축구 경기장 [뉴시스]
축구 경기장 [뉴시스]

 

[일요서울] 국립외교원 외교사연구센터에서 ‘외교’라는 렌즈를 통해 우리 현대사를 조명하기 위해 오럴히스토리사업 ‘한국 외교와 외교관’ 도서 출판을 진행해 왔다. 지금까지 총 17권의 책이 발간됐다. 일요서울은 그중 공로명 전 외교부장관의 이야기가 담긴 책의 내용 중 일부를 지면으로 옮겼다.

한·일 월드컵 공동 개최 

“아벨란제 FIFA 회장이 일본 대표 불러 공동개최 제안했다”

 

- 한·일 월드컵 공동 개최 문제에 대해서 말씀해 달라. 
▲ 사실은 1993년 12월 한·일 외무장관 회담 때 고노 외상이 “이 문제로 한국과 일본이 서로 경쟁해서 덕 볼 게 하나도 없는데, 공동개최를 하면 어떻겠느냐?”는 이야기를 했다. 그런데 그때 일본 측에서 사전에 그 이야기를 하겠다고 제게 전달해와서, 한 장관에게 귀띔을 했는데, 적극적으로 좋다는 답을 이야기를 안 하고 듣고만 계셨다. 그래서 저는 적극적으로 받아서 해줬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일본은 아시다시피 10년 전부터 J리그 프로팀을 양성하면서 월드컵 유치에 공을 들였다. 그런데 당시에 세계축구연맹 부회장을 지내던 정몽준 전 의원이 한국도 유치하겠다고 해서 서로 경합이 됐다. 경합이 격화되면 일본은 일본대로 국민감정이 굉장히 악화될 것 같고, 한국은 한국대로 또 일본에게 당하면 36년 모욕감에 반일감정이 격화될 테니 일본에서도 바람직하지 않았다. 그러니까 공동개최를 하자고 하는데, 그 이야기가 전해지자 1994년 2월에 고토도시오 대사가 우리 외무부를 찾아왔다. 미야자와 총리가 당시 국회의 유치원회 회장인데, “내가 회장인데 네가 그 이야기를 하면 어떡하냐”라면서 당시 주한 일본대사인 고토 대사가 우리 외무부를 찾아와 없던 이야기로 해달라고 했다. 

그러다가 1994년 말에 들어와서 유치운동이 벌어지고 경합이 격화되고 있었다. 당시 우리나라 유치위원회 회장은 구평회 씨였고, 외무부차관을 지내던 신동원 전 주독대사가 부회장(국제담당)이었다. 이 두 분이 저를 찾아와서 큰일났다고 이야기를 했다. 월드컵 FIFA위원들이 많은 유럽에 가서 유치 운동을 하니까 “우리는 일본과도 친구고, 당신과도 친구인데 어느 한쪽을 지지하라니 참 곤란하다. 공동개최하면 어떻겠느냐?” 하고 제의했다. 그 당시에 우리 측에서 “월드컵 FIFA 규정에 공동개최가 없는데, 어떻게 하느냐?” 하니까 “FIFA 규정을 고치면 된다”고 했다. FIFA에는 유럽 위원들이 많다. 

그때 주앙 아벨란제가 FIFA 회장으로 남미축구연맹을 꽉 쥐고 있어서 상당히 발언권이 강했다. 아벨란제가 우리 정부에 들어와서 이야기를 했다. “만약 우리가 유치하게 되면 우리 국내에 20개의 경기장을 만들어야 한다. 10개도 만들기 어려운데 20개를 만들어놓고 어떻게 뒷감당을 하느냐, 그러니까 공동개최가 좋겠다”고 한 거다. 막상 대한축구협회는 정몽준 회장의 리더십으로 똘똘 뭉쳐가지고, 왜 한국이 못하느냐고 했다. 

그래서 이홍구 총리 공관에서 회의를 했다. 구평회 유치위원장, 대한축구협회 정몽준 회장과도 4자회담을 몇 번 했는데, 내부 의견이 잘 조정되지 않았다. 의장인 이홍구 총리는 말없이 듣고 있고, 나와 구평회 위원장은 정몽준 회장을 설득하는 양상이었다. 정몽준 회장은 2대 1이 되니까 화가 나서 강경한 발언을 계속했다. 그 과정에서 8월 말에서 9월 초에 제주도에서 열렸던 제3차 한일포럼에서 공동개최하자는 건의가 나왔다. 

