줄 테니.”
유미가 시원시원하게 말했다.

수원은 회사에서 예약해 둔 본사 근방 호텔에서 하룻밤 묵었다. 다음 날 아침, 유미의 전화가 잠을 깨웠다.
“가자.”
유미가 다짜고짜 말했다.
“새벽부터?”
“새벽이라니? 지금 여덟시 반이야.”

“여기야.”
수원이 커피숍에 들어서자 먼저 와 있던 유미가 손을 흔들었다. 여전히 화려한 차림이었다. 어깨가 드러나는 치렁치렁한 원피스에 글래디에이터 힐을 신고 있었다. 거기에 어울리게 쇠장식이 여러 개 박혀 번쩍이는 커다란 백을 들고 있었다.
“늦어서 미안해. 여독이 안 풀렸나 봐.”

수원이 하품을 하며 말했다.
“혹시 밤새 성민 씨하고 있었던 것 아냐?”
유미가 눈을 흘기며 웃었다. 수원은 뭔가 설명하려다 입을 다물었다.
“모리무라 나쓰에가 다니는 회사 이름이 후지덴키가 아니고 후지 엘렉트릭 코리아야. 그걸 일본식으로 말해서 후지덴키라고 하는가봐.”
“그 아가씨 이름이 모리무라 나쓰에라고 했는데, 왜 아버지 성 스즈끼와 달라?”

수원이 미심쩍어하던 것을 물었다.
“아가씨라니! 나쓰에는 30대 중반의 아주머니야. 무르만스크 사고가 난 지 벌써 30년이 넘었잖아.”
“아, 그렇구나.”

“일본에서는 결혼하면 남편 성을 따르기 때문이야. 남편의 성이 모리무라겠지. 한자로 나무 목 자가 세 개 있는 삼(森), 그리고 마을이라는 뜻의 촌(村) 자가 합쳐진 성이지.
“우리 식으로 읽으면 삼촌이겠네.”
수원이 큭 하고 웃었다.

“그렇지. 이름 나쓰에는 한자로 여름 하(夏)자에 한강이라는 강(江), 우리 식으로는 하강이지.
“성까지 붙여 읽으면 삼촌하강(森村夏江). 재밌다!”

 

작가 소개 /

이상우는 추리소설과 역사 소설을 40여 년간 써 온 작가다. 40여 년간 일간신문 기자, 편집국장, 회장 등 언론인 생활을 하면서 기자의 눈으로 본 세상사를 날카롭고 비판적인 필치로 묘사해 주목을 받았다. 역사와 추리를 접목한 그의 소설은 4백여 편에 이른다. 한국추리문학 대상, 한글발전 공로 문화 포장 등 수상.

주요 작품으로, <악녀 두 번 살다>, <여섯 번째 사고(史庫)> <역사에 없는 나라>, <세종대왕 이도 전3권> <정조대왕 이산>, <해동 육룡이 나르샤>, <지구 남쪽에서 시작된 호기심>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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