일본 내에서도 조정이 어려웠지만, 그 가운데서 와카미야가 그야말로 중추 역할을 해서 양측의 합의가 이루어져 공동성명이 나왔다. 한일포럼에서 공동성명이 나온 적이 별로 없다. 그래서 제3차 한일 포럼을 무기 삼아서 적극적으로 대통령께도 말씀드렸고, 대통령께서도 좋다고 해서 공동개최가 이루어졌다. 

그래서 사실은 1993년 11월 한·일 외무부장관회담에서 제기됐고, 다음해 9월에 제주도 한일포럼에서 양국 정부에 건의를 하고, 그걸 받아서 양국 정부가 협의했는데 일본 축구협회가 끝까지 반대했다. 여기서 재밌는 점이 있다. 일본은 아벨란제 FIFA 회장을 믿고 반대를 했다. 그런데 어느 날 아벨란제 회장이 일본 대표를 부르더니 공동개최를 하자고 한 것이다. 왜 일본을 그렇게 밀던 아벨란제가 태도를 바꿨느냐면, 제가 당시 들은 바로는 아벨란제의 재선 분제가 있었다. 유럽이 반대하면, 유럽은 아벨란제의 재선을 지지하지 않겠다고 하니까 눈물을 머금고 일본 측에 철회를 권고했다는 거다. 

 

- 일본 쪽에서는 고노 자신의 소신이었나. 아니면 정부의 판단이 있었나.
▲ 고노 대신 앞으로 아마 어떤 사람들이 이야기를 해왔다. 누가 했는지는 모르겠다. 직접 듣지는 못했는데, 그러한 사람들이 결국은 와카미야 같은 사람들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했다. 와카미야가 아사히신문에 공동개최하자는 사설을 내기도 했는데, 언제인지는 조사를 해봐야겠다. 

 

- 여담입니다만, 옛날에 세지마 류조가 전두환 장군을 만나서 한국에서 올림픽을 개최하라고 제언했다는 내용과 유사하지 않나.
▲ 세지마 씨가 이야기를 했다는 문서가 있는지는 모르겠다. 제가 알기에는 돌아가는 박종규 경호실장이 올림픽에 집착을 해서, 박정희 대통령에게 건의를 하고 박정희 대통령께서 해보자고 했던 게 시작으로 알고 있다. 제가 차관보 때인데, 어딘가에 세지마 씨가 개입했는지는 모르겠다. 

 

- 12·12 이후 서울의 봄이 일어나고, 혼란한 틈을 타서 불안해진 일본 쪽에서 세지마가 전두환 장군을 만났다는 이야기다. 그때 나온 것이 결국은 올림픽 개최와 일본에 100억 달러 정도 차관을 요청해라, 지원할 수 있다는 말을 전달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 제가 알고 있기로는 차관 이야기는 세지마가 이야기한 것은 아니다.

 

- 그때 미국에서 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 제가 차관보 때 교섭을 했고, 사실은 처음에 나온 이야기로는 200억 달러였다. 미국에서 돌아오는 비행기 속에서 이야기가 됐다. 그 자리에 저는 없었고, 노신영 외무부장관이 대통령과 만나고 나오더니 이 이야기를 했다. 그 이 전에 전두환 대통령에게 들어갔는지는 모르겠다. 저는 정호영 장군이 1981년 군사사절단장으로 일본에 들렀을 때 다나카 가쿠에이 전 수상에게서 200억 달러 이야기를 듣고 귀국 보고서에 언급한 것이 처음이라고 알고 있다. 

 

- 길지 않은 시간동안 주일대사로서 의미 있는 역할을 해주셨는데, 재임 기간 중에 특히 기억나는 일이 있으신가. 주일대사 같은 경우에는 동포사회가 상당히 많이 연결되어 있고 관련된 일도 많을 거라고 생각된다. 
▲ 전임자는 3년 재임했다. 제 주일대사 재임 기간이 굉장히 짧았다. 제가 4월에 부임하고 다음 해 12월에 떠나니까 1년 반 좀 넘게 있었는데, 그해 1994년 12월 중순에 청와대에서 전화가 왔다. 청와대 부속실에 김상봉 비서관이 전화를 하면서 “각하 전화입니다” 해서 받으니까 전화가 보안이 되어 있는 거냐고 물었다. 되어 있다고 했더니 좀 들어와야겠다고, 발령 날 때까지 절대 발설하면 안 된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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